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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평점 :
자연은 산뜻한 봄기운을 알리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화창한 기운이 스러져가는, 그래서 이 음울한 어둠의 징후를 쓰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V-Dem)'가 2024년 3월 최근 발표한 민주주의 보고서에서 한국을 '민주화에서 독재화로의 전환이 급속하게 진행되는 국가'로 발표했듯, 지금의 한국 사회는 모든 민주주의 구성 요소들이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있다. 바로 정치검찰이 권력을 잡고 1년 6개월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두 명의 하버드大 정치학 교수가 쓴 이 책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점진적으로 무너지는 민주주의의 파멸에 대한 경고와 위험 신호를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국가의 패턴 사례를 통해 인지토록 하고 있다. 이러한 신호를 우리들은 인식함으로써 우리의 제도와 정치적 규범과 관습의 미흡함과 결여를 수정, 개혁하도록 정치권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불완전한 제도이긴 하지만, 입법과 사법, 행정의 삼권 분립(三權分立)의 균형을 기조로 하여 국민의 자유, 평등, 공정, 인권, 국토수호 등의 가치를 지지하는 민주주의는 바로 우리들 삶의 균형을 지탱하는 토대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골적인 독재로 민중을 탄압하던 시대는 가버리고, 공고한 민주주의의 뿌리가 이 땅에 깊숙이 내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환상임을, 결코 민주주의는 민중의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 없이는 언제든 부식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함을 이 저술을 통해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 제도의 모델로서 역할을 해왔던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 토대부터 침몰하고 있으며, 수많은 국가들의 민주주의가 독재와 전제적 정치권력에 의해 죽음을 맞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저자들은 이제 미국이라고 그동안 손가락질했던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와 동남아시아, 이탈리아를 비롯한 헝가리, 터키, 폴란드 등 유럽 국가들처럼 극우 독재정권과 다른 예외지대가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우선 대중 인식의 오만을, 그 착각을 깨우는데, “민주주의를 지키는 건 국민이 아니다.”라는 정의다. 대중은 너무 자주 조작된 여론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것이며(대중의 우매성-이것이 민주주의의 약점이자 곤란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정부를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정당이 내세운 인물에 국민은 그저 투표할 뿐이고, 선출된 자는 자기 입맛대로 국가행정을 방해 없이 실행 할 수 있는 까닭이다. 우리의 각 정당별 대선 후보 지명의 과정을 복기해보라, 정치 야망에 눈이 먼 인간을 필터링 하는 것은 우선은 주류 정당의 역할이다.
벨기에, 영국, 프랑스, 핀란드를 포함한 서북유럽 선진국들의 정당은 경험없고, 권력 욕망에 사로잡힌 아웃사이더인 대중적 인기인이나 선동가가 주류 정치에 끼어드는 것을, 다시 말해 권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잘 막아내는 ‘정치적 문지기’ 역할을 수행해낸다. 이러한 인물들이 권력의 중앙무대에 올라서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기능을 정당의 이익을 초월하여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해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도덕적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 사회는 극단적(대개 극우)인물이 대중 인기에 영합하여 등장하려 할 때 기성의 진보와 보수 정치인은 연합하여 그들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하여 민주주의를 훼손으로부터 지켜낸다.
이는 사전에 독재자를 감별하는 뚜렷한 조짐을 알아차리는 규범과 규준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저자들은 반민주적 정치인을 가려내기 위한 예일大 정치학 교수 ‘후안 린츠’의 미완성의 리트머스 테스트를 기반으로 ‘독재자 감별 경고 신호’를 적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둘째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며, 셋째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넷째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중 한 항목만 충족하더라도 그 인물은 독재자라 정의하고 있다. 하버드와 예일대 정치학 교수라는 검증된 저술자들의 지적이다.
