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내전 맑스 엥겔스 에센스 3
칼 마르크스 지음, 안효상 옮김, 최갑수 해제 / 박종철출판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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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왜 지금 다급히 프랑스 내전을 펼쳐야 하는가!  

이 사회의 힘, 이제 국민이라는 신체가 돌려받아야 하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1871530일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된 협회 회원들에 보내는 담화문 형태로 발표된 글로써, 같은 해 613프랑스 내전이란 이름으로 출간된 칼 마르크스의 저작이다. 이 글이 써진 시기를 무엇보다 주목할 이유가 있는데, 바로 파리 코뮌의 국민방위군을 포함한 추산 3만 명이 무참하게 도륙되던 523일에서 530일 사이에 작성된 것이라 점이다.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에 기술된 당대사(當代史)라는 이례성이다. 역사는 이 기간 521일에서 528일까지를 피의 일주간이라 부른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잔인한 대()학살극에 대한 표현치고는 지나치게 중립적인 명명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난폭한 기득 권력이 시민에게 어떤 짓을 할 수 있는가의 역사적 증거다.

 

대략 150년 전 유럽의 한 장소에서 발생한 국가 권력을 독점한 역사에 대한 반동 세력인 소수의 권력이 시민을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대살육 한 것은 가히 인류 역사에서 발견하기 드문 사건이다. 부르주아 측에 서있던 에밀 졸라같은 작자도 이 시기를 묘사한 소설 패주를 썼는데, 시체가 마구 버려져 산더미처럼 쌓인 파리 시가지와 불에 탄 시체들의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배경처럼 묘사할 정도였으니 그 끔찍함의 정도는 아마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18713월부터 10주 남짓 노동자시민을 비롯한 인민대중이 세운 최초의 정부였지만 이 코뮌정부는 실로 많은 정치적, 사회적 상념을 넘겨준다.

 

서울대 최갑수 교수의 이 책 해제(解題) 말미의 글처럼 2025년 지금 프랑스 내전을 다시금 펼쳐 읽는 이유는 인민대중에 대해 오만한 주인행세를 하며 이 땅에 기생충처럼 몸을 박아 넣고 이권으로서의 권력을 빨아대는 관료제적이고 엘리트주의적 족속들의 행태가 극단에 이르고 있는 까닭이다. 썩어빠지고 무책임하며, 무능력하기까지 한 1870년의 프랑스 권력집단들의 행태가 마치 2025년 오늘의 한국 사회로 옮겨온 듯 하기 때문이다.

 


1871년 피의 일주간을 내전이라 부르지만 사실 그것은 일방적인 살육전이었지, 쌍방의 전력이 동등한 총력전으로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코뮌군은 방어전은 펼칠 수 있으나 공격전을 전개할 군사적 능력도 조직도 없는 시민저항군에 불과했으며, 더구나 코뮌의 국민방위대라 하지만 상당수가 배신하여 오히려 적군이 되어 시민 살육에 합세했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실상을 프로이센(독일)군에 대항하여 함께 했던 어제의 국민방위군 동료가 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감상적으로 쓰고 있는 졸라의 상기 작품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사실 동료 시민의 잔혹한 살육의 역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혹독한 사태가 일어나야 했는가와 코뮌이 후대에 남긴 역사적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한 말을 하려는 것이기에 코뮌이 일어나게 되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배경에 대한 이해는 실로 중대할 것이다.

