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렇게 연애하는 까닭 - 사랑에 대한 낭만적 오해를 뒤엎는 애착의 심리학
아미르 레빈.레이첼 헬러 지음, 이후경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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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자 신드롬, 여자는 튕겨야 매력?, 밀당(밀고 당기기)은 연애의 필수 기술?, 이러한 것들은 공통적으로 기만 책략을 근원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진실함이나 배려와 이해와 같은 사랑의 본질과는 멀어도 한참이나 먼 교활한 테크닉이 마치 인간관계나 애정관계를 마치 풍요롭게 하는 것인 양 호도하는 것인데, 인간의 심리적 본성이나 애정의 본질적 요소에서조차 이러한 것들은 인간성을 비루하고 참담하게 하며 고통과 절망이란 손상을 만들어 낼 뿐이며 더구나 사람들과 사회를 불행하게하고 병들게 하는 일종이 병리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각종 매스미디어의 연애 지침이라고 소개되는 조잡한 얘기들이나 연예인들의 잡설 속에 분별없이 끼어든 얘기들은 이러한 기만술책을 연애 고수들의 무슨 비법처럼 뿌려댄다. 그러나 이 진정성이라고 는 한 점도 없는 기교로 연결된 결합이 오래갈리 만무한 것이고, 금시 바닥이 드러나 결별하고 완전한 이상적 사랑이 어딘가 있을 것이라는 망상으로 또 다른 이성을 찾아 헤맨다. 아마 이러한 무모하고 몽매함을 반복하면서 진정한 사랑이 왜 나에겐 오지 않는 것인가 하고 푸념해댈 것이다.

연애는 기교도 기술도 아니다. 진실한 감성의 교환이다. 그리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친밀감을 확대하며 의지할 수 있는 삶의 안전기지(安全基地)를 만드는 과정이다. 여기에 술수라는 기만이 개입해서 어떤 결합을 이룬다한들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자기의 쾌락을 늘리기 위한 획득책, 결국 연애조차 그것이 성적 욕망이던 어떤 재화에 대한 욕구나 지위나 권력, 명예와 같은 과시적 성취가 되었건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설혹 그 위선과 기만이 노출되지 않고 결합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친밀감이라는 애정의 본질적 요소가 변형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애착 심리의 유형

책은 이성간의 친밀감의 정도에 따른 ‘애착 심리’의 유형을 불안형, 회피형, 안정형,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유형 중 하나의 기질에 속하는데, 자신의 애착 기질을 명확하게 아는 것은 연애 파트너 혹은 배우자의 선택, 기혼자의 경우 배우자와의 관계성을 돈독하게 하는데 유용한 이해를 제공한다.

불안형은 끊임없이 상대로부터 친밀감을 확인하려는 유형이며, 반면에 회피형은 관계가 깊어지면 상대를 밀어내고 자신의 독립성을 우선시하는 기질이다. 그리고 안정형은 상대를 배려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를 갖추고 평온과 안정감을 지향하는 부류이다. 이러한 세 유형의 애착심리의 매칭관계는 우리들이 목격할 수 있는 애정관계의 모습들이 왜 그러한지를 선명하게 설명해준다. 회피형은 일명‘나쁜 남자’또는 밀당의 고수인 여자들과 흡사하다. 소위 쿨한 멋과 세련된 차림새로 다가와 모호한 뉘앙스의 언어로 자극하는데, 이러한 모습에 관심을 갖는 유형은 바로 불안형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배려하거나 안정감이라는 일견 지루해 보이는 것보다는 손아귀에 넣기 어려워 보이는 것, 왠지 세련되고 멋져보이며 가까이 다가가면 달아나 버리는 회피형에 열정이 솟는 것인데, 비극이자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회피형 역시 순간 열정적으로 끓어오르며 친밀감에 적극적인 상대가 눈에 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상반되는 기질은 친밀감의 지속적 확인을 원하는 불안형과 친밀감이 느껴지면 멀리하려는 회피형은 서로 고통과 좌절을 심화시키고 끝내는 불화로 결별하거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불안형이 대폭 양보함으로써 불행한 결합을 고통스럽게 이어나간다. 회피형은 친밀감이 깊어지면 상대의 단점을 발견하는데 집중하며 자신이 상대를 밀어내는 이유를 합리화한다. 그리곤 헤어지고 다시금 완벽한 이성을 찾아 헤맨다. 이것이 바람둥이는 대부분 회피형인 이유이다.

