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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반反하다 - 벌거벗은 자들이 펼치는 역류의 조선사 ㅣ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3
조윤민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8월
평점 :
■ 시작하는 말
앞선 저술인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며 신분우위와 특권행사의 근거를 마련하던 조선 양반 지배집단의 헤게모니 전략의 본거지로서 기획된 ‘조선 건축조물에 드리운 그림자’를 탐사했던 『문화유산의 두 얼굴』에 이은 두 번째 조선(朝鮮)역사 읽기이다. 우리는 역사 배우기를 항시 시대의 주류 흐름과 지배세력 중심으로 기술된 교육으로 강요받아 왔기에, 역사의 또 다른 한 축, 아니 실질적 줄기인 民(백성)의 눈물과 땀이 밴 노역과 산물은 물론, 당해 사회가 내재한 근본적 모순성이나 기만성에 대해서는 사유되는 것이 차단되어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앎에 대한 방벽을 세워 사유의 방법적 모색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지배자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하여 역사와 그 실체에 대한 곡해를, 그리고 역사수정주의라는 극단적 역사부정자들을 양산하는데 이르렀다. 역사의 진실은 외면되거나 부인됨으로써 이제 친일매국 세력이 버젓이 역사를 농단(壟斷)하기에 까지 이르렀다. 이 책은 지배집단이 은폐한 역사를 엄정한 역사의 줄기로서 드러내어 기울어지고 왜곡된 역사를 균형잡힌 정직한 역사로 기틀을 세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읽는 것은 지나간 과거를 단지 감상하고 공감 또는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닐 것이다. 바로 지금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예리한 “질타의 칼”을 마음에 들여놓는 작업일 것이다. 우리들의 사회와 정신에 깊게 새겨진 빛과 그늘을 새김으로써 동일한 실패의 반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자성(自省)의 칼(刀)’ 말이다. 책 『조선에 反하다』는 “의(義)와 도(道)라는 유교적 윤리의 얼굴 뒤에 숨어 구축한 억압과 착취의 사회구조가 지닌 부조리와 모순에 대해 균열을 내고 거스르며 맞서 싸웠던 민초들의 역류와 항쟁의 역사”이다. 특권을 항구화하기 위해 조선조 500년 내내 유교적 질서를 앞세워 얼마나 극악하게 백성을 차별하고 억눌러왔는가의 폭력의 시간적 자취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민초들의 저항의 역사 속으로
책은 연대기적 기술이 아니라 신분제 질서에 대한 저항, 변란과 모반, 그리고 거대한 백성의 봉기인 항쟁의 역사로 구분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감상글은 이와는 달리 연대기적 기술을 선택하였다. 이렇게 서술함으로써 민초의 저항이 조선조 내내 진행되어 왔음을, 그리고 그만큼의 참혹한 억압과 폭력의 지배가 극악하게 저질러졌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상하의 위계적 통치관계와 귀천의 신분질서가 합리화되고 정당화된 시대이다. 또한 삼강오륜이라는 의와 예, 효와 충을 사회질서의 덕목으로 하여 백성과 관료의 관계를 ‘강상(綱常)의 윤리’라 불렀다. 백성은 자식으로 양반 지배계급을 어버이로 하는 부자관계라 내면화시킨 사회다.
그런데 조선조 500년간 단 한순간도 백성에 대해 어버이와 자식 관계의 윤리적 실천이 실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 강상의 윤리라는 허무맹랑한 유교의 지배질서 체계의 허위와 기만에 실소를 터뜨리게 된다. 한글창제의 왕으로 추앙받는 군주이지만 세종은 결코 백성을 자식처럼 쓰다듬은 인물이 아니었다. 이미 ‘문화유산의 두 얼굴’에서도 지적한 바 (*링크 글 참조) 있지만, 그는 자신의 절대 왕권 유지를 위해 그 어떤 아량이나 베풂도 허락하지 않은 냉혹한 인물이다.
