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불임 클리닉의 부활
가이도 다케루 지음, 김소연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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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번 작품은‘가이도 다케루’의 전작(前作)을 주름잡았던 ‘다구치-시라토리’콤비와 도조대학 의학부, 살인과 추리라는 등식이 없다. 그러나 의료소설로서의 성격은 보다 선명해졌고 참여문학의 형태까지 지향한다. 장소는 동경의 명문 데이카대학 의학부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의료정책에 대한 직접화법을 구사하고 있기까지 하다. 행정 관료의 정책적 무능과 무력한 의료계, 그리고 붕괴되어가는 비참한 지방의료 체제의 문제와 인공수정, 대리모(代理母)로 대표되는 생명탄생에 대한 윤리적 타당성의 공론화라는 뚜렷한 문제제기를 양대 주제의식으로 하고 있다. 이렇듯 작품의 주제의식이 너무 분명해서 허구의 재미가 반감될까 우려 할 필요는 없다.

음모, 고발, 시기, 갈등, 섹스, 그리고 분자생물학, 인공수정, 대리모, 기성과 신진, 관료행정의 부패와 무능, 페미니즘, 도덕적 윤리 의 다채로운 소재와 구성요소들이 매혹적인 미모의 여주인공 32세의 인공수정 전문의이자 발생학 강사인 ‘소네자키 리에’의 주도면밀한 행동, 거침없는 추진력이 어울려 탁월한 소설적 재미를 안겨준다.

페미니즘을 전면적으로 부상시키고 있지는 않지만 주인공 ‘소네자키 리에’의 남성 중심적 의료세계와 기성권위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소신에 따라 행동하는 여성의 모습에서, 그리고 생명의 잉태와 출산이라는 여성고유의 내면화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내재화되고 있다.

‘리에’는 데이카대학이 지원하는 마리아클리닉에 외래교수로 지원을 나간다. 그녀가 담당하는 5명의 임산부(姙産婦)가 출산을 완료하는 시기를 마지막으로 마리아 클리닉은 폐원하게 되어있다. 2명의 인공수정에 의한 임산부와 3명의 정상적 임산부인 이들 5명의 여성은 리에와 함께 생명의 존귀함을 일깨우는 사건들의 전개를 같이한다. 낙태를 하려는 거리의 소녀, 임신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워킹우먼, 5년에 걸친 인공수정 노력을 기울인 30대중반의 불임여성, 50대중반의 부조화스런 인공수정 임신, 무뇌(無腦)상태의 태아를 가진 여성은 각기 생명잉태에 대한 윤리적 잣대와 사회제도에 대한 긴장된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출산율 저하에 대한 출산장려책이 행정 관료들의 오만과 무지로 오히려 지방의료체제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후생성의 관료정책에 대항하여 리에는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불임 부부를 지원하는 것이 진정한 의료지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윤리적으로 첨예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체외수정과 같은 인간의 수정란, 배아의 배양이 신(神)의 영역을 건드렸다는 종교적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타인의 수정란을 생물학적 부모가 아닌 인간의 몸을 빌려 출산하는 행위가 과연 윤리적인 것인가? 와 같은 대리모출산에서부터 남성의 동의 없는 정자수집과 임의 인공수정 행위, 체취 된 난자의 임의사용 등 이 작품에서 리에가 말하는 불임자들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란 감성적 호소에 귀 기울인다 하더라도 그녀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러한 윤리적 문제는 빗겨나고 있다. 단지 과학으로서의 의학기술에 열광하고, 부패한 의료정책을 비판하는데 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한편, 관료행정에 영합하고, 기성권위에만 의존하는 구태스런 사람들의 표본으로‘야사키’교수란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중립적 인물로 리에와 두 번의 잠자리와 한 번의 묘한 접촉이라고 기억을 더듬는 ‘기요카와’부교수가 있다. 이들과 벌이는 리에의 갈등과 설전은 이 작품의 재미를 견인하는 톡 쏘는 청량음료의 맛을 선사한다. 이 권위적 인물인 야사키를 면전에서 완벽하게 짓누르는 소네자키의 당찬 논리에서 얏호~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다. 이후 대학과 후생성이라는 거대한 기성체제에 대한 일전을 불사르는 리에의 모습에서 소신과 정의 앞에 의연한 한 여성을 찾을 수 있다.

