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속의 가을 피닉스문예 5
바진.율리오 바기 지음, 장정렬 옮김 / 갈무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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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문학적 향취도 그렇거니와 좀 독특한 사연을 지니고 있어, 작가와 작품의 취지를 간략히 소개하는 것도 의의가 있을 듯하다. 작가는 루쉰을 비롯한 꿔머로, 마오뚠, 라오서, 차오위와 함께 중국현대문학의 6대 거장인‘바진(巴金)’으로 한야(寒夜), 가(家)등의 걸출한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소개하는 작품은 그의 나이 스물여덟살인 1932년 5월 발표한 작품이다. 이러한 작품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소개된 연유는 그의 말의 평등, 인류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다는 국제 언어인 에스페란토어를 통한 한국과의 인연이 계기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국내번역본인 도서출판 갈무리에서 2007년11월 출간한 이 작품은 중국어가 아닌 에스페란토로어로 번역된 작품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봄 속의 가을(原題: 春天里的秋天)』 이라는 제목은 평생 에스페란토어로만 작품 활동을 하였던 헝가리 작가 ‘율리오 바기(Julio Baghy)’의 작품 『가을 속 봄』에서 차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제목의 ‘봄’이 상징하는 것은 청춘남녀들의 순박한 사랑, 근대성, 자유를, 그리고 ‘가을’은 당시 중국의 전근대적 봉건체제와 혼란스러운 사회상, 즉 전통적 윤리규범의 족쇄와 가정 안에서의 가부장 전횡,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은 1930년대 중국 남부지역을 배경으로 한 100여 쪽 남짓한 단편소설이다. 그러나 1932년, 1978년, 1980년에 각기 별도로 쓰인 작가의 말이 있는데, 이 글 또한 한 편의 에세이고 소설 같은 아름다움이 묻어있어 작품의 본성과 연계되어 읽히는 재미가 있다.
특히 1932년 작가의 말에는 작품을 쓰게 된 직접적 계기가 한 편의 서정시처럼 소개되고 있는데, 중국남부 지역을 우연히 여행하다가 지역의 벗으로부터, 만나달라는 한 여성 독자의 집을 방문하게 된 정황을 말하고 있다. 젊은 아가씨였는데, “울음 같은 여린 웃음”을 지었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소설의 본문에 돌입하기도 전에 그만 홀딱 빠져버리게 한다. 

부모의 승낙 없는 청춘남녀의 결혼은 물론 자유로운 연애조차도 속박되던 엄격한 가부장적 권위가 지배하던 사회에서의‘린’이라는 청년, 그리고 ‘용’이라는 아가씨, 두 젊은 남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이 매 장마다 절절한데, 용의 표정마다에 사랑의 변화를 걱정하는 린의 “봄비가 될지 가을비가 될지 나는 몰랐다.”라는 조바심은 요즘에는 경험하기 힘든 순박한 사랑의 모습이다.

다소 패배적 의식과 용기를 지니지 못한 유약한 심성의 청년‘린’은 아마 당시 外勢(일본)에 시름하고 이데올로기 전환의 진통, 전근대와 근대가 마주치는 침울한 중국의 사회분위기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이에 비하면 “핏빛처럼 붉은 포도주와‘그레타 가르보’의 영화를 좋아하는”처녀‘용’의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은 일견 대담하고 성숙한 의식의 소유자로 보여 진다. 

이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와 평행하게 달리는 실연으로 자살한 형에 얽힌 편지글은 작품이 고발하려는 당시 결혼풍속에 대한 불합리성을 풍성하게 한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이 결실을 맺기에는 애초 가능치 않다는 암시가 지속되고, 그러한 가운데 전개되는 사랑의 행복에 취한 열정과 몸짓들은 더욱 애잔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근대적 도덕을 설교하는”신문사 편집장인 친구‘슈’의 현실적 조언이 양념처럼 개입하는데, 이러한 요소들을 보면서 소설이란 시대성과 떼어놓고 말 할 수 없음을 더욱 확실하게 느끼게도 된다.

아버지의 의견을 거역하지 못한‘용’이 고향으로 떠나면서 이 작품은 위기와 절정을 동시에 맞이하게 되는데, 이 염세적 청년이 하는 말, “네겐 이미 가을이 와버렸어. 이 가을은 나에게 꽃을 주지 않고, 오직 비만, 내 마음을 산산이 부수는 빗방울만 가져다주는구나!”하는 독백에는 불가항력의 좌절이 담겨 그 비극적 종말을 잉태 한다. 

