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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ㅣ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현대인이라 불리는 오늘의 사람들은 가까이는 자국의 소외된 약자들에서 기아와 질병에 무력하게 노출된 저개발국의 사람들, 전쟁의 참화로 죽음의 공포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홍수처럼 쏟아내는 미디어 매체들의 전쟁과 재해, 기아로 일그러진 참혹한 이미지들이 우리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연민을 불러일으키며, 그 결과로 어떤 행위로 이어지기는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대중에게 전달하는 목적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수전 손택’이 “전쟁의 본성, 연민의 한계, 그리고 양심의 명령까지 훨씬 더 진실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한국의 독자들에게’ 별도로 부탁하는 이 문장은 이 저술의 궁극적인 제안과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전쟁의 잔혹함과 참담함, 추악한 처형의 모습 , 죽음을 앞둔 사람들, 빈곤과 절망이 짙게 묻어난 사람들 등등을 담고 있는 이들 충격적인 이미지가 지니는 본질적 속성과 의미의 성찰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대해 느끼는 사람들의 감정들을 섬세하고 적나라하게 통찰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전쟁사진작가라 할 수 있는 ‘로저 펜턴’의 1855년 크림전쟁의 기록사진에서부터 현대적인 의미에서 사람들이 지켜본(보도된)최초의 전쟁인 스페인내전(1936~39년), 급기야 텔레비전이라는 영상기술의 발달로 곧바로 죽음과 파괴의 모습을 가정의 코앞에서 보게 된 베트남 전쟁 등 일련의 전쟁 이미지들의 약탈적 속성과 즐기는 오락거리의 일부가 되기까지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현대적 경험들을 소개한다. 이런 이미지들을 보고 사람들은 어떤 반응들을 보여 왔을까?
타국에서 벌어지는 이 비열한 전쟁과 참혹상에 명목상 관심으로, “끔직한 일이군!”, 그리곤 잠간의 연민을 보내지만 곧 잊혀지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자국이거나 당사자 관계에 있을 경우에는 어떨까?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재현 된 데에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또한 “자신들의 고통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으로 보여 지기를 원한다.” 즉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다른 어떤 사람의 고통에 견주는 것을 참지 못한다.” 결국 미디어들이 전달하는 전쟁과 빈곤의 현장을 보여주는 고통 받는 이미지들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욕망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수단인 ‘사진’의 본질적 고찰을 통해 고통의 이미지들이 어떻게 표현되고 전달, 해석 되었는지에 대한 관념이 이 저술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는데, 신속, 간결하게 기억 할 수 있다는 사진의 장점으로부터 객관적 공인, 현실의 기록이라는 현실증명의 특성,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자체에 이미 구도를 잡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로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배제한다는 것의 다름 아님을 지적함으로서, 사진의 연출성을 통찰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진작가들의 저널리즘적 성실성의 제고와 발달된 영상기술이 적용된 베트남 전쟁에 이르러서야 연출된 전쟁사진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사진의 본성적 측면보다 이를 사용하는 관점은 ‘진실’이라는 면에서 보다 우리들의 양심과 내면을 돌아보게 한다.
신문지면이 되었든 TV가 되었든 뉴스가 소위 ‘전 세계’라는 어법으로 말하는 전 세계는 “세계적 이기는커녕 지리적 관심여부로나 아주 국한된 장소”일 뿐이며, 몇 개만 추려져 “선택된 전쟁들 속에서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가 아닌가 하고 항변한다. 이러한 편향적이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중심적인 관점은 왜곡된 믿음을 조장하는데, 일례로서 “빈곤에 찌든 에이즈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일가족의 모습을 통해”,“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만들”거나, “대중에게 공개된 사진들 가운데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찍힌 사진들이며, 저널리즘의 이런 관행은 이국적인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던 1백 여 년 묵은 관행을 오늘에도 그대로 이어받은 서구의 오만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전쟁의 참사나 빈곤의 고통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대중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부추기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변하기 쉬운 싸구려연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들이 이라크,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등지에서 날아온 이미지들에 보이는 반응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사람들이 잔악한 장면이 포착된 장면의 사진에 보이는 반응 또한 인간의 수치스런 심연을 보게 하는데, 실제로 발생한 죽음을 포착한 도로 한 복판에서‘처형당하는 베트콩 포로’의 사진이 수십 년 째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은 이 사진이 보여주는 인간의 추악함에 대한 제거로서가 아니라 공동의 방관자로서 즐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집단린치를 가하여 살해한 후 나무에 매달고선 그 앞에서 흥겨워하는 백인들의 파티 장면을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행위는 고통의 유대로서가 아니라 흑인 희생자들의 이미지를 둘러싼 대중들의 관음증적 욕구를 부추기고 영혹(佞惑)화하려는 야만적 본성의 한 측면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호기심 어린 행동을 보이는 예는 우리들의 일상에서도 비근하게 목격할 수 있는데, 끔찍한 교통사고 현장을 지날 때 차의 속도를 늦추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음증적 호기심과 뭔가 소름끼칠 만큼 섬뜩한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욕망과 다름 아닌 것이다.
오늘의 세상은 이미지가 흘러넘치고 그래서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특정한 관심을 유발할 특권적 이미지가 존재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있다. 이젠 의식을 더 강렬하게 때리는 뭔가가 아니면 붕괴된 감수성을 깨울 수가 없다. 보다 선정적이고 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탈레반이 한 무고한 동포를 살해하는 동영상이 무차별적으로 떠다닌다. 살해당한 사람의 미망인과 가족이 고통 받지 않을 권리는 대중들의 알 권리 충족과 충돌한다. 그러나 그 알권리의 본질은 무엇일까? 알아서 어떤 행위로 이어질 것인가? 마치 일종의 스너프 필름처럼 취급되는 오늘의 현실은 “악의와 비타협적 태도에 맞서려면 이런 고통은 견뎌내는 것도 가치가 있다”는 파렴치함이 아닐까?
지나치게 자극 받은 현대인들의 정신은 이미 분별력이 무뎌져 무감각의 상태에 빠져있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신문과 TV, 미디어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전쟁, 범죄, 절도, 호색, 고문, 사악한 행위, 잔악 행위가 철철 넘쳐흘러대는 뉴스와 이미지들은 사람들의 무감각을 재촉한다. 그래서 이미지들은 거대화 되고,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이고, 이내 사람들은 불가항력이라는 결론을 내리곤 무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가벼운 연민을 느끼고, 우리는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며, 자신의 무능력뿐 아니라 무고함까지 증명해 주는 셈이 되어 위안을 갖는다. 결국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연민의 감정이란 곧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그 연민의 속성이란 것은 이같이 어느 정도 뻔뻔한 반응일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날에는 도덕적으로 모자란 상태에 남아있기가 훨씬 어려울 정도로 이미지가 엄청나게 쌓여있어, 우리에게는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없다.”
결국 오늘의 우리들은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나가는,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보다 진지한 이해와 사유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이 될 것이다. 가까이는 이웃, 그리고 우리주변의 약자, 알지 못하는 지구촌 어디선가에서 시름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통의 공감과 연민의 실천에 대해 되돌아보게 하는 사유와 반성의 독서가 되었다.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는 ‘수전 손택’여사의 충고가 가슴깊이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