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일 단식 끝에 돌아가신 이한빈이 죽기 3일 전 수감 동료에게 남긴 유언.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하여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동무가 살아 나가거든 동무들에게 일제가 이 같이 나를 죽인 것을 전하여 달라!” 333기억해야 한다. 독립에 좌우가 어딨나기억해야 한다.수많은 숭고도 배신(6장)도.술술 읽힌다. 뛰어난 문장이다.
“길을 잃은 사람일수록 온갖 길 생각으로 꽉 차는 것인지.” 78길을 잃고 헤맨다. 갈 길이 없는 때. 아득하다.“너는 여전히 직바른 속도를 꿈꾸지만거기 벼랑 위의 원추리꽃에 눈이 팔려한순간 까마득한 추락을 할 뻔도 하는이 길을 누군가의 음덕인 양 여기는 건우리 생의 곡절을 항상 과장만 해온그 앞에 태산준령은 또 도사리고우린 그 길을 넘어야 하는 엄정함으로또 한 생을 여며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81험난한 첩첩산중이 버티고 섰다. 그래도 한 떨기 꽃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도. 그래서 위태로워지기도 하지만, 덕택에 덕분에 살아간다.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고,“십일월갱변의 늙은 황소가 서산 봉우리 쪽으로 주둥이를 처들며 굵은 바리톤으로 운다밀감빛 깔린 그 서쪽으로 한 무리의 새떼가 날아 봉우리를 느린 사 박자로 넘는다그리고는 문득 텅 비어버리는 적막 속에 나 한동안 서 있곤 하던 늦가을 저녁이 있다소소소 이는 소슬바람이 갈대숲에서 기어 나와 마을의 등불 하나하나를 닦아내는 것도 그때다” 116단순한 진리가 있다.“배꽃 길을 걷는 할머님워매! 바람에 꽃 다 져부네, 하니같이 걷던 영감님꽃이 져야 열매 맺제, 하네” 122
<십현담>은 10편의 7언율시이다.중국 불교 선종의 한 계파 조동종 승려 동안상찰이 지었다.선불교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한다. 동안의 동문 청량문익이 주석을 달았고거기에 김시습이 주해를 더해 <십현담 요해>를 남겼고그걸 설악산 오세암에서 한용운이 읽고,느끼고 깨달은 바 있어쓴 글이 바로 이 책, <십현담 주해>이다.<님의 침묵>과 같은 자리, 같은 시기에 쓰여 침묵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고.대승과 선의 말들이 비수처럼 꽂힌다.“더러움에 있다고 열등하지 않고 깨끗함에 있다고 고상한 것은 아니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겠는가. 또한 더러움은 깨끗함에서 떠나 있지 않고 깨끗함은 더러움에서 떠나 있지 않다.“ 47”부처님이 간 길은 이미 낡은 자취이니 다시 다른 곳을 찾아야 묘한 경지이다. 부처님이 가지 않은 길이 어디인가?“ 55“배우는 사람은 오직 인연을 쉬고 생각을 끊음을 종지로 삼아 마치 마른 나무와 죽은 재와 같이 된다. 그러면 도에서 멀어진다. 이에 이르면 마치 바위 앞에 갈림길을 만난 것과 같아서 바른길로 들어가기 어려우니 오히려 미혹하게 된다.” 105깨달음의 자리가 심산유곡 탈속에 있지 않고 여기 속세에 있다는 얘기가 흥미롭다. 멀리 가지 말고 여기서!
누가 감히 서럽지 않겠습니까.누가 감히 성성치 않겠습니까. 62마당은 환하고 불혹은 눈앞이다. 461997년 전남 담양 고향에서 농사 짓는, 30대 후반의 시인이 화자이다.다 죽어가는 농촌처럼 쓸쓸한 할매들이 눈에 밟힌다.“칠십 평생 논밭을 박박 긴우리 동네 남평할매 왈,/나 죽걸랑 화장을 해주소잿가룰랑 공중에 뿌려주소사방에 훨훨 날아댕기며,이 나라 산천경계죄다 구경허고 말겄네“ 63 눈물
저물녘을 견디는 법오무라졌던 분꽃이 다시 열릴 때저 툇마루 끝에식은 밥 한 덩이 앞에 놓고 앉아혼자서 멀거니식은 서천을 바라보는 노인이여!당신, 어느 초여름날 햇살이 환하게 비추는 것도 모르고 옆 논의 아제가 힐끔대는 것도 모르고 그 푸른 논두렁에서 그 초롱초롱한 아이에게 퉁퉁 불은 젖퉁이를 꺼내 물리는 걸 난 본 적이 있지요 당신, 그 薄暮 속의 글성거림에 나는 괜히 사무치어서 이렇게 추억 하나 꺼내봅니다 생은 추억으로 살 때도 있을 법해서 그만 죄로 갈 생각 한번 해본 거지요. - P69
나말여초에 묻어 버리기에는일제강점기보다도 긴 40여 년의 후삼국시대한반도 기반 국가 중 몇 안 되는, 연호를 낸 나라의 왕인데홀랑 나라를 뺏겨서 그런가남은 향취가 고약한‘슬픈’ 궁예
궁예의 경우도 그런 시각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궁예를 ‘치사한 놈‘이 아니라 신라의 구각을 깨뜨리고 새시대의 기틀을 다지려했던 사람으로, 견훤은 ‘나쁜 놈‘이 아니라 소외된 지역 백제를 대변하고 안정을 유지하려 한 사람으로, 그리고 왕건은 ‘좋은 놈‘이기 보다는 앞의 두 사람의 경험을 보완하여 통일을 이룬 인물로 이해하고 싶다. 만약 이 세 사람이 자신들의 이익과 패권만을 위해 투쟁한 것이라면 결국 좋은 놈에게 천하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도 무방하다. 그러나 세 사람의 세계관이 달랐거나 세계관이 같았더라도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면, 이들의 행보를 세계관이 다른 세 지도자의 고민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궁예와 견훤은 왕건을 서술하기 위한 들러리가 아니라 그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왕건에게 선험적 지식을 준 인물로 왕건과 동등한 지위에서 다시 평가되어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후삼국 시대 또한 고려의 전사로서가 아니라, 그 시대 자체를 고뇌하면서 여러 영웅들이 공존한 대립과 동반의 시대로 다시 이해했으면 한다. - P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