오늘날 부총리격인 의정부 찬성 허조는 세종에게 간한다. “부민과 수령의 관계는 아버지 아들의 관계이므로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그 허물과 악함을 고소하게 되면 아비의 허물을 들추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범한 자에게는 강상죄를 적용하여 능지처사로 다스려야 합니다.(《세종실록》, 1443년 세종13년)”고. 세종은 둔전의 지대를 거두러 온 어영청 관리가 이를 빌미로 농부들의 전답까지 강탈하자 이에 분을 이기지 못한 농부의 저항에 대해 능지처사를 명한다. 지배권력의 불의에 항거하는 것을 곧 왕권에 도전하는 것이요, 강상의 윤리를 저버린 포악한 행위로 보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배논리가 지닌 모순과 부조리에 끈질기게 지속된 저항의 목소리가 책의 지면을 가득 채운다.
1495년은 연산군이 집권하던 시기다. 경상도 동래 수군 신분의 박을수가 수령의 불법을 조정에 호소하지만 묵살되자 궁궐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운 사건이 있었다. 이후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궁궐 난입이 증가하는데, 이는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있었음의 반증일 것이다. 물론 박을수는 능지처사되었다. 왕을 비롯한 지배계급은 이를 단지 지배질서에 도전하는 악행으로만 비난하고 처벌하여 민의를 짓밟으면 체제가 유지된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이러한 양상은 그 사건의 모양만 달리하지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근본 원인을 제거하여야 하는데, 문제의 근본이란 것이 곧 지배질서 체제를 유지하는 유교의 의와 예의 논리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끝없이 잉태하고 출산하는 그 괴물스러운 강상의 윤리를 놓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1561년 명종 때에 ‘임꺽정’ 무리가 대거 준동한 것인데, 착취와 조세 수탈에 시달리던 양민과 농민, 상인, 헐벗은 천민까지 합류한 거대한 도적 세력이 양반부자들의 재산을 강탈하여 백성들에게 배분하는 의적으로 행세하였다. 오늘의 말로 하자면 물적 재분배라는 일종의 복지정책을 이들이 실행한 것이다. 이때 지배계급의 목소리는 이렇다. “지금 도적세력이 성하여 적국(敵國)과 같으니 엄히 다스려야.”, 이 말은 그저 탄압하여 눌러버리면 그만이라는 목소리다. 사회 기층민의 억울한 목소리에 깃든 근본적 사회 문제를 해결할 의지라는 것이 아예 존재치 않았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기록이 남아있는데, 조선을 찾은 중국 사신이 명종에게 논하는 말이다. “몸이 병난 것만 알고 병이 생기는 근본은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도적 무리가 생긴 까닭은 도적질하기 좋아해서가 아니라 굶주림과 헐벗음을 견디지 못해 하루라도 연명하려는 자가 많기 때문이다. (...) 벼슬을 산 자들이 지방관이 되어 백성을 약탈하니 백성이 어디 간들 도적이 되지 않겠는가.” (《명종실록》, 1561. 10.17)
오히려 중국의 사신이 근본문제를 살필 것을 이웃나라 국왕에게 논할 정도이니, 그 패악은 가늠하고도 남을 것이다.
