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에게 배우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37
맹문재 지음 / 실천문학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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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야근 끝내고 돌아오는 남편을 맞기 위해 사택(社宅) 골목 어귀에 다소곳이 서 있는 새색시의 스웨터 사이로
사글세방 연탄이 꺼지고 으슬으슬한 저녁, "이것 좀 먹어봐." 불쑥 방문을 열고 비지찌개 한 그릇 들어놓는 옆방 할머니의 메마른 손 사이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늘을 따서 입에 넣고 재잘거리는 횡단보도 건너편의 아이들 얼굴 사이로
오래된 앨범에 끼워진, 중국집 배달을 나갔다가 덤프 트럭에 깔려 죽은 불알친구 동석이의 오토바이 사이로
"하여간 굶지는 마라, 뭘 해도 몸이 성해야지." 식당에 일 다니는 막내고모님의 늦은 저녁 전화 사이로

몸 달궈 들이박는 저 눈물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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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시안황금알 시인선 2
오탁번 지음 / 황금알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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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시이게 하는 글자나 요소를 뜻하는 시안詩眼이 한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시에도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을 모실 때도 점안點眼이 가장 중요하듯 시에는 시의 눈이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그 말이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한 편의 시로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바로 그 말 하나! 이것이야말로 한 작품의 빛나는 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우리말이 지닌 신비하고도 넉넉한 뜻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그냥 대충 소감이나 주장을 설파하는 시는 싱거워서 못 읽는다.” 133-134. 시작노트 모든 사라진 것들과의 해후

‘하릅송아지’나 ‘엇송아지’처럼 농경문화와 함께 사라져버린 말들이 등장하여 벙벙해지기도 하지만,
‘손에 쥔 기차표 하뭇해하며’, ’엇송아지 한 마리가 강중강중 뛴다‘, ’낚시바늘 답삭 물고 몸부림하고 싶네‘,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등에서 볼 수 있듯 센말만 주로 써서 있는 줄도 몰랐던 여린말을 찾아내 알려주는데, 그 말결을 생각해 보면 참 딱 그 자리에 어울려 경탄한다.

생의 비의를 점잖게 읊을 수도 있으나,

”소나무 가지에서
한댕한댕 흔들리는
풍경 소리
홋홋하고
/낮곁 지나
수련 잠드는 소리
캄캄한
우주를 흔든다
/오늘밤
들고양이가
떠돌이별처럼
으앙으앙 울겠다“ 114, 무심사

탱탱한 삶의 비루를 숨기지 않는다.

“머리가 하얀 초등학생 셋은
무중력 우주선을 타고
저녁놀 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 방학리에 왔으니 학 한 마리 잡아다가
안주로 구워먹자 씨벌!
종택이와 종명이는 내 말에 장단을 맞췄다
- 그럼 그렇고 말고지, 네미랄!
광속보다 빠르게 블랙홀을 가로지르는
학을 쫒아가다가
그만 나는 정신을 잃고
종택이 경운기에 실려 돌아왔다” 124,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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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 봉정사 - 안동문화를 찾아서 4
이효걸 지음 / 지식산업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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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가 써서 그런가 연혁과 문화재만 나열하는 소개글을 넘어선다. 꼼꼼히 읽는다.

비록 사찰이란 곳이 부처를 모시고 진리를 깨우치는 신성한 장소라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지 자연의 몫이 아닌 까닭에 자연에게 사찰 조성의 양해를 구하고 혹 훼손되는 일에 대해 용서를 비는 것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무라 여기는 토속신앙은 너무나 윤리적이다. 그리고 토속신앙의 그러한 요구가 영역침범을 불허하는 배타적 태도가 아니라는 점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기꺼이 순응해 간 불교의 겸손도 땅에 대한 우리의 윤리의식을 더 윤택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엄밀 히 말하면 전통신앙과 불교가 화해한 것이 아니라 전통신앙이 불교의 팔을 끌고 함께 자연과 화해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불교와 토속신앙의 이와 같은 만남은 파괴되어 가는 자연환경에 망연자실해 하면서도 현재의 이익에만 관심을 지니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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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날기 위해 울음마저 버린다
김용만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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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언어로 지은 집이라서, 본래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글이 어떻게 손에 잡히겠는가. 그래서, 농촌을 읊고 노동을 읊는 시들에서 물론 시인은 농촌과 노동의 숭고함과 소중함을 읊겠으나 이물감을 어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시집은 물질이다. ‘달뜬 첫눈‘이 보이고, 아버지의 영어사전 뜯어 만 담배에서 침 냄새가 나고, ’늘 그렇게 가난하게 끝나곤‘ 하는 어머니의 농사 중 밭 갈며 ’밭 가상에 돌 던지던 소리‘가 ’깊고 아득‘하게 들려온다.

