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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개정판 ㅣ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1년 5월
평점 :
제목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
작가 : 유홍준
번역 :
출판사 : 창비
읽은날 : 2020/02/06 - 2020/02/19
분류 : 일반
베스트셀러도 좋은 책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책..
경상북도와 충청도, 서울 일부의 답사이야기다.
읽으면 읽을수록 가고 싶어진다.
경주여행때 아이에게 읽어주려고 샀는데 안동이나 공주도 가고 싶어지게 만든다..
언제 다 다니나...
P22 하나는 삼존불 형식이면서도 곁보살이 독특하게 배치된 점이며, 또 하나는 저 신비한 미소의 표현이다
P26 이 시대 불상의 미소란 절대자의 친절성을 극대화시켜 상징한 것으로 7세기 이후 불상에서는 이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절대자의 근엄성이 강조된 것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P28 더 이상한 일은 이 신비한 백제의 미소와 백제 불상의 대표작에 부친 제대로 된 찬문의 아름다운 수필이나 시 한 편이 없다는 사실이다
P34 어느 시인은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라고 읊었지만 강냉이술이 붉어질 때 마애불의 미소는 더욱 신비하게 보입니다
P37 비바람 속에 깨지고 마모되긴 했어도 그 남은 자취가 하나같이 명물이어서 일찍부터 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통일신라 때 만든 당간지주건 고려시대 대 만든 석탑과 물확이건 유물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멋스러움에 백제의 숨결이 느껴져 미술사가들은 그것을 백제지역에 나타난 지방적 특성이라며 주목하고 있다
P46 그로부터 열흘 뒤 내 연구실로 대산읍에서 두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하나는 눈망울이 또렷한 학생의 편지였고 또 하나는 권경남 선생이 보낸 그때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P48 모든 고대국가는 크게 세가지 특징이 있었다고 해요. 첫째 영토의 확장, 둘째 강력한 행정,율령체계, 셋째는 그것을 받쳐줄 종교였지요
P51 옛날 분들이 가장 좋아한 길은 강을 따라가는 길이었다
P53 해마다 3월 하순에는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부터 매화와 벚꽃까지 모두를 즐길 수 있는 날이 며칠은 있게끔 되어 있다. 그때가 섬진강답사의 황금기라 할 것이다
P58 그런 계단식 논배미의 마지막 보루가 여기 피아골이다
P64 아무리 문화유산이 많아도 뛰어난 작품 하나가 없으면 어딘지 허전하지만, 모든게 사라진 폐허라도 그 속에 천하의 명품 하나가 있으면 축복받을 수 있는 법이다
P69 맹목적인 모방은 미움이고 실패일 뿐이라는 교훈을 새기는 현장으로 연곡사만한 데가 없다고 생각하며, 미술사적 안목의 훈련과 시험장으로 여기보다 좋은 곳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P74 아! 이사람아! 새들한테 보여줘야지, 오늘 너희들 먹이 살 돈 들어왔다고. 그러지 않고 내 주머니에 쑥 집어넣으면 새들이 기분 좋겠어?
P78 안동문화권에는 독특한 불교문화 유적도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삼층석탑이 전국적으로 유행하였지만 이 지역만은 전탑양식을 고수하는 독자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첫째 둘째를 다투는 봉정상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이 모두 여기에 건재하고 있으니 불교문화의 뿌리와 전통이 얼마나 깊은가 알 수 있다
P82 여행이란 되돌아갈 것을 잊고 떠날 때 제맛이듯이 답사는 들를 곳마다 다 들르며 느긋이 아닐 때 정서적으로 부자가 된 기분이다
P86 아류가 갖는 필연적인 속성은 형태상의 힘은 약해지고 긴장미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P95 그것이 퇴락하여 무너진 것을 다시 쌓는 과정에서 옛 모습이 많이 변하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아쉬운 것은 옛 전돌은 예쁘고 섬세한 당초무늬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데, 보수용 전돌은 민짜로 했으니 이 전탑의 이미지는 완전히 바뀐 것이나 마찬가지다
P98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무명 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된 이래 그는 "환상만이 지배하던 우리 아동문하계"에 빛나는 감성과 생생한 현실을 어린이들에게 되돌려주는 건강한 동화를 선사했다
P103 법흥동 칠층전탑은 높이 17.2미터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탑 중 가장 키가 큰 탑일 뿐만 아니라 그 장대한 스케일에 걸맞게 웅혼한 기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P105 임청각, 군자정에 오면 나는 항시 두가지 사실에 놀라워하고 또 고마워한다. 하나는 이 집을 항시 개방하고 있는 너그러움이다
P113 최소한 2박3일은 가져야 북부 경북을 순례할 수 있는데 하회지역, 도산서원지역, 임하 임동지역 등으로 권역을 나누어 살피는 것이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다
P119 숲과 문화 동인들을 따라 서울 종묘를 답사했을 때 종묘 숲의 70퍼센트가 참나무인 것을 알았고 참나무의 참모습과 참가치도 그때 들어 배워서 알았다
P121 봉정사가 세상에 이름높은 것은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집인 극락전이 있기 때문이다
P131 그 굴비는 언제든지 손님을 맞이할 자세로 매달아놓은 것이며, 저것이 상할때가 되어도 손님이 오지 않으면 그것을 내려 집안식구끼리 먹고 그 대신 새로 굴비를 사다가 미지의 손님을 위하여 매단다는 것이다. 그것이 안동 양반의 체질화된 접빈객의 자세인 것이다
P143 나라에서 민속마을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한 것이 적지 않아 아산의 외암 민속마을, 순천의 낙안읍성 민속마을, 경주의 양동 민속마을, 고성의 왕곡 민속마을, 제주의 성읍 민속마을 등이 나름대로 특징과 명성을 얻고 있지만 그 규모와 내용의 다양성 그리고 수려한 풍광에서 하회를 당할 곳은 없다
