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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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더듬는 현대문명의 유치찬란함과 그 속에서 인간과 우주의 숙명적인 비애를 꿈꾸듯, 그러나 온전한 자기의지의 확신에 찬 존재로서의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그러나  단조롭게 되풀이되는 죽음의 의식이 다가오듯이‘검게 변하는 태양’이 삶을 너무 터무니없고 진부하게 만들어버린다. 삶과 죽음의 진실은 진정 무엇일까?  알게 된 바로 그 순간에야, 앎을 끝내는 것일까?

역행성기억상실증의 주인공 얌보(보도니)를 통해“늙은이로 태어나서 아기로 죽은 피피노씨”를 상기하듯 짙게 드리운 안개 속에서 잃어버린 인생초년의 경이를 다락방에 “가만히 틀어박혀 순수한 기호들을 해독”한다. 의미론적 기억, 백과사전식 기억만 존재하는 그리고 일화적 기억은 상실한 사람, 이는 과학이라는 이성에 내어준 메마른 감성의 오늘의 인류들을 빗대어 연민을 보내는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작품은 “사고, 종이기억, 그리고 OI NO∑TOI(귀향)”의 3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별의 장마다 독자들의 취향을 한껏 고려한 배려를 한듯하다. 사고의 장은 ‘올리버 색스’를 거론하며, 인간의 뇌라는 기억장치와 관련하여 무수한 원용들로 그의 해박한 지식을 백과사전처럼 뽐낸다. 여기서 작가는 그의 독특한 작법(作法) - “한 두 개면 우스꽝스럽지만 백여 개의 클리셰(Cliche)를 사용하면 그것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만남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임으로써 극단적인 진부함에서 오히려 숭고한 빛이 번득이게 된다.”- 을 통해 자전적 생애를 압축적으로 정리하고 들려주려는 인상을 준다.

둘째 장은 “프루스트는 피나무 꽃봉오리 차와 마들렌 과자를 실마리로 삼아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았다지만”하면서, ‘어떤 신비한 불꽃’을 찾아내려는 집요한 추적이 이어진다. 이“신비한 불꽃‘에 대한 암시가 이루어지지만 선뜻 이해하기 쉽지만은 않다. “어둠속으로 도망치던 가면올빼미에서”, “『난 날고 싶어』라는 음반의 광고지”에서, 그리고 다락방과 숨겨진 예배실에서의 얼굴이 후끈거리는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독서에서도 주인공이 심취해있는 뿌연 안개 속 물체처럼 선명히 다가오지 않는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설명과 같이 이 소설은 이른바 액자구조(en abime)를 취하고 있다.“이는 제논의 역설을 아직 배우지 않은 아이의 눈에 비친 무한의 모습이고, 도달 할 수 없는 목표에 다다르기 위한 경주이다.”인 것처럼 삶의 경이와 신비에의 탐험을 “이건 바로 네 이야기야(De te fabula narratur)”하며 자신의 어린 시절 일화들을 더듬어간다. 등장하는 추억어린 삽화들로부터 추억이 퇴색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작가의 모습을 보며, 괜스레 뭉클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마지막장인 “OI NO∑TOI”(The Nostoi; 귀향)에서 “내 기억이 돌아왔다"는 역설적이고 판단이 모호한 선언에 따른 철학적 사유는 “모니터에 나타나는 뇌파가 평평하다 해도 내장이나 발끝이나 고환으로 사고 작용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내 뇌가 활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직 내면의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죽음에 대한 판단을 유보시키고 있다.

“만약 내가 갑자기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그 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더없이 내밀한 지금의 삶과 비슷한 또 다른 형태의 내생이 시작될까? 아니면 아무 의식이 없는 영원한 암흑 상태로 들어가게 될까?”하고 부질없는 사유라 내치지만, “세상은 악의 지배를 받고 있어. 이 악은 여간 강력하지 않아. ~ 中略 ~ 나는 악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거야. ~ 中略 ~ 너는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니? 무엇보다 먼저, 죽음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하고 죽음에 대한 원초적 숙명을 탄식한다.

더구나 “우주종말, 우주 자체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악 중의 악이지. 우주는 죽을 운명을 타고난 거야. 이렇듯 악이 존재하는 세상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에서부터 “우리는 불운하게도 아주 영리한 존재들이라서,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어. 그러니까 우리는 악의 희생자일 뿐 아니라,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이기도 해. 환장할 노릇이지.”하며, 무정부주의자인‘그라뇰라’의 입을 빌린 어쩌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토로한다.

그가 집요하게 좆은‘릴라’, 신비로운 불꽃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일까?

