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발 없는 새
정찬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평점 :
※ 감상의 글에 앞서, 소설 『발 없는 새』는 높은 미학(美學)적 문장들과 그 구조적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지닌 지성적 문학 작품이었음을 말하고자 합니다. 다만, 제 편협한 감응(affects)의 장벽으로 인해 소설의 내면적 깊이에 도달하지 못하였음을, 따라서 부분적으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견해가 오직 독자의 부족함 임을 고려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역사란 비극적 존재가 그리는 집단적 궤적이오. (...) 이 비극 앞에서 위로가 되는 몽상이 있소. 장자의 몽상이오. 장자와 나비 사이에는 존재의 경계가 없소.” - 239쪽
작품의 핵심 소재는 1937년 “불과 6주 동안 이루어진 살육의 속도와 규모로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30만 명의 학살과 8만 명으로 추정되는 강간 희생자를 발생시킨 ‘난징 대학살’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반세기 넘어 “인류사에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잔혹하고 참담한 제노사이드”가 한중일(韓,中,日) 세 나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가를, 어떻게 사유되고 있는가를 불가능의 언어로 지펴내고 있다.
이 소설에는 영화감독 첸카이거, 배우 장궈룽, 『The rape of Nanking (난징 대능욕)』을 쓴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인 ‘장 아리스’ 등 실존인물이 소설 속 인물로 등장한다. 어쩌면 이들을 통해 예술로써 삶의 실체를 증명하겠다는 직설적인 작가의 선언처럼 보인다. 특히 중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전통 악기인 얼후(二胡)의 연주자이자 재야 역사가인 워이커씽은 이러한 인간의 현실적 비극을 예술적 삶으로 살다 간 존재로 기능하며, 여타의 인물들도 상상의 이미지들을 그리며 표현할 길 없는 악으로서 인간의 구원을 말하려 한다.
워이커씽은 난징 대학살이 이뤄지던 순간에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여인이 낳은 자식이다. 워이커씽의 기억은 어머니의 자살을 지워버려 무의식의 저 깊은 심연에 묻어버렸으나 그 고통이 신체를 떠나지 못한다. 이것은 《패왕별희》의 데이 역(役)을 했던 장궈룽이 배역의 영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의 유혹을 저버리지 못했던 것과 그 궤를 같이하며, 죽음을 선택하여야만 했던 어머니에 대한 운명의 몰이해와 자신의 버려짐에 대한 수용할 수 없는 거부의 마음에 깃든 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를 거니는 몽유의 세계로 이어진다.
이러한 의식은 장자(莊子)의 나비 환생 이야기로 이어져 가해자와 희생자의 경계가 사라진 공존으로 나아가는데, 이 지점에서 나의 감응(affects)은 냉정한 이성에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고 해야겠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흐려진 몽상적 현실이나, 가해자와 희생자가 동등한 선상에서 손을 맞잡는 상황, 오지 않은 죽음을 선택하는 정신에 대해 머리로는 이해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이 내 신체에 오롯이 새겨져 새로운 실천을 감행할 수 있는 지혜가 되는데 반항했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은 중국계 미국인인 장 아리스가 『The rape of Nanking』의 집필을 위해 인간의 벼랑 끝, 벼랑의 심연에 놓여있는 학살이라는 역사를 들여다보려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죄의 장소로 다가가 인간에 내재하는 근원적 악을 드러내려는 소명의 걸음이나. 작중 화자인 베이징 특파원인 한국인 ‘상우’의 고모할머니가 겪은 난징 위안소에서의 끔찍한 유린의 소슬한 기억들, 첸카이거의 어린시절 홍위병에 끌려가는 아버지를 짓누름으로써 빗나간 이데올로기에 열광했던 패륜의 기억들처럼 인간의 내재된 악에 대해 감응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이를 예술이라는 미적 언어들을 통해 표현 불가능한 인간의 악, 그리고 삶과 공존하는 죽음을 말하려한다. 그것은 소설이 그리고 있는 일본의 그림자극인 노(能)나 모래사막 너머의 모래사막이라는 환영이 인간세계 선악의 불가피한 공존으로 나아가지만 나는 이것이 환원되지는 않는 망상으로 여겨진다. 소설 속에는 난징 학살의 근원으로 일본 천황을 놓고, 이 초월적 존재인 신인(神人)에게 인간 세계의 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그 신민인 일본인, 일본군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으며, 이 어처구니없는 모순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일본인들을 가해자로, 죄악의 주체로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오늘날 우경화된 일본인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가 피 흘림에 대한 기쁨과 감격의 공간이 된, 전쟁의 참혹함이 깨끗이 지워지고 추앙의 장소, 신성한 진실의 장소가 된 이유로 연결된다. 희생자의 고통 앞에서 보이는 이 기이한 희열을 즐기는 일본인들의 희생자 코스프레가 가능한 까닭일 것이다. “사건의 주체인 학살자들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다는 것은 역사를 포기하는 것”이기에 이처럼 이들의 규명은 분명 중요하다.
