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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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추사 평전입니다.
글씨는 모르지만, 추사의 삶은 알게 되었습니다.

곁들여야 한다. 개성과 보편성, 열정과 관용은 서로 곁들여야 하는 것이다. - P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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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 아침달 시집 28
성윤석 지음 / 아침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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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게>는 참 탱글탱글했다. 성윤석이 남해의 처남네 수산시장에서 일하며 길어낸 시들은 참으로 신선했다.
아마도 지금 시인은 안정적이지 못한 듯하다. 삶의 여건이 고스란히 시에 담기는가 보다. 불안하고 우울하다.
어떤 시인들은 굳건하기도 하고, 관조도 서정도 찬찬히 보여 주는데, 이 시집은 쭉 흔들린다. 떤다.
평안할 수 없는 때다.

자연은 부서지고 실망하면서 아름다
워지는 것이니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쓰지
않아 걱정하지 말자고 이제 우리를 아는
사람은 우리밖엔 없을 거야 그것이 작
은 연대든, 혼자든, 눈이 와 같이 떨어
지지만 혼자 떨어지는 눈이 온다구 - P72

언제부턴가
무슨 일에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슬픔에게선
아무것도 찾아지지 않는다 - P82

희망은 가져보는 것

희망은 희망이 없을 때 가져보는 물건이 아니었더냐

공터에서의 희망 축대 옆 계단 위에서의 희망

도서관을 힘겹게 올라가던 희망

희망은 싸구려가 되었다 - P85

벗어놓은 바지


벗어놓은 바지가 움직이는 것 같다
구제 세일 옷가게에서
점퍼는 사도 바지는 안 사게 되더라
점퍼는 감싸고
바지는 서 있게 하니까
대개는 영혼을 아끼는 거지
사람의 몸이란 긴 거울 속에 있는 것
하루의 겨울
비 오는 겨울에서 돌아와
바지를 벗어놓으면
벗어놓은 바지는
무언가를 받치고 있는 대 같아
몸과 영혼이 동시에
빠져나가고
빠져나갔지만
그대로 일어서서
걸어 나갈 것만 같은,
길은 매일 와 있지만
밖으로 나간 지 오래
바지는 엎드려 있다네
바다 앞에서 거북이 멈칫거리는 것처럼
이게 아닌가
창밖은 다 내 잘못이야 - P112

어이, 너의 공허함은 아직 커다란가
터져버릴까 봐
뚜껑을 여는 대신
손으로 누르고 있다가
이번엔 그것마저 잊혀서
너는 울고 있구나 - P25

우리는 모두 죽었다
지금의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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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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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아파하고 고발하기도 하고
어린 시절을 애틋하게 떠올리기도 하고
어머니를 잃고 의연하게 슬퍼하기도 한다
잘 늙어가는 사람의 그윽한 눈길도 있다.

무엇이 됐든 말을 잘 눙친다.
읽을 맛이 나고
감탄과 감동에 이르는 구절이 많으며
읽고서 아득해지는 때가 잦다.

공부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고 나면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 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은 착한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하겠지요만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 - P118

얼빠진 집구석에 태어나
허벅지 살만 불리다가 속절없이 저무는구나.
내 새끼들도 십중팔구
행랑채나 지키다가 장작이나 패주다가 풍악이나 잡아주다가 행하 몇푼에 해해거리다 취생몽사하리라.
괴로워 때로 주리가 틀리겠지만
길은 없으리라. - P102

따신 밥 한술 먹자는 웃음기 도는 사람의 마음 - P99

누가 보거나 말거나
오두마니 자리를 지킨다는 것
누가 알든 모르든
이십년 삼십년을 거기 있는다는 것

우주의 한 귀퉁이를
얼마나 잘 지키는 일인가.
부처님의 직무를 얼마나 잘 도와드리는 일인가.
풀들이 그렇듯이
달과 별들이 그렇듯이. - P93

모든 좋은 날들은 흘러가는 것 잃어버린 주홍 머리핀처럼 물러서는 저녁 바다처럼. 좋은 날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새나가지 덧없다는 말처럼 덧없이. 속절없다는 말처럼이나 속절없이. 수염은 희끗해지고 짓궂은 시간은 눈가에 내려앉아 잡아당기지. 어느덧 모든 유리창엔 먼지가 앉지 흐릿해지지. - P41

