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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 김용택 시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55
김용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평점 :
오랫동안 어울려 잘 알고 있던 이에게서
확 낯선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저 내가 만든 이미지와 다를 뿐인 그의 일단면을 이제야 안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입체의 한 면은 대개 산뜻하다.
예술가에게 있어 질곡은
남들과 다른 자기 개성을 만드는 것과 그것의 변주다.
개성을 보였으되 몇 번 지속되면 지겹다고 자기 복제라고 공격받기 십상.
변신하면 또 니가 아닌 것 같다는 불평.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기는 하지만,
예술가도 세간에서 살아야 하는 자이니 표현 이후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어딘가.
군대 휴가 나와 고향집에 가려고 강남터미널에 갔는데, 우연히 시인을 만나 환하고 큰 웃음으로 받은 사인. 가장 인상 깊은 사인이었다. 휴가 나온 내 짐에 그 분의 시집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만큼 사랑한 시인이었으니 전작을 다 읽었고, 내게 김용택은 섬진강을 넘어 자연과 이 산하에 대한 애정과 분노를 마치 강물처럼 잔잔하고 때로 격랑 치듯 격정적으로 보여 주는 시인이다. 물론 ‘당신’에게 보내는 서정시도 몇 번 써 먹었을 만큼 좋다.
이 시집은 다르다. 작고 여린 것에 대한 공감과 감동이야 면면하지만, 전체적으로 정서가 매우 잔잔하다. 문장이 단문으로 간명하고 고적하다. “오매 내 새끼 이쁜그 이리 와봐라이 고추좀 먹어 보게” 하던 이모가 이제는 무릎 수술하고 구부정해서는 눈가만 축축해진, 모든 산 것들의 숙명인, 시듦의 쓸쓸함이 아니었으면 좋겠으나, 노년의 시임이 시리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의 자연은 삶과 현실과 여전히 함께 있고
관조에 애정이 담긴 그의 시선은 또렷하고도 따뜻하며
문장은 땅의 가장 아래를 흐르는 강물처럼 웅숭깊다.
보기에 투박하고 어설퍼 보이는 왕희지의 초서를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것과 같이 그의 시는 시를 모르는 척하며 은은히 빛난다.
두고두고 자꾸 꺼내 읽을 것이다.
생각을 다 모아봐도, 내 어디인지 모른다는 그게, 좋다 - P9
별들의 사이에서 태어나 강을 건너온 흰나비가 우리 집 마당 붉은 모란꽃이 되는 게, 시야 - P9
지나간 것들은 이해되어 사라져간다
물새는 살얼음을 쪼아댄다 물 위를 걷고 싶다 물과 얼음은 직전이 소실점이다 파문은 파열음으로 얼음에서 나가고 싶다 앞발로 물을 내디뎌본다 물 위를 걷는 말은 아직 내게 오지 않았다 산을 본다 해가 조금 남아 있다 알고 있다 말로 살기에 우리가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숲에서 나온 내 손이 내 손에게 차다 - P14
누가 이고 가다가 넘어졌는지 노란 물감이 높은 논에서 낮은 논으로 흘러 논마다 공평하다 세상에 무슨 일로 저렇게 마을이 일일이 하나하나가 다 가을이란 말인가 가을이란 말은 누가 지은 말인가 해와 달과 바람이 머물고, 개구리와 비가 그곳으로 뛰어갔다 필시 지금 나는 꿈길을 가고 있다 생을 탓하랴 꿈인들 아쉬우랴 산그늘을 따라 산을 넘어 마을 안길로 간신히 내려온 묵은 길 하나가 누구네 집 대문간에 서서 뒤란 감나무를 보고 있다 - P25
지금이 그때다
모든 것은 제때다 해가 그렇고, 달이 그렇고 방금 지나간 바람이, 지금 온 사랑이 그렇다 그럼으로 다 그렇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살아오면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던가 진리는 나중의 일이다 운명은 거기 서 있다 지금이다 - P45
누구도 불행하게 하지 않을 마른 낙엽 같은 슬픔
누구를 미워한 적이 없었을 것 같은 새들의 얼굴에 고요
누구의 행복도 깔보지 않았을, 강물을 건너가는 한 줄기 바람
한 번쯤은 강물의 끝까지 따라가봤을 저 무료한 강가의 검은 바위들
모은 생각들을 내다 버리고 서쪽 산에 걸린 뜬구름 - P59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아무런 것이 될 때 그때 기쁘다 그리고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갈 때 편안하다 - P64
꿈속에서도 시를 쓰다 잠이 깨면 연필이 손에 꼭 쥐어져 있어서 꿈을 생시로 잇기도 하였다 - P69
언젠가 보았던 그 별
새벽이다 현관을 나섰다 바람이다 내 몸이 바람에게 다정하다 디딤돌을 하나씩 디디며 가만가만 걸었다 물소리다 멈추어 서서 물소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내 세상에서 가장 낮다 어둠 속에 서 있다는 것이, 이리도 가만히 아름답구나 강물은,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들었다 검은 산머리에 마음을 다 울고 난 별 하나가 깨끗하다 언젠가 보았던 그 별이다 내 손이 마음에서 나와 가만히 강물을 건너 산의 이마로 다가간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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