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서유기 - 철들고 다시 읽는, 원숭이 부처 되는 기똥찬 이야기
성태용 지음 / 정신세계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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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마음에 단단히 고삐를 채우고!
16.변함이 없는 뜻, 용마를 탔구나
17.요괴나 보살이나 한 생각일 뿐이니

도망갔던 손오공이 다시 돌아오고, 긴고주를 채웠으니 앞으론 도망가지 못하고, 말 잡아먹은 용을 말로 둔갑시켜 타고, 관음보살의 도움으로 요괴를 수문장으로 변신시키다.
다음 장에 드디어 저팔계가 등장.

종교가 무엇입니까? 불교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철학적이고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불교도 종교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합리성에 바탕하면서도 합리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측면이 있지요. 그렇기에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고, 구원을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건강한 견해와 신념, 그리고 불보살에 대한 찬탄과 믿음이 함께할 때 불교도 건강해지겠지요? 진실한 기도라는 것은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며, 그런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큰 힘을 내는 것이라 믿습니다. - P185

보살님이 그 친구 요괴로 변신하고 손오공은 선물용 금단으로 둔갑을 하지요. 그래서 태연하게 요괴의 본거지로 잠입하는 계책을 쓰는데, 이때 손오공이 보살님의 요괴 변신을 보고 한마디 이죽거립니다.
"대단하군요. 대단해! 요괴가 보살이 된 겁니까? 아니면 보살이 요괴가 된 겁니까?"
감히 보살의 본래 면목을 문제 삼는 손오공이군요. 거기에 대한 보살님의 응수, 이게 정말 이죽거리는 손오공의 입을 한방에 뭉개버리는 우문현답 이상의 우문현묘답입니다.
"오공아, 보살이나 요괴나 결국 한 생각일 뿐이지. 근본을 말한다면 모두 본래 없음이니라!"
보살이다 요괴다 하는 겉모습에 매달리지 말라는 말씀일 까요? 한 생각 잘못하면 요괴가 될 수도 있고,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보살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일까요?본디 요괴다 보살이다 하는 것이 나오는 바탕으로 돌아가면, 결국 모습 없고 빛깔 없는 근본 자리가 있다는 말씀일까요? - P202

우리나라에서는 타협과 화해라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것 같아요. 지금도 걸핏하면 샐깔 논쟁으로 나가고 자기와 다른 입장을 ‘좌빨’, ‘보꼴’로 몰아가면서 적대감을 표출하잖아요. 자신과 다른 입장을 그냥 생각이 다른 것으로 바라봐주지 않아요.
물론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고 지지하며, 상대편의 입장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한 투쟁을 통해 인류 역사가 발전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상대편을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는 순간 우리의 삶은 증오로 물들게 되고 인류 역사는 피로 물들게 되니까요
이러한 사고방식을 교정할 수 있는 시각이 바로 서유기에 있고, 주역과 같은 동양의 다른 고전들 속에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고방식을 ‘관계론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르지요. 어떤 존재 자체에 선 또는 악이 본래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그렇게 드러날 뿐이라고 생각하는 방식 말입니 다. 그러니까 나와 적대적인 상대편은 지금 어떤 관계망 속에서 ‘악‘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뜻이죠. 그 관계망이 바뀌면 어떤 존재의 선악도 그에 따라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대편을 공격하지만, 그것은 그 존재가 절대적인 악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크게 보면 같은 항아리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상대편과의 다툼도 크게는 우리 전체를 잘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주역에서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같이 하면서도 다르게 한다" 또는 "다르면서도 같음을 안다"라고 표현합니다. 큰 지향을 같이 하면서도 얼마든지 서로 다를 수 있고, 그 다름 속에서도 같음을 향해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 큰 사고에 바탕하면, 우리는 다투면서도 상대편을 말살하는 방향이 아니라 어떻게든 커다란 하나를 향해 나아가는 건강한 형태를 보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과 역사도 건강하고 밝은 내용으로 채워지지 않을까요? 증오와 악의는 줄어들고, 피 흘리면서 부러지는 역사는 자취를 감출 테고요.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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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혼을 찾아서
오오무라 마스오 지음, 심원섭.정선태 옮김 / 소명출판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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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전문가인, 일본 학자 오오무라 마스오가
2000년 초에 홋카이도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펴낸 책이다.