“옅은 잿빛 fumifugium(연무)이 퍼지더니 현관문을 가려버린다. 나는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건듯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올려다본다. 왜 태양이 검게 변하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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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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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의 목록은 없었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날.시간.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슬픔과 재속에서의 탄생.-64쪽

나 한테 유일한 희망은 무(無)야. 난 온 마음으로 그걸 바라.-68쪽

악의 치유법은 없었다. 악의 이미지에 대한, 그들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치유법만 있을 뿐이다.-214쪽

어쩌면 세상의 파괴에서 비로소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3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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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코필리아 - 뇌와 음악에 관한 이야기
올리버 색스 지음, 장호연 옮김, 김종성 감수 / 알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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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의 저술들을 읽다보면 문득 그의 친절한 정신질환에 대한 다채로운 임상적 설명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충일함을 보게 된다. 신경생리학자, 정신의학자, 신경전문의라는 직업적 전문성이 대중에게 이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게 함에는 그가 이 저술에서 표명하는 음악에 대한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사랑,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저로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 저술에 등장하는 수없이 다양한 음악과 관련된 질병적 사례와 의학적 설명 하나 하나에서 어느 한 사례도 따뜻한 연민이 배제되어 있지 않음을 본다. 음악 발작에서 뇌 속에 울려대는 음악, 환청, 뇌벌레와 같이 지적 흥미를 유발하는 이야기에 있어서도 그의 지식과 노력이 인간을 향한 사랑임을 읽을 수 있다.

정신 질환이 외부로 표출되는 다양한 형태의 원인이 뇌의 손상이라는 점은 모두 아는 보편적 지식이다. 그러나 손상된 뇌의 영역에 대한 포괄적 지식, 즉 측두엽과 두정엽이 맞닿은 부분에 손상으로부터 시공간감각과 평형감각의 기능이 유실되고‘체외 유리경험’또는 자기상 환시(autoscopy)를 겪는다고 이야기 하는 이상의 지식이 오늘의 의학에서도 존재치 않는다. 저자는 이와 같은 영역적이고 기능적인 범주를 이해의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오히려 인간의 심성이나 감수성, 삶의 본질적 측면에서 환자들의 신비롭고 기적처럼 보이는 숭고한 노력과 능력에 관심을 할애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음악환청에 종일 시달리는 환자가 어느덧 그의 일상으로 울려대는 음악을 자신의 삶의 요소로 수용하는 정신적 승화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시각을 상실한 이들이 보이는 놀라울 정도의 절대음감 능력에서 “청각 장애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입력을 차단당한 대뇌의 청각피질 일부가 자발적으로 활성화”되어 잠재된(억제된) 음악적 소양이 발현되는 것과 같이 흥겨운 지적 잔치를 벌여주기도 한다.

이 위대한 저술의 의미를 특정한 하나의 주제로 정의하는 것이 주저되기는 하지만 일관된 흐름은 당연 우리 뇌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음악성을 인간의 본질적 요소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저술의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자아를 상실하고 있는 다양한 뇌신경 손상의 환자들이 보여주는 음악에서의 순간적인 안정과 정상적으로 보이는 행위들에서 “음악의 신경적 기초가 대단히 확고함.”을 입증하고 그래서“신경계의 상대적으로 원시적인 부위와 관련된 기억과 대뇌피질과 관련된 의식과 감수성은 서로 어떻게 연결될까?”에 대한 질문을 세세하게 파헤치고 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왼쪽 전두엽과 측두엽 부위의 손상과 더불어 기억상실증까지 가세한 환자가 서번트 재능이 급속히 발현되어 한번들은 음악을 멋지게 반복하고 나아가 즉흥연주까지 더한다면 기적인가? 아니, 평소 왼쪽 측두엽이 억누르거나 금지하고 있던 우반구의 일부 기능이 풀려나면서 활개 치는 것이다”와 같은 지식으로서의 재미는 이 책에서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윌리엄스 증후군’‘치매’에 걸려든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시선에서 ‘자아의 상실’이라기보다는 ‘자아의 보존’이라고 연민 그득한 인류에의 사랑을 볼 수 있다.

또한‘휴링스 잭슨’의 “뇌는 고정적인 표상이나 지점을 모자이크식으로 모아 놓은 정적 구조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하는 존재, 적극적으로 억압 또는 억제된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 이런 억제가 풀리면 그런 가능성을 분출하는 존재”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대뇌 가소성(cerebral plasticity)’에 대한 뇌의 신비, 인간에 대한 경외(敬畏)도 빼 놓을 수 없는 중심 주제라 할 수 있다.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이 위대한 저술은 지식의 다양성이란 차원을 뛰어넘는 21세기 고전이 될 것이다.

