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디 시인수업 5
정끝별 지음 / 모악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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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가 무엇이고, 우리 현대시에서 전개된 양상, 그 내적 원리, 여러 번 패러디된 시들의 패러디를 계보학적으로 살펴보기까지.
딱부러지게 알려 준다.
충분하다.

위대한 패러디스트는 텍스트의 표면적인 차이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속해있는 맥락적 심층의 구조 속에서 차이성을 발견해내는 자다. 따라서 맥락에 의한 심층 구조의 차이가 상반된 모순을 띠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패러디스트의 창작욕구는 발동하기 시작한다. 이런 의미에서 패러디스트는 자신의 현재를 항상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지우는 자이며 사회와 역사에 대해 풍부한 지식을 소유한 자들이다. 패러디의 핵심이 궁극적으로 미지의 것에, 끊임없이 보충되어야 하는 것으로서의 ‘텍스트성’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텍스트의 ‘관계성’에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강조된다. - P109

박상배는 선배시인의 영향력을 유표화시켜 전략적으로 역이용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 는 시적 상실과 시적 성취라는 두 가지 국면을 동시에 드러낸다. 문학의 독창성 • 원본성은 물론 그 진정성까지를 회의케 한다는 점이 시적 상실이라면, 글쓰기의 자유로움과 해방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또 다른 시적 성취이기도 하다. - P62

컴퓨터의 전자언어를 모방하여 패러디의 테크놀로지화를 실험하는 이러한 패러디 형식은 후기자본주의의 테크놀로지화된 구조를 반영한다. 결과적으로 시의 장형화, 산문화, 단편화, 분열증화, 비속화, 다성화, 짜깁기화, 부조리화, 유희화를 초래하기도 하는데, 테크놀로지를 근간으로 하는 대량복제의 소비사회에서 서정시를 쓴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자 하는 역설적 동기를 함의하기도 한다. 성기완이 언급했듯, 시인에게 있어서 테크놀로지화된 패러디란 시의 타락한 형식이자 시의 죽은 형식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루카치가 소설을 일컬어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성으로 인한 ‘타락한 사회의 타락한 형식‘이라고 명명했던 구절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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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을 밀어내지 않는다
이진수 지음 / 큰나(시와시학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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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이력 : 1962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다.

산뜻한 자서 :
열흘 비 끝에도
복숭아나무는 그늘을 밀어내지 않는다.
/그늘 쪽에도 열매를 매단다.

2002년에 나온 시집이다.
2014년에 충남작가회 신임 회장에 선출되었다는 기사와 거기에 직업이 청양신문사 편집국장으로 나온 것 말고는 이력을 알 수가 없다. 동명이인의 시집 말고는 이 시집 뒤로 시집을 펴낸 것 같지 않은데, 왜 그런지 역시 모른다.

발상이나 시상 전개 등이 투박하며, 삶을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주먹구구 같다
이제껏 내가 살아온 것.
어릴 때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할 수 있는 것이 드물었고
자라서는 하던 것을 멈추고 쉬고 싶기도 했는데 그게 또 잘 되지 않았다.
욕망은 그처럼 삶을 앞질러 가며 자주 나를 비웃었다.” 100. 무욕에 대하여

“나의 안쪽으로 이백 리를 가면 수생산이 있다. 초목이 뻐드렁니처럼 나고 가시덤불과 부서진 바위가 많다. 짐승이 있다. 모양은 목 없는 자라와 같고 울음소리는 맹꽁이 같다. 그 이름을 고질이라 한다. 이 짐승이 나타나면 일가붙이가 흩어지고 부모 마음이 옥살이를 한다.” 34. 짐승이 있다

농촌의 풍경. 구수한 면과 쓸쓸한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다.

“집 쪽으로 이어진
좁은 길이
대문 앞까지 갔다가
풀썩 주저앉고
/년에 한두 번
성묘하는 사람이나 지날까
뒤꼍에 감꽃 지는 걸
아무도 알지 못한다.” 47. 가까운 폐가

그 뒤로 어떤 시가 되었을지 무척 궁금하다.