짧은 글들이다.
의미심장하고,
새롭게 돌아보게 하고,
부끄러워지기도 하는
구절이 넘실댄다.

이 소설은 "이방인들이 흘린 오줌과 똥물만을 주식으로 하여", "‘반공‘과 ‘친미‘만을 열심히 부르짖다 보면 쉽사리 애국 자며 위정자가 될 수 있는"(「분지」에서 인용) 현실을 우화적 수법을 끌어들여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예속인가 자주인가라는 민족의 주체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분지」는 지나가버린 한 시대의 유물로 처리되어서는 안 되는 현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 P12

지금이야 풍광명미한 관광지로서 인기가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6만 명의 일본 군대가 상주하고 있었다.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하긴 했지만 제주도 상륙의 가능성도 컸기 때문이다. 지금도 섬의 산악지대에는 장대한 지하 사령부 흔적이, 평지에는 전투기 격납고가, 해안선에는 인간 어뢰 ‘회천‘기지 터가 남아 있다.
전후 1948년, 제주도는 5만 명 혹은 8만 명이라고도 하는 희생자를 낳은 4• 3사건을 경험했다. 조국의 자주통일과 38선 이남의 단독선거에 반대하여 봉기한 민중이, 그 후 10년간에 걸쳐 정부군과 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김대중 정권에 이르러 겨우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지만, 그 때까지 오랜 기간 사자들은 ‘빨갱이‘로서 사회적으로 기피되어 왔다. 미소 냉전구조에 기인한 불행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제주도의 역사와 사회가 낳은 제주문학은 한국문학 중에서도 특히 무거운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제주문학은, 물론 한국문학 중에서는 지방문학 중의 하나다. 그러나 한국 안에서 가장 신산한 세월을 맛본 제주도의 문학은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한국적이어서, 그것을 통하여 세계문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P38

임종국(1929~1989)씨는 1966년에 「친일문학론」(일본어 역은 오오무라 마스오, 고려서림, 1976)을 썼다. 이 책은 1945년 8월까지 거의 10년간 일본 지배하에서의 조선인 문학자의 발언을, 비판의 의미를 담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국에서 말하는 친일이란 민족의 주체성을 내팽개치고 일본의 지배에 추종한다는 의미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친일문제의 청산보다도 반공과 남북 대립을 가장 우선시해 온 한국 사회는 전전의 대일협력자가 그대로 사회 지도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 1965년 한일조약이 체결되자, 임종국 씨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친일문학론」을 집필했을 것이다.
임종국 씨는 춘추의 필법으로 객관적 사실만을 쌓아 올려 전전의 문화적 상황과 문학자들의 발언을 재현해 보여주었다. 저명한 사람이든, 권력자든, 대학의 은사든 그리고 자신의 부친이든 그는 집필에 임할 때는 붓을 굽히지 않았다. 한국사회는 그런 그에게 철저한 무시와 사회적 압력으로 대응했다. 임종국 씨는 말하자면 ‘식량보급선을 끊는 포위공격‘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40대 후반 임종국 씨는 생활을 위해 서울 교외에 밤나무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나는 두 번 임종국 씨의 집을 찾아갔다. 길도 없는 산꼭대기에 경운기로 자재를 실어 날라 자력으로 지었다는 집의, 침침한 자가발전 불빛 아래서 사과상자를 책상 삼아 원고를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밝고 명랑한 성격의 그는 흥이 오르면 프로 수준의 기타 솜씨를 보여주었다. 저녁식사 때는 밤밥, 아니 밤 위에 밥알이 붙어있는 밥밤을 대접해 주었다.
사후 14년이나 지나고 난 뒤, 어렵사리 이뤄진 것이긴 하지만, 임종국 씨의 작업이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성숙했고, 역사를 냉정하게 직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전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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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서유기 - 철들고 다시 읽는, 원숭이 부처 되는 기똥찬 이야기
성태용 지음 / 정신세계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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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여섯 도둑도 함부로 때려죽이면 안 되는 거여

