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 행복한 사회를 꿈꾸는 이상형의 나라
성 토마스 모어 지음, 황문수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과 인간사회의 모순은 시대의 현상에 따라 그 원인은 다른 형태를 띠지만 삶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자유와 상충하는 속박과 억압의 고통은 변질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인간을 절망하게 한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차별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물질의 편향성과 양극화의 해소 등등 인간사회가 안고 있는 해결되어야 할 부정적 모습은 이젠 생태계 복원과 보전의 문제, 신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시장자본주의가 출산해내는 병폐까지 더해져 암울해 보이기만 한다.

그래서인지 인류의 지성들은 시대가 안고 있는 인간사회의 불완전한 현상들에 대한 본원적 문제를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대안 사회를 설계하고 전망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지속시켜왔다. 이처럼 인간 세계를 다시 생각하고 모든 억압과 차별로부터 해방된 완전한 자유의 장소, 이상향을 꿈꾸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모색이라 할 수 있다.
‘토머스 모어’가‘어디에도 없는 나라(ou + topos)’, 즉 인간의 세계에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유토피아(Utopia)’를 염원했던 것은 이러한 실패한 낙원인 암울한 인간 세상의 불완전성을 돌파하고, 마침내 도달하고픈 이상적 삶과 사회체제를 향한 진일보였을 것이다.

이 책『유토피아』는 1516년에 출간되었으니 500년이란 정신적 지속성을 유지해 온 저술이다. 따라서 오늘의 이성으로 재단하려들면 근대적인 생명의 존엄성이나 인권관이 출현하기 이전의 시대에서 오는 편협함처럼 시대의 간극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에 집착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의 저술,『공화국』에서 설파한 이상적 국가 이래 중세 암흑기를 거쳐 2000년 만에 비로소 인간자신들의 삶의 세계를 비판하고 완전함을 향한 미덕과 지향하여야 할 도덕성을 갖춘 사회체제를 축조하였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폄하될 수 없는 고귀한 인류의 정신 유산이라 아니할 수 없다. 특히 16세기 초 화폐경제본위의 자본주의체제에 들어선 영국의 정치사회 현실과 인민의 삶을 배경으로 하여 그 제도와 체제의 모순과 부정,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서의 유토피아에 대한 기획은 21세기 오늘에도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책의 구성은 모어의 친구인 안트와프 수석장관이었던‘피터 자일즈’의 소개로 유토피아 섬을 탐험하고 돌아온‘라파엘’이라는 인물로부터 유토피아의 제도와 삶의 모습들을 전해 듣는 2권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1권은 정치적 식견과 다양한 세계경험을 지닌 라파엘이 중앙정치 무대에 서지 않으려는 이유로서 화석화된 현실사회의 비판의 변(辯)을 담고 있으며, 2권은 본론이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덕이 존중되고 만인이 평등하며 모든 것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나라, 이성을 존중하고 삶의 향락인 쾌락을 인간의 온갖 노력의 자연적인 목표라고 생각하는 공동체사회로서의 유토피아를 소개하고 있다.

‘라파엘’의 중앙정치 참여 불응의 변에 대해서

왕과 소수의 성직자, 그리고 귀족과 지주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 최고 권력자에 아첨하고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정치 무대에서 새로운 정치 이념과 개혁 아이디어, 더구나 그들의 지배적 이익에 반하는 정의를 실행한다는 것은 사실상 가능한 일이 아니다. 특히 당대는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시기로서 이들 지배 권력의 무차별적 탐욕에 의해 농민이 농토에서 축출되고 엄청난 전야(田野)가 수지맞는 양(羊)목장으로 약탈되고 있던 시대이고, 쫓겨난 농민은 걸인이 되고 도둑이 되어야만 연명할 수 있는 사회, 그리고 도둑으로 내몰린 이들을 정의의 구현이라는 미명하에 사형으로 처벌하는 사회였다.

또한 화폐가치조차 소수의 권력층이 조작하여 폭리를 취하고, 인민을 함정에 몰아넣고 위법의 댓가로 벌금을 징수하며, 법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춰 해석하는 사회였으니 이러한 지배 권력을 향해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충고를 한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양태는 인플레이션과 환율 정책을 조정하고, 세수의 항목과 세액감면 및 공제항목의 인위적 조작을 통해 부의 편중된 독식을 추구하려는 오늘의 지배 권력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이들 무리로 뛰어 들어가(실제 뛰어들지도 못하게 내쳐지겠지만) 도덕적 이상을 말하고 뿌리 깊은 사악함의 시정을 말한다면 백이면 백 적으로 간주되어 엄청난 핍박과 고통을 감수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바람을 억제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폭풍우속에서 배를 버리지는 못하는 것 아닌가”하고 항변하며, 더구나 “수년 내 인간이 완전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인 만큼,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도모하려는 간접적 수단이라도 동원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음과 사악함을 은폐하기 위해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은 현실과는 괴리된 한낱 이상이며 환상이라 경시하며, 모든 부(富)가 극소수의 인물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나라를 번영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는 중앙정치의 참여라는 것이 위선이며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반대론도 가능하다. 라파엘의 중앙정치 참여 불가의 변은 이처럼 오늘의 우리 사회현실에 비추어보더라도 그 비판적 시각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게 느껴진다.

