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서평단 설문 & 리뷰를 올려주세요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문장에서 마주하는 ‘너’라는 인칭(人稱)은 독자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리곤 곧이어 너라고 칭하는 이 화자(話者)는 누구일까? 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석연찮은 감정이 계속되는 것인가? 어느새 너는 곧 나로 이입되어 너의 엄마, 아니 나의 엄마에 대한 내 무지의 죄의식을 두드려 대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차린다. 작품속의 ‘너’와 소설 밖의 ‘나’를 동일시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었음이리라.

그저 당신은 나에게 엄마이기만 하면 되었다. 나를 돌봐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늘 내 편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그 자리에 있으면 되는 사람쯤으로만 알았다. 당신에 대해서, 여자인 당신의 삶에 대해서, 나에게 이해란 것 자체가 없었음을 몰랐다.

엄마를 지하철 서울역에서 잃어버렸다. 참담해하는 네 남매의 허둥댐에서 조차 현재의 엄마를 표현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자신들을 발견한다.  오늘의 엄마 모습을 알릴 수 있는 사진조차 없다. 엄마가 실종되고 나서야 기억의 밑바닥을 거닐어 그녀의 상태를 더듬는 이들에게서 바로 나의 모습을 떠올린다. 파란 슬리퍼에 드러난 퉁퉁 부어 곪아터진 발을 전달하는 목격자들의 이야기에서 조차 진실을 받아들이기 두려운, 그래서 외면하려는 너희들의 이기심에서, 자기연민에만 급급해하는 우리들의 본성을 본다.

아내와 자식, 가족의 생계에 무심하기만 했던 아버지, 그래서 억척스레 자신의 몸을 혹사하여야만 자식들을 건사할 수 있었던 엄마, 성장하여 집을 떠나보낼 때마다 겪는 회한과 고통에 지배된 엄마의 비어버린 가슴과 쓸쓸함 가득한 모습, 큰 애의 매래에 장애가 될까, 졸업증명서 한 장을 전달하기 위해 낯설기만 한 서울의 후미진 동사무소를 한밤중에 찾아 달려온 엄마, 집나간 둘째가 집을 다시 찾아 들어올 때  주저치 않게 “ 한 밤중에 바람소리에 깨면 그 바람에 문이 닫힐까봐 방문을 열고 나가서” 대문에 묵직한 돌을 괴어놓던 엄마, 글 쓰는 딸 아이이의 소설을 알고 싶어, 그 자식이 자랑스러워 타인에게 읽어 달라하여 듣던 엄마, 집 버린 남편의 밥을 하루도 빠짐없이 아랫목에 묻어두던 엄마, 자신의 건강이 나빠져 그 통증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남편의 작은 질병과 통증의 호소에 귀 기울이고, 시중을 들어주던 엄마, 그런 엄마를 잃어버렸다.

“열일곱 아내와 결혼 한 이후로 오십년 동안 젊어서는 젊은 아내보다 늙어서는 늙은 아내보다 앞서 걸었던” 그 빠른 인정머리 없고 사랑 없는 이기심이 기억조차 흐리고 상처투성이의 지친 몸뚱아리 치매 환자인 아내를 잃어버리게 했다. 매번 모시러 나가던 큰 애도, 작은 아이도 그날에는 마중 나가지 않았다. 큰 딸아이는 중국 자금성 관광을 하고 있었고, 작은 딸 아이는 자신의 세 아이들에 치여 있었다. 이들의 변명어린 일상의 자기 합리화에서 어쩔 수 없는 독립된 개체로서의 인간의 취약한 감정의 한계를 읽는다. 이들과 결코 다르지 않은 나는 속수무책의 자괴감과 화끈거리는 모멸감이 훅하고 나에게 덮쳐오는 것을 느낀다.