이러한 인물이 국가 정치권력의 핵심에 자리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주요 ‘정당의 문지기 역할’, 즉 극단적 인물의 등장을 억제할 힘이 있어야 하며, 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전제적 독재자로 인해 민주주의가 붕괴된 국가들은 한결같이 바로 이러한 문지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 국가들이 민주주의가 붕괴한 것은 정당이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반대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극우, 친일과 같은 국익을 해치는 극단적 인물과 정당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거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이며, 의회에서 소수 정당이 되기도 하는 것임에도, 한 때의 대중 여론에 편승한 인기인과 손잡아 선거의 우위를 잡으려는 유혹에 빠져, 독재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의 정당은 당의 이익보다 민주주의 수호에 더 중요한 가치를 두었다는 점을 우리는 눈 여겨 보아야 한다. (*벨기에, 오스트리아, 핀란드가 대중인기에 영합한 인물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켜낸 정당 문지기 역할 사례는 책 본문 참조), 나는 극우로 기운 작금의 여당 내 국회의원들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 과연 그들이 지금도 진심으로 권력자를 지지하고 있는지를.
사실 극단주의적 선동가들은 답답한 정치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에게 신선한 자극, 마치 정의로운 인물처럼 비치기 일쑤다. 기성 정치에 대해 저열하고 혹독한 말을 마구 내뱉기에 대리 만족을 선사한다. 또한 사적 이익에 집착하는 언론기업들의 반복된 조작 선동은 가짜를 진짜로 만들어낸다. 작금의 극우 황색지로 전락한 조중동을 비롯한 기득 집단은 자기 이익 말고는 민주주의나 국익에는 관심이 없기에 독재자도 선택한다. 이들은 국민의 오랜 분노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지키는 데 적극적이다. 대중은 대개 여기에 유혹되고, 종국에는 파괴된 민주주의 체계 속에서 신음과 고통을 껴안게 되는 것이 실상이다. 책은 특히 대통령제에서 문지기 역할에 대해 풍부한 연구사례들을 적시하고 있다.
트럼프를 사례로 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가 권력의 자리에 올랐을 때 독재자 감별 신호 리트머스 테스트를 실행 본 결과, 네 항목 모두 양성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우선 그는 민주주의 규범을 준수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선거 절차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2016년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전례 없는 주장을 선거도 하기 전에 내놓음으로써, 부정 사례가 불가능한 미국의 선거 제도와 방식을 부정했다.
두 번째는 경쟁자인 상대의 정당성에 대해 부정을 하는 것인데, 트럼프는 힐러리를 범죄자, 파괴분자, 매국노, 국가안보 및 국민 삶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비난했다. 그는 힐러리를 ‘구속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다. 세 번째는 폭력의 조장과 용인인데, 자신에 반대하는 시위자들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고 은근히 독려했다. “옛 날 같았으면 너 같은 사람은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터졌을 거야.”, 네 번째는 경쟁자와 시민권을 억압하는 것이다. 자신을 비난하는 어떠한 이들에게나 권력을 이용하여 고통의 구덩이(지금 한국사회는 무차별 압수수색과 자의적 기소 남용)에 몰아넣는 것이다.
