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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의 내간체 ㅣ 시작시인선 484
이정모 지음 / 천년의시작 / 2023년 9월
평점 :
정말 마아안연체를 자주 구사한다. 물도 열무김치도 없이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는 기분. ‘아무리 심장을 갖다 바쳐도 늘 숨이 모자라는’ 것만 같다.
사이사이 아포리즘 같이 음미할 만하거나 빛나는 묘사들이 박혀 있는데, 그것만 시는 아니지 않나.
운문을 완전히 버린 현대시라도 내재율이라는 운율이 마음 속에는 있는 법인데, 그저 상징적이고 시적인 문장이 쌓여 산문을 이룬다. 그래서 좋아할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벽에 대하여
매 순간이 권하는 대로 살던 나침반의 침도 흔들리면서 방향을 가리키고 어느 기차도 바람과 시간에 시달리지 않고 도착하는 역은 없다 그렇지만 꿈이 살던 달방은 어떡하나, 흔들리지 않는 체면이 몰고 가 버렸으니, 이제 지킬 무엇도 없이 경계가 된 나는 반지하방에서 성욕처럼 숨어 사는 불빛을 슬픔으로 오역하며 사라지지 않는 벽을 생각해, 아픔이 끝날 때까지지만 오래된 무관심의 표정에 대해 말해 줄까? 다시 말해, 적막에 홀려 속은 것은 나였고 살과 뼈 없이도 스스로 닳는 세월을 닮아 자꾸 사위어 간다는 삶은 몸 같아서, 닳지 않는 허기 하나 어쩌지 못하고 단지 피와 땀을 밑그림으로 그려 놓고 아름다운 바닥이라 쓰던 날들이 날 기죽게 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목숨에 스며들던 사랑의 물길에 대해 얘기하려 한다 어쩌다 그녀는 그런 나를 일으켜 세우는 물이 되었을까? 그걸 가끔 까먹는 나는 괜스레 꽃나무 가까이 가서 꽃과 소문의 관계에 대해 묻고 나서는 실없이 돌아오곤 했다 하, 바람의 맛만 알아 버린 이파리 같은 내 영혼도 그렇지만 고독은 또 무슨 도움이 되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피던지, 오! 시계가 시간을 모르듯 우리는 서로의 운명을 1도 모르면서, 사랑의 씨줄과 죽음이라는 날줄로 엮인 그물 속 멸치떼, 한 번도 빠져나갈 길을 열어 주지… - P86
세상은 개 같아서 짖기만 하고 어떤 문도 열어 줄 줄 모릅니다
위로라는 낱말은 책임질 줄을 모릅니다 - P52
펑펑 내리는 고독의 깊이에는 추위가 없으니 눈은 외투도 없이 따뜻한가 보다 - P46
운명은 그물과 같아서 노동의 손들이 한 올 한 올 짠 것이며 그 한 올들이 모여 목숨을 건져 올린 것이니 이 한 올의 거리가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거리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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