왜 엄마가 희생하는 삶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것일까? 왜 그녀의 상실에서야 비로소 그녀의 슬픔과 고통이 이해되는 것일까? 왜, 왜, 엄마는 그 속박된 삶에서 조차 행복할 수 있었다고 믿고 싶은 걸까? 병든 노구(老軀)를 끌고 자식들 힘들다고 먼 거리를 올라오던 엄마, 엄마의 두통이 온몸을 갉아먹어대도 알지 못하던 자식들, 쌀쌀맞고 건조하게 대하기만 했던 옹졸한 안부전화, 이 모든 무심함과 무지와 불성실과 에고가 죄스럽다. 바로 이 순간 뭉클하게 응어리져 떠오르는 죄송함과 시야를 흐리게 하는 눈물도 결국 나를 위로하기 위한 연민에 불과한 것 아닐까? 엄마를 몰랐다. 아니 외면하고 지냈다.

작품은 이렇듯 성장한 자식들이 극복해내지 못하는 원죄와 같은 이 자괴감을 송곳으로 빈틈없이 찔러댄다. 감정이입의 골을 타고 한 없이 그분, 엄마를 향해 눈물을 쏟아내라고, 그리고 품에서 떨쳐 보낼 때의 그 고통을 이제는 알았다고, 그 많은 몰랐음을, 알려할지 않았음을, 용서를 구하라고 사무치게 몰아대는 듯하다.  이 죄인의 인칭대명사인 ‘너’가 어느 순간 ‘나’로 바뀌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너희들이 몰랐던 ‘엄마’가 드러난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머리에 아무것도 이지 않고, 등에 아무것도 업지 않고, 그렇게 홀로되어 길을 걸어본지가 언젯적이었나.” 자신의 몸 홀로 가벼이 세상의 자유를 한껏 느끼는 엄마의 모습, “팔을 살랑살랑 흔들어보며 신작로를 걸었소. 기분 좋은 바람이 옷섶으로 파고 들었재.”라는 회상에서 일상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여인의 낭만적이고 관능적이기까지 한 그 작은 행복감을 보며 외려, 한 여인에 대한 공감의 눈물, 연민의 눈물, 고통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곤 작품의 화자인 ‘나’, ‘엄마’의 여인으로서의 발걸음이 남편에 앞서 자신의 이름은 엉뚱하게도 ‘나’ 박소녀라고 어깃장을 놓는 ‘그이’‘은규’를 바라보며, 그에게 하는 고백은 정말 이 소설의 백미(白眉)이다. “당신은 내게 죄였고 행복이었네. 난 당신 앞에선 기품 있어 보이고 싶었네. ”, 그리고 “당신은 내 비밀이었네. ~ 中略 ~ 당신은 급물살 탈 때마다 뗏목을 가져와 내가 그 물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는 이였재. 나는 당신이 좋았소.” 엄마가 간직했던 이 소박하고 절절하고 애틋한 사랑에서, 독자인 나, 누군가의 자식인 나는 당신을 행복하게 해준 사랑이 있었음에 진정 위로를 받는다.  그럼에도 당신은 엄마이기만 하면 되었고, 당신의 행복에 대해선 더더욱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나 밖에 모르던 나를 더욱 용서하기 어렵게 만든다.

선산에 있는 당신의 묘 자리를 보고 당신이 호소하는 안타까움에서 차마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게 한다. “죽어서도 이 집 사람으로 있는 것은 벅차고 힘에 겹네. 마음을 달래보려 노래를 부르며 풀을 뽑아주고 자리를 펴고 해가 저물 때까지 앉아 있어보기도 하고 그랬는디 마음이 안 붙어라오.” 엄마, 당신의 영혼만큼은 훨훨 자유롭게 놓아드리겠습니다. 산자들의 욕심, 자식이란 태곳적 이기심을 버리겠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작은 나라에서, 장미묵주를 사달라던 엄마, 바로 로마의 바티칸성국과 그곳의 묵주, 비로소 피에타의 성모상를 바라보며, 엄마를 부탁하는 ‘너’의 속죄의 속삭임이 엄마의 영혼에 진정 닿았을까... 엄마를 진정 위로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가족을 위한 세상의 고난을 오직 작고 지친 몸으로 싸안고 사라진 엄마가 바로 당신 아닌가요? 우리들도 가야 할 그 곳.

