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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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렌커의 작품은 전체주의 중국의 획일화된 언어와 서구 자본주의의 물신에 경도된 권력자들의 탐욕정치 하에서 사활을 건 글쓰기임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이 모두 판금(販禁)되었고, 이젠 중국내에서 새로운 작품의 발표는 아예 가능치도 않은 상황이어서 이 작품 『사서(四書)』는 오직 외국에서만 출간되고 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작가는 한국어판이 가장 먼저 출간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정부로부터 혹독한 처벌을 두려워 한 중국내 출판사들이 모두 출간을 거절한 탓이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첫 작품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마오쩌뚱의 혁명적 금언을 조롱함으로써 사회주의의 미명하에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참담하게 억압하는 혁명의 비정함과 모순성을 관능적 언어로 지펴냈는가 하면, 『딩씨 마을의 꿈』에서는 물신에 영혼을 상실한 부패한 정부 관리, 권력의 부도덕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인간의 생명, 즉 죽음을 담보로 하는 물질주의의 망령에 대해 맹공을 가하며 인민들의 처절한 절망과 고통을 함께한다.

 

『사서(四書)』는 이렇듯 엔렌커의 무너져가는 인민의 삶과 체제의 부패와 자기모순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에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은 학자, 종교인, 교수, 음악예술가, 작가, 의사, 과학자 등 지식인들의 정신을 개조한다는 명분하에 황허 유역의 거대한 불모지를 구획한 벽지의 수용소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종의 광대한 집단농장 중 가장 깊숙이 위치한 99구 라는 구역의 참담한 기록의 형식을 하고 있다. 제목은 바로 이 기록이 4개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작중 인물인 ‘작가’가 쓴 「옛길」,「죄인록」, 그리고 ‘학자’가 쓴 미완성의 원고「시시포스의 신화」, 그리고 누군가의 구술을 받아썼다는 「하늘의 아이」이다.

 

그렇다.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저 직업적 신분을 부르는 작가, 종교, 학자일 뿐이고, 체제의 상부에 의해 죄인이 된 이들의 노동과 일상을 지도하고 명령하는 99구의 감독자 역시 그저 ‘아이’일 뿐이다. 일종의 집단농장에 끌려온 이들에게 제시되는 10계명의 문장들이 모두‘일률적’이라는 관형사로 수식되듯이 전체주의 하에서 개인의 존재란 의미는 불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 개체의 존엄성이 박탈된 체제에 대한 조롱과 분노와 비난을 엔렌커 식으로 표현한 것일 게다. 개인의 신념과 양심, 사상이 인정되지 않는 획일화된 사회, 이 일률성에서 이탈하려는 자는 반동이 되고, 죄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개체 고유를 분별하는 이름이 없다. 그렇게 된 것이다.

 

1. 위신구 99구의 에피소드들

 

죄인들에게는 밀농사를 위한 불모의 토지가 분담되고, 달성 불가능한 수확량이 할당된다. ‘아이’는 어떠한 폭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망이 불가능한 99구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할 뿐이다. 붉은색 종이꽃 125송이를 모으면 어떠한 제약도 없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다. 단지 꽃 모양으로 오려진 색종이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권한을 내재하고 있다. 붉은 색종이가 물신(物神)화 된 것이다. 물신주의에 강한 저주를 보내는 체제가 온갖 물신들, 우상들로 그득하다는 것은 이미 자기 모순을 암시한다. 물신화된 꽃송이는 곧 자유와 해방이라는 강렬한 의미와 동격이다. 그래서 죄인들은 쟁기를 끌고 씨앗을 뿌리며 열성적으로 할당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중노동에 자신들을 몰아넣는다.

 

목표량은 아이가 숭배하는 상부(上部;위계에 의한 권력기관의 단계)의 진출을 위한 염원과 함께 늘어나고, 아이의 명령에 적극적으로 헌신하고 순응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꽃송이는 한 때 지식인이었던 죄인들을 경쟁의 지대, 탐욕의 영역으로 이끈다. 꽃송이를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연대감도 연민도 존재하지 않는다. 「옛길」과「죄인록」를 쓰고 있는‘작가’는 동료 죄인들의 언행을 내밀하게 기록하여 아이에게 제출하고, 그 고발의 대가로 꽃송이를 받는다. 존경받는 유명 작가였던 이가 어떤 번민이나 고뇌도 없이 염탐꾼이 되어 동료를 팔아 자기욕구에 몰두하는 것이다. 남녀 간에 애정전선의 기미만 포착되어도 불륜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그를 통해 귀향의 티켓이 될 수 있는 꽃송이를 위해 고발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이러한 행동에 있어 여타 모든 죄인들은 한 치의 차이도 없다.

 

이처럼 소설은 아이와 죄인들이 꽃송이라는 물신을 두고 벌이는 긴장관계인 것이다. 125송이의 붉은 종이꽃, 혹은 다섯 장의 붉은 별을 획득하기 위한 에피소드이다. 여기에 아이의 명령기관인 상부, 즉 체제의 지배 권력이 발하는 기만과 위선, 부조리의 면모들이 더해져 그야말로 오늘의 전체주의 중국의 일그러진 자가당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영미(英美) 등 서구문명을 폄하하고 무시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하는 체제의 열등감이 인민의 삶을 한없는 곤궁함과 절망의 세계로 밀어 넣고 있는 현실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꽃송이를 모으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던‘연구원’이란 남성이 급기야 125송이를 받아 99구를 유유히 떠나는 것인데, 바로 획득 배경이 그것이다.

