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놓치다 문학동네 시집 57
윤제림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9월
평점 :
품절


윤제림은
흐릿한 안개 속으로 숨거나
제 스스로 연기 피워 사라지는
짓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로지 일상에서 시를 길어 오므로
뭔가 저 멀리에 있는, 의미심장한 것들은 없다.
밍밍하면 어떠리 그게 집밥이지.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손이 어는지 터지는지 세상 모르고 함께 놀다가 이를테면, 고누놀이나 딱지치기를 하며 놀다가 "저녁 먹어라" 부르는 소리에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 달아나던 친구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상복을 입고 혼자 서 있는 사내아이한테서.
누런 변기 위 ‘상복 대여’ 따위 스티커 너저분한 화장실 타일 벽에 "똥 누고 올게" 하고 제 집 뒷간으로 내빼더니 영 소식이 없던 날의 고누판이 어른거렸습니다.
"짜식, 정말 치사한 놈이네!" 영안실 뒷마당 높다란 옹벽을 때리며 날아와 떨어지는 낙엽들이 친구가 던져두고 간 딱지장처럼 내 발등을 덮고 있었습니다. "이 딱지, 너 다 가져!" 하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 P28

넌 뭐냐?

식객이다.
아니다, 밥벌레다. - P46

구름
-청산옥에서 13


무엇이 되어볼까, 궁리하는 새에
벌써 몇 세상이 떴다 집니다. - P56

강가에서


처음엔 이렇게 썼다.

다 잊으니까 꽃도 핀다
다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천천히 흐른다.

틀렸다, 이제 다시 쓴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꽃도 핀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시퍼렇게 흐른다. - P72

함께 젖다


공양간 앞 나무백일홍과,
우산도 없이 심검당 섬돌을 내려서는
여남은 명의 비구니들과,
언제 끝날꼬 중창불사
기왓장들과,
거기 쓰인 희끗한 이름들과
석재들과 그틈에 돋아나는
이끼들과,
삐죽삐죽 이마빡을 내미는
잡풀꽃들과,

목숨들과
목숨도 아닌 것들과.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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