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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와 질서 사이에서 - 한 복잡계 물리학자의 이야기
조르조 파리시 지음, 김현주 옮김, 김범준 감수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11월
평점 :
【Gorgio Parisi, 2021년 ‘물리계의 무질서와 변동 사이의 상호작용’공로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이 저술은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이탈리아 사피엔차 대학교 양자이론 교수이며, 2021년 <물리계의 무질서와 변동 사이의 상호작용>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조르조 파리시Gorgio Parisi)'의 학회 발표논문과 과학 에세이 일곱 편으로 구성되어있다. 그의 글은 대중의 이해를 향해 있어 가장 쉬운 문체로 쓰여 있으며, 고차적 수식의 사용이나 물리학과 양자이론의 특정 개념어들조차 일상어로 풀어놓아 입자 물리학, 통계물리학, 복잡계의 물리학, 양자역학이 오늘날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해 이 여정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특히 입자물리학가 양자역학 등 과학도는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탐험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진실하고 겸허한 목소리에서 과학적 사유의 길을 경청할 수 있다.
그의 물리학적 업적인 ‘스핀(spin) 유리 이론’과 이의 배경지식인 ‘상전이(相轉移)’에 대한 연구내용, 유럽 찌르레기의 집단행동 연구를 통한 상호작용의 물리학적 규명으로부터 상호작용의 세기에 대한 상식을 뒤집는 발견처럼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물리학적 연구 업적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파리시는 이들 연구의 여정에서 자신이 마주했던 장애와 자신의 사유 오류와 실수, 그리고 동료 물리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참조, 현실세계의 복잡성을 단순화한 모형 구축이라는 재현실험 모델을 만드는 이유, 가설의 수립이나 아이디어 창출을 위해 논문이나 책에 기술되기 위해 정제되기 이전의 과학자로서의 발상과 사유의 방법론, 과학자로서 피해야만 하는 수사학적 추론인 은유의 배제와 그 엄격한 구별의 노력, 나아가 무의식적 추론의 중요성과 과학의 인류사적 의미에 이르는 진지하고 진실한 목소리는 아마 이 책의 진짜 미덕이라 하고 싶다.
「과학의 의미」라는 장(章)이 있다. 오늘 한국 정치 공간에서는 국가 R&D예산을 가혹하게 축소하여 기초과학을 질식시켜 국가경쟁력을 퇴보시키는 정책에 대한 논쟁으로 소란스럽다. 마침 파리시는 과학이 인간 사회와 이 세계에서 무엇인지를 환기시켜주고 있다, 마이클 패러데이와 영국 장관의 대화를 간략하게 옮겨본다.
영국 장관: 전자기학 실험이 무엇에 필요합니까?
마이클 패러데이: 현재로서는 모르지만, 나중에 여기에 세금을 부과하게 되겠지요.
이 대화에는 과학을 현실 경제의 유용성으로 과학의 쓸모를 말하는 자와 과학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식 탐구라는 인류의 문화적 요구로 이해하는 자의 갈등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기초과학 연구의 성취이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발견할 때마다 이전에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수많은 의문을 새롭게 형식화할 수 있게 되며, 이를 통해 알지 못했던 인류 삶의 사각지대를 밝힐 수 있게 된다.
‘리처드 파인만’의 익살스러운 과학의 필요에 대한 답변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리학은 섹스와 비슷합니다. 우린 결과물 때문에 그걸 하는 게 아니죠!” 어쩌면 자본주의적 사고에 한 걸음 양보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임을 주장하는 기발한 주장이기도 하다. 효용과 인류의 앎의 의지와의 투쟁, 궁극에는 그 과실의 경제적 향유에 대한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의 줄다리기일 것이다.
“그대는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덕과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모닥불이 커지면 커질수록 신비로운 장소도 더 넓어진다. 원자의 세계에서 무수한 은하로 뒤덮인 우주에 이르기까지 더 많이 탐험할수록 우리는 인류 미래의 삶에 유익한 무엇인가를 획득할 것이라 믿는다. 과연 도래할 그 궁극은 무엇일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아마도 내 시선을 강력하게 끌었던 장은 「과학과 은유」라 할 수 있겠는데, 진리를 찾고자하는 성실한 과학자에게는 수사학적 비유의 통제없는 남용으로 과학이 정치적 오용이나, 학문적 오류로 인한 연구낭비와 학문적 퇴보, 사회적 일탈의 초래로 인한 무분별한 갈등 초래 등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다. 또한 모형 사용이란 은유의 특징으로 시작되는 물리학의 본질적 문제에 대한 자기 경계는 은유와 비유의 추론에 대한 날카로운 이해를 촉구한다. 자의적 추론이나 가식적 논증에 사용되거나, 엔간히 훈련된 과학자가 아니고서는 그 감춰진 수사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음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오늘의 물리학은 결정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양자역학에 의해 다분히 수사적인 확률에 의한 은유적 수사성의 개입을 불가피하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강렬한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의 산실인 코펜하겐학파의 대표 격인 닐스보어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신이 뭘 하든 당신이 뭐라 하지 마세요.” , 오늘 닐스보어가 한 말처럼 신은 주사위 놀이도 한다는 사실이다. 크크.., 과학은 파리시의 말처럼 재미있는 분야다. 아마 오늘도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은유에 대한 저항과 해체로 논쟁중인 모양이다.
