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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마치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2월
평점 :
‘3월의 마치(march)’라는 같은 의미가 중복 표현된 제목에는 야릇한 기만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마치 아닌데 그것인 체하는, 혹은 무심한 반복이 지닌 그저 그러함의 자연이 주는 무의지의 쓸쓸함. 이 작품의 주인공은 “한 평생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는 일”로 살아온, 배우 ‘이마치’다. 나는 소설의 두 번째 문단을 시작하는 “3월이지만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듯 쌀쌀한 날씨였다.”는 문장에서 잠시 멈추어야 했음을 다 읽고 난 후 알아차렸다. 알츠하이머병, 자신을 잃어가는 한 여인이 멈춘 겨울같은 3월의 시간, 화창한 봄날로 가장된 춥고 외로운 인생이야기임을.
“전 무대에 서면 취해요. 거기서는 나 자신이 아름답게 느껴져요.(...) 이제 알 것 같아요. (...) 내가 꿈꾸었던 어떤 것들도 명예나 성공이 문제되는 게 아니고 어떻게 견디느냐, 어떻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믿음을 갖고 버티느냐를 알아야 해요.” - 체홉, 《갈매기》/ 《3월의 마치》 175쪽에서
열다섯 살 이마치가 어머니의 학대로 화장실에 가두어졌을 때 외우던 체홉의 희곡 속 니나의 독백이다. 일곱 살 마치와 아홉 살 언니 준, 어린 자식들을 내버린 채 미군장교와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어머니. 그리고 그 혹독한 헐벗음과 버려진 집에서 죽어가던 어린 언니와 그녀의 죽음과 같이 지냈던 지옥같은 기억들, 미국에서 버려지자 돌아올 도리밖에 없었던 어머니라는 여자와의 재회와 마치의 의식에 남겨진 공포와 증오의 감정은 반복되는 폭력으로 되돌아오고, 집을 벗어나는 일, 새벽 신문배달, 극장에서 하루종일 죽치는 일, 그러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다 같이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연극부의 일원이 된다.
그녀는 배우, “다른 사람이 되는 일,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것으로서 연극”에 빠져든다. 그녀의 유일한 환희가 된다. 그렇게 재능을 인정받고 이상한 운의 연속 속에서 유명 배우가 되지만, 세상은 수군거린다. “너무 많은 감독의 손을 탔다.”, “잠자리 오디션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마치는 세상은 그렇게 간단치 않은 것임을 알기에 상처받지 않는다. 그녀에게 “삶의 정수는 무대 위에 있었기”에.
이야기들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은퇴한 노배우 아마치가 담당의에게 술회하는 기억의 편린이고. 가상공간에서 행해지는 VR치료 속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혹은 은폐되었던 자신의 과거와의 재회 속에서 발견되는 자기 앎의 복기이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남자와의 결혼, 첫 아이의 출산과 아이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그 낯섦의 감정들, 위협과 강박 속에 갖게 된 둘 째 아이와 그 아이의 실종에 어린 죄의식, 남편의 무책임과 가장의 부담을 지어야만 했던 여배우의 강박적 연기의 몰두, 매니저 K의 헌신과 그의 사랑을 외면하였던 허위의 자존심,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앎을 넘어설 수 없는 어머니로서의 사랑에 대한 몰이해가 가져 온 아이에 대한 무관심 등, 혹독하기만 했던, 그래서 망각해야만 했던 자기의 지난 삶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흐른다.

증오심과 죄의식, 좌절, 절망의 안타까움, 가면 속에서 살아야만 했던 여인의 인내로 점철된 자기와 마주함으로서 채색되어 기만되었거나 잃어버렸던 기억들이 소환된다. 그녀가 “배우지 못한 삶의 방식들, 생존 이상의 것을 꿈꿔본 적 없는” 그래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꿈꿀 수 없는 것이었음을 경험”한다. 소설은 어쩌면 우리네 상상의 공간이 지닌 협소성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체험, 그 좁은 앎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그 고집스러움의 태도가 지닌 한계를. 인생이란 12월생인 이마치가 3월의 이마치가 되듯 허영과 위선, 기만으로 포장된 가면극인지도. 우리들은 결국 밀려오는 “무한한 파도, 자기만의 파도 속에 한줌의 공기처럼 가벼워져 날아오르는” 그런 존재임을 알면서도 그토록 진실을 가리고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내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전달했을까? 배우자에게는,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가면을 썼을까? 이젠 이런 지난 일들에 배어있었을 감정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소설을 읽어나가며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기록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내가 누락한 것, 혹은 포장하여 기록 한 것, 숨기고 싶어하는 기억은 무엇인지, 아마 나를 알게 되는 여정이 될 것도 같다. 그럼으로써 나와 한 때 함께했던 사람들 모두에 대해서 전하지 못했던 진심을 발견하고, 이제라도 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경험의 한계를 무한히 확장하도록 상상의 공간을 넓힐 것을, 아마 그 책무를 성실히 수행한 소설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3월인데 왠지 겨울을 벗어나지 못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가면의 집착 때문인 것일까? 이마치처럼 언젠가 내 삶과 화해를 하고 나만의 파도에 훌훌 올라 탈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