어린 시절 열이 펄펄 끌어 올라, 세상이 온통 혼돈 그 자체였던, 이미 의식을 놓아버린 내 곁에 열을 내리느라 부지런히 물수건을 번갈아 올려놓던 엄마의 애타는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는 이렇게 항상 하염없이 삶의 저 밑바닥에 내가 뒹굴 때면 한 없이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보듬어 안아주셨지.‘지헌’이의, ‘형철’의 그들의 내부에 무진장 쌓여있는 엄마의 기억들이 나와 우리의 엄마와 다르지 않음에 고통스럽다...난, 여전히 엄마의 자유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자기연민에만 시달리고 있을 뿐...

작품 속 엄마의 표상이 1950년대의 피폐한 전쟁기 혼인여성으로 그 환경이 시대적 간극을 뛰어넘기에는 오늘의 그것과는 사뭇 다름이 있다. 다만, 변치 않는 자식과 엄마라는 생물학적 동체와 분리의 고통, 그로 인한 은혜와 배신의 죄의식은 21세기 오늘에도 우리를 따라다닌다. 이 작품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격렬한 감정의 물살을 좌우하며 눈물 콧물을 쏙 빼 놓고, 결정적으로 한 여인으로서의 비밀에서 삶의 행복을 드러내어 어떠한 이의도 잠재워버리는, 오히려 감성적 동조를 이끌어내기까지 하는 점은 가히 탁월한 이야기꾼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미집으로 가는 오솔길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늘 주먹질을 해대고 감방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구두방 주인 피에트로마그로의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 핀, 뭇사내들에 하룻밤의 쾌락을 제공하는 누이의 뚜쟁이인 핀, 동네 사람들의 치부를 숨김없이 악의에 찬 큰 목소리로 외쳐대는 아이, 동년배 아이들의 놀음은 어리석어 보이기만 하는 아이, 그래서 어른들의 선술집을 기웃거리고, 그들 어른들의 추한 모양새를 우스개로 지껄여 한 귀퉁이를 차지할 밖에 없는 아이, 핀은 아이의 세계에도, 어른의 세계에도 끼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다.

매춘부 누이를 향한 속된 어른들의 추레한 욕망만이 고립된 핀의 존재의미를 부여 할 뿐, 나, 핀은 없다.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점령하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어느 세상에도 소속되지 못한 어정쩡하고 분노에 찬 낯설기만 한 아이의 관점을 이용하여 당 시대 사람들의 분노와 이데올로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증오에 찬 세상과 어떻게 화해하여야 하는지를 성찰하고 있다.

그 본원적 의미가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다. 아이에게 들리는 그럴듯한 저항세력의 이름, 가프, 위원회와 같은 용어는 신비로움과 경외의 대상이 된다. 누이를 찾는 독일병사의 권총을 훔쳐내고, 이를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위한 수단으로 의기양양하게 선술집에 도착한 아이에게 “남자들은 등으로 성벽을 치듯 둘러앉아 있었는데 핀에게는 그 성벽이 열리지 않았다. ” 아이는 이제 총을 자신만을 위한 상징으로 해석하기에 이르고, 총이 지닌 권력의 무한성에 매료된다. 장난감이 아닌, 실제의 총이 주는 그 차갑고 묵직한 감각의 무게는 아이가 감당하기에 버거운 무엇이다. 아이는 자신만이 아는 오솔길을 걸어 그만의 세상인 거미집에 총 P.38을 숨겨놓는다.

