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에 달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92
김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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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년생 시인이 96년에 냈다.
20대의 첫 시집답다.
어수선하고 거칠다. 들쭉날쭉하다.

세상을 냉소하고

“세상은
힐난받을 가치도 없고
멱살 잡고 싸움 걸 적당한 상대도
아닌 듯하다“ 103

자기 삶이 불만족스러우며, 작위로 치장한다.

“요점 없이 지리하기만 한
내 추억은 냉동 심장을 제조중” 83

“나는 온 청춘을 저속하고 불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거적 같은 몸뚱이를 아무데나 두고 자버렸고 내키는 대로 아무 꿈이나 불러들여 가위눌렸었고 바퀴벌레 우글거리는 헌 집처럼 오래오래 나를 비워두웠었다.“ 49

실패한 연애도 잦았고, 쌍욕을 서슴지 않는다.

“한 남자가 잠깐 동안 임대한 세계가 나라는 사실에
만족하기 위해 많은 세월을 썼지만
헛수고임을, 나 여기 묘비에 적듯 적어두노라 가거라
멀리 가거라 머뭇거리지 마라
뒤도 돌아보지 마라 씹새끼” 45

그래서 글을 썼겠지만, 그래서 순하지 않은 글을 선택한다.

“거울 안에 한 사람에 대한 고통이라든지
한 시대에 대한 추억을
담아놓았는데,
그걸 알아채는
사람들은 하나 없다” 105

“나는 난해한 말들을
창가에 심어두었고
가끔
물을 주었고 그 뿌리는
그리하여 썩었다“ 56

그 눈이 화자 밖을 향하면서 냉소가 드러날 때가 좋았다.

“나는 청춘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청춘으로 살아야 한다고 애쓰는 너희를 보았다 그런 너희가 지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33

“덩달아 화를 내는 일 잦아도 덩달아
기뻐하는 일이 드문 나는 말한다
거리의 화환이 즐비한 어떤 양화점 지나며

당신들은 좋겠어요
짧은 희망들마저도 내다놓고 장식할 줄 아시니” 32

21년 <i에게>를 끝으로 읽지 않다가 중3 딸이 푹 빠져 이 달에 나온 <촉진하는 밤>까지 집에 있는 김소연을 다 읽고 하는 말이 “첫 시집이 제일 좋다”. 그래서 간만에 읽었다.
나는 아직 모르겠다.

행복하여

허전하여 경망스러워진 청춘을
일회용 용기에 남은 짜장면처럼
대문 바깥에 내다놓고 돌아서니,
행복해서 눈물이 쏟아진다 행복하여
어쩔 줄을 모르던 골목길에선
껌을 뱉듯 나를 뱉고 돌아서다가,
철 지난 외투의 구멍 난 주머니에서 도르르르
떨어져 구르는 토큰 같은
옛사람도 만났다 오늘은
행복하여 밥이 먹고 싶어진다
인간은 정말 밥만으로 살 수 있다는 게
하도 감격스러워 밥그릇을 모시고 콸콸
눈물을 쏟는다 - P89

바로 그때입니다


지프가 한 대 지나가면
비켜서서 가장자리 쑥풀들을
밟겠습니다 몇 대 더 그런 차가 지나가면
호박잎이 뽀얀 흙먼지를 입겠고 힘겹게
늘어져 있을 테지만,
한차례
짧은 비로
그 잎은 푸른 제 빛을 찾을 겁니다 그때가

반짝이며 빛나던 호박잎이 너덜대며 찢겨지는
바로 그때입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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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뿌리 - 2017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한티재시선 6
이하석 지음 / 한티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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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

“1950년
여름 더위의
결빙.

대구 형무소에 갇힌 양심수들과 국민보도연맹원들은
구석 없는 광장에서
귀를 막지만,
죽음의
호명으로, 마구,

끄집어 올려집니다.
한데 엮인 채
녹색의 차에 올라,
바리바리,
경산 코발트 폐광산에 실려 옵니다.

그들을 둘러싼
군경들은 남색의 하늘 아래
천막처럼
서 있습니다.

관리와 교화로 엮인 보도연맹원들은
포승의 상처로
파랗게
멍든 채
몇 명씩 조를 이뤄
수직 갱 위에 세워집니다.