그노무 수박값이유
흉년에는 금값 되구
풍년에는 똥값 되는디유
수박 농사루 먹구사는
우리 당숙이
받고 싶은 건유

품값이래유 - P46

꽃은 소리없이 핀다


저 빗방울 소리
사이, 텅 빈 것들이
모여 꽃이 되는 거다

침묵은 가벼이 소란 떨지 않는다 - P50




말라붙어서
잘 밀려오지도 않는

엄마
젖꼭지. - P35

밥 타는 냄새 아녀


아이구야 인자는 하눌님두
노망이 나셨능갑다
비를 뿌릴라먼 바람은 딸리지 말구
바람을 보낼라먼 장대비는 붙들어 둬야지
요러케 한꺼번이 몰아다부치먼
대관절 어쩌라구 모가지 팬 벼포기며
두렁콩은 어떠케 허라구 징허기두 허지
아들눔 댕기던 회사가 망혔으면
며느리가 아프지를 말덩가
구두가게 사위가 광을 못 내먼
딸내미 생선 장사라도 물좋아야지
이리 틀어지구 저리 삐져버리니
업으나 지나 매한가지 자식눔덜
추석이라구 애비 에미 보러 오먼
쌀말이래두 푸고 콩됫박이래두 싸얄 틴디
비바람 연신 쳐불어대구 물꼬 보러 간
영감꺼정 끼니때 넘두룩 뵈지 않으니
빗낱 들이치는 웃방 마룻장 끄틈지에
눈알 벌게진 깨구락지만
깨굴깨굴 깨굴깨굴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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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내간체 시작시인선 484
이정모 지음 / 천년의시작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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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마아안연체를 자주 구사한다. 물도 열무김치도 없이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는 기분. ‘아무리 심장을 갖다 바쳐도 늘 숨이 모자라는’ 것만 같다.

사이사이 아포리즘 같이 음미할 만하거나 빛나는 묘사들이 박혀 있는데, 그것만 시는 아니지 않나.

운문을 완전히 버린 현대시라도 내재율이라는 운율이 마음 속에는 있는 법인데, 그저 상징적이고 시적인 문장이 쌓여 산문을 이룬다. 그래서 좋아할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벽에 대하여

매 순간이 권하는 대로 살던 나침반의 침도 흔들리면서 방향을 가리키고 어느 기차도 바람과 시간에 시달리지 않고 도착하는 역은 없다 그렇지만 꿈이 살던 달방은 어떡하나, 흔들리지 않는 체면이 몰고 가 버렸으니, 이제 지킬 무엇도 없이 경계가 된 나는 반지하방에서 성욕처럼 숨어 사는 불빛을 슬픔으로 오역하며 사라지지 않는 벽을 생각해, 아픔이 끝날 때까지지만 오래된 무관심의 표정에 대해 말해 줄까? 다시 말해, 적막에 홀려 속은 것은 나였고 살과 뼈 없이도 스스로 닳는 세월을 닮아 자꾸 사위어 간다는 삶은 몸 같아서, 닳지 않는 허기 하나 어쩌지 못하고 단지 피와 땀을 밑그림으로 그려 놓고 아름다운 바닥이라 쓰던 날들이 날 기죽게 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목숨에 스며들던 사랑의 물길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어쩌다 그녀는 그런 나를 일으켜 세우는 물이 되었을까? 그걸 가끔 까먹는 나는 괜스레 꽃나무 가까이 가서 꽃과 소문의 관계에 대해 묻고 나서는 실없이 돌아오곤 했다 하, 바람의 맛만 알아 버린 이파리 같은 내 영혼도 그렇지만 고독은 또 무슨 도움이 되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피던지, 오! 시계가 시간을 모르듯 우리는 서로의 운명을 1도 모르면서, 사랑의 씨줄과 죽음이라는 날줄로 엮인 그물 속 멸치떼, 한 번도 빠져나갈 길을 열어 주지… - P86

