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시랑토앙케 몰개시선 2
정양 지음 / 몰개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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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들마을 민화> “밑이 째지게 가난했어도 더러는 구수했”던 70여 년 전, 시인이 겪은 “가난한 들마을 사람들의 얘기들을 민화처럼 투박하게 그려본 것”
갑자기 튀어나오는 참을 수 없는 웃음 여러 번. 땡공영감 얘기, 허영감 얘기 등등 재미있다. 당연하지만, 해학만 있는 것이 아니니 주의를 집중해야 함. 바람쟁이 얘기는 토론에 이를 수도 있음.
2부는 잔잔한 노년의 시편들. 바짝 마른 듯 군더더기 없는, 아무나 쓸 수 없는 시들. 여전히 세상에 있어 그 즈음을 보여주는 황동규, 마종기, 정현종처럼 정정하다.

“아마도 이게 내 마지막 시집이지 싶어
못내 부끄럽습니다”라고 2023년 1월 시인은 말했다.

외로움 그리움 쓸쓸함이
쉽게 구분되던 시절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것들
따로따로 짚기가 어렵다 - P106

그렇게 쏟아지던 눈송이들
강물에 빠지면 흔적도 없다

하필이면 강물에 빠져
허망하고 야속한가
차라리 강물을 만나 한세상
개운하고 깔끔한가

저렇게 흔적 없는 게 좋은 건지
어디든 어떻게든 쌓여 한동안
흔적이라도 남겨야 좋은 건지

눈송이눈송이눈송이눈송이들
야속한 듯 개운한 듯
하염없이 강물에 빠진다 - P87

달밤


떠난 사람 보고 싶어서
풀들은 더 촘촘히 돋아나
텃밭도 마당도 장독대도 두엄자리도
아무 데도 안 가리고 우거지더니

우거지다 지친 풀들 길 잃고
아무 데나 드러눕는 빈집에
술 취한 달빛 가득 고였다

한세상 번번이 길 잘못 들어
영영 길 잃어버린 얼굴들이
달빛 쓰러진 풀밭에 어른거린다 - P85

단풍


잊고 싶을수록
더 깊이 번지는 상처가
감출수록 드러나는 소문보다
더 아팠나보다

이 세상 어디에도
더는 못 감출 상처가
골짜기마다 울긋불긋
앞다투어 타오른다 - P81

봄비


매화 꽃잎 진 자리

누굴 그리 보고 싶은지

빗방울들 맺혀 그렁거린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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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랜 사랑 창비시선 134
고재종 지음 / 창비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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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농촌을 다룬 시의 작자는 자기들의 잃어버린 고향을 떠올리며 이미 떠난 자의 입장에서 쓴다.
같은 회한이나 분노라도
고재종은 다르다. 그저 거기 있던 것도 아니다, 농사꾼으로 있었다. 고향 담양을 떠난 것도 생활고 때문이었다.
물론, 자연의 아름다움도, 당신 운운하는 서정시도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의 특장은 3부에 있다. 이미 붕괴한 농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운다. 괴로워한다. 그러나, 정서가 절제되어 현실 고발을 담고도 산문시로 읽힌다.
애달프나 단단하다.

아아 생은 언제나 솔뿌리 밑의
불개미 같은 것으로도 웅성거려
또 하나의 하늘을 일으키나니, 숲은
그 모든 작은 것들이 세우는
정정한 마을의 또다른 이름이겠다. - P132

대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주막집 난로엔
생목이 타는 것이다
난로 뚜껑 위엔
술국이 끓는 것이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괜히 서럽고
괜히 그리워
뜨건 소주 한잔
날래 꺾는 것이다
또 한잔 꺾는 것이다

세상잡사 하루쯤
저만큼 밀어두고

나는 시방
눈 맞고 싶은 것이다
너 보고 싶은 것이다

사방천지에 살구꽃 펑펑 터진들 저 저 봄날은 저 혼자만 깊어가는디 낸들 워쩔 것이요, - P73

처참에 울고…
아픔에 울고…
종말에 또 울었지만…
이제 불과 예닐곱집 연기나는 곳
퀭한 눈만 남은 또다른 월평네들의
간단없는 해소기침만 너무 질겨서
사방 산천 진초록도 목숨껏 노엽고 - P77