 

자석으로 황허유역 모래밭에 있는 흙철을 모아 철을 생산한다는 발상인데, 곧 이 아이디어는 중국 전체로 확산되어 철 생산을 독려하기에 이른다. 귀향의 혜택과 상부기관의 진출이라는 포상을 위해 99구의 아이와 죄인들은 황허의 강변 모래밭에 가마를 만들고, 자석으로 흙철을 모으기 위해 중노동을 하며, 철을 녹일 연료를 위해 나무를 남벌한다. 늘어나기만 하는 생산 압력은 얼마 남지 않은 농기구마저 녹여야 하게 되고, 급기야는 흠 없는 강철의 생산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흙철로는 생산이 불가능한 강철을. 이 기만을 꿰뚫어 본 99구의 죄인과 아이는 아이가 보관하던 강철로 만든 작두를 녹이고, 이웃한 98구, 97구...역시 똑 같은 짓을 할 것을 예견한다. 동일한 강철이라면 상부에, 체제의 지배권력을 만족시킬 수 있는 차별화만이 살 길이 된다. 그래서 오각별로 만든 강철에 붉은색을 칠하여 참가하지만‘충(忠)’자를 새겨 넣은 강철에 1등을 내주고 만다. 권력에 충성하는 것이 체제의 상징을 누른 것이다. 주와 객이 전도된 오늘의 중국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다. 부패한 권력, 위계화된 계급주의의 변질된 체제, 무지와 무능함으로 점철된 실종된 체제정신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아마 소설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아이의 허락을 받아 옥수수알, 아니 땅콩만한 밀알을 생산하기위해 자신의 피를 받아 밀밭에 뿌려대는 것이다. 밀의 성장에 따라 점점 많은 양의 피가 필요하고 과다한 출혈로 건강을 급격하게 잃어가는 과정은 울음과 비웃음이 섞여 나오는 기이한 희극이 아닐 수 없다. 99구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작가의 몸부림이자, 상부, 아니 최고의 상부기관이 있는 베이징에 발을 딛기 위한 아이의 염원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피의 향연이다. 흩뿌려진 비릿한 피로 붉게 물든 대지와 피를 먹고 자란 옥수수처럼 웃자란 밀대는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다. 자유와 영예를 위해서 인민은 피를 뿌려야 하는 체제란 것이다. 참담함과 절망감이 이렇게 소설 전체를 흐른다.

 

2. 십자가를 진 ‘하늘의 아이’

 

땔감으로 남획된 무분별함은 대홍수를 부르고, 기근을 낳는다. 식량은 더 이상 배급되지 않고, 죄인들은 풀뿌리와 풀씨로 연명하고, 죽어 나가기 시작한다. 성모의 그림을 숨겨두고 있던 ‘종교’는 아이를 찾아가 몇 알의 볶은 콩을 위해 성모의 그림을 바닥에 놓고 짓밟아 상부가 원하는 인간으로 변하였음을 시위한다. 그리고 불륜으로 낙인이 찍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돌아온‘음악’은 파트너인 ‘학자’를 위해 이웃 구의 상부에 몸을 주고 약간의 콩과 만두를 얻어오는 일을 반복한다.

 

작가는 음악의 이러한 매춘 행위를 미행하고 매춘의 상대자인 이웃구의 상부를 협박하려하다 도리어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작가의 행위는 여전히 자신의 안위에만 머물러 있다. 동료들의 밀고록인 「죄인록」과 달리 그가 쓴 또 하나의 기록인「옛길」은 99구에서 풀려났을 때 출판할 야심찬 기획으로 준비되는 것이다. 부패한 권력과 상부를 향해 진실을 외칠 줄 모르는 중국의 문단, 중국 작가들의 초상이다. 고통 받는 인민의 삶에 대해 아무런 감각도 지니지 못한 지식인이란 허울만 뒤집어 쓴 몽매한 이들의 표상에 다름 아니다.

 