갱 구멍이 눈 흘기는
역사 같습니다.
컴컴하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습니다.

군인이
앞의 한 명을 쏘아
갱속으로 떨어뜨리자 한테
엮인 이들
줄줄이
산 채로
따라서
떨어져 내립니다.
숨 막힌 미래 속으로
셀 수 없는
몸들몸들몸들 붉게
쏟아져 내립니다.

수천 명이 쏟아져 내렸어도
한 명도 게워올려지지 않습니다.
거대한 위장의 소화력으로
1950년 한여름의 더위는 캄캄하게,
결빙되고,

그리고는 그 위에 흙을 덮어버립니다.

곧장
죽음의 정보는 봉쇄되고,
폐기됩니다.” 54-57, 컨테이너

그랬다가 여러 피눈물 넘치는 증언이 잇따르자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침묵의 구조를 발굴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뼈들이 발굴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원회는 또다시 진실 덮는 힘에 의해 이내 해체되고 발굴은 중단되고 맙니다, 갱도 안에 아직 수천의 주검들이 묻혀 있는데도 거의 드러나지 못한 채. 발굴된 유해들 역시 안치할 곳 없어 컨네이너 안에 갇힌 채 방치됩니다.‘59

끔찍하고도 추악하고 천인공노할 학살이 엄청나게 자행되었는데도, 왜 진실을 밝히는 힘은 언제나 미약하고 ‘덮는 힘’은 이다지도 여전히! 강고한 것일까. 그래서 시인은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조용히 우는 것이다.

“죽음 자리가, 저렇듯,
푸르름으로
무성할 수 있다니!” 16

“망각의 껍질을,
꺼리는 질문과 대답으로
파들어가서
어리둥절하게 만나는
역사의 민낯이여.” 77

“풍경의 헤진 언저리에 우거진
어둠을 좀 더 밝게 인화하면,
행방불명으로 도드라지는 이름들과
아버지의, 되돌아 나오지 못한
막다른 길이 보입니다.” 81

“대숲 서걱이는,
바람결 다독이는
바깥 풍경을
다 애비의 무덤이라고 말하는 건
무슨 기척에 대한 화답입니까?” 95

‘당신은 여전히 행방불명’이고, ‘뭇 삶의 뒤꼍에 숨겨진 침묵의 구조는 여전히 화강암의 속을 달이’98 고 있지만,
우리는 ‘다 기억한다. 기억해야 한다.’97

“한바탕, 새로, 저항해야,
깨어나는 것입니다.” 109, 신천

나의 아름다움
릴케의 시*를 따서


누가 우는데
저 혼자만 우는 게 아닙니다
나도 왈칵, 뜨거워집니다

누가 즐거운데
저 혼자만 즐거워하는 게 아닙니다
나도 덩달아 들썩입니다

누가 부르는데
저 혼자만 부르는 게 아닙니다
나도 가쁘게, 기척합니다

물론 당신이 벙글면,
나도 피어납니다

이런 게 나의 아름다움이죠
그 힘으로 일어납니다

* 릴케, <마음 무거울 때>.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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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뿌리 - 2017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도서 한티재시선 6
이하석 지음 / 한티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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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생 시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시마다 결기가 서려 있다
홍어 거시기처럼 흐물흐물해질 나이
그가 돌연한 까닭은?

대놓고 묻어버린 국가폭력
과 싸우고 있으니

부끄럽다
아직도 실종인, 그 청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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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먹는 소 문예중앙시선 28
고진하 지음 / 문예중앙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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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기행, 유람한 것을 쓴 시가 좋기는 쉽지 않다.
아무래도 스쳐가며 느끼는 것이 깊기 어렵고
그래서 소재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고진하의 이 시집은 전체가 인도를 읊은 것이면서 깊고 그윽하다. 시간을 두고 오래 머문 것이 분명하다.
그곳의 ‘결핍에 덧댄 슬픔을 인생이라 부르지 않는 인생들이’75 시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문득 닳아버린 샌들 같은
겸손이란 말이 떠오르고
이지러진 그믐달 같은
소멸이란 말이 욱신거린다” 61