총을 훔친 아이는 독일군에 의해 정치범으로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받던 중, ‘빨간 늑대’라는 파시스트 저항세력의 유격대원과 탈출에 성공한다. 그러나 다시금 혼자가 된 아니는 철저하게 고립된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우연히 거미집 숲속에서 만난 남자, ‘사촌’이라 불리는 유격대원을 따라 조야한 저항군 부대의 일원이 되며, 이들과 생활에서 핀의 눈에 비친 이 비루한 유격대(레지스탕스)의 구성인물들과 그들의 언어, 행위의 밑바닥에 흐르는 본질은 세상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그리고 역사적 평가의 허구를 드러내는 배경이 된다.

독특하게도 이 작품의 말미에 첨부된 작가의 수정된 서문이 들려주는 그 진솔함과 같이, 나치와 파시스트에 대항한 민족적 저항, 조국애, 인간다운 삶의 회복, 민중혁명으로서의 가치와 같은 이념적 관점의 평가가 과연 실체의 진정성을 의미할 수 있는가에 회의를 보낸다. 유격대의 부대원들 - 파견대의 우두머리인 ‘오른팔’과 요리사 ‘왼손잡이’의 아내 ‘질리아’의 위선, 황소입 키다리, 백작 등 네 명의 동서, 배신자 펠레 등등 - 은 단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사회에서 도피 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이기심을 유보하기위한 도피처로서 참여하고 있음에 불과함을 통렬하게 파헤친다.

이렇듯 작가는 레지스탕스를 조국 이탈리아를 위한 민족적 영웅들로만 묘사하지 않는다. 구성원들은 경외할 만한, 그리고 숭고한 조국애나, 인류애, 특정 이데올로기의 실현과 같은 의지를 가진 인물들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치와 파시스트에 대항했던 사람들임에는 분명하다. 작가는 이를 굳이 역사적 의미로서 보다는 인간 본성의 한 방편으로 보는 것이 균형성이 유지된 시각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작가는 소설적 흐름을 희생하면서까지 유격대의 지휘관 페리에라와 킴, 두 사람을 등장시켜, 특히 ‘킴’이라는 인물을 통해 유격대원인 이들 민중이 갖는 무(無)이념성과 생존의 이기적 욕망뿐임을 “저들은 쓸모없는 몸짓들, 무용한 분노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야. 비록 승리했다고 해도 그건 쓸모없는 무용한 것들이지. 그것들은 역사를 만들지 못하고, 자유를 찾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라 그저 분노와 증오를 되풀이하고 영속시키는데 사용되기 때문이야.”라고 부각하여, 이념이란 단지 소수의 전유물임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어, 전후(戰後) 이탈리아의 레지스탕스에 대한 양분된 시선에 대해 시대적 소명의식을 작품에 반영하려는 고집스러움을 보인다.

한편, “가슴속에 안개처럼 응어리지는 고독을 씻어내기 위해” 남자들이 웃음에 흠뻑 취할 정도로 새로운 농담이나 찡그린 얼굴표정을 만들어 내는 핀의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은 우리 인간들 저마다의 비밀스런 상처의 한 단면이고, 우린 그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싸운다고 다독거린다.

자기만의 진실과 희망이 있는 거미집이 있는 숲속 오솔길, 핀이 세상과 화해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 그런 핀에게 느닷없이 생리적 욕구의 해결을 위해 그의 매춘부 누이를 알려달라는 ‘사촌’을 맞는다. 핀은 이런 ‘사촌’역시 다른 인간들과 다름없는 똑같은 부류로 치부해버리고 누나의 거처를 알려준다. 그러나 금시 돌아온 사촌은 그 짓을 하려다 구토가 올라와 그냥 돌아와 버렸다고 얘기한다. 이때 핀이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내뱉는 주절거림은 잔뜩 어두웠던 독자의 가문 마음에 해갈을 준다. “젠장, 사촌 구역질이 나다니!” 자신의 거미집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매춘이란 썩은 가치에 구토를 일으키는 사촌은 핀에게 더 할 수 없는 친구로 여겨진다. 이렇게 아이와 세상과의 화해는 시작된다.

