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 창비시선 286
문인수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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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50대 중반에 나온 시집이다.
아흔이 넘은 모친을 두고 큰누나가 가시고
여러 죽음이 나온다.
슬퍼하되 우뚝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현재형 문장이 대부분이라는 것.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쿵 하고 망연해지는 시구가 많다. 4부가 압권.

바로 지금 눈앞의 당신, 나는 자주 굿모닝! 그런다. - P39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게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 P47

죽음은 그 어떤 삶도 놓치지 않고 깨끗하게 챙긴다. - P79

지금은 쓸쓸한 춘궁,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
씹어먹어도 먹어도
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 - P87

인생이 참 새삼 구석구석 확실하게 만져질 때가 있다. - P90

내가 한쪽으로 기우뚱, 할 때가 있다.
부음을 듣는 순간 더러 그렇다.
그에게 내가 지긋이 기대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가 갑자기
밑돌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지금
오랜 세월 낡은 읍성 같다.

도대체, 인생이 어디 있나,
있긴 있었나 싶을 때가 있다.
나 허물어지는 중에 장난치듯
한 죽음이 오히려 생생할 때 그렇다. - P91

상사화 잎은 광분하듯 무성하게 솟구친다.
빈 손아귀, 어느날 또 흔적없이 사라져버린다.
봄날의 한복판을,
뒷덜미를 덮쳤다, 놓친다. - P94

과거지사란 남몰래 버티는 것, 대답하지 않는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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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땅
지피 글.그림, 이현경 옮김 / 북레시피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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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과 의혹이 많이 생겼으니 문제작.
어쩌다 문명이 망했는지 호수 바닥에서 떠오른 시체들의 뒤로 묶인 손에서 다양한 추측이 나올 수 있고,
아버지는 왜 서사 중 주적인 피코 신도들의 존재를 아들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는가? 그 디스토피아에선 사랑 등의 감정이나 글자도 필요 없다고 생략하고선 짐승을 잡으면 내장부터 가르라는 등의 생존 방법만을 가르쳤다면서.
‘마녀’가 자꾸 말하는 버섯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생존의 실마리가 될 생명줄인지 쌍둥이처럼 만들 오염된 것일지.
결말에서 작가가 제시한, 종말 이후 펼쳐질 ‘아들의 땅’이 암수 서로 정답기만 한, 글자 모르는 세상인 것이 산뜻한지도 의문.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고, 열린 결말이라는 점에서 이것저것 생각해 볼 수 있으니 역시 ‘기가’ 문제작.
그러나, 추천하기는 어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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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의 빈 의자 문학과지성 시인선 148
송찬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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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하기는 수월할, 불분명한 시공간의 해괴한 이야기들. 종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있기나 한지 알아내기 어렵다.

그런 속에서도 뜬금없이 한두 줄 현실을 건드리는 구절이 있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속력은 부자와
가난뱅이를 뒤바꾸진 않네”
“해고된 후 오랫동안 잠만 잤지요“
”부자들은 구름 위에서 내려오질 않는다“
”경찰 국가에선 무엇이건 보호받는다“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알 수 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구체를 없애고 괴기와 환상을 선택한 것일까?

중고등학교 어느 문학 교과서에 실린 듯 입시현장에서 간혹 보이는 <구두>의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켠“에 대한 성찰을 우의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이질적일 만큼 이 시집에는 괴이한 시들이 가득하고, 그 시들은 끌림이 없다.

<다시, 문 앞에서>와 <별은 멀리서 빛나고>는 읽을 만하였다. 그래서, 송찬호를 더 읽게 되었다.