요즘의 소설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시대성과 순박한 사랑이 아름다운 표현들과 고전적 신중함을 담고 있어 자못 흥미로운 독서가 되게 한다. “가을 같은 비가 내렸지만, 봄바람에 흩날리고 있답니다.”하는 이 문장은 왠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 같은 아스라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읽는 내내 예전의 청춘으로 돌아간 듯한 설렘이 따라다닌 포근한 작품이었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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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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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이라 불리는 오늘의 사람들은 가까이는 자국의 소외된 약자들에서 기아와 질병에 무력하게 노출된 저개발국의 사람들, 전쟁의 참화로 죽음의 공포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홍수처럼 쏟아내는 미디어 매체들의 전쟁과 재해, 기아로 일그러진 참혹한 이미지들이 우리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그 결과로 어떤 행위로 이어지기는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대중에게 전달하는 목적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수전 손택’이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국의 독자들에게’ 별도로 부탁하는 이 문장은 이 저술의 궁극적인 제안과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전쟁의 잔혹함과 참담함, 추악한 처형의 모습 , 죽음을 앞둔 사람들, 빈곤과 절망이 짙게 묻어난 사람들 등등을 담고 있는 이들 충격적인 이미지가 지니는 본질적 속성과 의미의 성찰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들을 섬세하고 적나라하게 통찰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전쟁사진작가라 할 수 있는 ‘로저 펜턴’의 1855년 크림전쟁의 기록사진에서부터 현대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이 지켜본(보도된)최초의 전쟁인 스페인내전(1936~39년), 급기야 텔레비전이라는 영상기술의 발달로 곧바로 죽음과 파괴의 모습을 가정의 코앞에서 보게 된 베트남 전쟁 등 일련의 전쟁 이미지들의 약탈적 속성과 즐기는 오락거리의 일부가 되기까지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현대적 경험들을 소개한다. 이런 이미지들을 보고 사람들은 어떤 반응들을 보여 왔을까?

타국에서 벌어지는 이 비열한 전쟁과 참혹상에 명목상 관심으로, “끔직한 일이군!”, 그리곤 잠간의 연민을 보내지만 곧 잊혀지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자국이거나 당사자 관계에 있을 경우에는 어떨까?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재현 된 데에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또한 “자신들의 고통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으로 보여 지기를 원한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한다.” 결국 미디어들이 전달하는 전쟁과 빈곤의 현장을 보여주는 고통 받는 이미지들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욕망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수단인 ‘사진’의 본질적 고찰을 통해 고통의 이미지들이 어떻게 표현되고 전달, 해석 되었는지에 대한 관념이 이 저술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는데, 신속, 간결하게 기억 할 수 있다는 사진의 장점으로부터 객관적 공인, 현실의 기록이라는 현실증명의 특성,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자체에 이미 구도를 잡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로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배제한다는 것의 다름 아님을 지적함으로서, 사진의 연출성을 통찰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진작가들의 저널리즘적 성실성의 제고와 발달된 영상기술이 적용된 베트남 전쟁에 이르러서야 연출된 전쟁사진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사진의 본성적 측면보다 이를 사용하는 관점은 ‘진실’이라는 면에서 보다 우리들의 양심과 내면을 돌아보게 한다.

신문지면이 되었든 TV가 되었든 뉴스가 소위 ‘전 세계’라는 어법으로 말하는 전 세계는 “세계적 이기는커녕 지리적 관심여부로나 아주 국한된 장소”일 뿐이며, 몇 개만 추려져 “선택된 전쟁들 속에서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가 아닌가 하고 항변한다. 이러한 편향적이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중심적인 관점은 왜곡된 믿음을 조장하는데, 일례로서 “빈곤에 찌든 에이즈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일가족의 모습을 통해”,“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들”거나,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며,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 여 년 묵은 관행을 오늘에도 그대로 이어받은 서구의 오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전쟁의 참사나 빈곤의 고통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대중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부추기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변하기 쉬운 싸구려연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들이 이라크,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등지에서 날아온 이미지들에 보이는 반응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사람들이 잔악한 장면이 포착된 장면의 사진에 보이는 반응 또한 인간의 수치스런 심연을 보게 하는데, 실제로 발생한 죽음을 포착한 도로 한 복판에서‘처형당하는 베트콩 포로’의 사진이 수십 년 째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은 이 사진이 보여주는 인간의 추악함에 대한 제거로서가 아니라 공동의 방관자로서 즐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집단린치를 가하여 살해한 후 나무에 매달고선 그 앞에서 흥겨워하는 백인들의 파티 장면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행위는 고통의 유대로서가 아니라 흑인 희생자들의 이미지를 둘러싼 대중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부추기고 영혹(佞惑)화하려는 야만적 본성의 한 측면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호기심 어린 행동을 보이는 예는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비근하게 목격할 수 있는데, 끔찍한 교통사고 현장을 지날 때 차의 속도를 늦추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음증적 호기심과 뭔가 소름끼칠 만큼 섬뜩한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과 다름 아닌 것이다.