온통 상처투성이인 세상, 영원히 이름도 알 수 없는 분노의 투쟁이란 되풀이되는 인간들의 몸짓을 전쟁의 상흔 한 복판에 아이를 서게 함으로써 아이가 어른으로, 세상의 부조리까지도 화해 할 수 있는 고통과 성숙의 과정을 숭고하기까지 하게 그려내고 있다. 1947년에 발표되고, 1964년 수정된 듯한 칼비노의 처녀작이라는 이 작품의 연대기적 위치를 떠나서도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버금가는 완성도 높은 성장소설의 걸작이라 할 수 있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수치와 모욕의 모든 단계를 내려가면, 마침내 ‘완전한 타락’에 이른다. 그곳은 선과 악에 관해 평등하다. 정말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세상이 아닌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세상처럼 여겨진다. 우린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혹 이처럼 우린 눈도 없이 살아가는 이전과는 다른 인간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느 날, 한 인간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온통 환한 백색의 상태, 눈이 멀어버리는 고통으로 시작된다. 늘 상 그렇듯 실의와 혼란에 빠진 고립된 인간에게 우리들이 보이는 행동, 이타심과 동정의 손길이 주어진다. 그러나 눈먼 자의 차량을 훔치는 돕는 자의 도덕적 양심에 대한 인간 본성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훔쳐보게 함으로서 작가는 진실의 눈으로 독자를 이끈다.

이내 이 백색의 실명은 전염병처럼 번지고, 당국의 신속한 격리조치로 이어진다. 이는 다수의 안전을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그럴듯한, 일견 민주주의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의 이면에 내재하는 비인도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다수의 폭력을 미화하는 것임을 폭로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 작품은 이렇듯 초입부터 우리들의 치부에 대한 고통스런 의문을 마구 던져대기 시작한다.

작품의 전반부인 다수의 사회로부터 격리된 공간에서 자행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에서, 집요하게 인간의 이성이라는 껍질을 벗겨내고, 그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본성을 추적한다. 궁극적으로 눈먼 자들만으로 구성된 이 폐쇄된 사회에서 우리는 그들 간에 상호 연민과 동정을 교류하고, 자발적인 도덕률이 지배하는 사회를 기대하지만, 이러한 소망은 여지없이 박살난다.
일군(一群)의 폭력적인 집단이 형성되고, 이들은 다수의 눈먼 자들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강제하는 기초가 없는 사회”에서 강제가 존재하는 사회, 규범으로서 조직화 된 사회로 질서를 유지하지만 오히려 부패와 악의 근원으로 작동하여, 인간의 취약한 사회적, 생물학적 본성을 대체하는 도덕적 질서와 첨예한 갈등을 가져오는 양면적이고 모순된 진실을 드러낼 뿐이다.

20명의 남성으로 구성된 눈먼 폭력조직은 음식물 공급을 대가로 각 병실마다 여성의 성적 향응을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병실의 구성원이 보여주는 반응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궁극의 회의(懷疑)를 일으키게 한다. 단지 같은 병실에 있음으로 인해 어떠한 관련도 없는 “남의 남자를 먹이기 위해 자신들의 다리사이에 있는 것으로 대가를 지불 할 생각”이 있는 여성이 존재 할 수 있을까? 이때 남자들은 희생이 불가피한 여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화자(話者)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남자들은 연민과 동정심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패배했다.”라고.
염치도 수치심도 잃어버린 남자들, “눈이 빛을 잃으면” 인간들을 인도하는 자존감도 상실하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만다.
폭력조직이 저지르는 잔인한 성적인 광란의 밤, 자신들의 여성이 온몸으로 감내한 학대와 수치, 모욕의 대가인 음식물을 받으러 가는 남자들의 모습에서 우린 이기적이고 몰염치한 인간들을 보게 되고, 또한 지독한 인간적 모멸감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여기, 이 모든 눈먼 자들의 세상에서 오직 눈뜬 유일한 인간, ‘안과 의사의 아내’는 눈뜬 자로서, 이 모욕적이고 처참한 인간본성이 저지르는 진실의 모습을 전달하는 목격자이자, 희생자이며, 통솔자이다. 이 추악하게 드러나고 방치된 인간의 본성을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감당해야 한다면, 그 고통의 무게는 과연 얼마나 될까? 미쳐버리고 말 것 같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이미 죽은 것이 될 때“, 마지막 한 조각의 존엄성이외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그 폭력조직의 우두머리를 살해한다. 이제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 일 뿐“이다.”