리트머스 시험지가 모두 붉게 그가 독재자임을 가리켰다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사회는 어떤가? 아마 완벽하게 동일한 현상임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구체적 실태들의 적시를 위해 내 노고를 사용하는 것은 지양토록 하겠다. 어쨌든 책은 이렇게 전제주의 행동을 가리키는 네 가지 신호를 적시하며, 우리들에게 민주주의의 침몰을 경고하는 징후들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대중의 우매함이라는 민주주의의 약점은 그대로 발휘되어 대통령에 부적합한 인물이 선출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자를 선출한 나라들은 곧 전제주의적 독재국가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규범을 허무는 독재자와 위기를 느낀 기성 정치 세력 사이에 고조되는 갈등의 결과로 붕괴된다고 한다. 책은 이들 독재자들이 한 국가를 끔찍한 지옥으로 몰아가는 단계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험악한 말로 시작된다고 한다. 비판자를 적이나 체제 전복자, 심지어 테러리스트라며 도발적으로 비난한다고 한다. 이를테면, 야당 대표를 범죄자라거나, 자신을 무능하거나 무도하다고 비판하는 언론인을 마구잡이로 압수, 수색, 기소하여 일상적 삶의 수행을 불가능하게 하여 인권을 말살하는 것이다. 더구나 자신의 세력을 옹호하는 언론을 이용하여 이러한 거짓을 정당화하고 오히려 상대에게 가짜 뉴스를 퍼트린다고 주장하여 대중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여 탄압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곤 말을 넘어 행동으로 옮겨, 대중 간에 상호 공포와 적대감과 함께 불신을 부추기고 사회 분열을 조장한다. 민주주의는 본래 험난한 과정의 연속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사회란 결코 수직적이고 획일적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무수히 서로 다른 견해와 욕구로 연결된 곳이 인간 사회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운영한다는 것은 협상과 양보, 타협이 무엇보다 중요한 절차이고 규범이다. 후퇴는 피할 수 없고 승리도 언제나 부분적인 것이다. 실제 이해관계가 다른 정당의 정치인은 이러한 제약이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지만,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인은 이러한 제약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것은 법제도의 차원을 초월한 민주주의 정치의 윤리 규범인 것이다. 경쟁자인 상대 정치인은 동료이다. 적으로 인식하는 순간 민주주의가 들어설 길은 차단되고 만다.
오늘의 한국사회에 노정된 문제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윤리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저자들은 두 가지 핵심적인 기본 규범을 적시하고 있는데, 그 첫째는 상대 정당을 정당한 경쟁자로 인정하는 ‘상호관용과 이해’이고, 둘째는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절제의 원칙’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절대적인 연성(軟性) 가드레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적절하게 작동하는 가의 여부가 파멸을 결정한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이 두 규범이 작동하지 않을 때 파괴되기 시작하는데, 제아무리 공고하게 설계된 헌법도 허물어진다. 어떤 구기 경기에서 심판이 매수되고, 상대 팀 주전 선수를 뛰지 못하게 막고, 경기 규칙을 상대에게 불리하게 만들면 우리들은 그 시합을 불공정하고, 폭력이라 말하는 데 주저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심판의 매수란 검찰, 경찰, 법원, 감사원, 정보기구, 기타 감찰기구, 공정거래위, 국세청, 각종 규제기관 등 중립적 중재 기관들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독재 권력자의 하수인으로 삼음으로써 마음대로 법을 어기고, 시민권을 위협하며, 수사나 검열에 대한 걱정 없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다. 또한 이 공적 권력을 이용하여 상대 경쟁자를 탄압하는 것이다. 작금의 한국의 정치권력은 애초에 이 심판 매수라는 가장 나쁜 위험을 안은 정치검찰에게 대권을 주었다는 점에 있다. 독재권력 자신이 심판인 것인데, 이는 이미 민주주의의 파괴에 대해 용인을 해 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재자는 이들 손에 넣은 무기를 이용하여 법률을 차별적으로 적용하고, 정적을 처단하고, 동지는 보호하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게 된다. 이미 민주주의는 괴멸하고 있는 것이다. (기소권을 독점하는 검찰의 자의적이고 선택적 기소행위를 보라, 그리고 그 남용을 보라.)