오늘의 세상은 이미지가 흘러넘치고 그래서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특정한 관심을 유발할 특권적 이미지가 존재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있다. 이젠 의식을 더 강렬하게 때리는 뭔가가 아니면 붕괴된 감수성을 깨울 수가 없다. 보다 선정적이고 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탈레반이 한 무고한 동포를 살해하는 동영상이 무차별적으로 떠다닌다. 살해당한 사람의 미망인과 가족이 고통 받지 않을 권리는 대중들의 알 권리 충족과 충돌한다. 그러나 그 알권리의 본질은 무엇일까? 알아서 어떤 행위로 이어질 것인가? 마치 일종의 스너프 필름처럼 취급되는 오늘의 현실은 “악의와 비타협적 태도에 맞서려면 이런 고통은 견뎌내는 것도 가치가 있다”는 파렴치함이 아닐까?

지나치게 자극 받은 현대인들의 정신은 이미 분별력이 무뎌져 무감각의 상태에 빠져있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신문과 TV,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전쟁, 범죄, 절도, 호색, 고문, 사악한 행위, 잔악 행위가 철철 넘쳐흘러대는 뉴스와 이미지들은 사람들의 무감각을 재촉한다. 그래서 이미지들은 거대화 되고,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이내 사람들은 불가항력이라는 결론을 내리곤 무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가벼운 연민을 느끼고, 우리는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며, 자신의 무능력뿐 아니라 무고함까지 증명해 주는 셈이 되어 위안을 갖는다. 결국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연민의 감정이란 곧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그 연민의 속성이란 것은 이같이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에는 도덕적으로 모자란 상태에 남아있기가 훨씬 어려울 정도로 이미지가 엄청나게 쌓여있어, 우리에게는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없다.”

결국 오늘의 우리들은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보다 진지한 이해와 사유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가까이는 이웃, 그리고 우리주변의 약자, 알지 못하는 지구촌 어디선가에서 시름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통의 공감과 연민의 실천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사유와 반성의 독서가 되었다.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는 ‘수전 손택’여사의 충고가 가슴깊이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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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워크 - 원죄의 심장,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3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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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블러드 워크(Blood Work)’는 채혈, 심장이식수술 등의 본래의 의미를 갖는다. 작품 속 주인공인 전직 FBI요원‘매케일렙’역시 심장질환으로 은퇴하고, 천우신조로 심장이식수술을 통해 생명을 연장한 자이다. 그러나 소설 초입에 매케일렙의 목소리를 빌어 작가는 다의(多意)성을 부여한다. FBI연쇄살인 전담반 요원들이 자신들의 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피의 작업'이라는, 바로“피로 진 빚은 반드시 피로 갚아야 했다.”고 들려주면서 말이다.

