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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생각하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96
천양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평점 :
그는 고독과 시만 선택했다.
등단을 앞둔, 20대 초반의 여자는 한 시인을 만나 사랑에 빠져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그런데, 어느날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시인은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고 한다.
그 뒤 가난과 고난에 시달리며 붙든 것이 시다.
”누군가를 생각해본 적 있나
사람들 사이에서 몇 번이나
그 사람 만나지 말았었기를 바란 적 있나
다시 곰곰 생각해보니
시가 나를 시인이라 생각할 때까지
직성(直星)으로 산 기억뿐이네“ 90
위로도 홀로. 버티는 것도 홀로.
“꽃 핀 쪽으로 가서 살거라
세상에 무거운 새들이란 없단다
우는 꽃이란 없단다
/아무 말도 없던 것처럼 오후가 길었다
/행복보다 극복을 생각하면서
서쪽을 걸었다” 37
답답한 삶
“인생은 무슨 이유로
환상은 짧고 환멸은 긴지
모를 일이다
/무슨 일이든 무슨 수로든 무엇으로든 무엇 때문이든 무슨 이유든
그 무엇도 모를 일
/세상이 광목이라면
있는 대로 부욱 찢어버리고 싶은지
정말로 모를 일이다” 17
쓸쓸하고 슬프다
“절대로 잘못한 적 없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뿐이다
언제부터였나
시간의 넝쿨이 나이의 담을 넘고 있다
누군가가 되지 못해 누구나가 되어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이지
돌아보니 허물이 허울만큼 클 때도 있었다
놓았거나 놓친 만큼 큼 공백이 있을까” 19
그는 오직 시만 생각한다.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속수이며 무책인 것이
안절과 부절 사이에서 헤맬 때
심사하고 숙고한 단 하나의 진정한 시는
다른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뜨는 것
내일의 불확실한 그것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것
… 일생 동안 시 쓰기란 나에게는
진창에서 절창으로 나아가는 도정이었고
삶을 철저히 앓는 위독한 병이었다
…고독이 고래처럼 너를 삼켜버릴 때
너의 경멸과 너의 동경이 함께 성장할 때
시를 향해 조금 웃게 될 때
그때 시인이 되는 것이지
결국 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99-100
그러나, 아래에 인용한 시에서 스스로 말한 것처럼
뭐 어때
“내일에 속는 것보다
세월에 속는 것이 나았거든요
꽃을 보고 슬픔을 극복하겠다고
기울어지는 해를 붙잡았습니다” 56
사라지는 것보다는 살아지기를 응원한다.
어때
참나무 아니고 잡나무면 어때 정상 아니고 바닥이면 어때 고산 아니고 야산이면 어때 크낙새 아니고 벌새면 어때 보름달 아니고 그믐달이면 어때 상록수 아니고 낙엽이면 어때 강 아니고 개울이면 어때 꽃 아니고 풀이면 어때 물소리 아니고 물결이면 어때 이곳 아니고 저곳이면 어때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러면 어때 저러면 어때
기쁨으로 술렁대고 슬픔으로 수런거릴 때 푸른 나무와 향기로운 풀이 꽃 피는 시절보다 나으면 또 어때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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