어린 시절의 가난이 구질구질하지 않다. 처절하게 그리지도 않고, 예쁘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담담한데 시리게 온다.

“물길을 뛰어넘고 물장구를 치며 놀다 난 그만 한쪽 고무신을 잃어버렸다 정신이 아찔했다 한쪽 남은 신발을 내려다보며 한없이 물길을 원망하며 울었다 소식을 들었는지 걸레 빨다 쫓아온 어머니에게 직사하게 맞았다 온몸에 걸레 자국 검붉게 남아 따끔거렸다
/지천의 물은 비만 멎으면 금방 줄었다 모두들 돌아갔지만 난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며 오래 물 앞에 앉아 있었다 어지럼증이 일었지만 행여 포기할 수 없었다 눈이 퉁퉁 부어 가물가물할 즈음 돌팍 사이에 끼어 물살에 발발 떠는 것은 것이 보였다 아, 잃어버린 한쪽 신발이었다 신발을 주워 맨가슴에 꼭 안고 혼자 한참 울었다 신발을 찾아 신고 자꾸 발등을 내려다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를 만났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어머닌 상처 난 내 맨몸을 쓰다듬으며 미안하다며 울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마루 기둥에 새겨 쓴 숫자를 찾았다 내가 검정고무신을 산 날짜였다“ 81 고무신

그리고, 그 가난은 가지런하다.

“늦가을 햇살 같은
가지런한 이 가난
/얼마나
간결한가” 51 가을날

시인의 아버지는 논을 갈고, 먼 데까지 가 풀을 베어 짐을 져다 쌓았다. 논마다 풀더미가 쌓이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퇴비를 만들려고 풀을 썰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 말없이 맥이고 딛는 먼 모습을 하굣길에 바라보다 말없이 돌아서곤 했다 작두날에 썰린 가지런한 풀처럼 참 아름닥고 고른 날들이었다“87

그런 시인이었으니 사람이 순하고 맑을 수밖에. 밤에 딸 마중 나가다 서행 중이었지만 고라니를 치고 드는 생각이

“다행이다
아마 많이 아팠을 것이다
/아휴, 큰일 날 뻔했네
했을 것이다” 13 고라니

한다. 자기를 위한 생각은 없다. 고라니 생각뿐이다.

시인은 전북 완주 학동마을 소양에서 산다. ‘만나는 사람 없어 산 보고 메리 크리스마스, 했어요‘18 할 정도로 외롭다. 그러나 밭이 열 군데라 할 일이 태산이고, 달팽이부터 온갖 푸나무, 숲, 산과 더불어 살다보니 심심할 틈은 없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모습도 시에 고스란하다. 담백하다.

위봉사 가는 길이 시인 덕에 외갓집 가는 기분이겠다.

배추밭


배추밭에 섰다
싱싱하다

—야, 이놈아
너도 속 좀 차려라

— 예
어머니

그렇게
가을이 갔다 - P43

시인


아름다운 것들은
땅에 있다

시인들이여

호박순 하나
걸 수 없는

허공을 파지 말라

땅을 파라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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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양식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10
이성부 지음 / 민음사 / 197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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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년에 나온 시집을 78년 중판으로 읽는다.
모시는 마음으로
그러다 놀란다.
유신으로 독재가 극악하던 그 시절 남긴 이 두 시가
50년 지난 이 모냥을 예언한 듯하여.

“밤이 한가지 키워주는 것은 불빛이다.
우리도 아직은 잠이 들면 안 된다.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비롯되는 싸움, 떨어진 살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아직은 똑똑히 보고 있어야 한다.
쓰러져 죽음을 토해내는 사람들의 아픈 얼굴,
승리에 굶주린 그 고운 얼굴을
아직은 남아서 똑똑히 보아야 한다.” 54 밤

“바다는 죽는다.
무덤으로 가는 것이 더 아름다워
바다는 그 가슴에
서슬 푸른 칼을 꽂는다.” 55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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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9-27 0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옛 생각이 나 이 양반의 <백제행>을 사놓고 1년이 다 되는데 아직도 읽지 않았군요. 강건하고, 만나면 진짜로 강건한 상남자 같던, 절대로 창백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요. 시인으로도 산꾼으로도 멋있었는데....

dalgial 2023-09-27 10:05   좋아요 0 | URL
강건. 딱 시인과 어울립니다. 그래서 별로 안 좋아했는데, 요즘 보기 드문 모습이라 그런지 싱그럽고 좋았습니다. 다시 읽어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