독재 권력은 권력의 유지와 공고를 위해 규칙 바꾸기에 나서는데, 법률(법령 포함)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시행하거나, 입법기관인 의회가 결의한 일반 법률이나 특별법(특검안을 포함)을 거부함으로써 반대세력이나 자기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모든 저항 세력을 약화하는 것이다. 또한 선거시스템이나 각종 국가 계획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는 기만 전략을 감행한다. 이렇게 획책하여 결정 시행하게 되면 수십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동안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도로 계획의 절차무시 임의 변경행위, 총선 선거공약으로 그린벨트의 무차별 해제 남발 등등)
“독재자는 위기의 순간에 음모를 꾸미고, 정적으로부터 권력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을 쌓는다.” - 「4장. 합법적으로 전복되는 민주주의」, 123쪽에서
우리들의 눈앞에서 민주주의가 해체, 파괴되고 있는데, 시민들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자기 삶이 영위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흐름이 자신의 삶의 이해관계에 밀고 들어 올 때 되어서야 아우성을 치기 시작한다. 또 이들 독재자가 벌이는 한결같은 최악의 행위가 기술되고 있는데. 이들 “독재자는 필연적으로 국가위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예외없이 독재자들은 경제 위기, 폭동, 전쟁의 위기와 같은 안보위협을 구실로 대중의 불안감을 증폭시켜 사회적 공포를 조성한다. 이를 통해 비난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정적의 힘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은 이러한 위기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실제로 이들을 실행에 옮기다가 패망한 사례가 즐비하게 적시되고 있다. 독재자와 국가 위기가 결합할 때 민주주의는 치명적 손상을 입으며, 국민은 끝없는 고통에 빠지게 된다.
총선을 앞둔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현 정권의 수장이란 자는 선거 부정 의혹이 있다고 역시 선거부정이 희박한 환경임에도 실시되지도 않은 선거에 문제를 제기한다. 트럼프와 지나치게 닮은꼴의 이 행위는 저자들이 독재행위로 지목한 가장 나쁜 행위의 하나이다. 이와 더불어 야당 대표를 임기 시작부터 2년에 이르는 기간 내내 압수와 수색, 기소 등 인신의 압박을 가함으로써 구속 위협을 그치지 않고 있다. 정적 제거 목적임을 모른다는 국민이 있다면 아마 자신의 눈과 귀를 막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학생, 국회의원, 의사 등 자신의 심사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누구에게나 폭력적 행위를 가하는 것을 버젓이 용인하는 것도 빼닮았다. 모두가 아는 사실은 여기서 줄여야겠다. 피곤하고 짜증나는 일이니까.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에 의존한다.”
- 「5장, 민주주의를 지켜온 보이지 않는 규범」, 131쪽에서
민주주의는 잘 설계된 헌법으로 보호할 수 있는가? 란 물음에 두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존경받는 법치국가들이 수없이 독재자에 의해 허물어졌음을 우리는 많은 사례로 접할 수 있다. 모든 헌법은 불완전하며 수많은 공백과 애매모호함이 존재한다. 더구나 제정시기와 달리 현대사회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으며, 이로인해 우연히 발생하는 모든 경우의 수는 예측 불가능하다. 때문에 헌법조항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악용될 소지가 무진장하다. 이는 너무도 중요한 지적인데, 법체계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개념적 공백과 의미의 모호함 때문에 헌법 조항에만 의존해서는 민주주의를 독재자의 횡포로부터 지켜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란 국민 대중과 정치인의 윤리적 역량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 및 사회 내부에 널리 공유된, 인정하고, 존중하고, 강화하는 행동으로서의 규칙인데, 이미 앞서 기술한 것처럼 상호관용과 자기 통제인 절제의 윤리다. ‘상호관용’이란 선거 패배를 재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적 집단 의지라 할 수 있다. 서로 경쟁을 벌이며 사회를 통치할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다. 상호 정당한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파괴될 때, 즉 경쟁자를 압살할 적(敵)으로 간주하게 될 때, 상호관용은 무너지고, 사회의 갈등은 골 깊은 분열로 이어지며 민주주의는 쏜살같이 실종된다.
둘째로 ‘자기 통제’는 대통령제에서 가장 극명하게 절제를 잃게되는 중대한 윤리적 역량인데, 바로 이 때문에 검증되지 않는 아웃사이더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막아내야 하는 정당의 문지기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자기통제, 절제와 인내는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 현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상위 법률의 시행이 정치검찰의 입맛에 맞지 않자 하위 법령인 시행령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의회를 우회하는(즉 상위법을 위배하는) 위헌적 행위를 거침없이 자행했다.