산아랫말 더벅머리 총각과
눈 맞아 떠나버린 그 어미처럼
우리 너무 쉽게 숫정을 버릴 때
우리 추억의 문도 소리없이 닫히고
용골 아이 김순동이 오늘도
야밤중에 오줌 싸러 나왔다가
산정 위 일등성 보고
엄마 ! 하고 부를 때
산이 산으로 우는 소리며
별이 별로 우우우 떠는 소리 더한
지상의 모든 순결한 것들이
제 몫의 외로움을 싸하게 깨닫는 소리
땅 끝 어디 한포기 풀잎에까지
싱싱한 이슬로 미쳐 떨린다 - P81

늙은 애비의 썩어 빠진 이빨처럼
날마다 듬성듬성 비는 마을에
급기야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소문뿐
삶의 관절들 마구 꺾어대는
포크레인의 굉음 소리에
개구리소리도 더는 위안이 못된다면
오, 시골을 만드신 하느님
이제 당신이 하실 일은 무엇인가
오늘밤도 당신의 상처 위에
화농처럼 덧들이는, 저기 저
나이트클럽의 밴드소리 끈적댄다 - P83

쌀밥의 힘으로 일평생 땅을 파온 사람들
쌀밥의 힘이 세상을 바꾸리라는 믿음이 깨진
이 깜깜한 날에도 새하얀 쌀밥을 고봉 먹을 때

저기 참대밭에 우수수 내렸다가
쏴아 콩 쏟아붓는 삭풍에 하늘로 치솟는
새떼의 비상을 결코 희망이라 말하지 않는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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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상상력으로 주역을 읽다
심의용 지음 / 글항아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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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꼭지마다
한시 한 수를 읽으면서
중국사의 인물 한 명을
조근조근 평가하는 데
주역의 괘를 자연스레 얹습니다.
솔직하게 야동 취향을 드러내기도 하고, 항우의 죽음을 가학과 피학의 나약함으로 평하는 등 종횡무진 자유로운 사유를 보여 줍니다.
“초조함은 죄악이다”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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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다는 말의 긴 팔 서정시학 서정시 112
문인수 지음 / 서정시학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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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
묵직한 울림

통화중


그곳은 비 온다고?

이곳은 화창하다.

그대 슬픔 조금, 조금씩 마른다.

나는, 천천히 젖는다. - P20

어느 봄날


언덕 아래, 무심코 오줌을 누다가
이런, 매화 만발한 소리를 들었다. - P14

미완이다


어딜 멀리 갔다가 되돌아가는 길인가 보다.
인각사 돌부처 한 분이 천 년 비바람에 많이 닳았다.
거의, 한 덩어리 바위에 가깝다.

그 앞에서 찍은 내 독사진이 있다.
왕복 어디쯤서 만나 잠시 겹친 것일까, 들여다보니 둘 다 미완이다. 지쳐
돌아가는 길이 함께 적적, 막막할 뿐이다. - P58

위도 떠나며


멀어지는 것은 모두 날 붙드는 일말의 힘이 있다. 나는 왜,
뱃전 꽁무니에 붙어 까치발 드나
안 보이는 쪽으로 길게 목을 빼나
멀어지는 것은 모두 내가 놓쳐버리는 간발의 손끝이 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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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59
박후기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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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악도
가난도
방황도
치기도
적절하다. 첫 시집답다.

스무 살,
마음속에 품은 지도 한 장
내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네
발 디디면 어디나 길이 되었고,
가지 못할 길은 없었으므로 - P60

나는
뒤돌아보지 못하는 한 마리 사과벌레,
청춘을 갉아먹으며 - P58

어디에서 떠내려왔을까
도랑을 따라 흘러가는 사내들,
굵고 단단한 어깨에 새겨진 문신
참을 인 자는 지키지 못할 각서 같은 것
어차피 참는 자에게 복은 없었다 - P56

도시가 팽창을 멈추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불러오는 풍선의 표면에 들러붙은 티끌처럼
우리는 점점 서로에게서 멀어져가고, - P12

검은 장화 속 같은 날들이었다. 들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가 장화를 벗으면, 퉁퉁 불어터진 발가락들이 꽈배기처럼 꼬여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 P74

나는 열아홉 살, 역 광장 앞 음악다방에서 해진 백판 재킷과 함께 너무 빨리 늙어갔다. 어린 창녀들과 비틀스를 들으며 낮술을 마셨고, 저탄장에서 날아온 탄가루가 내 몸을 더럽혔다. 취한 날엔 화물열차에 실린 미제 야포의 무늬처럼, 둥근 소매가 핏자국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 P75

눈이 그칠 것 같지 않던 겨울이었고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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