이 작품은 이처럼 다양한 암시와 각종의 복선이‘마이클 코넬리’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친절할 만큼 많이 등장한다.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치밀하고 정교한 얼개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다. 또한 상당히 얄궂은 상황으로 시작케 되는데, 악을 규정하는 데에 어떤 도덕적, 철학적 주저함이 없는 것도 투박한 만큼 독특하다.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준 심장이 강도의 살인으로 희생된 여인의 것이라는 점은, 악(惡)의 행위가 살인범과 악을 쫓던 자신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아이러니이다. 매케일렙의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은 그 악인이 절명(絶命)시킨 여인의 심장 아닌가. 하는 감성적이고 다소 신비적 결론이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게 하고 있는 것도 사실 색다른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프롤로그의 단 두 쪽에 표현되는 슈퍼마켓의 강도 살인 장면은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듯, 작품을 모두 읽고 난후에도 영상으로 남아있을 정도로 강렬하다. 처절하거나 잔혹한 묘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피살되기 직전의 평온한 한 여인의 미소와 순간의 차가운 철의 느낌, 그리고 아득히 내리는 적막과 암전의 그 극단적 대비가 주는 선명함, 생과 사, 선과 악의 갈림길이 주는 찰나의 공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무능한 경찰국 형사들과 FBI, 보안관서 등 수사관들의 영역싸움, 범죄 억제제도로서의 삼진제도가 오히려 강도행위를 더욱 극악하게 하는 원인제공이 되어버렸다거나, 의료정보시스템의 보안부실 등 사회 생태계의 문제를 슬쩍 제기하기도 하며, 점진적으로 사건의 중앙부로 접근하는 천연덕스런 작가의 역량은 리얼리티를 제고하는데 일조한다. 그리고 악을 쫓는 행위의 한편에‘그래시엘라’라는 메케일렙 심장의 주인인 피살된 여인의 언니를 등장시켜, “아주 오랫동안 내 속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에 이젠 빈 곳을 채우고 싶어요.”하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 삶의 희망을 찾으려는 고독한 은퇴수사관의 모습이 삶의 균형을 조절케 하고, 사랑 후에 “아무것도..., 그냥 행복해서 그래요, 그뿐이에요.”하는 진정 사랑의 기쁨이 전달되는 하나의 문장에서 작가의 저력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단순한 노상강도 같았던 사건이 사회적 권위에 콤플렉스를 지닌 살인자로 또는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청부살인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으로 확장되는 과정은 독자를 미궁에 빠뜨렸다가 다시 건져내주고, 또 다시 오리무중으로 내던지곤, 슬며시 단서와 암시로 현혹시키며, 살인자의 실체로 안내한다. 어떤 의미에서 매케일렙에게 커다란 은혜를 베푼 자, 그를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악과의 대면을 향한 속도가 심장을 무겁게 느끼게 할지도 모른다. 악에 잠재한 고립, 그 고립의 다른 표현인 고독이 깊게 내재해있는 은퇴 수사관, 메케일렙이 발견하는 신뢰와 사랑이 이 작품의 또 다른 얼굴로 다가오기도 한다. 재미, 스릴, 사색... 다양한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인간의 깊고 근원적인 본질을 탐색한 소수의 뛰어난 스릴러 작품 중 하나로 불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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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오바마 북클럽 1
조지프 오닐 지음, 임재서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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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도 열정도, 낙심도 절망도, 삶의 어느 순간순간마다 다가오는 느낌들에 감정의 과장된 기복을 표현하지 않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그 기점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에 그다지 기대할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기쁘다고 외치지도 슬프다고 쳐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화자인 ‘한스 판 덴 부르크’안에 잠복해 있는 운명론적 견유주의는 내겐 공감을 넘어선 일체감을 형성할 정도였다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선‘프루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여정이고, 관조적인 내면의 일기 같아서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소설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크리켓’이라는 과거 영연방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스포츠가 주요 제재이고, 화려한 소비문화와 현란한 욕망의 무대를 기대케 하는‘뉴욕’을 배반하고,‘한스’의 일상에 있는 갈색과 흑색의 피부를 가진 이주민들의 단조로운 모습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독서를 어렵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수다스런 치장과 감각적인 형용사들이 배제된 담백하고 일관된 아웃사이더들의 삶에서 오히려 치열한 삶의 의욕과 화해와 화합의 희망을“독선적 망상”에 빠져있는 거대제국에 뿌리려 하는 작은 행동들을 발견하는 것은 소박한 희열을 안겨주기도 한다.
변호사인 영국인 아내의 미국시장 진출을 위한 이주로 뉴욕생활을 하게 된 네덜란드인‘한스’의 이야기다. 금융투자분석가로 낯선 이국의 환경에서 그런대로 금융가에서 인정받는 애널리스트로 직장생활을 꾸려가는 서른여덟 살의 남자, 그에겐 친구도 없고 이렇다 할 여가활동도 없다. 아내와 아들이 있는 가정에 길들여 있는 그런 소박하고 평범한 남자.

그의 시선에 들어온 랜돌프 워커공원에 흰색 유니폼을 입고 크리켓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고향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항상 운동장에 아들의 시합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시고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왠지 애틋한 사랑을 기억케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게 한다.