이상적 사회, 유토피아에 대해서

유토피아는 인간의 도덕적 이성을 중시하는 스토아적 삶을 구현하는 사회인 동시에, 자연적이라는 삶의 향락적 쾌락을 지고의 선으로 하는 에피쿠로스적 인생관이 지배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지만 개인이면서 사회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이라는 인간을 떠올리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우린 공동체에서 에피쿠로스적이며 개인의 삶은 메마른 사막이 되어 무참히 이성적이다. 이렇게 삶의 궤도를 찾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인간과 사회가 된 연유는 무엇일까?

이상적 사회인 유토피아를 관통하는 사상이자, 인간사회가 부정하고 부도덕한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를 ‘결핍의 공포’와 ‘탐욕’, 그리고 ‘오만’에서 찾고 있다.
결핍의 공포가 없는 곳에선 탐욕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모든 생활의 수단이 언제든 획득 될 수 있을 만큼 풍부하다면 굳이 욕심을 부릴 이유가 없어진다. 또한 인간의 허영심도 탐욕을 부르지만 모든 인간에게 균등한 배분이 이루어지게 되면 이 또한 차단된다.
한편 오만이란 것은 계급의 구분을 통해 빛나는 것으로 열등한 지위와 계급, 가난한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달라붙은 지옥의 뱀”같은 오만은 평등과 자유,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으로 퇴색되어 버린다.

이와 같은 사회, 인간의 허영심도, 오만도 부질없으며, 결핍의 공포가 사라진 사회, 그래서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고, 공정함과 평등이 실현된 사회, 하물며 공동체의 사무를 위해 선출된 인물조차 “다스릴 인민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데무스(ademus)로 불리며, 봉사하는 자임을 표시하는 사회라면 완전한 사회, 이상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실천되는 미덕과 제도는 어떤 것들인가? 유토피아에서 토지는 재산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단지 경작되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진다. 개인 소유의 사유재산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 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리고 노동력은 국가가 관리하며, 모든 생산품은 공동 분배된다. 공산주의의 일면을 보이지만 이들은 철저히 유물론을 배척하고, 종교적 자유는 물론 지고한 도덕성으로 무장된 사회이다.

또한 개인의 향락이라는 에피쿠로스적 쾌락, 즉 진리의 관조에서 오는 만족인 정신적 쾌락과 신체의 기관을 충족시켜주고 질병도 걸리지 않는 건강한 상태로서의 육체적 쾌락을 지향함으로써 자칫 사회적 평등으로 박탈될 수 있는 개인의 자유, 즉 자연적 삶에 대한 철학을 존중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처럼‘토머스 모어’의 이상향은 자유가 없는 행복, 혹은 행복 없는 자유와 같은 딜레마를 연상시키는 <멋진 신세계>나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의 세계와는 달리 삶의 조화와 균형을 이룬 세상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21세기 우리의 현실은 디스토피아의 세계와 점점 닮아가고 있다. 그래서 케케묵은 갈등으로 그 균열이 날로 커져만 가고 있는 듯한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가치와 이상을 실현키 위한 사색의 시간으로 ‘대안사회’에 대한 이 걸출한 지성사의 뼈대를 성찰하는 기회는 여간 유익하고 유쾌하지 않을 수 없다.