1629년 인조(仁祖)부터 숙종, 경종, 영조, 정조에 이르는 17~18세기는 그야말로 크고 작은 민란과 변란이 전국 곳곳에서 우후죽순으로 발생하는데, 그 발흥의 신분은 천민에서부터 몰락 양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백성을 아우른다. 17세기 말 10년 이상 준동한 의적 장길산이나 개국대전(改國大典)을 내걸고 봉기한 이충경, 정감록 변란 사건이라 부르는 역성(易姓)혁명에 이르기까지 양반관료의 악랄한 침해와 착취, 신분제에 의한 정의의 실종은 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민의로 꿈틀대기 시작한다. 체제 모순의 심화, 제도의 파행적 운용, 억압과 착취의 심화, 해소는커녕 불만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한 무도한 폭력만이 자행되는 세계였으니 국가는 자멸의 길을 일찍이 이즈음부터 그 행보를 가속화했다고 단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순조 2년, 1812년 평안도 청천강 유역 다북동에서 출발하여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119일간의 처절한 항쟁을 하였던 ‘홍경래의 난’은 이처럼 곪아터진 조선사회 기득권계층인 양반세력의 오랜 파행적 부패에 대한 항거였다. 관군의 무자비하고 광기어린 진압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 지배계급의 포악질을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다. 2,983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으며, 어린아이와 부녀자 1,917명을 무차별 도륙하며 난은 평정되었다. 이 반란의 여파는 이후 각종 민란의 본보기가 되어 1813년부터 1817년까지 전국방방곡곡에서 그치질 않았다. 홍경래의 죽음을 부정하는 백성의 목소리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의 목소리가 오래 살아남아 백성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부활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1862년 ‘진주민란’은 과도한 수취, 이를테면 땔감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초군, 남의 땅을 경작하여 근근이 살아가는 병작농에게 토지에 물리는 전세를 부과하고 토지 주인은 세 부담에서 제외하여 주는 황당한 조세부과 원칙과, 관료와 구실아치의 집중적 수탈로 생존이 불가능하게 된 민초들의 거대한 봉기였다. 여기에 삼정의 문란으로 일컫는 황구첨정과 백골징포까지 군역의 폐단이 더해져 이후 삼남지방은 민란이 끊이지 않는 지역이 되었다. 아마 이때 처음으로 피지배층인 백성이 지배층의 언어인 ‘법’을 들고 제대로 준수하라고 외쳤다고 하니, 더 이상 법은 지배층이 독점하는 언어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마 이후 민란부터 민중과 결합한 정치적 변란의 성격으로 저항 운동이 한 단계 고양되었던 것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1882년 7월 15일은 서울에서 발생한 최대의 정치적 민란이 발생한 날인데, 선혜청 책임자의 횡령으로 13개월 동안 하급 군병의 급료가 지급되지 않다가, 모래알 섞인 쌀을 한 달치 급료로 규정에 미달하게 지급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인 임오군란에 이은 민겸호 등 민씨 척족의 부정부패와 반일(反日)의식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민씨 척족 정권의 무능과 부패로 인한 정책 파탄에 대한 주범인 중전 민씨에 책임을 묻는 사건의 일환이었는데, 고종이 내린 토벌 요청서를 받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임오군란 진원지인 왕십리와 이태원 일대의 급습으로 인한 백성들의 저항으로 촉발된 사건이기도 하다. 11명이 참수되고 170명이 체포 감금되며 사건은 일단락 되었는데, 도망쳤던 민비는 이때 청군의 호위를 받으며 입성, 다시금 조정을 장악하고 척족 세력의 착취를 더욱 노골화한다. 이 사건이 이 땅에 외세의 침탈을 유인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이 사건의 피해자라며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본에게 국토를 유린하는 권리를 양허하는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주어야만 했으니 말이다. 1894년 갑오 동학농민전쟁의 궤멸은 바로 이러한 일본군의 조선반도 내 본격적 진입과 경상도 안동, 의성, 예천 등 서원을 중심으로 한 양반 유림들의 일본군에 대한 적극 호응 지지의 결과이다. 경상도는 일본군의 병참기지 역할을 확실히 수행했는데, 스스로 민보군을 조직하여 일본군 관군과 협력하여 동족인 동학농민군을 참살하는데 앞장섰으니, 대한제국의 일본 병탄은 국가의 기층민인 백성의 약소함이 아니라 양반 유림들의 민족 배반과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했던 몰지각과 무능이 초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멸족되었어야 할 이것들의 후손이란 것들이 나라를 일본에 갖다 바치고선 그 매국의 더러움을 망각하고 뻔뻔스러운 주둥아리를 오늘에도 놀려대고 있다. (*경상도 서원 유림의 친일행각은 링크된 리뷰참조)
이것들은 친일 극우를 자처하며 오늘 더러운 아가리를 놀려댄다.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은 백성이 자기 수호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고 병약해서 자초한 것이지, 일본의 무력 침략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인의 열등감이지 일본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참회와 반성은 실종되고 추악한 것들이 그들 조상의 패악질을 잊은 채 망령된 헛소리를 지껄인다. 영남의 유림들이 조직한 민보군은 외세와 맞서 함께 싸우자는 농민군의 연합전선을 거절하고, 일본군에 붙어 동족 학살에 적극 협력했다. 아마 망국은 바로 이러한 유림세력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역사의 그릇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조선 지배층 다수는 자신들의 지배체제와 신분질서를 지키기 위해 외세 침략이라는 나라 전체의 위기조차 고려하지 않았다. 이들의 극단적 이기심이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끈 것이다. 이들은 포로를 아예 잡지 않았으며, “동학교는 모조리 살육하라!”는 토벌 구호를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친일파의 뿌리는 깊다. 이미 1880년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일본의 조선 침탈은 1905년 을사늑약이 시작이 아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이라는 지배계급 간의 권력 투쟁에 외세를 불러들인 양반유림계급의 사대주의가 시작이며, 이로 인해 일본군의 조선 주둔과 1894년 갑오년 동학전쟁으로 농민을 비롯한 일반 백성인 외세 저항 세력이 궤멸되었기 때문이다. 동학전쟁은 일본군과 백성의 전면전이었다. 여기에 양반 지배계급과 관군이 일본군에 합세함으로 인해 초래된 굴욕이 바로 1910년 한일병탄의 치욕이다. 결국 국가를 말아먹은 당사자는 바로 500년을 기만적 유교논리로 기득권을 누렸던 양반유림 세력이다. 이들이 매국노 집단이요, 이 땅의 발전을 가로막는 추악한 족속들이다.