이와 대비되어 아이, 곧 상부인 체제의 기만성과 부당성에 저항하는‘학자’란 인물이 있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신념을 저버리지 않음으로서 꽃송이라는 당근의 획득으로부터 불이익을 감수한다. 그러나 죽음이 짙게 내려앉은 99구로부터 사랑하는 연인‘음악’의 해방을 위해 옥수수처럼 거대하게 자란 밀을 경작하곤, 마침내 아이에게 곱게 포장한 거대한 밀을 안긴다. 아이의 꿈인 베이징으로의 통로를 위해 협력한 것이다. 모든 진실과 정의는 사랑에 기초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아이의 꿈이 실현되고 죄인들의 해방에 대한 염원을 체제가 수용할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권력이 원하는 것은 그네들의 부패한 권력에 충성하는 것이지, 지식도 인민의 삶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와 작가, 학자, 그리고 여타 죄인들이 알게 된 것은 무엇일까? 볶은 콩을 입에 가득 넣은 채 흉측하게 질식사한 음악을 발견한 작가의 자기반성과 번민은 자신의 살을 잘라내 고깃국을 끓여 굶주린 학자를 대접하고, 음악의 시신 앞에 바치는 속죄의식으로 이어진다. 또한 자신을 십자에 못 박고 자유의 징표인 강철별을 죄인들에게 나누어주는 아이의 순교행위로 나타난다. 너희들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가겠다! 그러나 엔렌커는 아이의 죽음의 대가로 자신들의 집으로 향하는 죄인들 앞에 99구로 향하는 일찍이 자유를 찾아 갔던 연구원의 회귀를 마주하는 아이러니를 두고 있다. 밀을 경작하며 편히 먹고살던 99구의 옛 시절을 생각한 회귀이다. 전체 인민의 삶 모두가 이미 피폐해져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게다. 혹은 동료였던 지식인들에 대한 소통의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이 아이러니는 학자가 쓴 「시시포스의 신화」의 수정된 우화에 가 닿는다. 반복된 노동의 고통, 그러나 “징벌이 주는 고통이나 변화, 무료함, 죽음 등에 일단 협력하게 되거나 적응하게 되면 징벌은 의미를 잃는다. (중략) 적응은 무기력함과 부득이함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도출해내게 된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발전시킨 체념과 타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곤 한편으론 “타성의 체념 역시 의미있는 저항과 능력을 갖”으며, “타성은 순응을 낳고 적응은 힘을 갖는다.” 무슨 의도를 지닌 말일까? 획일화하여 억압하고, 격리하여 복종시키려 한들 인간은 곧 적응하고 고유의 능력, 새로운 힘을 발견하고 체화한다는 말이다. 갇힌 체제, 권력에 순응하지 않는 인민을 핍박한다고 해서 저항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순응과 조화를 신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학자가 탄생시킨‘동양의 시시포스’를 보면 체제의 상부는 아마 화들짝 놀라지 않을까 싶다. 전체주의 신들은 결코 엔렌커의 붓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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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의 역사
조성권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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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부터의 산물, 설혹 그것에 인간의 인공적 조작이 관여하였더라도 그 대상 자체가 좋은가 나쁜가는 항상 인간이 그것을 어떠한 태도로 바라보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우라늄이 악의 물질이라서가 아니라 인간과 인류의 문명을 파괴하는 용도인 핵폭탄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마약 역시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치료물질로 사용될 경우에 이것은 선한 의약제가 된다. 그러나 중독을 통해 물질에 종속되게 하거나 범죄적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면 비로소 악한 물질이 된다. 마약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이다. 즉 인간이 어떻게 접근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마약은 혐오의 물질로, 불법적 물질로서 배척되는 물질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친다. 무엇이 이렇게 인식하게 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이 아마 이 책의 내용이라 할 것이다.

 

마약의 기원과 이해의 역사

 

마약은 인간의 역사에서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을까? 마약 식물에 대한 최초의 문자 기록으로 볼 때 BC3000년경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대체로 원시 샤먼의 종교적 의식 및 치료용으로 이용되는 초자연적 객체로서 샤먼이 주술을 실행할 때 환상의식 혹은 환생의식을 통해 정신세계로부터의 교감을 얻는 매개 수단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마약이 종교와 치료의 도구라는 긍정의 물질이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후 이러한 사용은 구약의 <출애굽기> 등이나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빈번하게 발견되는데, 출애굽기의 ‘신성한 향유(Holy anointing oil)’는 대마초를, 오디세이에서 헬렌의 네펜테가 아편임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종교에, 그리고 치료제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묘한 것으로 이해되던 물질이 히포크라테스(BC 460-370)에 이르러 처음으로 과학적 객체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모양이다. 신비함에서 과학으로의 변화, 즉 마약에 대한 과학적 인식은 “샤먼에 대한 초자연적 종교적 의식을 몰락시키고 점차 세습적 권력 엘리트에 의한 정치적 의식을 선호하게 됨”으로써 지배력의 이전이라는 결과의 초래를 이해 할 수 있다.

 

고대 로마사회는 이렇게 마약식물의 신성에서 치료물질로 이해되어 육체의 고통을 줄이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서 주로 양귀비에서 추출한 아편과 대마초가 주류를 이루어 대중에게 폭넓게 사용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기독교의 대두는 이러한 마약식물을 금기시하게 되는데, 알코올이나 마약으로 인간 육체의 고통을 줄이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위배는 것으로 순수한 신앙으로서 육체적 고통을 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독단 때문이다. 이로서 마약식물은 과학적 기반의 물질로서 약리학 발전을 몰락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무려 1000년의 중세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더구나 기독교 자체의 교리를 위해 부정하던 악마의 존재를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교부가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마약은 그야말로 악마와 공통의 언어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아무튼 기독교란 일개 원시적 종교가 인류사회에 미친 해악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듯하다.