책이 지향하는 것

이러한 애착 심리의 유형별 기질이나 특성들에 대한 설명을 통해 상대자로 적절한 유형은 어떤 유형인지, 이미 파트너나 배우자가 적절한 유형이 아닐 경우 어떻게 이러한 기질이나 태도를 변화시키고 조절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들을 조언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어떤 애착 유형의 소유자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와 유형별 성향에 대한 다채로운 사례와 심리학적 정리를 통해 친밀감을 회복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아름다운 동반자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또한 사랑이란 격정적인 불처럼 오는 것이라는 기대, 즉 애정을 뇌가 폭발하고 심장이 팔딱거려야 한다는 열정적 신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연애의 과학적 심리학은 사랑의 진실, 친밀감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는 귀중한 조언이 되어 줄 것이다. 더구나 회피형에 유독 집착하는 불안형의 고질적 좌절과 실패의 원인을 파악함으로써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조치들을 배울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이다.

한편 안정형과 같은 이상적인 상대를 선택하기 위해서 상대자의 애착 유형을 파악할 수 있는 지침들 또한 연애하는 모든 연인들에게 소중한 배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역설적 사용도 가능하다. 상대자들의 애착 유형을 파악함으로써 더욱 능수능란한 솜씨로 상대를 유혹하고 유린하는 도구라는 부정적 활용도 가능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연애과정이나 결혼 생활에서 고통을 겪고 있을지도 모를 우리들에게 상실되거나 포기한 친밀감이나 갈등의 배후가 되는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고통의 웅덩이에서 헤어나와 안정감과 친밀감을 회복하여 풍요로운 애정을 만끽 할 수 있는 분명한 삶의 조언을 제공하고 있다. 애정 관계는 결코 기교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진실성, 상대에 대한 배려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를 도외시한 애정은 불행을 전제한 것과 다르지 않다. 건강한 연애, 화목한 결혼생 활로 고통과 좌절이 없는 애정 넘치는 연인, 부부, 가족, 사회가 되는데 이 애정 심리학이 기초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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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3
다야마 가타이 지음, 오경 옮김 / 소화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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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본 문학에 있어 몇 가지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작품이다. 자연주의의 일본식 수용, 극 사실주의의 리얼리즘, 특히 작가 자신의 사생활을 소재로 한 사소설(私小說)의 본격화를 알린 작품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 적나라한 자기고백의 이야기는 사실의 충실한 재현이라는 측면에만 몰입하여 자연주의가 지극히 왜곡된 형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인데, 따라서 사회와 개인의 유리(遊離)화를 가속시켜 내면에 침잠한 고립된 개인이란 편협성이란 한계를 노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국내에도 잘 알려진‘다자이 오사무’나 올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니시무라 겐타’의 사적경험의 노출인 전형적인 사소설과 이 작품은 한 통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약하긴 하지만 사회와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어서 신구의 대립과 같은 근대조건과의 갈등을 하나의 축으로 함으로써 개인의 내부 의식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차이를 발견 할 수 있다. 이처럼 초기 사소설은 사생활과 사회와의 적절한 시선의 양립이 있었으나 점차적으로 사회와는 단절하고 오직 개인의 내적 경험으로 숨어들어간 것은 일본인들 특유의 정신적 구조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서평:“일본특유의 문학양식인 사소설(私小說) 로 본 일본인의 문화코드” 참조)

‘이중성’이라는 독특한 구조

사소설이라는 개인의 심경(心境)을 소재로 한다는 특이성 때문에 등장인물에서 타인의 비중은 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결국 ‘나(私: 와타구시)’의 이야기이기에‘나’라는 인물을 좇는 것은 불가피하다. 소설은‘다야마 가타이’ 자신인 소설작가‘도키오’이고, 그의 내적 경험의 일기이자 수기로 읽힌다.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인 외적인 언행과 내적인 심정이 항시 일치할 수 없으며, 그것은 곧 분열된 이중의 인간을 보여 준다. 삼십 육세의 소설가, 아내와 세 명의 자녀를 둔 가장, 그런 그를 숭배하는 문학 지망생인 십 구세 여성을 문하생으로,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부부생활의 건조함으로 신음하던 남성이 깨어난다.