어느 ‘집시의 뜰에서’ ‘시타르 켜며 들려주는 민속음악’을 듣고는 자신의 영혼이 ‘훌러덩 한 꺼풀 벗어 새파랗게 되었으니 남은 생은 그 지극한 떨림의 후렴이겠다!’13 하고 빠져들기도 하고,

해거름에 이슬람 재래시장에 모자 사러 갔다가 시궁창 같은 실개천에서 벌거벗은 아이들이 물을 뒤집어쓰고 노는 것을 보고는 ’시궁창 유치원, 노을수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여전히 먹구렁이처럼 꿈틀대는 아이들을 바로보다 삐죽, 삐죽 터져 나오는 울음‘ 감추려 ’모자를 두 개씩이나 후다닥 덮어‘33 쓰기도 한다.

‘갠지스 강에서 빼빼 마른 소녀의 환한 미소에 반해 타는 꽃등을 2루피 주고’ 사고서 시인은 이렇게 소원 빌었다.

“아무 빌 소원도 없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내 목숨의 꽃등 꺼지기까지
빌 소원도 없이

이 어두운 강을 건널 수 있기를 ” 53

가만히 따라 빌어 본다.

자연


자벌레도 아닌데
마른 나뭇잎을 나눠주었다
염소도 아닌데
마른 나뭇잎을 나눠주었다

니뭇잎 두 장을 이어붙인
나뭇잎 접시,

거기 흰밥을 담아주었다
거기 찐 콩을 담아주었다
거기 야채카레를 담아주었다

그걸 숟갈 대신 손으로
비비고 또 비비는데

거기 햇살도 듬뿍 얹어주었다
거기 맑은 공기도 섞어주었다
거기 청량한 새소리도 얹어주었다

나무 그늘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나뭇잎 접시를 다 비웠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설거지꾼들이 나타났다

나뭇잎 접시를 얼른 내주었더니.
버석버석 단숨에 먹어치웠다
어린 염소 세 마리가! -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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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를 생각한다 - 도쿠가와 3백 년의 유산 일본사 연구총서 2
쓰지 다쓰야 지음, 김선희 옮김 / 빈서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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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일본에서는 유학도 주자학의 명분과 한당의 주를 절충하여 고증에 가까워져 유학이라기보다는 한학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린다.
성리학의 격물에서 물은 인간이 관계를 맺는 대상으로 철학에 해당했으나, 일본에서는 물질적인 물로 봐 서구의 과학기술 성과를 받아들이는 데 용이했다.

결국 일본적이라는 것은 당연히 에도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
이국적 취향에서 시작해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고, 서민이 부상하고, 과학기술을 빨리 받아들인 점이 동양 3국 중 근대화에 가장 먼저 성공한 이유라고.

일본의 독자성을 가진 배경으로 나는 우선 근세라는 시대가 근대로 이어지는 통일 국가 권력의 형성기였다는 것, 동시에 중화 문명의 커다란 우산에서 독립하는 시기였음 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하여 새로운 통일 국가 안에서 일본의 전통문화도 외래의 이국 문화도 널리 민중 계층에 침투하여 정착하고, 마치 이 풍토에 토착하고 있는 듯한 ‘일본적‘ 문화를 형성했다.
시각을 달리하면 지식 교양에 대한 민중의 강한 의욕이 하층 저변까지 광범위하게 도달했고 봉건적 신분 계층을 뛰어넘은 지식 시민층이 형성되어 갔다. 일본 근세의 문화는 결코 왕후귀족의 주도• 보호에 의하지 않았고, 단순히 도시의 호상의 문화도 아니었다. 서민층의 저변 확산을 무시하고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화혼양재‘는 하루아침에 나온 것 아니다. 17세기 후반 주자학이 정통파의 입지를 확립하는 무렵부터 이미 주자학과 아울러 한당의 훈고학을 취하는 절충주의가 나타났다. 이윽고 그것이 주류가 되어 관념적인 도덕 철학보다는 경험적 • 실증적 학문의 풍조가 높아졌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저들의 장점을 취하여 이쪽의 단점을 보완하는 동양 도덕 • 서양 기술, 표리겸해表裏兼該도 가능했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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