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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랜 사랑 ㅣ 창비시선 134
고재종 지음 / 창비 / 1995년 5월
평점 :
대개의 농촌을 다룬 시의 작자는 자기들의 잃어버린 고향을 떠올리며 이미 떠난 자의 입장에서 쓴다.
같은 회한이나 분노라도
고재종은 다르다. 그저 거기 있던 것도 아니다, 농사꾼으로 있었다. 고향 담양을 떠난 것도 생활고 때문이었다.
물론, 자연의 아름다움도, 당신 운운하는 서정시도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의 특장은 3부에 있다. 이미 붕괴한 농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운다. 괴로워한다. 그러나, 정서가 절제되어 현실 고발을 담고도 산문시로 읽힌다.
애달프나 단단하다.
아아 생은 언제나 솔뿌리 밑의 불개미 같은 것으로도 웅성거려 또 하나의 하늘을 일으키나니, 숲은 그 모든 작은 것들이 세우는 정정한 마을의 또다른 이름이겠다. - P132
대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주막집 난로엔 생목이 타는 것이다 난로 뚜껑 위엔 술국이 끓는 것이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괜히 서럽고 괜히 그리워 뜨건 소주 한잔 날래 꺾는 것이다 또 한잔 꺾는 것이다
세상잡사 하루쯤 저만큼 밀어두고
나는 시방 눈 맞고 싶은 것이다 너 보고 싶은 것이다
사방천지에 살구꽃 펑펑 터진들 저 저 봄날은 저 혼자만 깊어가는디 낸들 워쩔 것이요, - P73
처참에 울고… 아픔에 울고… 종말에 또 울었지만… 이제 불과 예닐곱집 연기나는 곳 퀭한 눈만 남은 또다른 월평네들의 간단없는 해소기침만 너무 질겨서 사방 산천 진초록도 목숨껏 노엽고 - P77
산아랫말 더벅머리 총각과 눈 맞아 떠나버린 그 어미처럼 우리 너무 쉽게 숫정을 버릴 때 우리 추억의 문도 소리없이 닫히고 용골 아이 김순동이 오늘도 야밤중에 오줌 싸러 나왔다가 산정 위 일등성 보고 엄마 ! 하고 부를 때 산이 산으로 우는 소리며 별이 별로 우우우 떠는 소리 더한 지상의 모든 순결한 것들이 제 몫의 외로움을 싸하게 깨닫는 소리 땅 끝 어디 한포기 풀잎에까지 싱싱한 이슬로 미쳐 떨린다 - P81
늙은 애비의 썩어 빠진 이빨처럼 날마다 듬성듬성 비는 마을에 급기야 골프장이 들어선다는 소문뿐 삶의 관절들 마구 꺾어대는 포크레인의 굉음 소리에 개구리소리도 더는 위안이 못된다면 오, 시골을 만드신 하느님 이제 당신이 하실 일은 무엇인가 오늘밤도 당신의 상처 위에 화농처럼 덧들이는, 저기 저 나이트클럽의 밴드소리 끈적댄다 - P83
쌀밥의 힘으로 일평생 땅을 파온 사람들 쌀밥의 힘이 세상을 바꾸리라는 믿음이 깨진 이 깜깜한 날에도 새하얀 쌀밥을 고봉 먹을 때
저기 참대밭에 우수수 내렸다가 쏴아 콩 쏟아붓는 삭풍에 하늘로 치솟는 새떼의 비상을 결코 희망이라 말하지 않는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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