그는 여 제자,‘요시코’의 근엄한 스승으로, 온정어린 보호자이자 분별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선생의 외연을 갖는다. 그러나 구시대의 여성인 아내와는 달리 당대의 신교육을 받은 소위‘하이칼라 여성(신 여성)’인 요시코는 여인으로서의 설렘과 육체적 긴장이라는 신선한 자극으로서‘나’를 이끄는 대상이다. 따라서 도키오의 내연은 온통 여자에 대한 들끓는 애욕과 성적 충동으로 무성하다. 즉 내면의 소용돌이치는 중년 남자의 추악한 성적 욕망과 외면인 사회적 체면과 스승으로서의 관습적 태도라는 이중성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하는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것은 바로‘나’인 도키오의 내면은 독자만 알고 있는 것이지, 소설 속의 인물들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오직 작가는 독자를 위해서만 자신의 내면을 사실 그대로, 완전히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인데, 어쩌면 이러한 요소가 유독 엿보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을 매료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여 제자 요시코에 대한 육체적 갈망의 실현과 억압사이에서 내적 갈등을 겪는 구조를 시종 벗어나지 않는다. 단지 상황마다에 내심을 위장하고 이기심을 감춘 채 행동하는 위선의 내용들만 변 할 뿐인데, 이것을 보는 독자는 자기 욕구와 지켜야 할 사회적 관습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진실된 면모에 야릇한 통증을 느끼게 된다.

새로운 것과 옛 것의 대결

이처럼 구시대를 상징하는 아내와 신문명을 의미하는 여 제자 사이의 갈등은 문자 그대로 구와 신의 대결이자 전통적 관습과 근대의 신문명과의 갈등이기도 하다. 일견 도키오는 신여성인 요시코의 자유분방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듯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환심을 사고, 신뢰를 주기위한 기만에 불과하다. 그녀를 온통 자기만의 소유로 하기위한 정치적 술책에 불과한 것이지만 요시코의 애인이 등장하자 이 책략으로서의 외형은 급격하게 전통적 관습으로 회귀한다. 남자를 그녀로부터 떼어내기 위한 방책으로서 신사상과 구사상의 편의적 이용을 오가는 것이다.

여기서 심리적 배신을 느낀 도키오는 요시코의 낙향을 도모함으로써 구시대의 비판은 실패하고 만다. 1907년에 발표된 작품이니 메이지(明治)유신 이후에 걷잡을 수 없이 밀어닥친 근대화의 조류는 당대인들에게는 혼란스러움,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결국 위축된 개인들은 사회와의 투쟁에서 물러나 신변으로 시야를 좁힌 관조의 리얼리즘으로 숨어드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 폭로라는 위험천만한 작업을 통해 리얼리즘이란 극단적 사실주의의 예술적 집념을 불태웠던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라는 문학사(文學史)적 위치만큼이나 이 작품의 문학성도 제법 견고하다. 부분적으로 현대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과장이나 주인공의 비판력 결여와 같은 조잡한 일면이 있으나 그것은 사소설이 지니는 고유의 한계이자 특성이라는 측면에서 관대함을 갖게 한다. 아무튼 2011년‘니시무라 겐타’의 사소설로 인해 내 독서가 여기까지 이어지게 된 것은 문학에 대한 시야 확장인 것은 분명하다. ‘나’의 소설이 지니는 사실성의 득과 실을 이해했다면 그게 답변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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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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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에는 19세기 조선사회의 피폐하고 문란해진 삼정(三政)의 비루함이 촘촘히 깔려 가렴주구(苛斂誅求)로 신음하는 민초들의 좌절과 서러움이 짙게 배어있다. 지방의 말단 하급관리조차 제멋대로 백성을 수탈하고 저 위로는 계급을 팔아먹고 직위를 팔아먹으며 착취하는 아래위 할 것 없는 총체적인 부패의 난맥상을 보이던 사회였음을 말하기 위해서였음이리라. 저들의 잇속을 차리는데 백성의 삶이야 그들이 헐벗던 굶주리던 무관한 것이었으며, 단지 자신들을 위한 봉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소설의 중심 사건인‘황사영’백서사건은 일백여명의 천주교인들이 참형된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이를 비롯한 무수한 처형과 유배가 자행되던 당대의 사회상은 이처럼 끊임없는 관리들의 횡포와 불합리한 삼정의 운영으로 수탈되어 삶의 토대와 유리되고 방황해야만 했던 백성들의 좌절과 분노의 농도(濃度)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삶에서 쫓겨난 백성들이 미래의 삶, 천국을 향한 구원에 목을 매단 것은 당연한 귀결이랄 수 있을 것이다. 삶의 기반을 파괴당한 민초들의 죽음이 넘쳐났고 수익원인 유리된 백성들로 인해 남아있는 자들은 더욱 관리들의 폭압적 기승에 절망으로 몸을 떨어야 했을 것이다.