소네자키가 매료된 DNA염색체에서 울리는 3화음의 조화를 시작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독자의 시선은 무수한 의료문제를 당면하고, 생명의 신비로움과 존귀성을, 관료의 부패와 무능, 기성권위의 안이함, 지방의료체제의 붕괴와 같은 사회적 이슈와 마주하게 된다. 결국 작가의 의도는 성공적인 셈이 된다. 빠져나갈 곳이 없이 재미 속에 주제를 명료하게 언급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에 우리사회가 어떠니 저떠니 하는 종언은 사족에 불과할 듯하다. ‘가이도 다케루’는 다음에는 어떤 병동으로 넘어갈까? 다시‘부정수소외래’로 회귀할까? 아님 데카이대와 소네자키의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그의 차기작이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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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진화심리학 - 데이트, 쇼핑, 놀이에서 전쟁과 부자 되기까지 숨기고 싶었던 인간 본성에 대한 모든 것
앨런 S. 밀러.가나자와 사토시 지음, 박완신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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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저술은 분명 흥미롭고 재미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 뿐 아니라 동양의 성선설, 성악설에 이르기까지 인간 본성에 대한 탐색은 21세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논쟁의 근원이 되어왔으니 말이다. 또한 종족번식과 짝짓기라는 인간의 생물학적 본능에서 출발하는 진화론적 접근은 잔뜩 호기심 그득한 인간에게 매우 수월하고 자극적인 인식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무력화시킬 수 있기에 더욱 강력하게 이해에 스며든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은 자칫 인류 갈등의 근원이 될 수 있는 위험요소를 내재하고 있음을 경계하여야 한다. 연구자가 어떤 방향에서 인간 심리를 분석해 나가느냐에 따라 실로 위태로운 측면이 도사리고 있음이다. 인간의 태생적 평등, 후천적 학습과 경험을 주장하는 일종의 양육론(養育論)인 환경결정론으로서의 *빈 서판(Blank Slate)에 대항하는 생물학적 본성론(本性論)인 유전자 결정론과 같이 진화심리학은 자칫 인간의 차별화를 당위(當爲)화하여 인류 최악의 세기인 20세기의 인간 대학살과 살육전의 부활이론화 할 수 도 있음이다.

때문에 흥미로움만으로 접근될 경우, 이론적 부조화, 논증의 불합리성, 설명 불가능함과 같은 이론적 불비(不備)에 대한 비판을 넘어 인류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부정적 측면이 있을 수도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물론 저자들은 본 저술의 내용 어디에서도‘당위(當爲)’를 말하지 않겠다고 서문에서부터 다짐을 하고 있으며, 정치사회적, 인종적 편견으로 연계될 여지를 만들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기는 하다. 그러함에도 종교에서의 유전적 근거나, 이슬람국가들의 자살테러의 동인(動因)에 대한 주장과 같이 일부다처제로 인한 번식가능성에서 배제된 남자들의 행동이라는 귀결은 입증되지 않은 억척스럽고 감성적 주장의 예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학자의 양식을 넘어서는 위험한 담론이라 할 수도 있겠다.