그런데 난징 능욕의 결과인 태생적 선악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워이커씽이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의 내재적 선악의 공존으로 연결 짓는 데에 나는 환원될 수 없는 모래사막의 환영처럼 저항감을 외면할 수 없다. 내재적 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로써 용서와 화해의 구실로 삼으려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국인 워이커씽의 오랜 친구인 일본인 아오키란 인물을 통해 한국의 판소리와 최승희의 춤을 일본문화의 원형과 연결하며 삼국의 불가피한 영혼의 얽힘을 은근히 내비칠 때에는 거북함마저 느끼게 된다.
“몽상이 실현되려면 가해자가 자신이 가해자임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오.” -241쪽
이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란히 세움으로써 용서와 화해의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물론 위 문장처럼 가해자, 가해 집단의 자기 악의 직시와 진정한 사죄가 전제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과연 그것으로 용서가 되는 것인지, 그것이 인간 본질에 대한 동류로서의 겸허한 인정과 비례하는 것인지 나는 이에 공감하지 못한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 등장하거나 등장인물들의 대화 속 인물들은 지속하여 자살하는,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다.
다시 말해 불가피하게 내재된 악을 무너뜨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저버리는 행위로서, 반복되는 인간의 참담한 잔인성이 정화될 수 있는 것인가,에는 회의를 저버릴 수 없다. 문학, 즉 언어의 예술이기에 이러한 묘사가 인간 영혼에 의미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수긍할 수 있겠지만. 왠지 의도와 이야기가 서로 흡착하지 못하고 분리되어 겉돌고 있는 억지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다.
소설은 마치 여느 예술 비평의 한 문장처럼 첸카이거의 영화 《패왕별희》, 왕자웨이의 《동사서독》을 통해 “인간 삶에 고인 비극적 서정과 인간 실존 확인의 불가능성을 역류하려는 의지”를 녹여내기도 하고, 군국주의자이자 천황주의자였던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과 『금각사』 로부터 “진실을 분재(盆栽)한 거짓 이미지, 인간 생명의 존엄을 훼손하는 마조히즘적 폭력의 도구로 전락”했음을 읽어내어, 뒤틀린 인간 정신, 내재된 악의 현현을 소설의 전반적 분위기에 흡수하여 미적 체감의 감각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분명 이 소설의 문장 개별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지적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구조적 서걱거림, 파악될 수밖에 없을 만큼 결코 새롭지 않은 주제인 또 하나의 인류 악과 그 동행에 관한 이야기임에 나는 감응의 문장을 써낼 수 없다. 어쩌면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예술과 현실 적 삶의 경계가 지워진 삶을 살다가 간 《패왕별희》의 배우 ‘장궈룽(張國榮)’의 언뜻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거북함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현실의 날것들, 무수한 부정적 현상이 예술인 삶에 틈입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불편함이 내게 어떤 방어기제를 작동케 했던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인간 개체가 지닌 근원적 악과 집단 악의 실체를, 그리고 그 불가능한 해결의 실마리를 사유 하는 시간이 되는 작품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