출간될 당시 원제목인 「사회생활의 최선의 상태에 대해서, 그리고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섬에 대해서 유익하고 즐거운 저작」에서 보여 지듯이 인간의 삶이 도달하여야 할 최고의 선(善)으로서의 세계인 섬나라‘유토피아’의 노동과 생산제도, 교육체계, 정치적 민주주의, 신앙의 자유, 도덕심, 통치 형태 등 설명되는 사회일반의 모습은 오늘에 세계에도 생생한 시사를 던져준다. 또한 즐거운 저작이라는 표현만큼 풍자적 서사로 현학적인 체함을 던져버려 현실 비판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추구했다는 점은 토머스 모어의 보편적 이상을 향한 의지를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게 하여 준다. 불완전함을 자각하고 끊임없이 완전함을 추구하려는 겸허함을 가질 때 우리는 어느 작은 부분에서라도 한걸음 완전에 다가갈 것이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집필한 영국의 16세기의 인권과 삶의 질에 비해 오늘의 우리가 다소 나아진 것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반대자, 소수자, 약자의 목소리에 담긴 진리를 혹여나 놓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모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낙천주의자 캉디드
볼테르 지음, 최복현 옮김 / 아테네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해학적 풍자로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어리석음을 즐비하게 나열한 이 소설의 이야기 전개를 따르다보면 어느덧 인간과 인간사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주인공의 이름조차 '천진난만'하다는 의미를 지닌 '캉디드(Candide)'이어서 이 순진무구한 인물의 맹목적 형이상학이 소용돌이치는 현실세계와 조우하며 어떠한 반응을 일으킬 것인가에 절로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제목이 시사(示唆)하듯이 인생의 의의와 가치 등을 궁극적으로 선(善)이라고 하는‘낙천주의(Optimism)'가 발산하는 왠지 모를 유아적 시선이 오히려 불신의 눈초리를 권유하여 비판적 사유로 이끄는 마력이 있다.

소설은 행복과 감탄의 세계였던 독일의‘툰더 덴 트롱크’ 성(城)에서 아동기를 보내던 캉디드가 성주인 남작의 딸 ‘퀴네공드’와의 사랑이 발각되면서 추방되어 마주하게 되는 현실세계의 파란만장한 대 여정이다. 바로 여정은 “범죄와 혼란, 실수와 편견, 불행과 어리석음을 축적”하는 사건들의 반복이고, 이 반복되는 과정의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조건과 삶의 그러해야 함에 대한 사유의 성숙으로 견인된다. 이것은 볼테르의 치밀한 계산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성에서의 추방, 방랑과 도피로 점철된 남아메리카(신대륙)와 유럽여행, 그리고 마지막 정착지인 콘스탄티노플의 작은 농원이라는 캉디드의 인생역정은 인류가 지향하여야 할 궁극의 사회형태를 향한 탐색이며, 당대에 낙천주의를 주창했던‘라이프니츠’의 “어떤 원인 또는 어떠한 결정적인 이유 없이는 그 어떠한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충족이유’의 진리성에 대한 모순의 실질적 증거를 제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낙천주의자, 캉디드』는 18세기 당대의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던 혐오스런 사건들의 반복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추방된 캉디드가 체험하고 목격하는 전쟁, 기근, 광신주의, 지진, 난파, 사기, 위태로운 열정과 살인, 도둑, 배신이라는 낙천주의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현실적 사건들의 반복을 통해 충족이유, 원인과 결과의 모순을 보여주는 과정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주목하게 하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뚜렷한 개성이 품고 있는 세상관(觀)의 대치라 할 수 있다. 이 구별되는 관념의 세계, 즉 낙천주의와 염세주의라는 세상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게 하는 지상의 사실적 양상을 이들이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캉디드를 낙천주의자로 만든 사람은‘팡글로스’라는 현자이다. 그는 충족이유와 예정조화설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인물로서 현실세계는 최선(最善)의 것으로 창조되었으며, 설혹 악(惡)이 있더라도 그것은 최선의 세계를 만드는 예정조화를 돕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인생이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성에서 추방되어 걸인이 되고,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며, 노예로 전전긍긍하는 것인데, 여기서 충족이유를 발견한다는 것은 실로 우스꽝스런 일이 되어버린다.

한편, 우발적 살인으로 남미로 도피하게 된 캉디드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금 베네치아로 돌아오기 위해 말동무로 고용한 철학자‘마르탱’이란 인물은 우주를 선과 악이라는 두 원리의 투쟁이라고 보고 있으며, 악이 범람하는 세상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당연한 상태라 인식한다. 따라서 인간이 근심의 소용돌이에서 사는 것과 권태롭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사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라 주장한다. 사실 소설은 이처럼 팡글로스와 마르탱으로 대변되는 두 형이상학의 충돌이자 갈등이며, 캉디드는 이 두 세계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캉디드의 체험 세계는 신부와 수사들의 방탕과 탐욕에 희생되는 수많은 사람들, 귀족과 교회의 야심으로 인한 전쟁에 동원되어 약탈과 살인이 그치지 않으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배신과 살인을 마다하지 않는 현실에서 악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러한 현실세계는 순간순간 오늘의 우리사회에 대입해보게 하는데, 결코 원인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이 모순의 세계를 순진하게 낙관주의적이고 충족이유가 있는 세계라고 믿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캉디드의 우여곡절의 이 여정은 충족이유가 모순되는 세계를 희극적으로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이상의 세계, 형이상학의 세계가 아닌 실체적 삶의 세계를 구상하게 한다.

