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민음의 시 286
오정국 지음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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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즉 남아 있는 절벽들
창날 모양의 창바우, 깎아 세운 형상의 선바우 앞에서
철없던 맹세의 주먹을 몇 번 내뻗어 보고

목구멍의 욕설을 앞세워서
험한 땅거죽을 뱃구레로 밀고 왔다” 70-71

오정국의 고향은 경북 영양. 몇 년 전에 거기 답사를 갔을 때, 그 ‘창바우’와 ‘선바우’ 앞이 경관이 좋아 몇몇이 정말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중 한 사람, 혹 벗이 되었을지도 모를 동갑 남자는 그 뒤 세상을 버렸다. ‘욕설’을 앞세우고라도 버텨 보지. 다들 ‘육체를 땅바닥에 내려놓을 때까지 견뎌야 하는 등짐이 있’는 법인데 그는 더이상 멜 수가 없었던 게지. ‘강바닥 자갈밭이 그러하듯이 생은 언제나 목말랐던 것’이다.

무미할 정도로 심심했던 기억만 있는 오정국이었는데, 가슴을 치는 구절이 많다.

“등대를 선회하는 새들의
해안 절벽 벼랑길 아스라이 굽이치지만
손목 잡고 데려갈 파도는 없어요
부교처럼 흔들리는 불빛들
등허리에 아릿하게 감아 두르고
이 얼굴 캄캄하게 펄밭에 파묻어도
덧없는 세상을 덧칠해 온 느낌, 지울 수 없어요” 74

“이제 내 가슴을 들여다보면
발을 헛디딘 흙구덩이와
타다 만 숯덩이,
새의 날갯죽지 같은 게 흩어져 있다” 99

굉장히 감각적으로 쓸쓸하다. 아득하고.

“목적지 입간판이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오듯이
캄캄한 국도에서 불빛을 되쏘듯이
/어떤 후회는 일찌감치 당도해 있고
어떤 후회는 발걸음이 더디다” 70

“어느 몹쓸 꿈자리는 아닐 텐데, 이번 생을
웃고 울면서 웃기고 울리면서
하루해를 보내고
국도로 올라설 때
짐짓 헛디디는 발걸음 몇 번
강기슭 저쪽이 너무 아득해서
이쪽의 물살을 헛짚는 물결처럼” 63

<영명축일>, <침묵 피정> 등의 시를 보면 가톨릭에 귀의한 듯한데, 오정국은 평온하지 못하다. 시인이다.

“재의 얼굴은 무심하다
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는다
/나는 재의 얼굴로
나를 지나간다”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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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를 생각한다 - 도쿠가와 3백 년의 유산 일본사 연구총서 2
쓰지 다쓰야 지음, 김선희 옮김 / 빈서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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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질기고 오래된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
전통이란 것이
에계, 겨우?
싶은 것이 꽤 많다.
일본적이라는 것의 뿌리를 에도시대에서 캐낸다는데 기죽게 두껍지 않아 덥석 읽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과 일들이 많아 더디다. 그러나,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잘 읽힌다. 꼭꼭 씹어먹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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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유기, 근대 한국인의 첫 중국 여행기
이병헌 지음, 김태희 외 옮김 / 빈빈책방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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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희한하다.
곡부, 공자의 고향에 가서 성인을 추모하고 추숭하는 모습은 퇴계는 꿈꾸지 못했으나 갔으면 그랬을 법하게 고색창연한데,
현대 직전 중국의 캉유웨이와 만나기도 하고(만남은 예스럽다)
‘앵글로색슨족’을 논평하기도 하니
20세기 초라는 시간은
참으로
기이하다.

아래의 술회는 1914년 홍콩의 일이다.

28일. 백암과 함께 화원으로 가서 나무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 더위를 식혔다. 꽃과 나무의 이름은 거의 식별하기가 어려웠다. 종려나무는 수십 종이나 되었는데, 아름드리나 되는 것도 많았다. 형체가 기이하고 품종도 특이했다. 나무 모양도 제각각이었는데, 옆에 팻말을 세워 원산지를 표시했다. 영국인이 이 항구를 경영한 지 수십 년도 되지 않아 어엿한 하나의 국가를 이루었으니, 이른바 앵글로색슨민족은 어느 곳에 가든 열 사람이 하나의 나라를 만든다는 말이 어찌 허풍떠는 말이겠는가.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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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시인선 54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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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날들은 여직
잘못 찾은 무덤 앞에서 통곡한 것이나
그 무덤 아닌 줄 알면서 엎드린
누추한 반복일 뿐” 40

“스쳐가고 오는 동안
처음이고 나중인 풍경
너, 아니었는지”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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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문학동네 시인선 54
이규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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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튼소리가 없다.
담담히 일상을 응시하고 비의를 툭 던진다.
전형적인 시인이라서 tmi가 없다. 궁금한 일이 많다는 얘기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는데 얼핏 비칠 뿐 정서도 내비치지 않는다. 간이 크게 아파 서울로 1달에 한번 병원에 다니는 듯한데 역시 털어놓지 않는다.

체념보다는 달관에 가까운, 이 관찰이 눈에 들었다.

“아니라 아니라 못하고 발목이 빠져드는데도
저, 저, 하면서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있는 것이다” 016

시인이라 생긴 직업병일 수도 있겠다. 감정을 가다듬고 정서를 다듬어 말을 줄인 뒤에야 나오는 게 시이니.
흘러가는 대로 바라보는 거지.

요즘 갑자기 더운 게
사람들이 제 말만 울어대서였구나.

당신이라는 모든 매미



새벽 서너시까지 울어대는 매미
삼베 이불이 헐렁해지도록 긁어대는 소리
어쩌라고 우리 어쩌라고

과유불급,

나도 그렇게 집착한 적 있다
노래라고 보낸 게 울음이라 되돌아왔을 때
비참의 소리는 밤이 없었을 것이다

불협도 화음이라지만
의미를 거두면 그저 소음인 것을

이기적인 생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우리 안에는 당신이라는 모든 매미가 제각기 운다
어느 것이 네 것인지 종내 알 수도 없게 엉켜서

허공은 또 그렇게 무수히 덥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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