소설의 첫머리인 유배지인 섬 흑산(黑山)으로 압송되는 정약전의 신산한 여정에서부터 수탈당하는 백성들의 죽음 같은 삶이 길에 깔려있다. 주막에서부터 배의 사공과 노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착취의 대상이고, 이를 감당하지 못해 유랑하는 이들은 걸식자가 되고 그들의 자식들 또한 굶주림과 학대 속에서 개보다 못한 주검이 되어 널브러지고 방치되어 부유(浮遊)한다. 설혹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언정 자신의 기반을 버리고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백성들의 고통을 왕권과 사대부의 기득권에 대한 충효의 논리로 위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어린 순조임금의 수렴첨정을 하던 정순대비로 추정되는데, 이 이가 내린 자교의 자기중심적 논조는 마치 세상의 어지러움과 백성의 피폐함이 백성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라는 협박으로만 보인다. 고작 궁궐에 앉아서 ‘헤아리고 있다. 부패한 관리가 있음을 안다.’라고 한들 무엇이 변화할 수 있었겠는가.  

           

정약전이 육지로부터 구백여리의 망망대해에 떠있는 유배지 흑산(黑山)의 검을 흑자를 일컬어 “너무도 컴컴하다”하다는 심사로부터 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대 전체에 산재한 어둠과 공포의 뿌리 깊은 부정을 읽게 된다. 아마 나라 전체가 흑(黑)의 산(山), 주검의 산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사회에 내린 만연한 부패와 부정, 이 썩은 구조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신(神), 왕권을 초월하는 이 알 수 없는 권력인 천주교의 신과의 대결을 선택한 당대 지배 권력의 우매함을 보는 것은 수치스럽고 참담함이다. 무릇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자신들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불안한 예감, 그 불온함이란 감정이란 폭력을 낳는다. 당대의 권력들을 그토록 불안하게 했던 것은 천주교가 아니라 좌절과 분노로 몸을 떨어대던 백성들이요, 파렴치한 자신들의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더욱 극악해지는 폭력으로서의 처형은 더욱 은밀한 결집, 권력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뿐이다.

소설의 양대 인물 축은 정약전과 약전의 형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이지만, 오히려 민초들의 삶에 조명을 맞춤으로써 이야기의 구성을 이끌고 있다. 역참 마부인 마노(馬路)리, 매득노예 육손이, 아리, 새우젓 장사 강사녀, 약전의 말벗인 창대와 그 아비, 소작농의 처 오동희, 신분상승을 위한 수단인 공명첩을 사기위해 허류를 통한 착복을 일삼는 박차돌이란 인물 등등 비루한 삶을 살다간 민초들의 애환을 통해 어쩌지 못하는 그 지독한 세상과의 단절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음을 목격하게 한다.

그럼에도 그 삶에 대한 애착이란 무엇인지, 동료를 배반하고 배격해야 이어갈 수 있는 것이어서 더욱 무참해진다.
자신이 살기위해 조카 황사영을 지목해야하고, 오라비를 지극히 따르던 여동생과 연루를 피하기 위해 죽음을 사주해야 하고, 밀정질을 통해서라도 지켜내야 했으니 그 현재의 삶이란 것의 끈질기고 던적스러움이 새삼 몸서리 처진다. 현세의 역겨움, 그래서 그 구역질나는 세계를 떠나 감히 죽음을 불사했던 이들의 구원을 향한 몸부림은 더욱 처절하게 다가온다.
아마 흑산의 아니, 비록 흐리고 어둡지만 가느다란 빛이 있음직한 자산(玆山)을 말하던 약전의 저 너머 세상에 대한 희구는 애처롭고 간절한 무엇이 되어 마음을 두들긴다.