비록 진화심리학의 기초입문서에 불과한 대중심리학서이기는 하지만, 인간 개체에 대한 미시적 접근을 넘어 정치, 경제, 종교와 같은 거시적 조망이 요구되는 분야에 이르는 의기양양한 주장은 많은 논쟁의 기초가 될 수 있으며, 실제 논쟁을 야기한다. 그래서 저자들이 아무리 순수한 대중입문서로서 진화심리학의 저변을 넓히고, 학문적 심화에 일조하려는 의지라고 하여도 이미 순수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 단순하고 작은 책자는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철학, 신경생물학 등 인간의 본성, 즉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관련연구 분야의 종사들 뿐 아니라 대중들에게 의미심장한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진화심리학은 과거의 멈춰진 시간에 기초한다. 또한, 진화의 특질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수 십 만년에 이르는 안정적 환경이 지속되어야 하며, 다시 말해 인간의 두뇌가 오랜 기간 전인 1 만년 혹은 그 이상의 시점인 구석기, 이전 선사시대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행동은 바로 진화가 정체되어있는 그 시대에 형성된 심리적 기제를 오늘에도 가지고 있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심리적 기제의 중추는 바로 생물학적 본능인 종족번식, 생명의 유지를 기초로 하고, 이 원초적 기제(  機制)하에 인간의 모든 행동은 유발된다고 주장한다. 금발머리의 가는허리, 긴 머리카락, 풍만한 가슴의 여성을 남성이 선호하는 것이 과연 사회의 끊임없는 학습효과로 인해 후천적으로 발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남성은 본래적으로 이러한 여성을 찾도록 프로그램화 되어있는 것인가? 왜 포르노에는 끊임없이 돈이 몰릴까? 이 모두 진화가 정체된 인간 뇌의 산물이라는 이라는 것이다. 건강하고 생식능력이 뛰어난 여성으로서의 오랜 학습이 진화의 시간 속에 프로그램 된 결과일 뿐 이라는 것이며, 가상의 공간에 있는 이들 여성에 반응하는 남성은 미처 사회의 변화에 따르지 못한 뇌의 실수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다못해 인류의 결혼제도 역시 인간의 프로그램 된 뇌(수렵시대와 동일한 우리 현대인의 뇌)는 일부다처제에 익숙함에도 대다수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일부일처제가 내용상에서는 여전히 지켜질 수 없는 시스템이며, 실상에서도 지켜지고 있지 않음을 입증하고 있기도 하다. 가장인 남자에서 폭력범인 남자에 이르기 까지 이들의 행위에는 결국 자기유전자의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즉, 종족 번식이란 본능의 작동이상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급기야 남성의 성기모양과 섹스의 반복운동까지 자기종족 번식을 위한 진화의 결과물이라고 증거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부모의 이혼이 딸을 사춘기로 빨리 몰아넣는 것도, 아들이 있으면 이혼율이 떨어지는 것도, 젊은 남자가 외국 남자를 경계하고 혐오하는 것도 모두 종족번식을 동인으로 하고 있는 것이며, 남자가 돈도 더 벌고, 정치권력가가 바람을 피우는 것 역시 종족번식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상대인 여성을 가능한 많이 상대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하다. 이러고 보면 세상에서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언어와 행동의 근원은 종족 번식을 위한 것 뿐, 그 이상의 어떠한 본질적 의미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역시 흥미 넘치지 않는가? 여기서 과연 우리 인간 행동의 근원에 오직 생물학적 본능만이 작동하는 것일까 하는 회의가 떠오르지는 않는가?

‘본성 대 양육’이란 이제는 한풀 꺾인 환경결정론과 유전적 결정론과 같이 그 본질이 첨예하게 극단화 되어있지는 않지만, 저술내용에서 시종 이론의 비교우위를 지향하기 위해 언급하는 빈서판 즉, 깨끗한 뇌라는 어떠한 것도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은 출생 시의 뇌가 차츰 육아, 교육, 대중 매체, 사회적 보상이란 경험을 통해 학습된다는 이론과 경합하는 것은 다분히 이 저작물이 논쟁을 지향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빈 書板(Blank Slate)'이 주장하는 환경결정론이 인간행동을 해석하는데 많은 부분에서 취약함과 오류를 노출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모든 행위가 짝짓기와 번식행위로만 설명되지도 못한다.

여전히 우리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정체를 찾아 헤매는 방랑자들의 노력은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뇌를 중심으로 한 신경심리학, 분자생물학, 신경화학, 신경세포학 등 바로 현재의 인간의 뇌가 정복되는 날, 우린 우리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유익하고 흥겹고, 생각게 하는 저술이다.

*빈 서판(書板;Blank Slate)은 환경결정론자들이 인간의 뇌는 처음에는 모두 깨끗한 상태에서 동등하고 평등하게 시작 된다는 의미로 사용한 용어이다. 세계적 진화심리학자인‘스티븐 핑거’의 저술인 同名의 책 『빈 서판(The Blank Slate)』은 바로 이러한 환경결정론을 비판한 걸작이다.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의 본문에서 인용되는 ‘빈 서판’은 문자 그대로 비어있는 서판 즉, 깨끗한 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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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기별] 서평을 써주세요
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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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범부로서의 추억,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 그리고 작가로서 작품에 투영하였던 의지와 시선, 인간 본성과 언어에 대한 사유가 저마다의 색깔을 가지고 때론 시의 잔잔한 여운과 함께, 때론 강직한 신념과 이성의 목소리로 정리되어 있는 이 땅의 부재한 소통을 복원하기 위한 제언집(提言集)이라 할 수 있겠다.

부산 피난열차의 지붕에 닥지닥지 붙어, 떨어져 죽음에 내몰리는 지옥 같은 피난의 대열에 끼었던 무수한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고관대작들은 하물며 그네들의 개새끼, 가제도구 일체까지 실어 나르던 넉넉하게 차지한 그 열차 객실 안 다른 세계의 조명은 평범한 장면이 아니다. 순진무구했던 백성들과 몰염치와 사악함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의 후안무치(厚顔無恥)의 그 인간들이 시간의 장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에도 이어지는 것을 볼 때 수치스러움이 불길처럼 훅하고 엄습해 옴을 느낀다.