 

18707월에 개전된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제국)의 전쟁발발에 대한 원인은 역사학자들마다 제각각이어서 단 하나의 중대 원인이 전쟁을 촉발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제 2제정 황제 루이 보나파르트가 권력의 연장을 꾀하려다 실패한 전쟁이라는 마르크스의 판단에 동의하려 한다. 한 자연주의자의 소설이긴 하지만 패주또한 이 전쟁의 초기를 묘사하며, 권력 연장에 집착하며 서서히 고립되는 보나파르트와 독일을 향한 선제공격의 기회에도 불구하고 미적거리는 무력한 프랑스군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비스마르크가 판 함정에 프랑스가 걸려들었다는 시각이나, 룩셈부르크 지역 등에 대한 양국 간의 영역 다툼으로 인한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들은 표면적이고 결과론적 판단일 뿐 모두의 이면에 도사린 궁극의 원인이 있었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즉 프랑스 내부에서의 권력 암투와 무모한 해외 식민지 쟁탈 전쟁으로 인한 이권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 상층부의 부패로 인한 분열의 심화다. 이로 말미암아 국내외로 고립된 보나파르트로서는 만회할 명분이 필요했고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는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얘기다. 마치 윤씨가 전쟁을 유발하려 했던 것과 같은 동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전쟁 초기 프랑스군의 전력이 월등하게 압도적이었음에도 아군 전선 지휘관들의 상호 눈치 보기로 공격의 기회를 실기하기가 일쑤고, 그나마 전투에서는 먼저 도주하는 지휘관들이나 전략적 무능과 더불어 파리 제정 고위관료들과 황제의 주변 권력들의 중앙정부에서의 힘의 이동상황을 주시하는 지휘 장군들의 기회주의가 판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권력 상층부를 점유하고 있던 소위 엘리트라는 소수 집단의 깊은 부패상을 엿볼 수 있다.

 

그 사회의 집단 내에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내겐 가장 중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인데, 바로 인민대중의 인식수준이다. 졸라의 작품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소위 교양을 가진 지식인 청년 모리스로 대변되는 당대 중산계층의 의식이다. 과거 제국의 영광에 사로잡혀있는 이 인물이 국민방위군으로 참전한 것은 애국주의의 발로다. 참전 초기부터 사고할 줄 아는 이 인물은 개인 화기는 물론 병참조차 제대로 이루어지 않으며, 전선에 이르러서는 군대를 이끌고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는 이 무슨 해괴한 작전인가!” 라고 당혹스러워한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모리스는 민족적 퇴화라고까지 자신들의 무능과 부패성을 깨닫기 시작한다. 사회 대중의 전반적인 인식의 부패가 과거 제국의 환영에 도취한 프랑스인들의 정신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자각일 것이다. 이 전쟁(일명 보불전쟁;普佛戰爭)은 애초에 승리 할 수 없는 전쟁이었으며, 항복 협상에 이르는 과정 또한 인민대중, 즉 국가의 이익과는 무관한 상부 계층들의 자리 보전이라는 권력 유지에 맞추어져 진행된다. 개전 두 달도 되지 않은 92일 보나파르트가 포로가 됨으로써, 제 2제정 몰락과 함께 95일 공화정이 선포된다. 그리고 들어선 자가 아돌프 띠에르라는 교활한 인물이 프랑스의 수장이 된다. 절대 항복하지 않겠다고 인민을 향해서는 떠들고 뒤에서는 독일과 항복 협상을 벌여 나라를 팔아먹는다.

 

1871128일 파리가 독일에 항복하자, 파리 시민의 대규모 시위가 잇따르기 시작했고, 민중의 정부에 대한 배신감은 극에 달했다. 2월 패전 끝에 파리에 집결해있던 국민방위군은 연맹을 결성하고, 임시중앙위원회를 결성, 새로운 혁명기구를 탄생시킨다. 사실 파리의 코뮌은 1871315일 이전인 18712월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해야 하겠지만, 띠에르 정부가 파리에서 완전히 철수하여 오직 코뮌만이 파리의 치안과 정치경제 활동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기에 1871315일을 파리 코뮌의 단독 정부출발로 보는 것 같다. 띠에르는 코뮌에 유화적 제스처를 보이면서 뒤로는 비스마르크와 코뮌의 파괴 지원 협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기득권을 누려왔던 권력집단이 하고 있는 짓거리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코뮌의 역사와 그 참살에 이르는 과정은 역사서들의 기술에 맡기기로 하고, 다시 인민대중의 보편적 인식 상태로 돌아가 살펴보는 것이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할 것 같다.