물리계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 업적이 파리시의 소산이지만 입자물리학과 양자이론, 통계물리학 등 비교적 쉽지 않은 이야기이기에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할 것 같다. 상호작용은 미시적 세계인 원자나 분자 활동에 대한 이해로부터 거시적 세계인 인간사회나, 우주 체계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기초 지식이다. 이것은 총 4장에 걸쳐, 상전이, 찌르레기의 비행. 로마의 물리학, 그리고 스핀유리, 무질서의 도입으로 설명되고 있다. 일반 독자를 향한 저자의 배려가 돋보이는 글들인데, 로마의 물리학은 입자 물리학의 50년에 걸친 발전의 여정을 통해 맵시 쿼크와 중간자, 중입자(重粒子,baryon)의 친절한 개념 설명을 기번으로 입자들 사이에 발생하는 상호작용을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서 최종이론을 향한 물리학의 길에 대해서.
아마 여기서 독자는 한 성실한 물리학자의 사유 방법을 엿볼 수 있는데, 우리들은 그저 당연하게 넘어가는 문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물이 끓거나 어는 것이 이상한 사건이라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왜 온도가 조금 변했다는 이유만으로 물질의 형태가 갑자기 변하는가? 이런 변화는 대체 왜 일어나는가?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어떤 물질이 특정 임계점에서 다른 형태의 물질로 변화하는 것을 상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물(액체)이 수증기(기체)로, 물이 얼음(고체)으로 바뀌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상전이는 다시 1차 상전이와 2차 상전이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잠열, 즉 분자의 결합을 끊는데 필요한 열량의 존재 유무에 대한 구별로서 특정한 열량 공급이 없어도 다른 상태로 전이되는 자석과 같은 상전이가 2차 상전이의 예이다.
이것은 물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저자의 업적인 스핀 유리 이론의 개발에 대한 설명의 토대로서 기술된 것인데, 스핀 유리의 미세 구조 내에서 발생하는 입자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하나의 질서를 규명하고 입증하는 것이다. 무질서하기만한 세계에 존재하는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물리학자가 이에 접근하기 위해 복잡다변한 실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일부 특성을 포착할 수 있는 합성 모형의 구축과 이의 검증을 위한 계산과 결과의 불일치,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물리적 현상에 대한 특징의 무지로 인한 오류의 발생, 상전이를 설명하는 ‘질서 맺음 변수’가 하나의 점이 아니라 함수로 이루어져 있음을 이해하는 여정의 진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아마도 카오스 이론 방정식의 발견을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이러한 오류와 무지에 막혀 시름하다 정말 우연히 마주치는 무의식적 추론과 수학적, 물리학적 직관의 중요성을 일화를 통해 보여준다. 아마 과학도들은 이를 통해 하나의 물리학적 진실의 규명에 이르는 수 십 년에 이르는 지난한 과정을 지켜보며, 혹여 간과하고 지나쳤거나, 아주 조금만 더 생각을 이끌었으면 도달했을 생각을 떠올리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르겠다. 어떤 유형의 논리적 과정을 거쳐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만들어지는지, 동료 연구자와의 대화에서 무의식 속에 잠재했던 무엇이 건드려져 느닷없이 유레카를 외치게 되는 그 멋진 장면을 그려볼 수 있을지도.
책을 시작하는 유럽 찌르레기의 비행 연구가 복잡한 집단행동에서 다수의 행위자가 상호작용하는 계의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나, 스핀유리의 입자 상호작용 연구가 대체 어떤 것을 우리에게 밝혀주는 것인가의 이해로 연결된다. 찌르레기의 3차원 움직임을 정량화하여 공간과 시간 속에서 표본의 궤적을 재구성하고, 상호작용이 세기를 정의할 때 거리가 끼치는 영향이 당연히 크다고 생각하는 고전 물리학이 여지없이 붕괴하는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집단의 상호작용은 구성요소들의 간격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요소 사이의 연결성에 좌우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 사회와 무관해 보이는 이러한 입자들이나 새떼의 집단행동에서 입자물리학은 인간 사회의 상호 행동에 대한 인문학적 사회학적 이해를 제공하고, 나아가 인간 세계의 미래 구성에 대한 바른 지혜의 길을 보여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책은 이러한 한 성실한 학자의 연구 과정의 이야기로부터 그들의 정제된 논문이나 책에서는 좀처럼 보여 지지 않는 연구 과정에서의 노고와 의혹, 망설임의 흔적과 같은 귀중한 시행착오의 구체적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자신의 오류를 찾는데 좀 더 매진하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세계를 탐험해왔던 인생에서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70세 거장의 목소리는 정말 커다란 울림을 준다. 생에 전반의 소명으로 복잡계 해석 연구에 바친 한 인간의 열정에 매혹되는 읽기가 되어 줄 것이다. 세상은 복잡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복잡하다고 누군가 말했다. 이 책은 입자 물리학과 복잡계 이론, 양자역학의 이론 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도전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절로 겸손해지는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