딸아이의 선물에 감격하는 아빠의 소박함과 “아버지를 묻던 겨울은 몹시 추웠다.”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연륜이 더해지면서 우린 어느 순간 ‘생명의 개별성’에 대해 보다 실체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를 동토(凍土)의 지하에 묻던 그 절절한 슬픔은 시간 속에 바래지고,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中略 ~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라고 했다.

겨울철이면 유난히도 많이 들려오던 소방차의 사이렌소리에서 타인의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이타적 시스템의 긍정성에 감사하는 작가의 타자에 대한 연민이 진정으로 다가온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이 내재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소방대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화마(火魔)에 무너져 내리는 건물에 묻혀버린 소방대원들의 고귀한 희생에 우리들의 시선을 멈추게 하기도 한다.

생명을 담보로 한 소방대원들 간의 신뢰와 의지에서 타인이 없는 내가 존재할 수 없음을 이해한다. “인간에게 다른 인간이 다가오지 않으면 고립된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 ~ 中略 ~ 다가오는 인기척, 그것이 인간의 희망인 것이다.”

크게 세 단원으로 묶여있는 글 중에서 나는 ‘말과 사물’의 장(章)에 수록된 ‘회상’과 동명의 ‘말과 사물’, 이 두 글에 유난히 공감으로 머리를 끄덕여 댔다.

그의 몇 몇 작품을 접했던 독자로서의 공감뿐 아니라, 우리사회, 나아가 인간사회에 닿은 그의 시선에 대한 동의가 더욱 크다. ‘난중일기’와 이순신 장군을 배경으로 한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이란 좁디좁은 울타리 안에서 조차 흉물스럽기 그지없는 이 땅 사대부들의 졸렬하고 이기적 당파의 그 적나라함이 그려진 『남한산성』에서 오늘, 우리사회의 무능함을 반복해서 읽는다.

“사실에 입각하는 것,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이순신의 승리 요인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의견이란 것들, 이 사회의 당파 자들은 자기이익을 대변하는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탈정치성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재앙자로 처단하곤 한다. 바로 탐욕으로 인한 불안함이리라. 이것이 한국사회가 지금에도 고스란히 재연하고 있는 현상이다. 사실에 대한 인식도 없는 자들, 자기가 편에 속한, 자기의 의견이란 것으로 보수니, 진보니, 좌니, 우니하며, 자기집단의 이익을 쫓고, 마치 무슨 대단한 투사인양 되먹지도 않은 주둥아리를 놀리는 인간들의 행세와 이에 열광하는 무지한 추종자들을 보면 입맛이 쓰디쓰다.

“이 사회적 담론이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됐기 때문에,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는 것이죠. ~ 中略 ~ 이런 언어는 인간의 소통에 기여 할 수가 없는 것이고 이런 언어가 횡행 할수록 인간 사이에는 소통이 아니라 단절이 심화되는 것이고 이 단절이 지금 거의 완성되어 잇는 것 같아요.~ 中略 ~ 당파성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 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시대의 언어가 폭력의 수단인 무기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는 작가의 진단은 그래서 사실이며, 사실이기에 안타깝다.

“이 세상의 바탕을 이루는‘펀더멘털 베이식(Fundamental Basic)’이 있다면 악과 폭력이라는 작가의 시선에서, 나는 문득 1만 년 전의 수렵과 채집, 그리고 약탈에 적응하고 멈춰진 오늘날 인간의 심리적 기제를 말하는 진화 상태를 말하는 글이 떠오른다. 생물학적으로 틀리지 않은 성찰이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망, 도덕율이 인간이란 차별성을 규명하는 중요한 특질이 된다.