 

마지막까지 불의와 부패로 썩어 문드러진 소수 권력에 저항한 당시 파리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던 이념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 우리네의 인식 교정에 적절할 것이다. 여기에는 아주 광범위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공존하는데, 오늘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대에 오늘과 같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조차 성립되기 이전이고, 그들은 이러한 체제는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 온전히 교차한다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그들 또한 소위 애국주의(일종의 민족주의적 이해에 기반 한), 사회민주주의, 공산주의 등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애국주의의 믿음에 기반 한 다수의 시민들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들이야말로 정치에 무관심한 지극히 평범한 생활인들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왜 코뮌을 지지하고 코뮌군이 되었을까?

 

이들은 가시적인 실상을 읽을 수 있을 뿐이기에, 독일에 항복, 적에 국토의 할양, 그리고 군주제의 부활을 꾀하는 띠에르 정부를 혐오스럽게 생각했다는 점에 있다. 그저 소박한 공화주의를 원했기 때문인데, 바로 이러한 정서적 신념이 바로 애국주의의 저류를 지탱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바로 이러한 시민들의 대학살이 자행되던 시점에,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근간을 보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파리 시민들의 의식에 폭넓게 자리한 정서적 공감은 자신들의 국가에 대한 애착이었다는 점이다.

 

국민과 국가를 배신하는, 국민의 의지를 배반하는 권력은 이 보수적 애국주의자들까지도 저항의 무기를 들게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자본가의 노동자 착취의 문제도 아니요, 공무원의 연봉 상한제, 무상 의무 교육의 확대, 영세 상인의 보호와 같은 제도 개혁의 문제라기보다는 권력 계급이 보인 계급적 속성에 대한 환멸과 그 권위의 청산에 대한 갈망이었으리라 이해된다. 작금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권력의 상층부로서 기득권을 누려왔던 검찰, 법원의 인력들을 비롯한 권력의 상층부 곳곳에 숨어있던 이러한 비루한 권력기생충들이 확연하게 추한 민낯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그 부패가 심화되고, 이것을 비추는 거울이 말끔할수록 그것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그 거울을 깨부수려 못하는 짓이 없어진다.

 

항시 이것들은 누려오던 권력의 유지에 위협이 발생하면 그 민낯을 드러내고 거침없이 흉측함과 폭력성, 잔인성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파리 코뮌은 바로 이 모습을 후대에 전해주고 있다.  파리 코뮌은 시민들 자신에 의해 창출된 사회적 해방의 정치적 형태의 모습을 오늘의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정치적 분투의 현장에서 살고 있다. 자신의 위치에서 한 걸음 벗어나 바라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놓여있는 현재라는 역사의 위치를.

 

법치주의의 야바위꾼들에 우리들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운영권을 넘겨주어서는 안 될 일이지 않은가? 일제의 권위주의적 잔재를 그대로 물려받은 한국의 사법부와 검찰이라는 강고한 기득권력이 더 이상 국민의 삶을 자신들 마음대로 주물럭거리게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이들이 지금까지 빨아먹은 모든 힘은 이제 국민들, 이 사회의 신체가 돌려받아야 할 중차대한 지점에 우리는 서있는 것이다. 기득권의 카르텔로 연결된 저것들에 대한 광범위한 수술은 불가피한 것이고, 우리들이 기필코 이루어야 할 개혁과제일 것이다. 대법관, 검찰총장과 같은 임명직 자리는 국민이 선출하는 선출직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하시라도 소환하여 해임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은 대법관 10인의 탄핵이다! 서둘러야 할 일이다. 저것들의 정의를 신뢰하는 것은 바보 짓이라는 것을 프랑스 내전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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