자고로 반란, 대중운동, 혁명은 그 모습이 종교의 형상을 하던, 이념을 앞세우던, 현재에 발을 딛고 설수 없다는 민의 표식이다. 우리의 역사는 이를 해결하거나 청산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반복을 해댄다. 소설 속 박차돌이 죽은 여동생을 묻던 쇠락(衰落)한 절두산 잠두봉 성지는 이처럼 특정 종교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민초들의 고난과 아픔, 그 구원을 외치던 해방의 장소이다. 처형대에서, 감옥에서, 그리고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던 선조들의 침묵의 언어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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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본능 - 불, 요리, 그리고 진화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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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행태와 습속, 외양 등 우리가 왜 오늘의 이러한 모습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에는 바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규명함으로써 인간 자신에 대한 이해라는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서려는 욕구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신체의 형태, 행동 양식, 사고방식 등에 생태계의 어떤 선택압(選擇壓)이 작동하여 진화를 이끌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직립보행하게 된 배경, 나무에서 내려와 대지를 삶의 바탕으로 삼게 된 이유, 뇌가 커지고 생각을 하게 된 압력, 성별로 차별화된 기능분담이 이루어진 원인 등등, 이러한 것들로 진행하게 한 어떤 자연적 힘, 그 결정적 요인을 안다는 것은 바로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는데 있어 지극히 중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그간의 인류는 무수한 답을 내놓았다. ‘놀이’하는 인간,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 ‘불’을 사용하는 인간과 같이 우리가 인간이게끔 구별된 종으로써의 진화와 또한 인간의 본능과 문명 행태를 설명하는 요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사실 이러한 가설들 중 하나는 인간의 진화를 설명하는 진실일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그것들로만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데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데 저자 ‘리처드 랭엄’은 이와 같은 견고한 가설들에 또 하나의 가설을 더하고 있다. 의외의 주장으로 ‘화식(火食)가설’이라는 익힌 음식을 먹게 됨으로써 인간은 인간만의 독특한 진화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 피우기 ; 화식은 어떻게 해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는가」라는 원제목이었더라면 훨씬 이 책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수월했을 것이다. 『요리 본능』이라는 번역판 제목은 마치‘요리’능력이 생래적으로 각인되어 있었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결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현생인류로의 진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요리본능’을 발휘한 적은 없다. 단지 익힌 음식, 불에 굽거나 두들겨 연해진 음식을 먹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그래서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다. 단지 익힌 음식이 어떻게 직립으로, 나무에서 대지로, 성별에 따른 기능분화로, 사회화로 이끌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야기하는 것이다.

우선 뇌의 무게가 여타 유인원을 제치고 커지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를 먹거리의 차별에서 찾고 있다. 뇌는 신체의 다른 어떤 기관보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히 침팬지와 같은 타 유인원보다 고열량의 음식을 섭취했음을 증명해 내지 않는 이상 설명할 수 없다. 오랜 시간 씹어야 하고 소화하는 데 또한 장시간을 요구하는 거친 풀과 열매와 같은 음식으로서는 고 칼로리를 확보 할 수 없다. 우리의 조상은 이들과는 달리 부드러워 씹고 소화가 쉬운 연한 뿌리식물들, 과즙이 풍부한 과일들, 그리고 약간의 육식을 함으로써 그들과는 차별화된 섭생을 함으로써 신체의 내장기관을 대폭 줄였으며, 이들 내장기관이 소화를 위해 요구하는 막대한 열량을 뇌로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침팬지나 보노보, 오랑우탄과 같은 유인원에 비해 인간의 내장은 신체크기에 비해 1/3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이것이 바로 먹거리가 선택압을 다르게 작동시킨 결과이며 뇌의 용량이 커진 것을 설명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뇌가 커지게 됨으로써 보다 넓은 영역에 대한 관점을 제공하고 사고의 능력을 신장시켰다는 것이다. 한편 고 열량의 에너지원은 수렵을 통한 육식이 가능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생식의 문제가 대두된다. 질긴 고기를 날 것으로 먹었을 때 실제 위와 대장에서 소화하는 양은 극히 적어 대부분은 소화되지 못하고 덩어리가 되어 배설된다고 한다.