무제 3


누가 이 촛불을 켤 수 있었을까 식물은 유리 속에 잠들어 있고 화약은 아직 격발을 몰랐을 때, 결혼식은 성대하였다 초대받은 不在者들, 헤아려진 돈, 편력 없는 구두, 10년 동안의 빈 의자, 퍼뜨려진 전염병 그리고 휴일마다 반복되는 지상과 교회와의 굳건한 결혼식, 결혼식은 끝났다 정육점도 공장들도 훌륭히 완성되었다 이제 다시 신부를 데리고 隊商은 먼 나라로 결혼식을 이끌어가리라
...... 나의 신부여, 내게도 이 결혼식을 준비해다오 이 빛, 굽은 술잔을 네게 기울여 흘러가고 이 몸, 유리처럼 차디찬 바닥에 굴러떨어지리니 - P36

아가야, 골목을 흐르는
저 독경 소리마저
네겐 자장가로 들리니?
칭얼대다가도 때가 되면 너는
잠들 줄 알고
홀연히 깨어나면
돌아누운 고단한 내 등뒤에서 너는
남남으로 헤어질 줄 알아
길 찾아 헤매다 보면 거북등처럼 터진
골목 밖은 아득한 서역
떠나가도 가도
출가의 길은 더욱더 멀고
문득 돌아보면
인연은 길 옆에 비껴선 무심한 돌부처인데
헤어져 만리 길
우리는 어인 업으로 다시 만나
내 병든 얼굴,
너의 눈물
꿰어 내 목에 걸어주고
한 자락 바람처럼 - P66

꽃이 꽃씨를 떨구듯
아픈 상처의 딱지가 떨어지듯
어둡던 몸 속으로 떨어지는
별 하나,
잠시 아픔도 잊고 환해지는 몸
지금 그 별은 멀리서 빛나고 있지만
누구나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상처를 가지고 산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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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 김용택 시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555
김용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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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어울려 잘 알고 있던 이에게서
확 낯선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그저 내가 만든 이미지와 다를 뿐인 그의 일단면을 이제야 안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입체의 한 면은 대개 산뜻하다.

예술가에게 있어 질곡은
남들과 다른 자기 개성을 만드는 것과 그것의 변주다.
개성을 보였으되 몇 번 지속되면 지겹다고 자기 복제라고 공격받기 십상.
변신하면 또 니가 아닌 것 같다는 불평.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기는 하지만,
예술가도 세간에서 살아야 하는 자이니 표현 이후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어딘가.

군대 휴가 나와 고향집에 가려고 강남터미널에 갔는데, 우연히 시인을 만나 환하고 큰 웃음으로 받은 사인. 가장 인상 깊은 사인이었다. 휴가 나온 내 짐에 그 분의 시집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만큼 사랑한 시인이었으니 전작을 다 읽었고, 내게 김용택은 섬진강을 넘어 자연과 이 산하에 대한 애정과 분노를 마치 강물처럼 잔잔하고 때로 격랑 치듯 격정적으로 보여 주는 시인이다. 물론 ‘당신’에게 보내는 서정시도 몇 번 써 먹었을 만큼 좋다.

이 시집은 다르다. 작고 여린 것에 대한 공감과 감동이야 면면하지만, 전체적으로 정서가 매우 잔잔하다. 문장이 단문으로 간명하고 고적하다. “오매 내 새끼 이쁜그 이리 와봐라이 고추좀 먹어 보게” 하던 이모가 이제는 무릎 수술하고 구부정해서는 눈가만 축축해진, 모든 산 것들의 숙명인, 시듦의 쓸쓸함이 아니었으면 좋겠으나, 노년의 시임이 시리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의 자연은 삶과 현실과 여전히 함께 있고
관조에 애정이 담긴 그의 시선은 또렷하고도 따뜻하며
문장은 땅의 가장 아래를 흐르는 강물처럼 웅숭깊다.
보기에 투박하고 어설퍼 보이는 왕희지의 초서를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것과 같이 그의 시는 시를 모르는 척하며 은은히 빛난다.
두고두고 자꾸 꺼내 읽을 것이다.