폭력집단에 라이터 불꽃을 갖다 댐으로써, 일종의 화형형식을 띤 수용소(정신병원) 화재는 외부와 단절되었던 제한된 공간에서 열린 소통 공간, 다수의 사회로 이들을 연결한다.
그러나, 세상은 “박테리아도 살려면 서로 잡아먹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알려진” 극한적인 무법의 난장판, 미쳐버린 도시일 뿐이다. 오직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눈먼 자들만이 방치된 도시, 썩어가는 사체와 부패한 쓰레기, 오물의 냄새가 진동하는 세상, 거기엔 오로지 동물의 본성만 존재 할 뿐이다.

이 작품은 내내 우리에게 선과 악의 양면성, 세계의 모순성, 인간의 존엄성을 피할 수 없는 질문들로 가득 채워 곤혹스럽게 한다. 그리고 붕대로 눈이 가려진 성상(聖像)에서 신의 부존(不存)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진정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가? “사물의 질서가 뒤집혀 있어요. 늘 죽음을 나타내던 상징이 삶의 상징이 되어버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음을 절감하게 만든다.
물신(物神)주의와 정신이 황폐화된 사회, 바로 오늘의 우리사회, 몰염치가 기승을 부리고 도덕적으로 이미 패배한 사람들, “우리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고,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 “어쩌면 눈먼 사람들의 세상에서만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 지도 모르겠다.”라는 이 역설적 진실은 수치심도 모르는 우리들의 도덕적 양심을 쑤석거려 통증을 준다.

파괴된 인간의 도덕적 이성에 대한 너무도 분명하고 전면적인 경고로 그득한 이 작품은 오랜 세월 풍화되지 않고 우리 인간들을 지속적으로 자극하는 고전으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문명사회, 자본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인간 이성의 위약함과 허위성에 대해 이처럼 냉혹하고 참혹하게 그리고 매혹적이며 상상력 넘치는 메스를 들이댄 작품은 당분간은 불가능하리라. 작가의 인간사회에 대한 희망이 여린 촛불처럼 위태롭게 하늘거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가 지켜줄게
포셔 아이버슨 지음, 이원경 옮김 / 김영사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여전히 무지하고 오만한 인간들이 삶을 슬프게 한다. 절체절명의 치유법을 찾는 환자를 고작 자신들의 가설을 입증하는 도구나 사례로서만 접근하는 탐욕스런 과학자들로 낙담하는 지은이의 실망한 표정이 선하다. 중증 자폐증의 소통가능성, 지능의 확인, 닫힌 그들을 세상과 연결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 세상의 외면과 가족의 고통, 실망, 좌절 그리고 다시 희망과 힘겨운 노력의 과정이 소박한 사실적 이야기로 그려지고 있다.

시각에 의해서만 대상을 인식하고 구체화한다는 철칙으로 굳어진 자폐증에 대한 정설은 청각에 의한 표상의 인식을 하는 자폐아의 진단과 치료를 아예 차단하고, 인정치 않으려는 과학자들의 자기 방어적이고, 보수적인 이기적 오만의 태도에 직면한다. 이러한 상황들은 우리가 항상 마주하여야 하는 왜곡된 실상이어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사람들을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곤 한다.

자신의 아이가 자폐아로 진단되었을 때, 차마 인정치 못하고 안타까움과 혼란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엄마의 참혹한 심정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대면한 자폐증에 대한 의학적 연구와 치료의 세계는 한없이 일천하고 열악하기만 하다. 정신의학, 신경심리학, 분자생물학의 세계적 명성을 지닌 학자들은 저마다 단편적인 자신들의 이론을 수호하고, 명예를 유지하는데 있을 뿐, 자폐증의 심층적 연구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현실만을 접하게 된다.