이것은 야생 유인원들의 섭생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며, 원시 부족들의 식생활에서도 발견되는데, 유인원들이 단백질 보충을 위해 타 동물을 살생하더라도 부드러운 내장만을 먹고는 질긴 고기를 방치한 채 버려두는 양태라든가, 원시부족의 극히 예외적인 생식에서도 연한 지방이나 내장은 먹지만 고기는 익혀서 먹는 행태가 그것을 입증한다고 한다. 바로 현생인류로의 비약적 발전인 뇌의 용량의 증대와 내장기관의 축소는 불을 통한 고기의 익힘으로써, 부드러워진 음식으로 소화를 용이하게 하여 비싼 대가를 치루던 소화기관의 열량을 뇌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에 거친 야생의 음식들, 열매, 풀뿌리, 생고기를 익힘으로써 씹고 소화하는 시간을 괄목할 만큼 줄이게 되었으며, 이는 곧 일생을 먹고 소화하는데 분주해야 했던 삶의 시간을 혁명적으로 바꾸게 했다는 것이다. 사냥은 매일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또한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불이 없다면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채집하고 씹고 소화하는 식물성 음식의 생식을 포기하고 성공률이 극히 낮은 사냥에 실패했을 경우에는 이는 곧 죽음이라는 생명의 담보를 요구하는 위험한 행위였기에 쉽게 수행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을 통한 익힌 음식은 획기적으로 여유 시간을 만들어 냈고, 사냥의 시간을 확보케 하였으며, 육식의 기회가 그만큼 증가하게 됨으로써 뇌를 비롯한 신체구조의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화식(火食)은 이러한 인간의 신체적 진화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독특한 생활구조인 사회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유인원을 비롯한 야생의 동물들은 자기의 먹을 것을 나누어 먹지 않는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전의 우리 조상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에 익힌 음식은 오래 저장할 수 있었고, 불가에 둘러 앉아 관계성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곧 사회적 구조를 가능하게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는 남녀 성(性)의 차이에 따른 기능분담이라는 의미심장한 배경이 이면에 놓여있다고 주장된다.