 

결국 이러한 중세 기독교의 마약에 대한 인식 배경은 대기근, 자연재해, 흑사병, 백년전쟁, 장미전쟁 등 오랜 내전과 종말론적 현상으로 고립화되자 위기를 탈출하려는 시도로 대중의 통제를 시도하게 되는데 그것이 종교란 이름으로 무려 200여 년간 잔혹하게 수행된 마녀사냥이다. 기독교의 본질인 여성혐오를 배경으로 팽배한 사회 불안감의 해소구로 약초지식을 가지고 있던 여성들에게 마녀 혐의를 뒤집어씌움으로써 사회통제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마녀 재판의 공통요소가 ‘여성+마약+섹스=사탄의 유혹’이라는 점은 곧 마약에 악(惡)이라는 의미를 편의적으로 고착화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악의 선물로서 마약이 ‘신의 선물’로서 다시 명예를 회복하게 되는 것은 근대 이성주의, 계몽주의의 대두로 부터이다. 중상주의와 과학적 이성의 대두는 마약의 치유 성분에 대한 긍정적 발견을 의미하는 것이고, 아편을 함유한 셰리와인으로 제조된 로더넘과 같은 소프트알코올은 광범위한 대중적 약제로 확산된다.

더구나 모르핀, 헤로인, 코케인과 같은 새로운 합성 마약의 생산과 피하주사기의 발명은 마약의 대중적 확산을 초래하게 되는데, 이는‘중독’이라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마약의 이름을 보더라도 당시 마약에 대한 생각을 엿보게 되는데, 모르핀이란 바로 꿈의 신인 오르페우스의 독일식 표현인‘모르피움(morphium)’에서 따온 것이나, 독일 바이엘 제약회사가 헤로인을 모르핀의 치료제로서 추출 재발견하는 예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선물, 긍정의 물질이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습관’과는 달리 개인 자신의 행위 통제력을 상실한 탐닉인 중독의 문제는 개인 습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죄악으로, 즉 범죄로 간주하는 태도의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현대 마약사 - 범죄화, 그리고 권력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마약은 이렇듯 중독이라는 통제 불능의 개인 습관에 범죄의 딱지를 붙인다. 벤담이나 J.S.밀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이 대두하면서 마약 중독에 대한 책임은 개인 자신의 범죄로 치부되지만, 사회구조적으로 약자인 노동자들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몰상식한 계급주의적 발상이란 비판을 면치 못하기도 한다.

실제에 있어서도 마약은 노동자들에게 자본가들이 의도적으로 공급하는 시스템을 낳는데, 광산주나 철도건설주들이 아편 공급범죄단과 연계하여 육체적 고통과 배고픔을 잊도록 하여 저임금으로 생산력을 착취하는 효과적인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약은 자유주의자들의 말처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없는 사회구조적 책임이었음을 부정 할 수 없다.

 

이러한 사회구조적 차원에서의 마약의 이해는 현대 마약사에 있어서 중요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일반 대중에게 마약의 침투는 국가적이고 국제적인 차원의 이기심에서 출발한 역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이래 최초의 국가 간 불평등 조약이라 할 수 있는 ‘난징 조약(1842년)’이 바로 영국이 자신들의 무역 역조를 시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중국에 아편을 무차별적으로 공급하여 개인과 사회를 피폐화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의 세관관리는 물론 부패한 권력자들과 결탁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부패한 권력 혹은 정치적 이해로부터 마약이 범죄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이 19세기에서 21세기 오늘에 이르는 역사이다. 손문이 신해혁명을 위해 마약조직인 삼합회 홍방으로부터 자금을 조달 받았고, 장개석은 국공내전을 위해 청방으로부터 군사비용을 조달한 것은 마약과 정치권력이 연계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후 중국 공산당 집권이후 삼합회가 동남아로 마약생산기지를 이전 구축하는 과정에서 반공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미국이 적극적으로 묵인하고 지원하였던 것도 권력연계의 일례이다.

 

특히 오늘날 가장 많은 마약 중독자가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마약 시장으로 골머리를 앓는 미국의 현실은 부메랑 효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냉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반공조직을 지원하는 자금원으로서 동남아시아, 남아메리카, 서남아시아 지역의 마약 생산기지를 육성하고, 후원하며 또한 이라크-이란의 8년 전쟁에서 미국이 자국의 이해를 위해 마약밀매 시장을 어떻게 주도적으로 사용하였는가는 국제정치는 물론 마약조직의 국제화, 즉 범죄의 국제화가 이루어지게 된 동인을 목격하게 한다. 결국 자신이 키워놓은 악의 근원에 자신의 목이 죄는 형국이라 할 수 있다.

 

마약, 이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마약은 이제 국제적인 조직망에 의해 움직이는 거대한 권력이 되어있다. 정치권력, 국가의 이기심이 키워놓은 존재이다. 미국, 영국 등 유럽 등 선진국들은 마약의 밀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 밀매를 종식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콜롬비아 메데진 카르텔, 러시아 마피아, 멕시코 카르텔, 중국 삼합회 등 거대한 마약 조직은 합법적 비즈니스 시장에 진입해 있고 또한 부패 권력과 연계하고, 법집행기관으로부터의 안전을 위하여 테러조직이나 범죄조직과 끈끈한 동맹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인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더러운 동맹이라 할 수 있다. CIA+노리에가 친미독재정권+콘트라스반군+메데진 카르텔을 연결하는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은 마약조직과 권력의 추악한 밀원관계를 보여준다. 더구나 콜롬비아나 멕시코는 아예 대통령은 물론 국가권력의 핵심부가 마약조직으로 구성되어 있거나 국가 기관에 정면 도전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 이렇듯 거대한 자본을 축적한 마약조직이 초국가적 범죄조직이 되어 세계화라는 기류를 타고 전 세계에 확산되는 것은 이제 불가항력적이기만 한 것 같다. 한 지역을 차단하면 금 새 새로운 지역에 생산기지가 옮겨가는 풍선효과로 인해 그 종식은 요원하기만 하다.