자폐아인 아들 ‘도브’의 닫혀버린 세상을 열어주기 위한 엄마로서, 지은이 ‘포셔’의 이 굳게 쌓인 벽으로 둘러쳐진 사회를 향한 도전기이자, 자폐증에 대한 두터운 무지를 한 겹씩 벗겨나가는 실천적 성과물인 이 저작물은 그래서 온통 사랑이고 연민이며, 삶에 대한 아름다운 수상록이 된다. 세상이 무심하면, 내가 알아야 하며, 내가 해결을 위해 먼저 나서야 한다. 포셔와 남편 존의 자폐증에 대한 세상에의 호소는 ‘CAN(Cure Autism Now ; 이제 자폐증을 치료하자)’이라는 세계최대의 자폐증연구재단을 설립하기에 이르고, 중증 자폐아인 인도의 소년 티토와 그의 엄마 소마를 알게 된다.

미술 전공의 방송작가인 지은이가 신경학, 분자생물학, 정신의학, 심리학의 그 고상한 이론들을 섭렵하기위해 내 딛는 분투는 현대의학의 무기력하고 무심한 현실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고, 수많은 자폐아들, 세상과 단절된 이 아이들에게 소통이란 열린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인간애이며, 바로 내 아이를 그 어두운 터널에서 태양이 비추는 밝은 세상으로 데려오기 위함이다.

이 저작물은 이렇듯 한 자폐아의 엄마이자 자폐증 연구재단의 설립자로서의 관점은 물론, 자폐증의 숨겨진 모습에서 희망을 함께 찾아가는 ‘소마와 티토’와의 진단테스트 과정과 결과, 질문과 대답 등 수많은 대화를 통해 인식에 이르는 세세한 절차와 과정의 추적 등 자폐증의 다양한 현상들을 보여주어 기초연구자료로서의 생생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 일종의 자폐증 연구 성과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까지 하겠다. 특히, 청각과 시각적 자폐증이란 자폐증의 새로운 분류에 대한 연구관점이나, 소통의 길을 안내하는 학습프로그램의 제안 등은 여느 정신과학 성과물 못지않은 저술이라 할 수 있다.

이 저술은 세상의 모든 이들(의학은 물론 가족까지)이 외면한 중증자폐아 ‘티토’를 세상과 연결시켜주고 나아가 그 아이의 꿈을 실현시켜주고자 하는 엄마 ‘소마’의 이야기를 중심소재로 하고 있다. 엄격하면서도 진정한 사랑이 내재되어있는 소마의 독특한 학습방법이 자신(티토)의 의사를 문자판에 지시하여 표현하며, 급기야는 직접 펜을 들고 글을 써나가는 아이, 시(詩)를 쓰는 아이,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아이로 성장시키고, 이들 모자(母子)를 통한 자폐증의 본질 - 자폐아의 내면, 사물에 대한 인식과정, 기억과 사유의 절차 등 - 을 하나하나 발견해 나아가는 과정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소마의 따뜻한 정성에 맡겨진 도브가 어느날 문득 글자판에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기 시작하였을 때, 엄마 포셔의 감격의 눈물에서 ‘ 아이가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인간으로서의 깊은 연민에 가슴 뭉클한 공감으로 눈시울이 적셔지기도 한다. 쉼 없이 자신의 팔과 몸을 떨어서야 자신의 실체를 느낄 수 있는 아이들, 괴성을 지르거나, 초점 없는 시선으로 무언가에 고정된 채 앉아있는 아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 줄도 모르고, 타인의 존재에 무심한 아이, 그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는 표정, 그 표정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난 정신없이 마구 뛰어다니고 뒤집어 없고 소리 지르는 나를 멈출 수가 없어요.” 몸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자폐아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이들에 대한 이해는커녕 시선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던 나와 우리의 냉담함이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여전히 우리 뇌의 비밀은 정복되지 않고 있다. 설사 뇌의 모든 이해를 가질 수 없더라도, 포셔, 소마와 같은 엄마들이 그들의 아이들과 그리고 그 아이들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보다 많은 치유의 기회가 주어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관련 학자들의 보다 많은 관심과 연구, 이들을 지원하고 수행 할 수 있는 기금의 모집 등 우리도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동과 참여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은 기적들] 서평단 설문 & 리뷰를 올려주세요
작은 기적들 1 -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특별한 이야기
이타 핼버스탬, 주디스 레벤탈 지음, 김명렬 옮김 / 바움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우리는 고통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연민과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세상의 힘겨움이 온통 나에게만 지워지는 듯한 고통, 불행한 나날, 누군가로부터의 잊혀 짐, 고립, 소망의 좌절, 갑자기 다가오는 사고 등은 우리에게 삶의 즐거움과 행복, 사랑의 마음을 앗아가 버린다.