이렇듯 결코 철학을 말하지 않지만 한없이 철학적인 책, 우스꽝스런 콩트이지만 역사와 사색을 요구하는 책이다. 또한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여린 인간의 진솔함이 그대로 스며들어 더욱 깊은 감동과 공감을 갖게 하여, 잠든 우리의 의식세계를 일깨운다. 끝내 선과 악, 낙천과 염세에 대한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지만 삶을 견뎌내는 길이 무엇인지를 우린 알게 된다. 형이상학을 포기한 현명한 공동체의 삶을. 이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와 함께 웃다보면 우리의 본성과 정염이 일치하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 조종자들 - 당신의 의사결정을 설계하는 위험한 집단
엘리 프레이저 지음, 이현숙.이정태 옮김 / 알키 / 2011년 8월
평점 :
절판


기술결정주의, 특히 정보결정주의 환경의 지배력 확장과 이러한 현상에 무기력하게 종속되어가고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경종이자 비판이다. 정신없이 쏟아지고 있는 정보통신 기기들과 소프트웨어들은 각종의 융합기술을 동원하여 그 어느 때보다 생활의 획기적인 이기라 선전하면서 미디어의 세계로 인간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특히 웹기반의 인터넷 환경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일상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을 정도에 위치하고 있어, 소수의 거대 포탈사이트는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한다.

사람들은 그저 사이트가 토해내고 있는 내용을 클릭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그들이 노출하는 것만을 본다. 메인화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뉴스를 비롯한 콘텐츠라는 것들은 감각적이거나 달콤한 유혹을 부추기고, 연예인 동정과 같은 거짓 이슈로 채워지고 있다. 정작 인간 세계가 이루어내기 위해 알아야 하는 중요한 사안은 보이지도 않는다. 보이는 것과 믿는 것을 동일시하려는 인간의 경향은 이들이 보여주는 것만이 세상이라고 믿는다. 결국 자기표현과 자기실현에만 가치를 두는 ‘탈물질주의’에 광분하는 기형적 인간과 사회로 몰아가고, 이렇게 공공의 문제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자신의 열망만 부채질하는 인간들에게 정치는 사회의 정의나, 도덕성, 민을 위한 정책과는 무관한 인기만으로도 권력을 재생산하며 수월하게 지켜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초기에는 인간들은 그 다양한 정보의 세계에 탄성을 외치고, 어떤 매개자 없이 직접적인 민(民)의 소통이 이뤄지며,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도 분산되어 다수의 민이 참여하는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의 플랫폼이 될 것이라 열광하였다. 그러나 지금 어떠한가? 소수에게서 권력을 빼앗아오기는 커녕 오히려 그네들의 권력은 더욱 집중되고 공고해졌으며, 정보의 비대칭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대체 30여년의 과정에서 어떤 현상들이 발생한 것이기에 초기의 기대가 이렇게 우울한 상황으로 전환 된 것일까?

웹, 미디어의 실패

저자가 시종일관 중점을 두어 설명하는 것은 ‘인터넷 필터’를 통한 ‘개별화’이다. 거대 사이트들은 물론 군소 사이트들 모두 자신의 사이트에 방문한 개인들을 추적하면서 예측 엔진들을 가동한다. 그리고 그 개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실제 무슨 일을 했는지 추론하고 예측하여 행태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낸다. 그리곤 이 데이터를 이용하여 정보와 아이디어를 조작하고 개인들의 입맛에 맞는, 그들이 친근함을 느끼는 세상을 펼쳐낸다. 이렇게 “정보를 맞닥뜨리는 방법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현상을 ‘필터버블(filter bubble)'”이라 부른다.

이 필터버블, 즉 개별화라는 맞춤식 전개는 일견 소비자중심의 이상적인 진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참담하며 사악한 요소가 압도적으로 우세적이다. 개별화된 맞춤식 필터는 개인마다의 생각만을 더 주입하고 친숙한 욕구만을 더 찾게 한다. 그래서 타자의 견해나 심각하고 복잡한 세상의 문제, 다양한 세상의 현상을 외면하게 하고 중요한 공공문제를 사라지게 해버린다. 사람의 인식을 왜곡하고 인식의 쳇바퀴 속에서 편협한 인간들만을 증식시키는 것이다.
실제 구글에서 동일한 단어를 검색해보라. 평소 서로 술자리를 같이하는 친구이지만 한 사람은 증권분석가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소설가라 하면, 그 두 사람이 같은 검색어를 입력 했을 때 전혀 다른 검색결과가 나열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주장의 근거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공통의 견해, 자기와는 다른 견해를 알 수가 없게 된다는 의미이다. 인식의 균형은 파괴되고, 자신의 견해만이 고착화되어 확증 편향에 빠져 세상의 소통은 단절되고 만다. 공통의 경험이 사라진 세상, 편협하고 이기적 인간들만 양산된다.