 

금지와 억제 정책은 풍선효과로 인해 오히려 폐해만을 증폭시킨다. 강력한 생산지 봉쇄정책은 마약의 국제 거래가를 폭등시켜 범죄조직의 이윤만을 늘려줄 뿐이다. 다시 말해 수요의 변화 없이 공급을 막는 정책은 그 효과가 의심스럽다는 말이 된다. 네덜란드는 이러한 마약수요의 억제를 위한 하나의 정책 모델이 된다. 마리화나 같은 소프트한 마약은 비(非)범죄화 하고 범죄자가 아니라 환자로 간주하여 의료계를 끌어들여 개인 및 사회적 해악을 최소화하는 정책이다. 실제 중독자 수를 줄이고 AIDS 방지에 효과를 거두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고 한다.

 

국내법이 강화될수록 불법수익이 높아지는 마약밀매의 경향은 마약 유통의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 쾌락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탐욕으로 인한 유발이기에 그 근본적 단절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마리화나 같은 소프트 마약의 비범죄화가 하드 마약 사용으로의 전환 계기만 제공한다는 비판도 존재하지만, 마리화나 흡연이 알츠하이머병, AIDS, 폐암, 유방암의 치료와 환자의 고통을 경감하는 효과가 보고되고 있다고 하며, 호주, 벨기에, 캐나다, 이스라엘, 네덜란드, 미국 15개주 등 일부 선진국들에서는 이러한 소프트 마약을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추세인 모양이다.

 

금지와 획일적인 불법화, 나아가 “완전 박멸 같은 실현 불가능한 전략보다는 소비에 대한 적절한 관리를 유지하면서 확산을 방지하는 선택적 통제전략의 추구가 장기적으로 실용적인 정책”이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제언은 우리의 문화적 현실로 볼 때 고려해 보아야 할 정책으로 이해된다. 보이지 않는 백색 유령을 인간이 어떻게 접근하느냐하는 태도의 문제라는 말은 되새겨 봐야 할 생각일 것이다. 마약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다! 마약의 종교적, 치료적 기원에서 악의 선물이 되고, 다시 신의 선물로서, 그리곤 중독과 권력의 부패를 상징하는 악의 언어가 되기까지의 인류문화사이자 마약정책의 흥미롭고 유익한 이해를 갖는 시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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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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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의 전제가 아닐까? 그리고 ‘나’는 이러한 세계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히 인식하고, 이 자각(自覺) 하에 지향하고자 하는 사회를 위해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수순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자본주의’사회라는 세계(생태계)의 속성이 무엇인지, 개인이란 존재는 사회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요인들이 인간 서로를 좌절케 하고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궁극에 도달해야 할 사회형태와 지향되어야 할 인간의 의식을 탐색한다.

 

1. 물신성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많은 저작들의 개념을 집약하여 오늘의 현실을 설명한 이 책을 몇 글자로 다시 표현 한다는 것은 어쭙잖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소비사회, 물질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우리가 놓인 생태계의 본질적 특성을 압축적으로 대변하는 ‘물신성’이란 어휘만큼은 정확하게 납득하여야 할 것 같다.

 

'물신=페티쉬(fetish)'이란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만으로 위안을 받지 못한 인간들이 나무나 돌을 쪼아 신의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빈다는 기원에서 시작된다. 결국 신성이 덧씌워진 물질을 숭배하는 역전된 의식의 전형이랄 수 있다. 오늘의 소비주의를 견인하는 힘은 바로 이 물신성이기에 내재된 무모함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된다. 이 같은 물신성은 종교나 돈, 상품은 물론이고 권력도 지니고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의해서 비로소 주어지는 권력이 일상화되면 권력을 가진 자가 스스로 자신의 내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면서 물신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이 독재화되고 안하무인으로 변질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물신성 때문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물신성을 고착화시켜주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특정한 삶의 방식, 생활양식이라 할 것인데, 삶을 지탱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느냐 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삶은 물론 사고방식까지도 규정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인간의 의식이란 것이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기에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의 어떤 변화는 인간 개개인이 생각을 고쳐먹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생산양식, 즉 ‘물질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물신성을 우리들이 어떻게 깨뜨리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만족스러운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항상 부딪히는 딜레마 때문이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구조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인지라는 수순의 장벽에 봉착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은 “사회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이 참여하는 관계의 총합을 표시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말로부터 잘못된 의문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개인의 총합이 사회라고 생각한 단순함의 어리석음 탓일 게다. 전통적인 생각, 행동방식, 관습 등이 하나의 패턴을 이루어 구조화되고 그것이 오늘의 나와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구조라는 무수한 관계들의 총합이 세계임을 생각할 때 개인과 구조의 비교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근거의 토대위에 놓인 물신성이란 사회 조건 의 변화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다. 사회조건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발견은 내겐 중대한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대상의 물질화에 따른 가치의 전도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실천의 진리를.