Tip) 이 저술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최근작인‘로아나 여왕의 신비로운 불꽃’에 등장하는 백과사전적 지식과 같은 ‘의미기억’은 모두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나, 일화성 기억은 상실한 무기력하고 분별력을 상실한 역행성기억상실증의 주인공이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에코’의 동 소설에서도 역시 ‘올리버 색스’의 저술‘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교차 소개되어 독서광들의 흥미를 자아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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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리아드 (양장, 한정판)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송경아 옮김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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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적 형식을 빌린 철학의 탄생을 보는 듯하다. 발표된 지 30여년이 지난 작품이라곤 상상키 어렵게 작가의 해학적인 조어(造語)들과 과학적 편린들은 가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물론 이들 조어와 철학적 단상, 자연과학을 빙자한 표현들이 독서의 진행을 까다롭게 하지만 그 독특한 맛이 장애로 인정치 않게 한다.

기계의 전지전능한 창조주‘트루를’과 그의 친구 ‘클라포시우스’의 우주를 방랑하며 겪어내며 들려주는 영웅담은 미래의 어느 시대를 그려내는 단순한 환상 스토리가 아니다. 이들의 천방지축같은 일화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이에 연유하는 욕망, 그리고 그 부질없음에 연민을 담고 있으며, 인간 실존에 대한 의문과 진실, 허위에 그득한 오늘의 과학적 오만에 대한 조롱과 자숙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 판타지에는“존재란 무엇인가?”하는 이 간단치만은 않은 숨 막히는 질문과 트루를의 기계(로봇)들이 하는 언어를 통해 그리스철학자 ‘파르메니데스’의 인식론적 사유가 기막히게 녹아있는가 하면 “있다”와 “없다”로 시작되는 존재의 속성, 존재와 비존재, 존재와 진리에 대한 사유, 그리고 우주의 무계획적 생성론과 같은 물리학적 사유의 기원을 마련한‘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의‘보편적 정신’론 등이 절묘하게 패러디되어 인간 정신과 우주의 법칙을 안내하고 있다.

바로 이 탁월한 작품은 소설의 탈을 쓴 철학서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것도 노골적으로 아주 쉽고 일상적인 언어로, 또한 누구나 알 수 있는 풍자와 은유의 말로 비아냥거리기까지 하면서 읊조린다. 시인, 철학자, 과학자...의 고식적이고 유치하며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오늘의 세계를 여지없이 비아냥대면서 말이다. 트루를의 전자시인이 인간(시인들)을 빈정대며 즉흥시를 읊어댄다.

『운명의 힘에 이끌려, 나는 노래하네 / 무기와 기계를, 지구의 해안에서 쫓겨나 망명한 / 거만한 인간의 무자비한 운명을....』그리곤 오늘의 詩作이 ‘영광 증폭 메카니즘’을 지나 난해성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그 허위성을 비웃어대는 것과 같은 식이다. 이 작품의 정수로 “게니우스 왕의 이야기 기계 세 대 이야기”라 함에 동의치 않는 독자는 없으리라.

위대한 창조자 트루를은 “동굴에 은거해서 명상에 몸 바치고 있는 게니우스 왕의 종종 다가오는 슬픔과 자기혐오”의 위안을 주기위해 요구된 이야기하는 세 대의 기계를 주문받는다.‘세(三)대’가 필요한 절묘한 이유와 같이 이 작품의 모든 어휘와 문단과 문장과 이야기는 보석처럼 빛나는 경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볍게 지나쳐버릴 것이 없을 정도이다.

일례를 보면, “두 가지의 지혜가 있네. 첫 번째는 행동하게 하는 지혜이고, 두 번째는 무위(無爲)의 지혜지. ~ 中略 ~ 그러므로 완벽은 모든 행동을 회피하는 데 있네. 여기서 진정한 지혜는 단순한 지성과는 다르지.”처럼 빛나는 지성의 보고로 가득 차 있는 것과 같다. 꺄~악~ 읽어가는 내내 작가의 무궁무진, 인류의 사상과 과학지식을 종횡누비며 그칠 줄 모르게 줄줄 새어나오는 촌철살인식 이야기속 에 “말문이 막혀 입을 떡 벌릴”정도이다.