한편 소비자를 우선하는 듯 보이는 이 이상적 진화의 의도 역시 순수함과는 아예 거리가 멀다. 어떤 병명을 검색하면 동시에 컴퓨터에 당사자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최대 223개의 쿠키가 설치되고, 그 병과 관련한 서비스를 판매하려는 다른 웹사이트에 의해 개인의 온라인 행태가 추적된다. 검색 댓가로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우리의 행동을 비롯한 정보가 어둠 속의 누군가에게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양상은 심화되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보험료도 뛰어 오를 수 있다. 익스트림 스포츠에 관심이 있어 무심코 몇 차례 관련 사이트를 방문하면 보험사는 우리가 사고의 위험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판단해 버린다. 과연 어떤 개인이 온라인에서 몇 번 클릭 한 과거의 결과, 재산, 직업, 구매성향, 수입, 의료기록이 그 사람을 설명 할 수 있는 것일까? 더구나 현재의 소망이 미래의 욕구를 이해 할 수 있기나 할까? 이 기술 맹신주의가 낳은 오만은 인간을 점점 참혹한 구렁텅이로 내몰고 있다.

무책임하고 비도덕적인 정보기술자들

우리가 사는 오프라인 세상에서 법을 기획하고 제정하는 일련의 작업은 어느 한 사람의 독단에 의해서 결코 이루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이루어 질 수도 없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들, 코드를 만드는 사람들은 법체계나 법률가도 없이 만들고 완성되는 즉시 즉각적으로 시행한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자신들의 결정이 무엇을 초래하는지 전혀 무관심하며 무책임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페이스북의 ‘저커버그’같은 젊은 사업가는 이러한 사회적 책임과 도덕적 의식의 요청에 대해 “원하지 않으면 사용하지 말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소위 ‘매수자 부담의 원칙’이라는 사악한 상인의 의지만을 고수하는 것인데, 자신에게 천문학적 광고수입을 안겨주는 수십억의 사용자들에 대한 도덕적 책무란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이들 정치적 사고가 미성숙한 이들에게 엄청난 권력이 손에 쥐어진 것은 진정 인류에게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심화시키고 있는 개별화라는 필터버블은 도덕적 개념이 전혀 없는 기계시스템에 인간과 인간사회를 내맡기자고 광분하는 것이다. 귀납적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정보결정주의를 맹신하는 부도덕하고 무책임하며 인간에게 무관심한 이들의 행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교정되어야 한다. 지금의 온라인 시스템, 그리고 개별화를 강화해 나가는 시스템은 인간들을 일반적인 지식의 통합 대신 과잉 집중에 몰입케 함으로써 인간 내부의 정신과정과 외부 환경간의 상호작용을 방해하고, 동떨어진 아이디어의 병렬을 통해서 가능한 인간의 창의력과 혁신성을 실종시킨다.

더구나 개별화를 통해 획일화된 세상은 ‘J.S.밀’이 그의 『자유론』에서 말했듯이 “반증 가능성이 진리를 찾는 핵심”이라는 여지를 말살함으로써 점점 인간사회는 진리구현과는 멀어지는 어둠의 세계로 전락하는 길을 재촉하게 될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인터넷에 대한 애초의 기대인 권력 분산의 길이 아니라 집중화의 길로 치닫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맥락의존적인 귀납적 시스템의 추구, 고착화와 인식의 왜곡, 공공영역을 멸실시키며 정적인 개념의 개성으로 내모는 무한반복의 함정에 빠뜨리는 시스템은 여론의 조작과 정보의 비대칭을 심화시키게 된다. 지식의 비대칭은 곧 권력의 비대칭을 낳는다. 권력이 없는 민(民)에게서 다시금 권력이 있는 소수에게 정보권력을 재분배하게 되는 개별화, 필터버블은 공동체의 단절과 참을 수 없는 침체의 세계를 만들게 될 것이다.

필터버블의 대항과 감시를 위해서

분리하고, 조작하며, 의도적으로 세분화하여, 대화에 적대적인 공공영역을 만들어 내는 개별화를 향한 웹미디어의 행태는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제 이론의 여지가 없다. 기술지상의 광신적 부도덕성의 결말은 인류의 공멸이다. 결국 미디어는 사람들이 하는 일을 그대로 비추는 개별화의 무조건적 추진이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모르는지 보여줄 수 있는 미디어로서의 책임을 가져야 한다. 공동체간의 연결도 없고 겹치는 부분도 없는 단절과 불통, 소외의 하위문화가 아니라 삶의 시선과 관점을 폭넓게 인식할 수 있는 균형 잡힌 기술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용자가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들만의 규칙을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체계가 아니라 투명한 시스템이어야 한다. 개별화의 진행은 필히 사용자의 승낙을 받아야 하며 실종된 편집윤리도 도덕적으로 보강되어야 한다.