세상은 개 같아서 짖기만 하고
어떤 문도 열어 줄 줄 모릅니다

위로라는 낱말은 책임질 줄을 모릅니다 - P52

펑펑 내리는 고독의 깊이에는 추위가 없으니
눈은 외투도 없이 따뜻한가 보다 - P46

운명은 그물과 같아서 노동의 손들이 한 올 한 올 짠 것이며
그 한 올들이 모여 목숨을 건져 올린 것이니
이 한 올의 거리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거리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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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내간체 시작시인선 484
이정모 지음 / 천년의시작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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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구절들이 많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내 마음에 긴긴 문장을 쓰는지’ 모르겠다.
덜어 내고 덜 말하면 더 좋을 텐데
담고 있는 생각과
하고픈 말이
엄청 많은 시인이다.

상흔은 여기가 아니라 그때라는 것을, 공중이 소리를 받아들이듯 모셔야 하는데, - P30

바람은 길의 행방을 묻지 않는다, 길은 바람의 인연일 뿐 삶이 같이 가야 할 항로가 아닌 걸 아는 까닭이다 - P31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식물의 왕국을 좋아해서, 예컨대 기적같이 꽃가루가 도착한 암술처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리라 - P21

비 오는 날, 내 몸에서 삶의 흔적을 찾는 건 쉽다
몸이 뻐근하지 않으면 평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

그 흘러간 시간도 격이 있다 그 격에 맞게
물에 젖은 것들이 흔적을 남기려 몸으로 붐비고 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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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랜덤 시선 19
이규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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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시집에는 아버지가 가득했다.
이 시집이 두 번째 시집인데, 드디어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느 날, 우리를 울게 할

노인정에 모여 앉은 할머니들 뒤에서 보면
다 내 엄마 같다
무심한 곳에서 무심하게 놀다
무심하게 돌아갈,
어깨가 동그럼하고
낮게 내려앉은 등이 비슷하다
같이 모이니 생각이 같고
생각이 같으니 모습도 닮는 걸까
좋은 것도 으응
싫은 것도 으응
힘주는 일 없으니 힘드는 일도 없다
비슷해져서 잘 굴러가는 사이
비슷해져서 상하지 않는 사이
앉은 자리 그대로 올망졸망 무덤처럼
누우면 그대로 잠에 닿겠다
몸이 가벼워 거의 땅을 누르지도 않을.*
어느 날 문득 그 앞에서 우리를 울게 할
어깨가 동그럼한 어머니라는
오, 나라는 무덤


* 브레히트의 시 <나의 어머니>에서 빌려옴. - P112

서른 개의 밤과 낮
마흔 개의 골목과 골목이
하루도 쉼 없이 바닥을 지나갔을까
더러 동행이 있거나 수런거리는 잡담도 있었겠지만
결국 홀로 오르내렸던 능선과 골짜기에는
등정보다 실족의 기록 뿐이다
그래도 한번 불러보고 싶다
누구 거기 있기는 한 건지 - P36

그늘이 제 이름을 버리는 밤과 새벽이 있듯이
마음이나 그늘이나 오천 원이나,
자기도 모르게
접힌 바짓단에 숨어든 모래처럼
그렇게 들고 나는 것 - P55

간격과 소리 사이에서 잠이 툭 끊어진다
손짓 하나, 바라보는 눈짓 하나
한 꽃 피는 시간이나 따끔했던 연애도
끊어지지않는 것 어디 있더냐
유월 비도 저렇게 끊어질 듯 내려와 닿고
한 생애를 위해 수만 컷의 필름이 서로 앙물려 있을 텐데
끊어지지 않는다면
목숨인들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 건가
앞의 빗줄기가 뒤의 비를 마중하듯이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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