이제 그 유명한 “가능한 한 가장 발전한 단계”인 ‘가가발단’이란 정규분포곡선에서 가장 우측에 자리 잡는 최고의 이성이 우주의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상상의 이야기에 집중해보자. 트루엘의 친구 클라포시우스가 급기야 찾아낸 가가발단의 이성들은 모래밭에 누어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인가? 이 질문에 그들은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반문이 주어진다. 또한 “전능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전능하다.”고 주장한다. 바로 오늘 우리 인류들의 끊임없는 지적 오만과 어리석음에 대한 일침이다. 배꼽 빠지게 즐거우면서 진지하다. 이 황당한 농담 같은 진담이 우리세계를 신랄하게 비웃어대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인류에 대한 연민을 놓치 않는 작가의 사랑이 짙게 배어있음이 이 작품을 더욱 매혹적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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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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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하게 신을 말하던 사람들이 이 길에는 이제 없다. 그들은 사라졌고 나는 남았다. 그들은 사라지면서 세계도 가져갔다.”지구의 종말이 훑고 지나갔고 죽음의 재와 잿빛 눈, 짙게 깔린 어둠만이 남아있는 황량한 겨울의 대지위에 떨고 있는 두 짐승이 여기 생존의 길을 걷고 있을 따름이다.

남자와 아이는 삶의 숨결이 멎은, 그리고 오직 생존의 본능만 남은 사람들을 피해, 양식을 찾아, 남쪽이란 존재치 않는 이상향의 행로를 걷는다.

‘앨런 와이즈먼’의『인간 없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질문인“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 가장 놀라운 존재인‘아이’가 다시 푸른 대지에서 뛰놀 수 없게 된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 뒤에 남을 것인가?”에 대한 답변처럼만 보인다.

작품은 끝없는 생존의 걸음과 마지막 인간이 뱉어내는 회의와 불완전성, 그리고 구원에 대한 사색이 이어진다. 그리고 사랑, 아름다움, 선(善)과 악(惡)에 대한 배반적인 사유와 신의 실체에 대한 구체적 탐험을 지속한다.

남자와 아이,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은 더 이상 “할 일의 목록은 없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만이 존재한다. 아니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꿈 일지도.

“때가 오면? 때가 오면 시간이 없을 거야. 지금이 그때야. 신을 저주하며 죽는 거야.”그럼 두 사람에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유일한 희망은 무(無)야. 난 온 마음으로 그걸 바라.”“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 省略 ~”에서 ‘없음’,‘부존재’이외에 무엇을 선택 할 수 있을까?

아이는 인간을 먹어야 하는 생존한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아비와 인간들을 피해 걷는다. ‘나쁜 사람들’을 피해서, 그러나 도움을 주어야 할, 서로 위로해주어야 할 인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마주칠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우리는 지금도 좋은 사람들인가요?”하고 반문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 “사람들은 늘 내일을 준비했지. 하지만 난 그런 건 안 믿었소.~ 中略 ~ 아무도 여기 있고 싶어 하지 않고 또 아무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소.”그러나 우린 종말을 향해 달음박질을 치고 있다. 결코 “수의에 덮인 지구, 황량한 지구”가 우리 앞에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는 앨런와이즈먼의 ‘푸른 대지위에 뛰노는 아이’처럼 인류의 빛, 그리고 신(神)의 현현으로 비유되고 있다. 마치 창세기의 한 구절이 묘사된 듯이 “소년 주위가 온통 빛이었다. ~ 中略 ~ 주위를 둘러봐라.~ 中略 ~ 지구의 오랜 연대기에 나오는 모든 예언자를 오늘 여기서 기린다. 네가 어떤 형식을 이야기했건 네가 옳았다.”그리고 남자의 죽음 뒤에 찾아온 사람과 그의 가족, 아비의 유언처럼, “신의 숨이 그의 숨이고 그 숨은 세세토록 사람에서 삶에게로 건네진다고."

“죽음처럼 고요하고 더 깊은 죽음처럼 검은 밤.”에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아이’에 대한 이기적 보호와 사랑에서 우린 남자의 독백처럼 “아마 아름다움이나 선 때문일 거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 신이 존재 할까? 마침내 우리가 지구에서 종적을 감추면 무엇이 남아 있을까? 마침내 “어쩌면 세상의 파괴에서 비로소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고 무(無)의 낭만적 논리성을 강변한다. 결국 이 작품은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의 한계성에 대한 애달픈 연민일 수 도 있고, 종말을 치닫는 인간의 악과 오만에 대한 경종일 수도 있다. 음울한 두 사람의 행로에서 고귀함, 아름다움, 희망의 울림이 배제되지 않고 전해져 옴을 느낄 수 있다. 노 작가에게서 우린 다소의 위로를 받는다. “슬픔과 재속의 탄생. 나한테는 네가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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