국가권력 또한 기득 권력의 보존과 확대를 위해 외면하고 이들 거대 웹미디어 세력과의 결탁에 혈안될 일이 아니다. 개인의 행태를 추적하는 금지체계의 기술적 도입을 위한 노력을 하여야 하며, 개인정보 통제권이 지금처럼 사이트에 있어서는 안 된다. 사용자에게 주어지고 승낙이 있어도 그 사용에는 구체적 용도가 개별적으로 피드백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정보사용규칙의 변경과 정보사용 감시체계의 도입을 최우선적으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웹미디어 기업들에 옴부즈만 제도를 의무화하는 것도 하나의 제도적 장치가 될 것이다.
툭하면 터지는 개인정보들의 도난과 중개사건을 민사사건이라고 술수방관만 하는 국가는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토대를 말살하고 공공지향의 영역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소수권력이나 사용자인 대다수의 민중에게 공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 한다.

정보결정주의에 빠진 웹미디어의 위험천만한 행태를 치밀하게 탐색하고 그의 재앙적 문제점들을 인문학적, 기술적 지식의 토대위에 예리하게 분석해낸 정보기술의 현상학이라 할 수 있는 이 저술은 개인의 이기적 욕망이란 기형화된 자유주의적 삶의 실태를 냉철하게 통찰하고 있다. 우리에게 편협한 이해관계만이 모든 것이라고 주입하는 세계는 우리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를 아예 존재치 않는 것으로 몰아 낼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한 진심의 노력이 곳곳에 배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웹미디어에 의존적인 오늘의 세계에서 코드가 법이라고 외치는 새로운 입법자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의 절대적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이 저술의 의의와 가치는 더 없이 중대하다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민주주의’란 우리에겐 결코 낯선 용어가 아니다. 또한 마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선명하지는 않지만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이며, 민주주의라는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에 그리 저항감이 들지도 않는다. 게다가 민주주의는 선(善)한 것이지, 악(惡)한 것과는 결코 친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으며,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통치권력은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통치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권리를 위임받아 수행하는 대표자들일 뿐이라는 점에 의문을 달지 않는다. 대체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이해와 신념이 이런 환상을 갖게 한 것일까? 더구나 정말 우리사회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사회임에는 분명한 것인가?

만일 민주주의가 선한 것이라는 우리들의 믿음이 옳은 것이라면‘자크 랑시에르’는 왜 ‘민주주의는 증오의 대상인가?’하고 묻는 것일까? 누군가는 민주주의라는 것이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일 것이며, 증오할만한 명백한 이유가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 누군가란 누구이며, 민주주의가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기에, 어떤 양상을 타나내고 있기에 그렇게 혐오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논의와 주장은 정당하고 타당한 것인지를 아는 것은 우리의 삶을 에워싼 환경을 이해하고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데 중대한 양식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민주주의에 내재되 있는 그 이중적 모습과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정착되고 운용되고 있는지, 나아가 민주적 삶이란 것이 오늘날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세계의 실상을 성찰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진정 범죄적인가?

민주주의란 인민의, 인민의 대표의 통치 체제이다. 또한 누구도 타자에 대한 우월성이 존재하지 않는 원칙이며, 따라서 통치를 위한 모든 자격을 배제하는 무정부적 체제이다. 그러하다보니 개인 저마다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혀 무질서를 창조한다. 개인과 공통의 이익을 지닌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실현하기위해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각종의 요구로 혼란을 증식시킨다. 그런가하면 공동체를 위한 공공선에는 무관심한 인민이 양산 된다. 민주적 삶이란 이런 것이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인간들마다의 욕망에 기초한 혼란과 무질서를 속성으로 한다. 우리 사회를 조금만 응시해보면 공동체의 이타성이나 중심을 결여한 채 분산되어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는 민주주의적 인간이 만들어내는 실상을 볼 수 있다. 즉 개인들의 무제한적 욕구가 지배하는 사회체제, 이기적 소비자인 민주주의적 인간들의 탈정치화된 삶의 모습, 소수자와 약자의 권리, 문화산업, 줄기세포 등에 무관심한 부(負)의 과잉을 목격하게 된다. 악(惡)으로서의 민주주의이다. 한편으론 사회에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분출하는 욕구의 과잉, 다른 한편으론 공공선에 무관심한 이중적 과잉으로 치닫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 속에는 이기적 개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소비지향적 인간들의 경박함을 비난하면서 이것을 이유로 인민의 권력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일까? 민주주의가 비록 통치력에 압력을 가하는 요구들의 불가피한 증가를 의미하지만 이것이 없다면 폭정, 독재, 전체주의와 같은 적이 발생한다. 또한 소비주체로서의 개인화에는 민주주의 부재와 평등의 결여를 은폐하려는 거짓된 평등의 개념과 자본주의 경제의 무제한 성장추구를 대중적 개인주의 탓으로 돌리려는 음험한 책략도 숨어있다. 이것은 자신들의 거친 파렴치에 기초하는 이기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측들의 편협한 주장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통치되어야 할 사회도 아니며, 한 사회의 통치체제도 아니다. 그것은 통치불가능 자체이며, 이러한 통치불가능성에서 모든 통치행위가 그 기초를 찾아야 한다.”는 말처럼 정치적 장(場)에 집결된 과도한 에너지를 개인적 행복, 사회적 유대관계 등을 추구하며, 이중적 과잉을 제어 할 수 있는 조화의 장으로 전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 스캔들