나아가 대통령의 거부권을 남용하여 단 하나의 입법도 실행 될 수 없게 하여 다수당인 야당의 입법 기능을 괴멸시켜왔다. 의회가 승인(가결)한 모든 법안을 무효화해버리는 작태는 전형적 독재자의 행위임을 적시하고 있다, 특히 가장 나쁜 독재자의 행위로 사법부가 판결한 범죄자를 자기편이라 하여 바로 사면권을 행사하여 풀어주는 것인데, 이 사면권 남용의 행위는 대통령의 행정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사법부의 판단을 무시함으로써 민주주의 초석인 삼권분립을 노골적으로 무력화시키려는 반(反)민주주의적 행위이기 때문이며, 사회정의를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파멸적인 비윤리적 행위인 까닭이다.
오늘 한국사회는 민주정치의 핵심윤리인 가드레일이 이미 사라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판의 분열이 고착화되어 완전히 배타적인 진영이 되고 있다. 서로 공존이 불가능한 상호 고립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례는 이럴 때 민주주의 시스템을 전면 부정하는 집단이 등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민주주의는 사망하고, 국가와 사회대중은 죽음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음은 더 말 할 것도 없다.
자제의 규범이 무너지면 권력 균형이 무너진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 정당이 대권 후보자를 선정할 때 기성 정치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고 지적한다. 자기 정당의 선거 이익을 위해, 즉 수권정당으로 서기 위해 부적합한 후보를 영입하곤 그 자를 자신의 입맛대로 통제,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가장 어리석은 생각임이 입증되는데, 이렇게 추대된 자가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정당은 물론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교훈은 주류 정당이 필터링 기능을 포기할 때 그것은 민주주의의 파멸적 징후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수구정당인 공화당이나 한국의 극우화된 여당이나 모두 문지기 기능을 지니지 못함으로써 정당의 이익보다 고차원의 가치인 국가의 민주주의를 버렸다는 것에 있다. 책은 이러한 규범 파괴의 사례들을 통해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우리 민중들이 무엇을 주의 깊게 감시하고 분별해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불문율을 파괴한 대통령은 지금껏 없었다.”
-「트럼프의 민주주의 파괴」, 245쪽에서
이제 우리 사회의 정치국면에서 전환적 순간이 될 수도 있는 국회의원의 선거가 눈앞에 다가왔다. 책의 8장에는 트럼프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해 나갔는지에 대한 각종 민주주의 파괴 행위로 채워져 있다. 검찰 등 국가규제기관을 통한 비우호적 언론 압박하기에서부터, 자기 이익에 반하는 기업들과 언론사에 대한 막대한 세금의 부과는 물론 인신구속의 압박, 가장 비민주적이고 위헌적 처사였다고 지적되는 공정선거대통령자문위원회 설립을 통한 투표 억제의 시행을 통한 투표권 행사의 위축과 선거 전부터 선거가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상대 정당에 대한 윤리적 손상을 공공연히 도모하려 했으며, 전방위적인 중립기관들인 검찰, FBI, CIA, 대법원, 각종 규제기구인 심판을 매수, 협박함으로써 총체적이고 극단적으로 규범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선출된 대통령이 되면 정치 선진국들은 정당의 대권 후보자로서의 지위를 버리고, 국민의 대표가 됨으로써 중립적인 정치 행위자가 된다. 따라서 경쟁자를 정치의 동반자로 대우하고, 그 다른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정치 윤리의 두 축인 상호관용과 타자에 대한 절제와 인내의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자신의 권력이 혹여 전제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시로 성찰해야 한다. 이것은 선진 민주주주의 정치인들의 기초 덕목이고 불문율이다.
한편 빈틈이 드러난 권력 견제를 위한 법률 제도를 보완하여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독재자가 출현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독재자가 될 수 없는 강력한 견제와 감시 제도를 확충해야 한다. 지금 안하무인이며, 법 위의 황제인양 중립유지 의무인 대통령이 일상적 행정기구 의견 청취 행위라고 사전 선거를 하고 전국을 누비며, 법 체제를 무시하고 있다. 이 모두 독재의 전형적 표시라고 두 저자는 입을 모은다. 선거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는 것이고, 이는 곧 민주주의를 파괴하겠다는 의지의 다름 아닌 지극히 사악한 기만이 된다.