다음은 1894년 갑오년의 대표적 친일파 매국노의 일례이다. 이때 중앙군영인 자위영의 영관(領官)이었던 ‘이두영’이란 인물이 있는데, 일본군이 앞세운 동학농민군 토벌 선봉대장이 되어 백성을 무자비하게 유린 학살했으며, 이 토벌의 승리를 대가로 일본에 의해 1908년 전라북도 판사, 조선멸망과 함께 전라북도 도지사를 역임한다. 또한 일본이 양성한 교도중대 지휘관 ‘이진호’는 1907년 중추원 부찬의를 거쳐 평안남도 관찰사, 한일병탄 뒤 도지사를 거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고문을 지냈다. 1895년 동학의 교주인 전봉준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신문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지는데, 당시 이 신문의 최고 책임자는 일본이 만든 법무아문(오늘의 법뮤장관)의 ‘서광범’이다. 갑신정변의 주동자인데, 일본으로 도주해서 미국 망명길에 오르고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다. 그리고는 일본 외무성 주선으로 조선에 돌아와 법무장관에 임명된 대표적 친일, 민족 배신자이다.
결국 조선(대한제국)의 패망은 이들 지배계급의 탐욕이 불러온 자멸이다. 동학농민전쟁이 외세없이 수행되었다면 아마 백성이 세운 흥국안민(興國安民), 통치의 도리와 지배의 의리가 토대가 된 새로운 세계가 열렸을 것이다. 지배계급으로 자처하는 잘난 족속들이 자기 이익에 매몰돼 역사의 진실한 축을 외면할 때 그 나라의 미래는 곧 자멸의 길을 향하게 된다. 조선조의 뿌리깊은 배제와 차별의 억압과 폭력의 정치는 그 추악한 유림 세력을 통해 일제 식민지 치하의 기득권으로 이어지고, 오늘 극우 친일의 배은망덕으로 다시금 그 더러운 모습을 뻔뻔스레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엄중하게 징치(懲治)되어야 할 대상이지 감히 나댈 것들이 아니다.