그러함에도 우리사회는 당파적 의견만이 난무하고, 이 무지막지하고 상대에 냉담하며, 폭력적이기까지 한 언어의 무늬만을 띤 독설들이 이젠 완벽하게 소통을 차단해 버렸고 그저 벽에 대고 각자 떠들어대는 비극적 현상으로 치닫고 있기만 하다. 그 잘난 무슨 무엇하는 논객이란 작자들은 소통이란 걸 알지도 못하며, 지금도 여전히 제깟 녀석의 목청만 높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작가 김훈선생의 소설가로서의 소명의식에 대한 진솔한 고백이 더욱 나의 정신에 공감의 떨림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내 언어는 남의 언어에 부정당하면서 소통의 문을 겨우겨우 열어나가는 것이죠.” 그렇다. 힘겹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언어의 허약함이 아무리 본질적이라도 작가의 표현처럼 소통의 힘이 내장되어 있지 않은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불완전한 언어로 불완전한 세계에서 사는 불완전한 인간에 대해서 쓴다는 것입니다.”라는 선생의 철학에 백번 만번 아니 천만번 공감한다. 작가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삶의 시선을 확장해 주는, 그리고 우리의 글과 소통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정말 귀한 사유를 얻었다. 선생에게 해금의 소리가 항시 울려 퍼져, 우리들에게 선생의 고귀한 언어들이 지속하여 많이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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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욕망의 비밀을 풀다 - 인간의 소비심리를 지배하는 뇌 속 'Big-3'의 비밀
한스-게오르크 호이젤 지음, 배진아 옮김, 이인식 감수 / 흐름출판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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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작물은 소비자로서, 기업 고객으로서 뿐만 아니라 무심코 하는 우리들의 무수하고 다양한 결정에 대해 뇌 활동을 구조화하여 신경화학, 신경생물학, 심경세포학, 신경심리학, 신경철학, 신경언어학의 지식이 어우러진 흥미진진한 연구와 성찰, 그리고 이해를 통한 인간 행동의 근원적 동기를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마케팅 분야의 새로운 지평과 관점을 제공하고, 우리들의 무의식 세계를 들여다보아 신경철학자 ‘토마스 메칭어’가 주장한 ‘자아’의 허구적 실체에 당혹스럽게도 한다.

낯선 나와 우리 실체인 뇌, 머릿속 뇌의 구조와 영역별 활동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는 이 뇌의 탐구는 환상적이기까지 하며, 이 매혹적인 여정에서 연결되는 인간의 ‘감정과 동기’에 대한 뇌 속 거대한 영역시스템의 이해와, 이로 인한 인간 행동 결정과정의 무의식세계의 조명은 더 이상 소비자의 욕망을 몰라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의 분명하고 입맛에 맞는 마케팅전략으로 안내한다.
매일 벌어지는 우리들의 수많은 결정들이 바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의식’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단다. 모든 결정의 70~80%는 무의식적으로 내려지며, 나머지도 이 무의식 활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실제 외부에서 유입되는 모든 정보가 우리 의식에 도달하는 것은 0.00004%에 불과하며,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판단도 실은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뇌를 스캔하는 기능성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통해 다양한 목적과 욕구에 따라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위치)을 파악하는 것은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다. 뉴로마케팅(Neuromarketing), 또는 소비자신경과학서라 할 수 있는 이 저술은 바로 이러한 우리 뇌의 활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통한 마케팅의 장(場)을 열어 보여준다.

저자와 연구팀의 관점은 의외로 단순명료하다 할 수 있다. 인간의 행동은 감정과 동기시스템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는 뇌의 영역과 매치되어 뇌의 반응시스템으로서 3개의 커다란 시스템인 균형시스템, 지배시스템, 자극시스템으로 구분되고 있다. 즉, 인간의 모든 반응은 이 시스템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바로 뇌의 생물학적 구조와 이 시스템의 활성화 정도의 차이가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규정하고 있으며, 연령과 남녀의 뇌 구조적 변화와 차이, 뇌의 신경전달물질 및 호르몬의 차이를 통해 개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그 각각의 성향이라는 다양성까지 추정하고 있다.

예로서 포르쉐의 스포츠카와 같은 탐욕스런 물건에 뇌의 쾌감중추인 ‘측좌핵’이 활성화 되고, 일반적인 소형자동차를 보았을 경우 오히려 이런 뇌 영역들이 비(非)활성화 됨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측좌핵이 활성화되고 있는지도 모르며, 무의식의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알도리가 없다. 이처럼 대상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에 따라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이 다르며, 이는 뇌의 3개 반응시스템의 개별 차(差)에 따른 감정적 결과일 뿐이다.

