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웃으까?” 68어머니는 당신의 영정을 찍히며 말씀하신다. ‘그 표정 쓸쓸하고 복잡’하고 ‘돌아오는 길은 멀고 울퉁불퉁했’다.그렇게 ‘당신이 안 보이는 곳으로 갔을 뿐’인 ‘그런 아득함’은‘아‘’남아서 남아서막무가내가 된다‘“흔들리면서일어나면서/불안도 꽃인 것을” 91’아득하고 쓸쓸하기만 한‘ ’변두리의 밤‘과 ’사랑스러움을 견딜 수 없‘는 ’흠 있는 존재‘를 자꾸 보게 될 듯하다.
저 지경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살아왔구나. ”국가가 반인을 계속 성균관과 반촌에 묶어놓기 위해 생계수단으로 제공한 것은 현방의 독점경영권이었다. 곧 서울에서 소를 도축하여 쇠고기를 팔 수 있는 전매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현방 경영권은 반인의 성균관에 대한 사역에 대한 반대급부일 뿐이었지만 성균관은 이내 현방 수익의 일부를 요구하였다. 조선 후기의 성균관은 반인의 노동력을 수탈하고 반인이 현방 경영에서 얻는 수익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균관은 국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당연히 국가는 성균관의 유지와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공급해야만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국가는 재원을 공급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요컨대 사족국가 최고의 학교이자 국가이데올로기의 교조에게 제사를 올리는 신성한 제의소는 자신이 소유한 노비를 혹독하게 착취함으로써 겨우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142“반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들은 성균관에서 일차 노동력을 사역의 형태로 수탈당하고, 현방의 수익을 성균관과 삼법사에 바쳐야 했으니, 이중삼중으로 수탈을 당한 것이었다.” 143“하지만 앞으로 수없이 보게 될 것이지만, 조정에서의 결정이 실행에 옮겨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192
오직 이예의 삭료에 대한 항구적인 재원을 마련하는 것만이 삼법사의 금란이 야기하는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을 위시해 어떤 관료도 이예의 삭료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시도하지 않았다. 관료들은 삼법사의 직임을 맡았을 때 극히 드물게, 예외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었고, 다른 관서의 직임으로 옮길 경우, 그 문제에 대해 발언하지 않았다. 문제의 존재는 공지의 사실이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책임의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 또한 이 무책임은 나름 의도를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 달리 말해 문제를 방치함으로써 의도를 관철시켰다고 볼 수 있다. 금란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거의 모든 금란 명목이 신분제의 상징들을 이탈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을 떠올려보라. 삼법사의 이예는 피지 배자들에게 국가권력의 존재와 작동을 체감시키는 최말단의 도구였다. 아마도 지배계급은 이예들이 과도하게 날뛰는 것이 피지배층을 통제하는 데 적절하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했을 것이다. - P226
“•••앞에 있는 장강의 왼쪽은 바다인데, 눈앞이 광활하게 죽 펼쳐 보였다. 산 남쪽 발목 지점에는 낙빈왕과 문산 문천상, 문천상의 부장 김응의 묘가 있어 사람들에게 발걸음을 멈추고 옛날의 사적을 돌아보게 했다. 선생과 함께 산 아래에서 투숙했다. 다음날 인사를 하고 상해로 돌아왔으니, 10월 5일이었다.”이것이 책의 결말이다.허탈하다.인생인가.저자 이병헌은 44세인 1914년에 첫걸음을 한 뒤 1925년까지 5차례 중국을 다녀왔다. 홀로 여행. 이 책은 그중 2차까지의 기록을 당시 중국에 망명 중이던 김택영이 1916년에 중국에서 간행한 책을 번역한 것이다. 아마도 저본의 결말이 저렇게 여행 중이리라.그는 1940년에 생을 마쳤다.우리는 모두 그때 살았던 이들의 후예이다.많은 모색이 있었다.
“여즉 남아 있는 절벽들창날 모양의 창바우, 깎아 세운 형상의 선바우 앞에서 철없던 맹세의 주먹을 몇 번 내뻗어 보고…목구멍의 욕설을 앞세워서험한 땅거죽을 뱃구레로 밀고 왔다” 70-71오정국의 고향은 경북 영양. 몇 년 전에 거기 답사를 갔을 때, 그 ‘창바우’와 ‘선바우’ 앞이 경관이 좋아 몇몇이 정말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중 한 사람, 혹 벗이 되었을지도 모를 동갑 남자는 그 뒤 세상을 버렸다. ‘욕설’을 앞세우고라도 버텨 보지. 다들 ‘육체를 땅바닥에 내려놓을 때까지 견뎌야 하는 등짐이 있’는 법인데 그는 더이상 멜 수가 없었던 게지. ‘강바닥 자갈밭이 그러하듯이 생은 언제나 목말랐던 것’이다.무미할 정도로 심심했던 기억만 있는 오정국이었는데, 가슴을 치는 구절이 많다. “등대를 선회하는 새들의해안 절벽 벼랑길 아스라이 굽이치지만손목 잡고 데려갈 파도는 없어요부교처럼 흔들리는 불빛들등허리에 아릿하게 감아 두르고이 얼굴 캄캄하게 펄밭에 파묻어도덧없는 세상을 덧칠해 온 느낌, 지울 수 없어요” 74“이제 내 가슴을 들여다보면발을 헛디딘 흙구덩이와타다 만 숯덩이,새의 날갯죽지 같은 게 흩어져 있다” 99굉장히 감각적으로 쓸쓸하다. 아득하고.“목적지 입간판이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오듯이캄캄한 국도에서 불빛을 되쏘듯이/어떤 후회는 일찌감치 당도해 있고어떤 후회는 발걸음이 더디다” 70“어느 몹쓸 꿈자리는 아닐 텐데, 이번 생을 웃고 울면서 웃기고 울리면서 하루해를 보내고 국도로 올라설 때 짐짓 헛디디는 발걸음 몇 번 강기슭 저쪽이 너무 아득해서 이쪽의 물살을 헛짚는 물결처럼” 63<영명축일>, <침묵 피정> 등의 시를 보면 가톨릭에 귀의한 듯한데, 오정국은 평온하지 못하다. 시인이다.“재의 얼굴은 무심하다재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는다/나는 재의 얼굴로나를 지나간다” 123
아주 질기고 오래된 것이라 생각하게 되는전통이란 것이에계, 겨우?싶은 것이 꽤 많다.일본적이라는 것의 뿌리를 에도시대에서 캐낸다는데 기죽게 두껍지 않아 덥석 읽기 시작했다.모르는 사람과 일들이 많아 더디다. 그러나, 전혀 지루하지 않고 잘 읽힌다. 꼭꼭 씹어먹어야 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