우린 진정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통치하고 있는 것인가? 실상은 대다수의 인민이 소수의 권력 행사에 좌우된다. 공공영역을 담당할 권한을 가진 소수가 전체를 대표하는 대의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구의 엄청난 증가에 대처하기 위한 민주주의 실현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대의제란 민주적으로 보이게 하기위한 하나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마치 민(民)의 동의를 구했다는 엘리트들의 권력 유지와 행사를 위한 교활한 수단으로 출발한 것이다. 대의제는 민주주의의 정반대의 것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인민은 엘리트들의 기대와는 달리 권력을 행사할 때마다 통치원칙에 훼손을 가하곤 했으니 대의제는 매우 불안정한 타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모순관계를 잇는‘선거’는 대표성을 통해 엘리트인 소수 지배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지극히 효과적 수단이었으며, 더구나 사회적 동의까지 얻는 것이었으니 일거양득의 기막힌 도구가 아닐 수 없다. 실제 ‘대의제+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어느 곳이든 선거는 정권교체라는 형태 하에서 본질적으로 동일한 지배층의 재생산을 보장해주고 있으며, 자신들의 생명의 위협 없이 권력을 유지하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통치논리와 민의 정치적 분열을 연결하는 위선적 논리로서‘국민주권’이 얼마나 허구의 산물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이들 통치집단은 거짓된 민주주의인 개인주의적 민주주의의 논리를 통해 민주적 개인들의 게걸스런 욕구는 인류를 자멸로 이끄는 대재앙이라 하면서 평등에 증오를 내뿜는다. 한국사회의 지배권력이 툭하면 복지포퓰리즘이라 매도하면서 인민을 향해 위협적 언사를 서슴없이 내뱉는 것은 대표적 실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공공영역을 끊임없이 축소하려고 하며, 자기들의 내부로 흡수하여 사유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곤 국가차원의 과두체제와 경제차원의 과두체의 결탁에 의해 공공영역을 장악하려 든다. 공공영역이란 엘리트 지배계층에 의한 통치와 민(民)의 통치라는 서로 반대되는 두 논리의 만남과 갈등이 충돌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이자 공공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할 것이다.

인민은 공공영역에 대해 하나의 원칙을 구현하려는 정부의 의도를 거부하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 보호망을 마치 국가의 선물처럼 호도하는 통치권력의 간교함은 배척되어야만 한다. 이는 이들 지배계층과 지난한 노동 및 민주투쟁의 결과물이며, 인민인 자기 산물의 정당한 배분일 뿐이다. 대의제가 올바른 민주주의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 권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조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실제로 우린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지 않다. 과두제적 법치국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실질적인 민주주의의,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지배계층이 지적하는 거짓된 민주주의인 민주적 삶이라 부르는 악을 퇴치하는 그런 통치를 위한 각성이 필요하다.

결 어

지배 권력이 자신들의 민주주의 부재와 평등의 결여를 은폐하기 위해 인민을 내몰고 있는 민주적 인간의 삶이라는 환상, 얼빠진 소비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주의를 마치 사회의 한 형태로 간주하면서 국가 과두체제의 지배를 은폐하려하고 불평등의 심화현상을 조건 평등 정책 만연의 탓으로 돌려 자신들의 이념을 정당화하려는 행태 또한 제대로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이중성은 본래 그러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오늘의 사회처럼 이들 지배권력에 휘둘려 무형의 시끌벅적한 군중의 혼란에 갇힐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민에 의한 엄격한 정부형태이어야 하고 민의 타협에 의한 사회형태이어야만 한다. 끊임없이 국가권력은 금권과 연합하여 민의 정치공간을 축소하려 하는데 열중한다. “공공영역에서 과두(寡頭)적 정부의 독점을 위한 탐욕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며, 민의 생활전반에 대한 유산계급의 강력한 영향력을 끈질기게 뿌리 뽑는 것”이 민주주의인 것이다.