손오공이 삼장을 모시고 가다 여섯 도둑 물리쳐 죽인 것에 힐난 받자 튀어버린 대목.
’어찌어찌 바른 길로 돌아왔지만 차분하게 한길로 나가지 못하는 마음의 행태‘

우리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이 우리의 마음을 훔쳐가고, 그렇게 훔쳐진 마음은 보고 듣고… 하는 데 빠져 거기에 휘둘리며 기뻐하고 성내고 애착하고… 그렇게 한세상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려가다 죽음이란 종말을 맞게 되는 것이지요. 슬픈 인생 아닙니까? 이런 삶을 두고 "내가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여섯 도둑에 이끌려 삶을 당하고 있을 뿐이지요. - P172

그리고 이치로 보아서도 여섯 도둑을 다 때려죽이면 안 되는 일입니다. 왜냐구요? 여섯 도둑은 여섯 감각기관인데, 여러분은 감각기관 없이 살 수 있어요?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이야기와 그것을 죄악으로 보고 없애버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내가 주인이 되어서 그것들을 부릴 수 있으면 되지, 그것들은 나쁜 놈들이나 무조건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다르잖아요. 내가 잘못해서 그것들을 도둑으로 만들었으니까, 다시 내가 잘해서 그것들을 하인으로 부려야지요. 여섯 도둑보다 여섯 하인이 훨씬 좋지 않아요? - P174

불교에 대해, 불교의 수행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거든요. 그리고 수행을 시작하는 분들이 실제로 이 대목에서 많이 고생들 하세요. 잡생각과 망상, 감각에 들어오는 온갖 방해물과 씨름하느라 한세월 보내는 경우가 많아요. 실제로 수행에 들어가 마음을 좀 집중하려 하면 오히려 번뇌망상, 잡념이 더 끓는 것 같지 않던가요? 저도 겪어봤고 고생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일반적으로 평상시의 우리는 번뇌망상의 흐름 속에서, 그것과 함께 떠내려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함께 떠내려가기에 그 흐름을 느끼지 못해요. 그런데 수행을 한다고 마음을 다잡는 순간, 그흐름에 함께 떠내려가지 않고 우뚝 서는 형세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거센 번뇌망사와 잡념의 흐름을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지요. 그 흐름에 쓸려 몇 번 다시 넘어지는 것도 당연하구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고,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계속 수행을 하다 보면 차츰 잡념이 줄고, 내 수행에 순수하게 집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의식하고, 그것들에 대항하고, 그것들을 없애려 하는 것 자체가 그것들에 마음을 뺏기는 일이요, 그것들에 지는 일입니다. 꿋꿋하게 내 갈 길을 가는 것, 서둘지 않고 뚜벅뚜벅 큰 길을 걸어나가는 것이 수행의 왕도라는 점을 기억해두시면 좋겠습니다.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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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양식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0
이성부 지음 / 민음사 / 197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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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의 정액이
내 아가씨의 육체와 치마폭을
늠름하게 적셨다 때려죽일 놈은 그 자식이 아니라
그 나라가 아니라
허약한 내 몸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나는 알았다 - P78

힘들의 창끝은 무디어진다. - P75

勝利 1


이른 새벽에 잠깨어 물마시고
담배를 한 대
벌판의 마른 마음 소리 들어보면
왜 저다지도 사람들은 춥다냐.