 

2. 경쟁에서 호혜의 원리로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시장 경쟁의 논리를 신봉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모두가 자신을, 상품을 팔기위해 죽기 살기로 경쟁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상품이야 팔고나면 그 후에는 치열한 경쟁의 지위에서 해방되지만 “인간의 노동력이란 것은 판매된 뒤에도 구매자인 자본가의 통제에 놓인 채 일해야 할뿐 아니라 노동자 서로 간에도 경쟁”에 내몰린다. 경쟁을 통해 우수한 것을 얻어낸다는 논리의 미화를 통해 경쟁 뒤에 감춰진 현실의 어둠이 은폐된다. 즉 ‘경쟁’그 자체도 하나의 물신이 되어 숭배된다.

 

그러나 경쟁의 중요한 심리적 기반인 질투, 즉 적극적 욕망은 물론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수동적 욕망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배경으로 인간 상호간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남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경쟁의 속성으로 인해 ‘너’의 기대와, ‘사회’의 기대에 따라 행동할 뿐 정작‘나’는 소외된 인간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오늘의 개인들은 더욱 외롭고 아프지만 소통할 대상, 서로의 이해가 같은 소통체계를 찾지 못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이 물신성에 장악된 자본주의 문제의 본질은 ‘사적소유’이다. 개인이 자기의 물질적 소유를 무한히 늘리려는 욕망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이의 안티테제(Antithese)로서 모두 공공적 소유로 전환하면 해결 될 것인가? 사실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며 불완전한 실험이었지만 일부 국가에서 1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진테제(Synthese)로서 자본주의 특징인 사적 소유를 유지하되 생산수단은 공공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생산양식의 변화를 견인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세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쟁이란 물신사회의 속성은 누그러지고 증여와 답례로 이루어지는 호혜의 시대를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충돌이 진정으로 해결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가 활성화되는 공동체의 구성은 그래서 더욱 실현해야 할 가치일 것이다.

 

3. 이 책에 대해서

 

이 책은『헤겔 법철학 비판』, 『독일 이데올로기』,『경제 철학 수고』등 비교적 감성적인 마르크스 초기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그의 주저인『공산당 선언』,『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자본론』을 망라하여 인간 호혜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론을 일상의 언어로 알기 쉽게 풀어 쓰고 있다.

 

결혼 그리고 육체적 관계가 사랑의 물질적 근거가 되는 일례와 같이 물신성의 이해를 도모하고, ‘목숨을 건 도약’이란 명제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의 끊임없는 혁명의 발생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가 정상적 교환형태인 등가교환이 아니라 부등가교환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것이 바로 자본에 편입된 노동력에 있음을 직시하게도 한다. 그리곤 물신성, 경쟁, 사적소유, 역사 해석의 관점 등을 통해 궁극으로 지향하여야 할 원리로서 인간 상호의 사랑을 발견케 한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곳에 놓여있는가, 나는 왜 아픈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해야 하는가를 소음에서 한 걸음 떨어져 생각게 하는 사색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생산의 사회화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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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안다는 것 열린책들 세계문학 83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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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전원주택 마을에 자신만의 식민지를 만들고 은둔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에게는 빠져있는 삶의 기쁨과 연민, 그리고 욕망을 되찾아가는. 또한 「창세기」의 <그리고 아담은 자기 여자를 알았다>는 구절처럼 그와 삶의 무대를 함께해온 아내와 딸과 노모와 장모, 그리고 스쳐간 여인들을 이해하려는, 그녀들과 자신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일어나고 있는지를 발견하려는 절박한 자기 관찰기이다.

 

이스라엘 비밀 정보요원‘요엘’은 아내‘이브리아’의 알 수 없는 죽음과 함께 은퇴한다. 우연한 감전사인지, 혹은 연인과의 동반 자살인지 불분명한 이 죽음은 아내를 더욱 이해할 수 없게 하지만, 간질 발작의 질환을 지닌 딸, ‘네타’를 보호하려는 책임감과 단짝이 된 어머니와 장모를 위해 텔아비브 근교의 ‘라마트 로탄’이란 전원마을에 은거한다.

 

요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서두를 필요 없고, “내일도 또 날이야.”라는 방기 속에서 기억 속 삶의 흔적들을 추적하며 자기의 여자들을 이해 할 수 있게 되리라는 현재와 과거의 경계가 사라진 시간을 살아간다. 자기 욕망이 배제된 이웃집 여자와의 잠자리, 정원 가꾸기에 공을 들이고, 열여섯 살 딸아이의 삶이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며, 창고에 드나드는 고양이에게 음식을 건네는 단조로운 일상에 과거 기억의 조각들 - 첩보활동을 벌였던 세계의 도시들과 마주한 사람들, 순간의 상황의 기록들, 그리고 그를 향해 뱉어진 문장들... - 이 더해지며 모호하고 알 수 없었던 비밀의 실체를 이해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네 삶이란 것이 본디 재단하듯 그리 명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리라. 선명하게 다가가 이해하려는 비밀들이 명료한 정의로 나아가기에는 흐릿하기만 하다. 아내의 죽음도, 딸의 질병의 원인도, 방콕에서 순간 사라진 여인의 모습도, 휠체어에 앉았던 남자의 움직임도, 이웃집 여자와의 관계도, 모든 것이 분명치 않다. 이런 남자에게 그가 맡았던 사건의 해결을 위하여 비밀정보원으로서의 임무가 종용되지만 딸의 보호를 위하여 거절한 것이 그를 대신한 동료요원의 죽음이 되어 돌아온다.