이 두 권의 책은 이렇듯 고통스러워 보이는 세상에, 상상할 수 없는 치유의 힘이 우리에게 항상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을 세상의 빛에 내놓은 부모로부터 떨어져, 입양된 아이가 갖는 외로움과 간절한 그리움이 잘못 걸은 전화로 다시 찾게 되는 신비로운 우연의 힘, 처음 찾아본 조상의 묘역에서 만나게 되는 잊혀 진 가족들과의 만남, 부모세대의 작은 도움이 오랜 세월과 거리를 뛰어넘어 다음세대의 아이들에게 찾아오는 행복의 재회 등 가족의 소중함과 따뜻함이 기적처럼 펼쳐진다. 수취인 없는 위문편지에 답장이 오고, 그것이 그들을 생의 동반자로 이끌고, 누군지도 모르는 전차대원의 전쟁에서 피어난 동료애가 훗날 자매들의 남편으로 만나게 되는 가슴 따뜻한 행복의 기운이 넘쳐흐른다.

한편,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불임여성에게 아이가 잉태되고, 입양한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성애의 감동과, 도움의 손길이 없는 산모가 무작정 들어간 집에 오랜만에 들른 그 집의 딸이 마침 산부인과 간호원이기도 하고, 아내의 임박한 출산에 발을 동동 구르는 차편 없는 남자를 데려다준 행위가 언니의 가족을 구원하는 길이 되어버리기도 하는 우연들은, 우리가 행하는 작은 친절과 배려, 소망이 우리를 잊지 않고 어느 순간에 나를 위한 친절과 배려로 돌아 옮을 보게 된다.

이 저작물의 제목과 같이 112편의 ‘작은 기적들(small miracles)'이 펼쳐진다. 어느 하나 따뜻함이 묻어나지 않는 글이 없다. 진정함과 사랑이 충만한 이야기들로, 그리고 삶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들을 통해 지극히 편하게 그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다만, 유대교를 중심 신앙으로 하여, 종교적 색채가 짙게 스며있어, 부자연스럽게 신의 가호나 배려로 연결 짓는 많은 귀결들이 거북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자리를 떠난 직후 폭탄 테러로 생명을 건졌음을 신의 보이지 않는 보살핌이라 찬양하지만, 그들이 떠나고 난 뒤 그 자리에 앉아 산산조각난 사람들은 그들의 신이 왜 보호하지 않았는지와 같은 배타적인 이기적 유일 신앙이 보여 지는 것 같아 안타까움도 배어난다.

그럼에도 가족을 위하여, 여성을 위하여 의 2권으로 우리에게 소개된 이 ‘작은 기적들’ 시리즈는 우리들 인생의 축복을 위해 지금도 우리 주변에 무수한 기적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문득 이 우연이 내게도 다가와 충만한 행복으로 우리가족을 에워싸기 시작했음을 깨닫게 된다. 아름다움과 따스한 평온이 가득한 저술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는 가슴은 가끔 그 고통을 치유 할 수 있는 능력이 되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