■ 실행된 적 없는 조선의 상하 소통제도
조선조에도 백성이 지배층을 향해 고충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형식적 제도가 있었다. 지배체제에 용인한 합법적 항의 방법으로 ‘등소(等訴)’라는 것이 있었는데, 실현된 적이 없다고 한다. 지배체제의 본질과 구조로 인해 아래 것이 상전에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었다. 또한 ‘거화(擧火)’라는 것도 있었는데, 일종의 직접 간언 제도로써 왕과의 면담을 요청하는 횃불을 올리면 그를 확인하고 대응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단 한 차례 실행되었는데, 1824년 순조 때 이인백이라는 인물이 거화하고 상소를 올린 사건이다. 이에 좌의정 이상황이 왕에게 전언하는데, “지척에서 변괴가 일어났습니다. (...) 상소 양식으로 첫머리가 시작되고 말이 나라의 길흉에 관계되어 아주 흉악했습니다....”이다. 존재하는 제도였으나 조선 역사 이래 단 한 차례 실행되자 지배계급의 인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백성의 간청이 ‘변괴’이고, ‘흉악‘으로 돌변하는 것은 양반 권문세가들의 백성에 대한 인식이란 오직 찍어 누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부민고소(部民告訴)’ 라는 것도 있었으나, 백성이 지방관을 고소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단지 모반대역죄와 불법 살인죄만 허용되었는데, 즉 지배권력에 위해가 될 여지가 있는 것만 조정에 알릴 의무가 주어진 것이지 사회적 약자인 백성의 정당한 고소 수단과는 애당초 한참이나 먼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왕의 거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능과 사당에 참배하기 위해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국왕의 행렬을 말한다. 거둥길에서 왕은 길가에 엎드린 백성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사실 군주의 위엄을 과시하고 통치 권위를 확보하는 일종의 정치 쇼로서 기만적 몸짓이라 할 수 있었는데, 거둥길의 이 “소통 이벤트를 통해 불만을 가진 백성을 지배질서로 포섭하고 민심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 소통 이벤트인 정치 쇼는 1777년 정조에 이르러 다소 완화되어 거둥길에 백성이 앞으로 나와 소란을 피우지 않을 정도의 거리만 떨어져 있으면 용납되었지만, 그 이전에는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마치 작금에 용산 청사를 비롯해 이동할 때마다 거리가 차단되고 수많은 경호차량과 경찰 오토바이가 에워싼 무례한 권력자의 행차와 닮아있었다. 1861년 철종에 이르러 국왕의 거둥길 행차에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왕의 가마 꼭대기 황금봉황 장식을 부러뜨린 사건이다. 즉시 범인은 색출되어 국왕의 온갖 고문으로 계속된 친국 속에서도 당사자 조만준은 굴복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단독 행위임을 주장했다. 그는 사지와 목이 찢기는 능지처사 되었다. (국민의 대표로써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입법기관인 의회 다수당인 야당 대표의 목에 칼을 찔러 넣는 희대의 살인 미수사건이 벌어져도 수사가 오리무중인 작금의 현실과 엄청난 대조를 보여준다)
신격화된 군주의 심기에 거스르는 행위는 도의를 부정한 것이라는 ‘대역부도(大逆不道)’, 오늘이라면 참으로 가당치도 않은 죄목으로 주살되었다. 조선의 지배질서란 지배계급 자신이 영구히 상전인 것은 하늘의 신성한 뜻이라는 것이었다. 감히 하늘의 뜻을 넘봐? 아래 것들이 죽을라고!, 이것이 500년 조선사, 아니 오늘의 패덕한 극우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야만적이고 반인륜(反人倫)의 파렴치가 지속되고 있다. 조선조는 백성이 지배계급에 정당한 요청을 하는 길이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던 사회라 할 수 있다. 백성은 오로지 지배계급의 요구에 순응하여 따르는 예의만 요구되던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유일한 수단은 봉기이고, 민란이요, 반란이며, 혁명을 위한 전쟁 뿐이었다. 때문에 이러한 저항운동은 주류의 관점에서 바라 본 부정이나 부도덕, 또는 부정의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소통의 통로가 단절된 유일한 민의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 맺는 말
조선 사회는 모두에도 말했지만 의와 도라는 유교적 윤리의 얼굴 뒤에 숨어 그 자체가 내재한 무수한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로 추한 민낯을 감추기 위해 백성을 수탈하고 차별하며, 모욕하고 원한과 설욕의 욕망을 뒤엉키게 한 불의한 비극의 세계였다. 사회자체의 본질과 구조로 인해 회피할 수 없는 모순과 신분제의 부조리함이 깊게 똬리를 틀고 있는 사회였다. 양반 지배질서는 백성에 그러함에도 어질고 예의바름을 요구했다. 오로지 상전을 향한 의와 예를,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아래를 향한 그 의(義)와 예(禮)를! 양반계급의 지배와 교화는 의로웠던 적이 한 순간도 없었던 잔혹한 사회였다.
