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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 카프카 드로잉 시전집 ㅣ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8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평점 :
이 시전집은 카프카의 일기, 편지, 소설을 포함한 산문들에서 시적(詩的)인 116편을 떼어낸 것이다. 여기에 카프카의 자유로운 정신적 흐름의 산물인 드로잉 스케치 작품들이 곁들여져 카프카 문학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세계와의 친밀성을 더해준다. 카프카 전기를 쓴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스케치는 화가로서의 능력과 독창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기에 적합했다고 말하면서, “그 누구도 스케치 환상과 서사 환상의 유사점을 추적”하려 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시집의 첫 지면과 마주하게 되는 시(詩)는 열네 살 카프카가 쓴 조금은 통속적 분위기의 시구다.
오고
감
이별이 있다.
그것도 자주 - 재회는 없다. (1897.12.20.)
단어 또는 문구 한 구절 마다 행을 달리함으로써 우리 사고의 지연을 요구하여 대립된 이미지의 묘한 통합을 이루게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행에 이르러 어떤 숙명의 작용을 생각하게 한다. 이 어린 시인의 감성에 이미 삶과 죽음의 기묘한 어울림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는 점은 놀랍기도 하다.
《이 드로잉에는 ‘청원자와 지체 높은 후원자’라는 설명이 붙어있는데, 각자의 내면을 상징하는 듯한 모자를 쓴 그들의 작은 얼굴표정과 표면화된 얼굴의 이중성이 대비된 희화성을 읽을 수 있다.》
나는 12번째 시를 한동안 응시했는데, 소설 『소송』의 ‘요제프 K’와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의 마음이 이러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며 인간으로서의 막연한 공감을 하게 된 작품이다.
침대에서,
무릎을 약간 세우고,
주름진 이불을 덮고 누운 채,
----(중략)----
군중과 멀리 떨어져서,
군중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먼 관계를 맺는다.
동화하려 하지만 불가능한, 또한 하나의 고정된 관념처럼 되어버린 유대인으로서 분리될 수 없는 정체성과 이 세계의 끈질긴 억견으로부터 고립된 한 인간의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그에게는 애증의 도시인 프라하의 풍경을 묘사한 2번째에서 4번째에 이르는 시구는 그 처연함과 외로이 걷는 한 청년의 처진 어깨를 떠오르게 한다.
오늘 서늘하고 칙칙하다,
구름은 굳어 있다.
바람은 잡아당기는 밧줄이다.
사람들은 굳어 있다.
---(후략)--- (1903.11.8.)
그런데 카프카의 음울한 사변과 다른 조금은 명랑해보이기까지 해서 감긴 눈을 뜨이게 하는 시가 있다. 하늘하늘한 봄바람이 굳은 마음을 열어 폴짝폴짝 뛰는 경쾌함이 미소짓게 한다.
작은 영혼이여,
그대는
---(중략)---
반짝이는 풀밭에서,
두 발을
쳐드는 구나. (1909. 9)
단편소설 「시골 의사」가 출처인 듯한 작품인데, 우리들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코러스의 합창, 인물들이 말하지 못하는 세상의 인식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연상케 하는 구절이다. 아마 카프카를 읽어 본 독자들은 이 시를 대하고 친밀함에 반갑기도 할 것이다.
그의 옷을 벗겨라, 그러면 그가 치료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치료하지 않으면, 그를 죽여라!
그는 단지 의사일 뿐, 단지 의사일 뿐.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의 치료를 주저하는 시골의사를 향한 마을 주민들의 은근한 압력의 장면이 떠 오를 것이다. 기이한 관계역설을 일으키는 ‘카프카스럽다’는 말을 절로 내뱉게 하는 대표적 장면일 것 같다.
아마 다음의 시구는 단편 「돌연한 출발」이 그 출처일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그의 정체성을 묶어두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 그러나 그것이 목표인 한 그것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을까?
주인 나리,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 나는 말했다.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단지 여기서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내 목표에 도착할 수 있어.
“그러시다면 나리께서는 목표를 아신단 말씀인가요?”
“그렇다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여기-에서-떠나는 것’, 그것이 내 목표야.” (1922.2)
옮긴이의 한 문장이 어쩌면 카프카 시문학의 많은 부분을 대변하는 것 같다. “슬픈 미래와 전쟁“에서 ”폐허 더미를 목격한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라는 말이다. 자신 안에 이 세계의 질서를 부여할 수 없다는 사실과 정직하고자 하는 절대적 요구에 의해, 혼돈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카프카의 내면은 가혹한 전쟁터였을 것이다.
두 권의 카프카 평전을 쓴 ‘마르트 로베르’는 세기 전환기인 19세기 말 “이상(理想)의 몰락으로 인류의 지성들이 현기증 나는 심연과 마주했을 때 이를 메우고 진실을 열어 보이기 위해 이상의 대치물로 문학에 최고의 지위를 기대했다”고 주장한다. 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이 있고서부터 신이 떠나고 없는 자리를 대신하게 된 신비와 맺어주는 능력을 시가 담당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접근 불가능한 경험 저편의 세계로 이르는 길을 열어준 카프카 산문의 출현은 이러한 시의 신비와 경이의 교량기능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카프카의 시(詩)전집 번역자인 ‘편영수’는 카프카에게는 “시와 산문 사이의 과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카프카의 산문이 시에 가깝듯 카프카의 시는 산문에 가깝다.”고, “산문에 근접할 때만 독창적”이라 카프카의 시를 혹평한 집단을 향해 마르트 로베르의 시대정신을 품은 문학의 의미로서 카프카의 시를 대변한다.
작품에 대한 해설에서 카프카는 “세계와 세계질서의 도래하는 파괴를 예감”한 횔덜린을 잇는 파편적 글쓰기의 선구자라 이해하며, 이 “파편(fragment)이 곧 카프카의 문체가 완성되는 유일한 형식”이라 말하고 있다. 사실 많은 문학이론가들이 앞서 이 파편의 축조물로서 카프카의 소설을 해독하고 있다, 파편인 실존의 폐허를 재료로 삼아 완성한 성(城)은 축조된 조각들 사이에 메워지지 않은 무수한 틈을 지니게 된다. 아마 완성되었으나 여전히 미완성인 이 모순적 상황이 카프카의 시와 산문일 수밖에 없는 원인일 것이다.
책의 편집에 대한 작은 아쉬움의 변으로 감상을 맺어야 할 것 같다. 수록된 시들은 카프카의 산문글 어느 것으로부터 분리된 글들이다. 즉 시들 중 많은 것들이 어떤 맥락 속에 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를테면 1916년 12월 24일자 일기라던가, 단편 <어느 단식 광대>와 같이 그 출처를 밝혀 독자들의 읽기를 도울 수 있었을 텐데 작품해설에서 몇 편에 대해서만 이를 표기하고 있기에 감상에 어려움을 갖게 되는 것은 이 책의 흠결(欠缺)이다. 차후 개정을 하게 될 때 반영을 고려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이 시전집은 카프카는 시인일까? 라는 회의적 질문에 대한 당찬 도전 작업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듯하다. 아마 카프카의 문학을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카프카에 이르는 새로운 접근 통로가 되어 줄 터이다. “주목할 만한 시적 재능을 지닌 시인”, 카프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