 

여기에 이르러서 이 소설의 뚜렷한 내적 갈등을 포착하게 되는데, 국가를 위한 임무 수행으로 자기 인생의 유일한 연인이었던 아내를 이해하지도, 보호하지도 못했다는 죄책감의 깊이, 그 고통의 무게를 헤아리게 된다. 반면에 국가의 부름을 받지만 자기 여자인 딸의 보호와 더는 바꿀 수 없다는 사적안위로 인해 동료가 희생되었다는 대칭적 상황으로 인한 또 다른 죄책감이란 구렁텅이에 빠지고 만다. 이 소설에 감정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것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탈출하는 가라 할 수 있다. 소위 ‘마이클 샌델’과 같은 다분히 도덕철학적인, 개인이냐 국가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해당 국면에 정당하게 맞서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죽은 동료의 늙은 아버지를 찾아 비록 혹독한 비난을 받을지언정 스스로는 지울 수 없는 죄의식을 털어내는 것이고, 궁극에는‘살아있음’, 그 살아있음의 불패를 인정하는 것이다. 삶의 이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작가에 대한 경외로 머리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이 전환적 사건으로부터 느린 행보를 거듭하던 소설은 조금 속도감을 찾는다. 딸아이의 보호가 오히려 그녀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각성, 이웃집 여자와의 관계에서 자기 욕망을 발견해 나가고, 자신 속에서 동정과 슬픔, 연민의 힘을 조화롭게 뽑아내는 법을 깨달아간다. 그리고 그토록 풀어보려 했던 비밀들, 즉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풀 수 없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마침내 그는 “ 몇 분 후에 절망적인 친지들은 재앙에 대항하여 슬기롭고 영리하게 자신들을 대신하여 싸워주고 또 쉽게 패배할 것 같지 않은 동맹군이 여기 있다는 신비한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고 조용히 독백을 외친다. 어둠이 순간적으로 밝아지는 흔치 않고 예상치 않은 순간을 맞이하는 요엘이란 중년 남자의 환한 얼굴이 떠오르고, 내게도 “은밀하게 가물거리는 빛이 다가오기를 희망”해 본다.

 

삶의 기쁨을 알지 못하고 지낸 것이 꽤 오랜 시간인 듯하다. 그러니 욕망도, 연민도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 할 터. 병원 봉사활동에서 투명한 기쁨을 온 몸으로 발산하는 요엘을 통해서 삶의 비밀을 모두 알아 버린 것만 같은 넉넉해진 마음을 갖게 된다. 기억과 현실의 일상이 뒤얽긴 독특한 서술구조로 인해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가 실루엣 뒤의 무언가를 기대케 하여 읽기를 주저치 못하게 하는 기교는 가히 약이 오를 정도로 대단하다. 그러나 결코 뚜렷한 형상은 그려 내지 않는다. 'W.G. 제발트'의 『이민자들』의 문체를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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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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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을 당황하게 하는가? 나는 그러해야 한다고 이해한다. 자기 삶의 역사의 고유한 저자로서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인간의 도덕의식의 변질과 파괴에 대한 성찰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에서 인류의 자기 이해를 건드리는 본원적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한낱 먼 미래의 공상적 이야기의 재미 밖에 느끼지 못한다면 이는 이미 인간 종으로서의 자기이해를 상실한, 즉 윤리적 감각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1. 이야기 속으로

 

노인과 십대의 어린 소년, 소녀만이 생물학전에서 살아남은 세계가 배경이다. 한 쪽은 사회적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고 한 쪽은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이다. 그러나 여기엔 오로지 약육강식의 논리만이 작동하고, 물질적 부(富)가 역시 지금과 같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하는 세계이다. 거리의 부랑자로서 숨어 살 수밖에 없는 열여섯 살 소녀‘캘리’는 병약한 어린 남동생‘타일러’를 위하여 결단을 내린다. ‘엔더’라 불리는 노인들에게‘스타터스’인 어린 자신의 몸을 대여하면 동생과 안락한 삶을 꾸릴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바디 뱅크’를 찾아간다.

 

부를 거머쥔 소수의 특권계층 노인들이 젊고 생기 넘치는 아이의 몸을 렌탈하는 것이다. 렌탈된 기간동안 아이는 의식을 상실한 채 기간 종료로서만 자신의 몸을 되찾을 수 있다. 인간의 신체가 사물화되어 거래대상이 된 것이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이미 일어나고 있다. 소수의 부자들은 자신들의 수정란을‘대리모’에 이식하여 대신 임신토록 하고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다. 대리모는 자신의 신체를 1년 이상 이들에게 렌탈하는 것인데, 이 역겨운 일을 의학적 정당성이란 논리로 항변하는 것을 보면 인간 탐욕의 동력에 혐오스러움으로 치가 떨린다.