먼 불빛이
혼자만 떠는 아쉬움을 깨달아서
다른 불빛들을 찾아 나설 때,
다른 나라에서도 구해 올 수 없는
목마름을 보았을 때,

하나 남은 불빛은 씨앗처럼 죽어
보다 가까운 아침을 태어나게 한다.
걷어부친 팔뚝과 힘이 만드는
불빛의 장례, 피로 사랑하는
세계와의 만남, 그리하여 불빛은
누리의 밝음 속 그 어두움에
깊이깊이 파묻힌다.

사람의 춥고 가난함도
저 이른 새벽에 혼자 남은 불빛이 아니냐.
결코 사람들은 쓰러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크게 다른 얼굴로 일어서는 일••••••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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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철학:서양에서 바라본 예에 대한 새로운 이해
허버트 핑가레트 / 서광사 / 199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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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철학적 문제 의식이 갖는 첫번째 의미는 공자의 사상을 주희(朱熹)의 《논어집주》(論語集註)와 그에 근거한 기존의 해석들로부터 해방시킨 그의 현대적 해석의 혁명성에 있으며, 두번째 의미는 먼 옛날의 중국 고전에 나타난 철학적 통찰을 오늘날의 현대적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단히 매력적인 하나의 ‘새로운 대안’으로 재해석해 내놓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대안적 모델’이 현실상황에서 얼마만큼 실질적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이미 기존의 전통들이 왜곡되고 뒤틀린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회(공동체)의 경우라면, 그리고 그러한 왜곡된 전통과의 역사적 연결선상에서 극심한 사회적 모순에 시달리는 비참한 중생들의 구체적 행위가 결코 진정하게 ‘인간적’이라고 볼 수 없는 그런 사회적 상황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보수적이고 개량적인 경향을 짙게 노정할 수밖에 없는 ‘전통 지향적‘ 해결 방식이 진정 사회와 인간의 문제를 얼마만큼 실질적으로 해결해 줄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 담겨진 바로 이와 같은 ‘새로운 대안‘의 참신성과 문제점 모두가 보여주는 특수성 때문에 나는 1992년 2학기 대학원 과정에서 핑가레트의 이 조그만, 그러나 많은 시사성을 담고 있는 저술을 독해하였고 이제 우리말로 옮겨 독자 여러분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참신성과 문제성을 아울러 안고 있는 그의 해석이 이제 이 책을 읽는 분들에게 잔잔한 파문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요컨대 그의 야심적인 독해가 보여주는 공자의 모습과 그 철학적 통찰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비전’이 이 땅 독자들의 철학적 문제 의식 속에서진지하게 고려되고 비판적으로 이해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 P9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점점더 단계적으로 야심이 커나가는 세 가지 희망을 가졌었다. 가장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나의 첫번째 희망은 서구인에게 공자의 철학적 통찰력을 알리고 그것을 제대로 평가해 보이려는 것이었다. 20세기의 서구의 철학자들은 공자의 사상을 인간의 본성과 인간 세계를 꿰뚫어볼 수 있는 철학적 통찰의 원천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그저 아득한 고대의 잘 이해되지 않는 역사적·문화적 재료로만 치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출판된 후 20년의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이러한 사고 경향이 눈에 띄게 달라졌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11

공자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그가 무미 건조하고 답답한 도덕 군자라고 생각하였다. 그의 어록인 <논어>(論語)는 온통 구닥다리 냄새가나서 더 이상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나중에 꼼꼼히 읽어 보면서 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내가 아는 어떤 위대한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깊은 통찰력과 탁견을 가진 사상가로 다가오게 되었다. 공자가 오늘날 우리 현대인에게 스승이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그는 이미 통용되고 있는 개념들에 단순히 색다른 조명을 해주는 그런 철학자가 아니라, 현대인을 깨우치는 진정한 큰 스승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이미 어딘가에 언급되어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를 가르칠 새로운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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