1597년 양반 오희문은 자전일기인 《쇄미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쓴다. “한복이 죽은 것은 족히 아까울 것이 없다. 다만 (...) 갑자기 죽었으니, 마치 더러운 물건을 삼킨 것 같아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고. 자신의 노복 한복에게 빌려준 땅의 농사와 달리 자신의 전답을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관아에 고발하여 죽음에 몰아넣고는 그 죽음에 어떤 연민이나 슬픔도 보이지 않으며, 고작 계산의 잣대를 들이댄다. 그 소유 물건이 없어진 것만이 안타까운 것이다. 이것이 조선조 양반 지배계급이 백성을 대하는 고착된 관점이요, 방식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요, 동물이었던 것이다.
1704년 숙종 때에는 성균관 유생을 시중들고 건물을 운용하며, 온갖 식음과 제사의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사령 두 사람이 자결했다. 숙종조 《승정원일기》 에는 “재원은 줄어들었는데 받들고 수행해야 할 일은 전과 같으니 최소의 임무조차 행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성균관 노비가 역(役)을 감당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알 수 있습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양반 사대부들은 자신들은 한 푼도 부담하지 않으며, 자신들, 양반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기관의 운용 재정 전반을 백성에게 부담시키며 그 혹독함을 모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1727년 영조 3년의 《승정원일기》에 다시 반복 되어 나타난다. “백성의 신역(身役)중 성균관의 신역보다 괴롭고 무거운 경우는 없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절대 양반 지배계급의 의식은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그 부담은 더 가중되어, “이들에게 형조, 사헌부, 한성부에 속전으로 바치는 돈이 거의 수천 냥에 이릅니다. 하급 벼슬아치도 함부로 돈을 요구합니다.”고 실상을 왕에게 고하고 있다. 건물 관리, 제사 업무 전반에 대한 책임, 유생의 뒷바라지, 음식을 만들어 받드는 식사 책임, 성균관 운영에 대한 전반적 재정 감당까지 여기에 더해 속전까지 요구한다,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이다.
이것을 조선이 자랑하고 오늘도 이들을 계승하고 있다며, 거들먹거리는 후손들은 유교의 윤리가 이 땅의 정신이라는 터무니없는 헛소리를 지껄이기까지 한다. 이 책, 조선의 역사를 읽는 다는 것은 고통과 울분을 마음에서 삭이는 인내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의함이 오늘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추악한 사슬, 연결의 고리를 잘라내야 하는데, 우리는 지나친 관용의 말로 그 패악을 희석하고 만다. 결코 이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석학들은 “민중의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 없이는 민주주의란 언제든 부식될 수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잘 안착된 민중의 평등과 자유와 인권에 대한 제도조차 이렇게 불안한 것이 인간 세계이다. 하물며, 철저하게 민의가 봉쇄된 억압 사회에서 백성의 삶이란 어떤 것이었겠는가?
역사를 주류, 기득권의 관점에서만 기술하려는 자들, 그리고 조선조 말 외세에 의존하여 나라를 팔아넘긴 양반 유림 세력들, 그리고 일제부역자들과 청산되지 못한 이것들의 후손이라는 것들이 더 이상 이 땅의 역사를 왜곡하고 더럽히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아니 하는 순간 매장되는 제도적이고 윤리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신음하며 고달픈 삶을 살아내야 했던 많은 백성들의 후손인 오늘의 우리들은 이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나 또한 이들 민초의 지난한 고통과 저항의 역사가 역사 변혁의 주체였다고 단언하지는 않으련다. 그러나 “그들이 외쳤던 절규의 목소리와 정직한 몸짓”은 다가오는 우리의 역사적 도전에 중요한 자성의 칼이 되어 줄 터이다. 조선의 패망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양반 기득권 지배계층의 위선과 무능이 불러 온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오늘은 이러한 지배권력과 질서를 만드는 책임이 국민에게 주어져 있다. 잘못된 자유의 선택은 독재자를 부르고 공멸의 길을 열어젖히기도 한다. 역사 읽기는 이러한 미혹의 시선으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한 단계 올려놓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세 번째 조선사 읽기인 『조선의 두 얼굴』로 달려 가보아야 할 것 같다. 선비라 부르던 사대부들의 그 이중적 얼굴의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