 

이 렌탈 행위가 불법인 것은 소설의 세상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돈이 이미 최고선(最高善)의 지위를 가진 세상에서 법과 제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프라임 데스티네이션(Prime Destination)'이란 특권층을 위한 바디뱅크에서 공공연히 십대의 신체 렌탈 행위는 자행되고, 급기야 유력 상원의원과 결탁하여 영구 렌탈은 물론 합법화시키는 데까지 이른다. 부와 권력의 결탁, 부도덕과 비윤리적 행위에는 항상 추악한 이것들의 결탁이 있다.

 

여기에 더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물론 젊음이라는 추상성의 연장이랄 수 있겠지만 외형, 표피에 대한 숭배에 매몰된 몰가치화된 미의 추구이다. 성형대국인 한국사회처럼 깍고 째고 주입하여 조형된 얼굴에 대한 획일화된 기준에 몰두하는 정신 실종의 사회상이다. 렌탈되는 소녀는 티 하나 없는 완벽한 피부와 성형을 통해 투명할 정도의 미녀가 되어 대여되는 것이다. 이러한 바디뱅크의 성형기술에 현혹된 일부 부유층 아이들이 프라임 데스티네이션에 찾아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실종된 손녀를 찾기 위해 캘리를 렌탈한 엔더인 헬레나의 추적 작업이 소설의 주요 스토리이다.

 

이 파렴치한 신체 강탈 행위의 원흉을 찾아 불의를 처단하는 것이고, 누군가에게 렌탈당하여 자신의 신체를 잃어버린 손녀를 찾는 것이다. 프라임데스티네이션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머리에 이식된 칩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헬레나는 캘리의 몸을 지배할 수 없게 되고, 캘리는 헬레나를 대신하여 불법적 집단의 괴수인‘올드맨’과 부도덕행위에 협력하는 상원의원을 찾아 진실을 규명하려 한다. 쫓고 쫓기는 긴박감과 사이사이 캘리와 상원의원의 손자인 블레이크와의 풋풋한 사랑의 설렘이 달콤하게 지면을 채워 나간다.

 

2. 제동장치 없는‘욕망 이라는 이름의 전차’

 

오늘 우리들의 세상은 물질적 소비의 광란과 표피적 향락에 정신이 실종되고, 소수의 특권층은 브레이크 없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인간들을 태워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게 하여 이러한 광기가 영원히 계속 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불어 넣는다. 계속 되려면 끝없이 레일을 깔아야 하는데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조만간 대형 참사가 일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물공학 기술은 배아 줄기세포를 도구적으로 이해해도 좋다는 공리주의적 인증과 더불어 의학적 정당화와 경제적 정당화의 논리에 기초하여 인간의 도덕적 감수성을 혼란에 몰아넣고 있다. 생명의 객체화, 대상화, 생산물화로 인한 인간 고유의 정체성을 변질시키고, 인간 종의 윤리적 자기 이해를 붕괴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의 불평등성을 당위시하는 도덕의식의 변질과 파괴가 있다는 말이다. 근육과 같은 신체 강화, 보톡스와 같은 약물 주입으로 피부의 조절, 집중력 강화제 등 생체공학, 유전공학 기술이 만들어내는 도덕적 문제를 우린 회피하고 있다. 인간의 행위 주체성을 침식해서 바로 인간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임에도 지양(止揚)되어야 할 이기적 경쟁의 논리가 만들어내는 불평등이라는‘프로메테우스적 욕구’인 인간의 본성이 아무런 반성도 절제도 없이 극한으로 치닫고만 있다.

 

결국 태아줄기 세포를 얻기 위해 난자가 적출되어 거래되고, 태아가 되려는 수정란을 실험 도구로 사용하다가 폐기하면서 생명에 대한 아무런 도덕적 회의조차 하지 않는다. 불치병 환자의 세포를 동의 없이 반복하여 의료용 재료로 활용하는 등 인간의 신체가 한낱 물질적 도구에 불과하며, 대리모란 신체 렌탈을 마치 자애(慈愛)적 의학수단이라고 정당화하는 정도에 이르러 있다. 그러니 늙어 부패해진 몸뚱어리를 가진 부유한 특권층이 젊은 십대의 신체를 렌탈하여 렌탈된 십대의 소년소녀가 그들의 삶을 잃어버리는 것에 어떤 연민과 도덕적 가책을 느끼겠는가.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의 저서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의 생명을 일단 한 번 도구화하기 시작한 사람, 살 가치가 있는 것과 살 가치가 없는 것을 구분하기 시작한 사람은 정지 없는 궤도를 달리게 된다.”

 

생명 윤리에 대한 논의는 아무리 반복한다해도 거듭해야 하는 긴 호흡이 필요한 규범적 해명과정이 필요한 중대하고 또 중대한 문제이다. 인간 상호간의 대칭적인 책임 묻기의 관계를 제한하는 오늘과 같은 공리와 경제중심의 논리는 절대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논리일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복과 통제의 가치로 유전학 기술을 사용하려는 계층의 야욕은 인류 전체에 적대적 칼을 들이대는 문제이다. 이 비정한 신체 강탈의 가상 세계를 그려낸 SF 소설을 그저 그 소재의 참신성과 스토리의 달달한 맛에만 머물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생명윤리에 대한 도덕적 성찰을 이끄는 훌륭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참고> '바디뱅크'가 미래의 공상이라구? - 사이언스타임즈 2012.4.26자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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