‘한스’의 일상 속에서 스쳐가는 사물과 사건에 이어지는 기억들, 시간과 공간을 마구 거슬러 떠오르는 회상들, 거기에는 어머니의 배려와 사랑이 담긴 표정이 있고, 아들 제이크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진지한 의지와 소망이 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 실망과 부당함의 통증도 있고, 이민자의 스포츠로 치부되는 크리켓을 미국사회에 스며들게 하려는 트리니다드 사람‘척 램키순’의 열망에 대한 회의도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대한 결과는 우리의 노력과 관계없이 결정되며,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은 떠나가기 마련이고, 해야 할 말은 끝끝내 할 수가 없고, 온 세상이 지리멸렬함 투성이고,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한스 ’의 운명론은 마치 작품전체를 아우르는 예언 같다.

항상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한스’의 아내 ‘레이철’이 쏟아내는 독설처럼 “병든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나라, 대중이나 지도자가 미국과 세계뿐만 아니라 광신적인 기독교 복음주의 덕분에 우주에 대한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있는 나라” 한마디로 “‘악성 정신병에 걸린’비현실적인 나라”에서 자신들의 자아에 상처를 입지 않고 꿈을 꾸려하는 이민자들의 비릿한 삶의 모습들이 흔들거린다.
이처럼‘한스’의 기억의 여정에는 미국의 배타적 독선이 빚어낸 망상과 이민자들의 기대어린 꿈이 어울려 있고, 어머니와 아내, 아들, 그리고 친구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흐른다. 그리곤 이민자들의 마음 저 밑바닥에 흐르는 어린 시절 고향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에 대한 깊은 향수가 서려있다.

그런가하면 뉴욕에서의 운전면허 신청을 위한 외국인에 대한 하찮은 인간들이 행사하는 부당하고 냉담한 권력의 메스꺼움에 대한 일화에서부터, 떠나버린 아내로 인한 극도의 무감각으로 인생자체가 해체되었음을 느끼는‘한스’에서와 같이 그의 촘촘히 엮인 내면의 기억들, 세밀한 심리의 묘사들을 좇는 진지한 즐거움이 있다.‘한스’가 털어놓는 작은 기억의 기록들에서 잃어버렸던 우리들의 기억을 찾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소설의 형식이 가져다주는 빼어남일지도 모르겠다. 이주민들의 땅(nether-lands)이란 은유적 의미도 지닌‘네덜란드’는 뉴욕의 또 다른 얼굴을 우리에게 드러내준다. 절정도 리듬감도 어떤 굴곡도 느낄 수 없는 문장으로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이 엄습하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 우리들 마음을 커다랗게 진동케 한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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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하는 테크놀로지 - 과학기술학자들 '기술'을 성찰하다
손화철 외 지음 / 동아시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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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우리들은 과학기술의 존재 없이 밥알 한 톨이라도 먹을 수 있을까? ‘과학기술’에 대한 어떠한 인식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이처럼 그 존재 없이는 생존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바로 기술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어느덧 공기와 같은 인간존재의‘배경’이 되어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긍정적 혜택만 주는 것은 아니며, 생명의료 윤리의 문제에서부터 인간성의 훼손, 기술에의 종속이라는 자유의 박탈 등 부정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독특하게도『‘욕망하는’테크놀로지』라는 제목처럼, 과학기술이 마치 생명체라고 주장하는 듯한, 이 저술을 구성하는 28편의 과학기술시론은 인간과 기술, 기술과 사회, 기술의 현재와 미래의 관계라는 성찰을 통해 과학기술의 정체와 특징을 탁월한 이론과 예화로 전달해 주고 있다.
기술은 “인간이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대하는 태도”라고 정의하였던‘하이데거’의 말처럼, 형체가 있는 인공물로서, 이것이 만들어내는 무형의 서비스와 노하우, 그리고 인공물과 같은 대상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기초가 되는 공학 지식을 의미하는 기술에 더해, 인공물이 만들어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꾸려는‘의지’까지를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기술은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바꾸려는 의지가 각인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오늘의 기술들은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거대한 기술시스템을 형성하고 있으며, 한 두 사람의 의지만으로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으며, 결국 기술은 그 자체의 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하고, 자체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기술철학자‘자크 엘륄’의“현대 기술이 자율적이 되었다!”는 상징적 표현처럼 “인간이 기술을 발전시키고 사용하는 것이 맞긴 한데, 발전시키지 않을 자유도, 사용하지 않을 자유도 인간에게 없다면 인간은 기술의 주인인가? 하인인가?”하는 질문이 절로 터져 나올 밖에 없는 것이다.