신체적으로 남성에 비해 작은 여성이 자신의 채집 식량을 쌓아두고 홀로 불에 익혀 먹는 것은 수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불을 피워 음식을 익히는 냄새는 주변 남성들의 약탈을 촉발 했을 것이며, 여성은 완력으로 이를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음식을 특정 남성에게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식량을 지키고자 했으며, 이렇게 여성으로부터 제공된 안정적인 음식의 제공을 받은 남성은 사냥을 하기위한 시간의 확보는 물론, 안정적인 생존이 가능했을 것이다. 결국 저자는 지금까지의 진화론적 정설을 뒤집는 주장을 하는 것인데, 여성의 남성 선택이 성(性:sex)적 선택이 아니라 식량, 즉 먹거리의 보존을 위한 것이라는 새로운 가설이다. 여성은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남자를 기다리고 남자는 그 여성을 사회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진화 속에 각인되어 현대 인류사회에 있어서조차 남성과 여성의 성적 구분에 의한 가사분담의 역할 구분으로 나타나는 뿌리깊은 본성 중의 하나라는 것이며, 성은 음식보다 후차적인 것으로서 먹는 것이 제1의 본능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화식이 인간이 되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주장하는 이 책의 여정에는 이 밖에도 흥미로운 주제들로 넘쳐나고 있다. 생식과 다이어트의 그 역설적 관계는 아주 대표적인 화식가설 주장의 논리적 뒷받침으로 등장하는데, 소화율을 보더라도 익힌 음식에 비해 절대적 열위인 생식은 그 음식이 가진 열량을 흡수하지 못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야윌 수밖에 없는 것이니 다이어트 효과가 반대급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과연 생식이 인간의 섭생에 익힌 음식보다 유익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가능해진다. 200만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의 진화 역사를 보더라도 불에 익힌 음식이 인간을 만든 이상 이를 역행하는 생식이 인간의 신체에 더 유용하리라는 주장은 왠지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불에 탄 음식에는 발암불질이 발생한다고 하지만 인간은 이에 대항하는 유전적 요소를 또한 진화시켜 왔다는 것이다. 생태학, 심리학, 동물학, 진화생물학, 인류학, 고고학 등 다채로운 이론적 배경과 실험사례가 즐비하다. 이들을 통해 인류 진화의 혁명적 계기를 주장하는 이 책은 그만큼 흥미로우며, 재치 넘치는 지혜가 그득하다. 새롭게 보고 해석하려는 시각, 저자와 같이 세상을 보는 이러한 탐구자세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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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가든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6
기리노 나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무라노 미로’시리즈를 완결하는 4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이다. 특히 미로 시리즈를 읽었던 독자로서는 이 소설집을 통해서 그녀의 삶의 원형을 확인, 완성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로소 완결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첫선을 보였던 『얼굴에 흩날리는 비』의 처음 장면부터 음울하게 흘러내리던 새벽녘의 빗소리처럼, 또한 SM 쇼와 같은 소재에서 느껴지던 특유의 욕망의 끈적거림에 내재된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와 관능적이며 그로테스크한 세계에서 전율케 하던 근원을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표제인 단편「로즈 가든」은 죽은 남편으로만 등장하던 ‘히로오’의 삶의 모습과 기억을 통해 미로라는 여인을 재구성하여 그녀의 치명적 독성을 이루게 한 요소들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더구나 『다크』에서 아빠 ‘무라노 젠조’를 의붓아버지임을 부각함으로써 적개심까지 불태우던 그 심리적 배경이 된 원인을 목격 할 수도 있다. 의붓아비와 소녀 미로의 금지된 장난, 그리고 이 야릇한 비밀이 발산하는 퇴폐적이기 조차한 어떤 원시적 관능까지 몽환적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한편 시리즈 각 작품에 공히 흐르던 인간 모두가 내밀히 품고 있는 악의(惡意)를 단순한 일상으로부터 발견케 하는 「표류하는 영혼」이라든가, 「혼자 두지 마세요」와 같이 사랑과 욕망의 혼돈, 그리고 거짓과 분노하는 인간을 목격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수록된 단편인 「사랑의 터널」은 마치 미로시리즈에 등장했던 온갖 불온하고 불편했던 존재들이 뿜어내는 은폐된 폭력과 강압, 은밀한 욕망의 집산지처럼 극한의 자극 세계를 좇는 감각이 마비된 현대인들의 어두운 공조를 까발린다.

이러한 작업은 욕망에 취약한 인간의 정신, 불완전한 인간세계, 악의에 대한 해방을 염원하는 미로의 세계, 우리들이 진정 헤어나야 할 닫힌 공간으로부터의 탈출, 어둠의 미세한 균열을 찾는 여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니게 한다.
이렇듯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은 인간 욕망의 이면에 감춰진 어둠의 세계를 파헤치기에 엽기적이고 음침하며 음란하기조차 한 소재들로 인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지만 치밀한 복선, 논리적 정교함을 통해 우아하기까지 한 분위기로 전환되는 탓에 그 기이한 마력에서 쉽사리 발을 빼지 못하게 한다.
장편『천사에게 버림받은 밤』을 연상시키는 단편「혼자 두지 마세요」에 등장하는 게이바, 호스트바, 포르노그래피 등 어두운 욕망이 암약하는 오늘의 세계, 그것이 딛고 있는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세계의 심각성이 발작적 슬픔처럼 다가오게 하기도 한다.

또한 장편 『다크』에서 선악 관념이 더욱 흔들리고 보다 감성적 인물로 변한 미로를 접했던 독자로서 증오와 삶의 체념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인 그녀의 내면이 왜 지옥의 어둠 같이 뒤틀린 잔인한 무엇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또한 폭력적 분노, 광기에 휩싸인 미로의 거침없는 감정의 질주처럼 악마적 탐욕스러움으로 그녀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완전히 전복시켰던 장면들이 이 세계의 당혹스런 도덕성에 직면케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반항과 반란의 열망이었음에 대한 이해를 완성시켜준다.

매혹되었다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었던 미로 시리즈를 완결하는 이 소설집을 덮는 심정이 아쉽기만 하다. 붉은 장미 같고 독사를 품은 것 같은 여인, 순수함과 관능을 동시에 발산하는 이 여인에 중독된 독자들에게 『로즈가든』은 위안을 삼게 해 줄 작가의 배려인 듯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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