저자들은 마지막으로 대중 인식에 있어 중요한 요인을 지적하고 있는데, 바로 “독재자가 하는 불문율의 위반(파괴)이 계속되면 사회는 이 일탈의 범위를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준을 하향 조정한다는 것이다. 예전에 비정상으로 보였던 행위가 정상적 행위로 이해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거짓말하기, 규범의 일탈, 반국가적(친일)행위, 경쟁자인 상대에 대한 일상적 모욕과 괴롭힘 등 이들 정치적 규범의 일탈에 대한 기준을 하향조정하게 됨으로써 독재자의 권력남용의 허용 기준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즉 간덩이가 붓는 다는 것이다.
간덩이가 부어올라 상대를 모욕하고 멸시하며 괴롭히는 데 더욱 그악스럽고 포악해지며, 자기 이익과 관련없는 국민다수는 언제든 멸시하고 무시해도 되는 종속된 개나 돼지로 취급하게 된다. 책은 마지막 장에서 민주주의 미래 시나리오 세 가지를 예시하며, 어떻게 손상된 민주주의를 구할 수 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가장 가능성 높다는 우울한 시나리오인 뚜렷한 양극화와 규범 붕괴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은 배제하고 신속하게 회복되는 낙관적 형태를 생각해본다.
그것은 어쨌거나 독재 정권의 정치, 경제 외교를 망라한 총체적 무능과 권력 남용, 법치의 파괴 등 실정을 묻고 지지를 철회하여 사임이나 탄핵을 통해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것이다. 이번에도 주류 정당들이 부적합한 후보를 거르지 못할 경우 해당 정당에 대한 국민적 압박이 가해져야 한다. 국가적 손실이 얼마인가? 수치로 표시되지 않는 국가 위상의 추락과 국민의 도덕적, 지적 수준까지 한없이 낮추어버린 수치심까지 더하면 대체 이들에게 물려야할 죄과는 가히 천문학적 수준이 되지 않을까?
“민주주의란 국민의 절반 이상이 절반 이상의 경우에서 옳다고 말하는 생각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라고 한다. 그래, 민주주의란 아직 반증되지 않은 이념이며, 타락하지 않은 노래일 뿐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이를 대체할 만한 체제를 우리 인류는 구상하지 못하고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민주주의가 최선의 체제이다. 이를 파괴로부터 지켜내는 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뿐 아니라 근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도 가치 있는 의무일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대상은 미국의 정치 현실이지만, 그들의 민주주의 헌법체계와 정당 정치는 오랜 갈등과 타협 속에서 안정을 만들어 온 유서깊은 체제이다. 그럼에도 유지해왔던 정당의 문지기 기능과 오랜 관습으로 정착되어 온 불문율인 정치의 핵심 윤리를 저버림으로써 부적합한 인물이 대권을 차지하게 되고, 한 순간 민주주의는 송두리째 허물어지는 상황을 겪었다,
현재 미국의 수권정당인 민주당은 트럼프가 망가뜨린 민주주의 체계들의 복원에 고통을 겪고 있다. 아마 망가뜨리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것을 복원하는 데는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이 모두가 국민의 몫이다. 우리 한국은 더 오랜 시간과 필요 없었을 재정 낭비를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 곤경의 시간을 어떻게 희망의 시간으로 돌릴 것인가라는 도전의 과제가 남았다. 어쩌면 이것은 비관적 미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기이한 경험을 우리들이 했다는 관점에서 전화위복의 낙관적 시간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이 2018년 국역되어 출간된 이래 2024년 1월, 18쇄에 이르렀다. 아마 시민 독자들의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이 저술이 어느만큼 해소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침몰하는 민주주의의 위기의 요인들을 인식하고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손상된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 보다 깊은 뿌리를 내리는데 작은 힘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풍부하고 치밀하며 섬세한 사례들과 분석 내용을 모두 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