민주주의는 물론 악이고 범죄적이 될 수 있다. 그 이중적 모습에서 이기적이며, 소비적인 욕망에 기초한 무질서에 안주한다면 지배계층의 교활한 탐욕의 영속을 고착화시켜주는 비극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정당성의 근거를 불평등적 우연성 상태를 인정하는‘평등적 우연성’에 두고 있는 통치할 자격을 가지지 못한 인민의 고유한 권력이다. 누구와도 공평하게 권력을 나눠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와 기쁨을 선사해주는 아직은 유일한 덕목이기에 우리에겐 포기할 수 없는 선(善)인 것이다.

민주주의의 이중적 모습을 상반되는 정치철학 논의들과 프랑스혁명, 68 학생운동 등 역사적 사건들에 내재된 민주주의의 양상들을 통해 냉철하게 통찰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지구촌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왜 혐오와 증오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는지, 그 이면의 사실들을 한 꺼풀씩 벗겨내어 범죄적 민주주의라는 오명을 씻어내기 위한 인민의 자성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난과 고발이 지니는 성격의 특수성을 파헤침으로써 실질적 민주주의와 평등의 의미를 감각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규명한 21세기 민주주의가 처한 현상에 대한 탁월한 분석서라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 : 와이 더 라스트 맨 디럭스 에디션 01 시공그래픽노블
브라이언 K. 본 지음, 박재용 옮김, 피아 구에라 그림 / 시공사(만화)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성이 전멸한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the unmanned world)"

Gender-cide(성별 말살), 지구상에 공존하던 두 개의 성(性), 여성과 남성 중 하나의 성이 한날한시에 모조리 사라진다면? 그리고 그 사라진 성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바로 ‘나’라면 어떤 일을 하여야하며,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과연 생존을 유지할 수는 있는 것일까? 이처럼 황당하고 쓸데없어 보이기조차 하지만 유전자조작, 인간복제로 치닫는 오만한 인간에 대한 적절한 물음이 이 그래픽노블의 소재이다.

일순간에 지구상의 모든 수컷들이 죽어버렸을 때 세상은 어떤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 수많은 사회 기간시스템은 제대로 작동될 수 있을지, 본래의 기능으로 복귀하는 것은 가능한지, 종(種)의 번식은 어떻게 될지, 결국 남은 성도 멸종하게 될 것인지, 지구표면의 유일한 남성 생존자를 여성들은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 등 끊임없는 의문이 떠오른다.
종의 번식을 위해 생존 남성을 살려둘까? 아니면 복제기술을 통해 무성생식이란 방법을 선택할까?

이러한 의문들에 인간의 답변들이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얄궂은 사건들과 마주하면서 성(Gender)이 내재하고, 또한 야기하는 인간사회의 문제들을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하고 고찰하게 한다. 여기에 젠더사이드가 일어난 미지의 음모(?), 혹은 배경이었을 듯한 암시와 또다른 변수의 예고들이 펼쳐지면서 인간의 본성, 은밀한 인간사회의 파멸적 징후들을 탐색 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Y 염색체를 가진 두 개체(個體)인 살아남은 스물두 살의 청년‘요릭’과 수컷 원숭이‘앰퍼샌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멸종과 구원의 각축전은 인류 문명의 기로(岐路)라는 위험천만한 외길을 아슬아슬하게 걷는다. 남성 전멸의 세계, 그 후의 세상이 현실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하나 남은 남성의 존재마저 제거하려는 여성 단체‘아마존’, 그리고 생명의 복원을 위해 유일한 남성을 보호하려는 여성들, 게다가 젠더사이드를 조정했을 듯한 미지의 집단까지, 우리들의 지성을 한껏 자극한다. 기발한 소재만큼 그 서사에 도취될 정도로 흡입력이 강한 작품이다.
    
디럭스(Deluxe)판으로 접한 그래픽의 생동감 넘치는 시각적 느낌이 스토리 고유의 감성을 더욱 고조시켜주고, 원본의 초기 이미지들을 알려주는 스케치와 상징적 그림들의 선정적 장면은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드높인다. 작품성 못지않게 매혹적인 도판과 양장된 이 판본은 소장품으로서의 가치까지 배려한 것 같다. 탁월한 상상력과 의미심장한 주제의식으로 쏟아진 세간의 격찬이 빈 소리가 아님을 확인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