생각을 다 모아봐도, 내 어디인지 모른다는 그게,
좋다 - P9

별들의 사이에서 태어나 강을 건너온 흰나비가
우리 집 마당 붉은 모란꽃이 되는 게, 시야 - P9

지나간 것들은 이해되어 사라져간다

물새는 살얼음을 쪼아댄다 물 위를 걷고 싶다 물과 얼음은 직전이 소실점이다 파문은 파열음으로 얼음에서 나가고 싶다 앞발로 물을 내디뎌본다 물 위를 걷는 말은 아직 내게 오지 않았다 산을 본다 해가 조금 남아 있다 알고 있다 말로 살기에 우리가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숲에서 나온 내 손이 내 손에게 차다 - P14

누가 이고 가다가 넘어졌는지 노란 물감이 높은 논에서 낮은 논으로 흘러 논마다 공평하다 세상에 무슨 일로 저렇게 마을이 일일이 하나하나가 다 가을이란 말인가 가을이란 말은 누가 지은 말인가 해와 달과 바람이 머물고, 개구리와 비가 그곳으로 뛰어갔다 필시 지금 나는 꿈길을 가고 있다 생을 탓하랴 꿈인들 아쉬우랴 산그늘을 따라 산을 넘어 마을 안길로 간신히 내려온 묵은 길 하나가 누구네 집 대문간에 서서 뒤란 감나무를 보고 있다 - P25

지금이 그때다

모든 것은
제때다
해가 그렇고, 달이 그렇고
방금 지나간 바람이,
지금 온 사랑이 그렇다
그럼으로 다 그렇게 되었다
생각해보라 살아오면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던가
진리는 나중의 일이다
운명은 거기 서 있다
지금이다 - P45

누구도 불행하게 하지 않을 마른 낙엽 같은 슬픔

누구를 미워한 적이 없었을 것 같은 새들의 얼굴에 고요

누구의 행복도 깔보지 않았을, 강물을 건너가는 한 줄기 바람

한 번쯤은 강물의 끝까지 따라가봤을 저 무료한 강가의 검은 바위들

모은 생각들을 내다 버리고 서쪽 산에 걸린 뜬구름 - P59

아무렇지도 않은 것들이 아무런 것이 될 때
그때 기쁘다 그리고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갈 때 편안하다 - P64

눈이 쌓인다 다음 문장으로 가자 - P68

꿈속에서도 시를 쓰다 잠이 깨면
연필이 손에 꼭 쥐어져 있어서
꿈을 생시로 잇기도 하였다 - P69

언젠가 보았던 그 별

새벽이다 현관을 나섰다 바람이다 내 몸이 바람에게 다정하다 디딤돌을 하나씩 디디며 가만가만 걸었다 물소리다 멈추어 서서 물소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내 세상에서 가장 낮다 어둠 속에 서 있다는 것이, 이리도 가만히 아름답구나 강물은,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들었다 검은 산머리에 마음을 다 울고 난 별 하나가 깨끗하다 언젠가 보았던 그 별이다 내 손이 마음에서 나와 가만히 강물을 건너 산의 이마로 다가간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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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비시선 174
이상국 지음 / 창비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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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다 못해 지루할 정도로 담백하다.
시인의 고향 양양의 풍광, 정경, 사라진 사람들과 공동체로써의 고향을 잔잔히 보여 준다.
누군가는 스타일도 소재도 구리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쏘야도 좋지만, 나물에도 손이 가는 때가 온다. MSG 범벅이 물리고 진국이 당기는 때
이상국의 시는 구수하고도 웅숭깊다.

도대체 이 동네로 무엇이 지나갔길래
한때는 벌판 하나를 다 먹어치우고도
성이 안 차 식식거리던 발동기가
침세* 대신 커피를 얻어먹고 사는 걸까


* 침세는 방앗삯 - P54

어느 시절엔들 슬픔이 없으랴만
늙은 가을볕 아래
오래 된 삶도 짚가리처럼 무너졌다
그래도 집은 문을 닫지 못하고
다리 건너오는 어둠을 바라보고 있다 - P65

지게

길은 멀다
지게여
들판에는 아직 익어야 할 벼가 있는데
떠나간 집 담벼락에 기대어
너는 몸을 꺾고 쉬는구나

우리들 따뜻했던 등이여

아버지여 - P60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을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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