불안, 공포를 회피하거나 배제하고 아늑함과 쾌적함을 요구하는 균형시스템, 패배나 분노, 노여움을 피하고 승리감과 칭찬을 소중히 하는 지배시스템, 지루함과 단조로움을 회피하고 흥미로움과 짜릿한 체험을 환영하는 자극시스템의 상호 견제에 의해 우리의 행동은 결정된다는 것이다. 감정적 의미가 크지 않은 연필이나 세제, 드라이버 등의 물건에 우리 뇌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스포츠카, 유명브랜드 화장품, 디자이너 패션의류, 최신형 휴대폰, 이야기가 있는 상품들은 뇌를 활성화시키고 속박시키기까지 한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시음을 통한 뇌의 활성화 측정 실험은 우리들 뇌의 신기함을 목격하게 한다. 브랜드를 모르고 시음했을 경우, 5:5비율의 선호결과가 나왔단다. 그러나 브랜드를 공개하고 마시게 하자 압도적으로 코카콜라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때 사람들의 뇌의 여러 영역이 활성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뇌가 저장한 익숙한 데이터에 에너지를 최소화하여 신속하게 반응하는 생명의 지속적 유지라는 뇌의 진화와 관련하고 있다. 새롭거나 익숙하지 않은 낯선 정보보다는 뇌가 보유하고 있는 익숙한 정보에 우선 신속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브랜드의 인지도를 쌓은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성공적인 마케팅이 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를 좀 현학적으로 표현하면, 변연계(뇌의 중추인 대상피질, 시상하부, 편도, 해마, 안와전두피질을 말함)에 저장된 데이터를 통해 굳이 의식과 연결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결정하여 다량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신피질’의 작동까지 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강력한 브랜드 이미지가 저장된 코카콜라에 뇌가 우선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결국 맛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뇌가 익숙한 것이 승리하는 것이다. 신비롭고 기특하기까지 한 뇌가 아닌가.

이제, 뇌의 구조적인 영역별 기능을 알고, 사람들마다의 성향을 파악해내면 그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정말 너무 수월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맥락 하에 사람들의 뇌 속 ‘감정동기’시스템의 성향을 전통주의자 ,조화론자, 향유자, 향락주의자, 모험가, 실행가, 규율숭배자 7형태로 분류하고 있다. 전통주의자적 뇌 소유자는 검소하고 평온한 상태를 희구한다. 상대적으로 향락주의자는 자극적인 세계를 쫓고 화려한 패션을 즐긴다. 이처럼 사람은 저마다 뇌의 구조적이고 화학적 차이로 인해 성향이 규정되고 있다는 것이며, 인간의 이들 성향별 분포를 알아내는 것은 목표시장의 설정이나 상품의 기획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준다. (*연령별 분포의 자료도 수록되어 있다.)

흥미로운 연구사례가 마케팅의 전 영역을 아우를 정도로 다양하게 포진하고 있다. 여성의 ‘결합, 보살핌’호르몬, 뇌의 균형시스템을 이해하고 생수병의 디자인을 둥그런 곡선형으로 변경하자 매출이 신장되기 시작했다는 사례에서부터, 자동차회사의 이미지와 제품의 목표 타겟이 일치하지 않음으로 인해 사람들 뇌의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는, 그래서 동기감정시스템과 성향을 일치시킨 광고전략의 변경, P&G의 세제용량에 대한 오판으로 인한 시장실패에서도 사람들의 뇌 가 반응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까지, 그리고 상품포장지의 문구가 일으키는 뇌의 유혹까지 마케팅 실무 비서(秘書)라 할 정도로 다채롭게 소개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의 경우 생애 최초의 자동차에 이름을 붙인다? 왜 그럴까? 뇌의 신비만이 알고 있다. 믿고 의지하고 싶은 파트너로 인식하려는 ‘에스트로겐’을 비롯한 뇌 속에 그 진실이 있다. 작은 감성적 지시만으로도 뇌의 전체 네트워크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전략은 우리 뇌의 에너지를 절약시켜주는 전략과 통하기도 한다. 강력한 브랜드, 자기유사성의 원칙, 감정이 우선하는 뇌를 고려한 감정적이고 구상적인 단어를 선택한 광고문구, 남자와 여자의 향수광고가 왜 그토록 판이한지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이 저술의 중추적 이론 개념인 '감정동기‘ Big3 시스템을 이해하고 활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들이 보이는 그 알 수 없었던 욕구와 반응의 근인(根因)을 알 수 있게 된다. 여자들은 왜 인형을 로봇보다 좋아할까? 노인들은 왜 지출을 절제할까? 포르쉐에 환호하는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디자인을 어떻게 하면 여성고객을 늘릴 수 있을까? 매장은 어떻게 진열할까? 포장지의 인쇄문구는 어떤 어휘를 사용하여야 할까?... 신제품의 구상에서부터 광고문안, 목표계층의 설정, 세일즈맨의 교육프로그램, 접대언어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환상적인 마케팅 일관체계를 배우게 된다. 기획부서원, 마케팅부서원, 경영전략수립자, 기업대표, 광고기획자, 그리고 우리 일반소비자 모두에게 혁신적인 시장마인드를 알려주는 길라잡이로서 추천함에 주저할 이유가 없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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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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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에서 마주하는 ‘너’라는 인칭(人稱)은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리곤 곧이어 너라고 칭하는 이 화자(話者)는 누구일까? 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석연찮은 감정이 계속되는 것인가? 어느새 너는 곧 나로 이입되어 너의 엄마, 아니 나의 엄마에 대한 내 무지의 죄의식을 두드려 대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차린다. 작품속의 ‘너’와 소설 밖의 ‘나’를 동일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었음이리라.