외롭다고 쓰지 않는다 한사코.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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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놓치다 문학동네 시집 57
윤제림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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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은
흐릿한 안개 속으로 숨거나
제 스스로 연기 피워 사라지는
짓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로지 일상에서 시를 길어 오므로
뭔가 저 멀리에 있는, 의미심장한 것들은 없다.
밍밍하면 어떠리 그게 집밥이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손이 어는지 터지는지 세상 모르고 함께 놀다가 이를테면, 고누놀이나 딱지치기를 하며 놀다가 "저녁 먹어라" 부르는 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달아나던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상복을 입고 혼자 서 있는 사내아이한테서.
누런 변기 위 ‘상복 대여’ 따위 스티커 너저분한 화장실 타일 벽에 "똥 누고 올게" 하고 제 집 뒷간으로 내빼더니 영 소식이 없던 날의 고누판이 어른거렸습니다.
"짜식, 정말 치사한 놈이네!" 영안실 뒷마당 높다란 옹벽을 때리며 날아와 떨어지는 낙엽들이 친구가 던져두고 간 딱지장처럼 내 발등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 딱지, 너 다 가져!" 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 P28

넌 뭐냐?

식객이다.
아니다, 밥벌레다. - P46

구름
-청산옥에서 13


무엇이 되어볼까, 궁리하는 새에
벌써 몇 세상이 떴다 집니다. - P56

강가에서


처음엔 이렇게 썼다.

다 잊으니까 꽃도 핀다
다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천천히 흐른다.

틀렸다, 이제 다시 쓴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꽃도 핀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시퍼렇게 흐른다. - P72

함께 젖다


공양간 앞 나무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
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
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끗한 이름들과
석재들과 그틈에 돋아나는
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
잡풀꽃들과,

목숨들과
목숨도 아닌 것들과.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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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사막 랜덤 시선 41
신현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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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동물들이 나오는 시집이 있었던가

굴뚝새 거위 장수하늘소 토끼 고래 논병아리 나비 전갈 그리마 도마뱀 게 갈매기 방울뱀 낙타 고추잠자리 귀뚜라미 갈까마귀 휘파람새 너구리 물고기 기러기 다람쥐 두꺼비 거미 공작새 오소리 족제비 까치 사마귀 종달새 숭어 메기 호랑나비 흑염소 뻐꾸기 두루미 제비 사슴 종다리 오리 개 방아깨비 나귀 고양이 고슴도치

천진난만하다.
물론, 멀리 가기도 한다.

분꽃


너를 보자마자

짐짓 시치미를 뗀다든가

딴 데를 보는 척하면서

휘파람을 불어야 하는 건데

나는 휘파람을 불 줄 모른다

입을 오므려뜨려보지만

분꽃같이 되지 않는다. - P101

서쪽에서 싸우다



해가 진다

황혼이다

갈까마귀 울다

나, 서쪽에서 싸우다

너, 이거나 먹어라 하고 주먹을 팔까지 훑어 감자떡을 먹이다

신발짝을 확 벗어던지다

지팡이를 날리다

여차하면 도로 지팡이를 끌어안고

이제라도 못 본 척 장님 행세라도 하며 가면 그만이다

가던 길 타박타박 길 가면 그만이다

나, 나그네이다

일찍이 달마도 동쪽으로 가면서 그리하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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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1-05 0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사인은 신현정을 생각하며 지은 시 <바보사막>을 이렇게 시작하더군요. 읽어보셨을 듯.
˝눈부신 가을볕 더는 성가셔 슬쩍 피해 가셨단 말이지˝

dalgial 2023-01-05 10:47   좋아요 1 | URL
멋진 사람이었나봐요. 그를 그리워하는 시들이 꽤 많은 걸 보니. 보여 주신, 김사인 시구도 참 좋습니다. 덕분에 꺼내 읽어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