근대이후, 인간의 오만이 만들어낸 자연의 지배 욕구는, 그 자연에 인간 자신마저 포함되어 스스로 지배의 대상이 된 꼴이 되고 말았다. 과학기술을 통한 눈부신 성취 뒤에는 공허함과, 권태만이 남아 있을 뿐이고, 스스로 대상으로 전락했으니 주체는 없어지고 의지만 남은 셈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기술시스템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거대 기술시스템은 효율성의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여기에 인간의 가치나 필요는 효율성의 논리 앞에 무력하고,“인간이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인정 할 자유밖에 남지 않았.”음의 다름 아닌 것이다.

이러한 기술과 인간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은 기술결정론, 사회결정론, 사회구성주의론 등 과학기술학 및 기술철학자들의 다양한 통찰들을 기반으로 하여 기술의 윤리와 도덕성, 기술의 정치성, 기술의 인간사회에 대한 영향과 책임에 대한 화려한 사색이 풍부하게 수 놓여 지고 있다. 일례로 기술철학자 ‘랭던 위너’의 기술의 정치성에 대한‘뉴욕 존스비치 공원’진입로에 놓인 고가도로가 흑인이 이용하는 버스의 통행을 막기 위해 낮게 설계되었다는 예화나, 숙련노동자의 노조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전자동 수치제어 공작기계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지적은 기술의 새로운 범주로의 확장된 이해와 시각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또한 세탁기와 같은 가사기술이나 휴대전화가 과연 인간을 보다 자유롭게 한 것일까? 하는 질문의 답변 역시 낭만적인 긍정만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기대행동의 패턴을 변화시킴으로써 새롭게 인간을 구속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부지기수로 등장하는데, 체외수정의 생식보조기술이나 피임기술 역시 여성을 출산이라는 우연적 위험에서 해방시키기는커녕, 사회적 맥락을 달리함으로서 기술을 사용하라는 압력에 시달리게 하는 것과 같이 암묵적으로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는 전제에 지배당하게 하고 말았다는 것과 같다.

특히 기술후발국으로서 세계 경쟁시장에서의 생존이라는 명분하에 기술개발에 윤리적, 법적, 사회적 영향은 물론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는 한국의 끔직한 현실을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 기술의 잠재적 혜택만 부각하고 불확실한 위험은 축소하거나 무시하며,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거나, 과학기술 발전의 당위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면 국익을 무시하는 반역행위처럼 취급되는 후진적 현실이 궁극에 얼마나 막대한 폐해를 야기하는지 우리 과학기술의 현주소를 반성케도 한다.

기술의 발전이 인류에게 편리와 자유의 확장, 그리고 엄청난 물질적 혜택과 성취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술발전의 신화만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기술은 인간의 자율성을 넘어선다고 경고한다. 인터넷이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선사하였지만, 중독과 같은 그 자유에 도리어 묶이게 하는 측면도 있다. 나아가 최근의 “언제 어디에나 동시에 존재”한다는 ‘유비쿼터스’의 환경은 우리가 피부로 느끼거나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확산된다. 아마 ‘조지오웰’의 『1984년』에 등장하는‘빅브라더(Big Brothers)’들이 통치하는 ‘제레미 벤담’의 전자‘파놉티콘’의 감시사회로의 이행도 우려 할 수 있는 것과 같이, 기술이 제공하는 기회만을 강조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동반되는 다양한 문제에 꼼작 없이 갇히는 신세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 저작은 기술의 철학적,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조명된 화려한 통찰들로 오늘의 기술사회에 대한 냉정하고 진지한 성찰을 가능케 한다. 과학기술학에 낯선 독자들에게조차 익숙한 언어로 새롭고, 다채로운 이론적 배경과 지식으로 무장하여 지혜롭게 과학기술의 면모를 이해시키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 지상주의나 이와는 반대로 사회결정론과 같은 편협된 주장을 페기하고, 균형된 시각을 지니기 위한 노력의 흔적들이 더욱이 기술철학과 과학기술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접하는 대중에게 고마운 저술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기술이 자체의 힘으로 도덕적인 사회를 만든다거나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과학기술자, 엔지니어, 사회집단을 향한 기술의 책임에 대한 교훈들은 더 이상 다루기 쉬운 도구가 아닌 기술에 대한 명철한 통찰 이상의 조언이랄 수 있다. “인간을 닦달하는 테크놀로지”, 존재자 중심의 사유가 극에 달한 것이 바로 현대기술이라는 하이데거의 지적은 어찌 보면 인간소외의 미래사회를 향한 우울한 예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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