그저 당신은 나에게 엄마이기만 하면 되었다. 나를 돌봐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늘 내 편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그 자리에 있으면 되는 사람쯤으로만 알았다. 당신에 대해서, 여자인 당신의 삶에 대해서, 나에게 이해란 것 자체가 없었음을 몰랐다.

엄마를 지하철 서울역에서 잃어버렸다. 참담해하는 네 남매의 허둥댐에서 조차 현재의 엄마를 표현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자신들을 발견한다.  오늘의 엄마 모습을 알릴 수 있는 사진조차 없다. 엄마가 실종되고 나서야 기억의 밑바닥을 거닐어 그녀의 상태를 더듬는 이들에게서 바로 나의 모습을 떠올린다. 파란 슬리퍼에 드러난 퉁퉁 부어 곪아터진 발을 전달하는 목격자들의 이야기에서 조차 진실을 받아들이기 두려운, 그래서 외면하려는 너희들의 이기심에서, 자기연민에만 급급해하는 우리들의 본성을 본다.

아내와 자식, 가족의 생계에 무심하기만 했던 아버지, 그래서 억척스레 자신의 몸을 혹사하여야만 자식들을 건사할 수 있었던 엄마, 성장하여 집을 떠나보낼 때마다 겪는 회한과 고통에 지배된 엄마의 비어버린 가슴과 쓸쓸함 가득한 모습, 큰 애의 매래에 장애가 될까, 졸업증명서 한 장을 전달하기 위해 낯설기만 한 서울의 후미진 동사무소를 한밤중에 찾아 달려온 엄마, 집나간 둘째가 집을 다시 찾아 들어올 때  주저치 않게 “ 한 밤중에 바람소리에 깨면 그 바람에 문이 닫힐까봐 방문을 열고 나가서” 대문에 묵직한 돌을 괴어놓던 엄마, 글 쓰는 딸 아이이의 소설을 알고 싶어, 그 자식이 자랑스러워 타인에게 읽어 달라하여 듣던 엄마, 집 버린 남편의 밥을 하루도 빠짐없이 아랫목에 묻어두던 엄마, 자신의 건강이 나빠져 그 통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남편의 작은 질병과 통증의 호소에 귀 기울이고, 시중을 들어주던 엄마, 그런 엄마를 잃어버렸다.

“열일곱 아내와 결혼 한 이후로 오십년 동안 젊어서는 젊은 아내보다 늙어서는 늙은 아내보다 앞서 걸었던” 그 빠른 인정머리 없고 사랑 없는 이기심이 기억조차 흐리고 상처투성이의 지친 몸뚱아리 치매 환자인 아내를 잃어버리게 했다. 매번 모시러 나가던 큰 애도, 작은 아이도 그날에는 마중 나가지 않았다. 큰 딸아이는 중국 자금성 관광을 하고 있었고, 작은 딸 아이는 자신의 세 아이들에 치여 있었다. 이들의 변명어린 일상의 자기 합리화에서 어쩔 수 없는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간의 취약한 감정의 한계를 읽는다. 이들과 결코 다르지 않은 나는 속수무책의 자괴감과 화끈거리는 모멸감이 훅하고 나에게 덮쳐오는 것을 느낀다.

왜 엄마가 희생하는 삶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것일까? 왜 그녀의 상실에서야 비로소 그녀의 슬픔과 고통이 이해되는 것일까? 왜, 왜, 엄마는 그 속박된 삶에서 조차 행복할 수 있었다고 믿고 싶은 걸까? 병든 노구(老軀)를 끌고 자식들 힘들다고 먼 거리를 올라오던 엄마, 엄마의 두통이 온몸을 갉아먹어대도 알지 못하던 자식들, 쌀쌀맞고 건조하게 대하기만 했던 옹졸한 안부전화, 이 모든 무심함과 무지와 불성실과 에고가 죄스럽다. 바로 이 순간 뭉클하게 응어리져 떠오르는 죄송함과 시야를 흐리게 하는 눈물도 결국 나를 위로하기 위한 연민에 불과한 것 아닐까? 엄마를 몰랐다. 아니 외면하고 지냈다.

작품은 이렇듯 성장한 자식들이 극복해내지 못하는 원죄와 같은 이 자괴감을 송곳으로 빈틈없이 찔러댄다. 감정이입의 골을 타고 한 없이 그분, 엄마를 향해 눈물을 쏟아내라고, 그리고 품에서 떨쳐 보낼 때의 그 고통을 이제는 알았다고, 그 많은 몰랐음을, 알려할지 않았음을, 용서를 구하라고 사무치게 몰아대는 듯하다.  이 죄인의 인칭대명사인 ‘너’가 어느 순간 ‘나’로 바뀌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너희들이 몰랐던 ‘엄마’가 드러난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머리에 아무것도 이지 않고, 등에 아무것도 업지 않고, 그렇게 홀로되어 길을 걸어본지가 언젯적이었나.” 자신의 몸 홀로 가벼이 세상의 자유를 한껏 느끼는 엄마의 모습, “팔을 살랑살랑 흔들어보며 신작로를 걸었소. 기분 좋은 바람이 옷섶으로 파고 들었재.”라는 회상에서 일상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여인의 낭만적이고 관능적이기까지 한 그 작은 행복감을 보며 외려, 한 여인에 대한 공감의 눈물, 연민의 눈물, 고통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곤 작품의 화자인 ‘나’, ‘엄마’의 여인으로서의 발걸음이 남편에 앞서 자신의 이름은 엉뚱하게도 ‘나’ 박소녀라고 어깃장을 놓는 ‘그이’‘은규’를 바라보며, 그에게 하는 고백은 정말 이 소설의 백미(白眉)이다. “당신은 내게 죄였고 행복이었네. 난 당신 앞에선 기품 있어 보이고 싶었네. ”, 그리고 “당신은 내 비밀이었네. ~ 中略 ~ 당신은 급물살 탈 때마다 뗏목을 가져와 내가 그 물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는 이였재. 나는 당신이 좋았소.” 엄마가 간직했던 이 소박하고 절절하고 애틋한 사랑에서, 독자인 나, 누군가의 자식인 나는 당신을 행복하게 해준 사랑이 있었음에 진정 위로를 받는다.  그럼에도 당신은 엄마이기만 하면 되었고, 당신의 행복에 대해선 더더욱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나 밖에 모르던 나를 더욱 용서하기 어렵게 만든다.

선산에 있는 당신의 묘 자리를 보고 당신이 호소하는 안타까움에서 차마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게 한다. “죽어서도 이 집 사람으로 있는 것은 벅차고 힘에 겹네. 마음을 달래보려 노래를 부르며 풀을 뽑아주고 자리를 펴고 해가 저물 때까지 앉아 있어보기도 하고 그랬는디 마음이 안 붙어라오.” 엄마, 당신의 영혼만큼은 훨훨 자유롭게 놓아드리겠습니다. 산자들의 욕심, 자식이란 태곳적 이기심을 버리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나라에서, 장미묵주를 사달라던 엄마, 바로 로마의 바티칸성국과 그곳의 묵주, 비로소 피에타의 성모상를 바라보며, 엄마를 부탁하는 ‘너’의 속죄의 속삭임이 엄마의 영혼에 진정 닿았을까... 엄마를 진정 위로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가족을 위한 세상의 고난을 오직 작고 지친 몸으로 싸안고 사라진 엄마가 바로 당신 아닌가요? 우리들도 가야 할 그 곳.

어린 시절 열이 펄펄 끌어 올라, 세상이 온통 혼돈 그 자체였던, 이미 의식을 놓아버린 내 곁에 열을 내리느라 부지런히 물수건을 번갈아 올려놓던 엄마의 애타는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는 이렇게 항상 하염없이 삶의 저 밑바닥에 내가 뒹굴 때면 한 없이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보듬어 안아주셨지.‘지헌’이의, ‘형철’의 그들의 내부에 무진장 쌓여있는 엄마의 기억들이 나와 우리의 엄마와 다르지 않음에 고통스럽다...난, 여전히 엄마의 자유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자기연민에만 시달리고 있을 뿐...

작품 속 엄마의 표상이 1950년대의 피폐한 전쟁기 혼인여성으로 그 환경이 시대적 간극을 뛰어넘기에는 오늘의 그것과는 사뭇 다름이 있다. 다만, 변치 않는 자식과 엄마라는 생물학적 동체와 분리의 고통, 그로 인한 은혜와 배신의 죄의식은 21세기 오늘에도 우리를 따라다닌다. 이 작품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격렬한 감정의 물살을 좌우하며 눈물 콧물을 쏙 빼 놓고, 결정적으로 한 여인으로서의 비밀에서 삶의 행복을 드러내어 어떠한 이의도 잠재워버리는, 오히려 감성적 동조를 이끌어내기까지 하는 점은 가히 탁월한 이야기꾼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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