P148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건재한 조선시대 5대서원의 하나이다
P153 병산서원이 낙동강 백사장과 병산을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병산서원의 정원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를 건축학적으로 끌어들이는 건축적 장치를 해야 이 자연공간이 건축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인데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 만대루이다
P171 안동사람들이 조상을 받들고, 종가를 보필하면서 집안의 전통을 지키려는 태도는 끔찍스러울 정도다. 각 집안 불천위제 때는 보통 200명이 참가했는데 요즘은 줄어서 50명, 그래도 적어도 30명 이상이 온단다
P176 제사는 죽은 조상을 통한 산 자손들의 만남이라는 속뜻이 서려 있는 것이다
P178 우리 조상이 그랬어요. 내가 무엇이 안되었음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내가 무엇이 되었을 때 그것에 대한 준비가 없음을 걱정하라고
P187 낙동강을 유유히 따라 걸어오다가 서원 입구 곡구암에 와서는 돌계단을 차곡차곡 밟고 천연대 옆으로 올라 해묵은 갯버들의 호위를 받으며 서원 문에 당도하던 그 그윽한 정취와 분위기를 우리는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P187 한마디로 1969년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은 속된 관광화 사업이 되고 만 것이다
P198 48세에 단양군수로 발령받아 다시 나갔고, 이어 풍기군수가 되며 이때 조정으로부터 백운동서원의 지원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지방교육기관으로서 서원제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P202 퇴계 시 첫구절은 언제나 서정적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 구절은 꼭 공경하라, 공부해라로 끝나거든요
P206 퇴계 문장의 참맛은 서간체에 있다는 세평이 있듯이 그의 편지는 진지하면서도 호소력이 뛰어나다
P212 사정이 허락지 않아 내청량사에서 외청량사로 잇는 등반과 퇴계가 공부하던 청량정사가지는 답사치 못한다 할지라도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며 청량산의 청량한 기상을 대하는 것은 북부 경북 순례의 한 클라이맥스이다
P219 듣고보니 어느 것이 정설인가는 확인할 길 없지만 내 생각엔 서민들의 선행이 흔히 지배층의 논리로 차출되거나 둔갑해버리는 설화의 숙명적 변질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P225 첫째 입향조는 대개 세조찬탈 또는 무오,갑자사화때 수절하여 낙향한 분이라는 점, 둘째 문중의 중흥조는 본인이나 그 자제가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낸 분이라는 점, 셋째 문중에 퇴계의 문하생으로 석학이 된 분이 있는 집안, 넷째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킨 분이 있는 집안 등 네가지 유형을 다 갖추었거나 최소한 하나를 갖고 있어야 안동에서 양반 반열에 든다
P242 내가 남의 동네 이력을 이렇게 소상히 밝히는 뜻은 아무리 궁벽진 곳이어도 전통과 의지와 열정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시범을 여기서 현실감있게 느끼기 때문이다
P246 안동에 비할 때 봉화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어서 외지인의 상처를 받지 않고 옛 이끼까지 곱게 간직하고 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민속촌이다
P255 미륵사터 발굴 결과 이 얘기는 사실로 증명됐다. 미륵사가 늪지에 세워져 서쪽 금당은 경주 감은사터에서 본 바와 같이 높은 주춧돌로 받쳐있고, 법당, 탑, 회랑이 각각 세 곳에 세워져 있음을 알게됐다
P260 미륵사의 정면관은 목탑을 중심으로 하여 좌우 석탑을 협시보살처럼 거느린 안정되고 권위있는 삼각형 구도를 갖추게 되었다
P266 복원된 탑을 원상과 비교해보면 형태상의 잘못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느낌상의 차이는 현저하게 드러난다
P276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한 일이어도 진실이 아닌 것은 후대의 비웃음거리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이 부실한 사료들이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P280 통일신라의 예술품으로 뛰어난 것은 모두 경덕왕 때 소산이다. 불국사, 석불사, 석가탑, 다보탑은 물론이고 에밀레종, 경주 남산의 불상들, 안압지 출토의 판불들... 국립경주박물관의 불상과 불교관계 유물 중 뛰어난 것은 모두 이 시기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P290 지금 우리는 불국사를 아름다운 고건축으로 대하는 관람객의 입장에 있지만 창건 당시의 건축취지는 그야말로 불국토를 건축학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다라서 이 절집의 돌 하나, 문 하나마다 그런 정신이 들어있는 것이다
P304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를 36년밖에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건너간 것을 찾아오기는 커텽 무수한 유물을 닥치는대로 빼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그때 그들은 영원히 식민지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P314 문화재 수복에 필요한 어떤 특수장비도 마련된 것이 없고, 그런 데 관심을 둔 일이 없는 정부로서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문화재관리국장조차도 군 출신이 차지하고 있었다
P347 온조가 고구려계의 유민집단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한강 북쪽에 먼저 자리잡은 것을 삼국사기에서는 기원전 19년으로 기록하였으니 2천년도 더 된 대의 일이고, 이후 한강 남쪽으로 궁실을 지어 옮긴 것이 기원전 5년이라고 했으니 1996년은 하남 휘례성 정도 2천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인 것이다
P352 역사관에서 몽촌토성과 석촌동의 출토유물을 본 것까지는 좋았으나 진열실에 모조품을 진열해놓고도 모조품이라고 확실하게 표시해놓지 않은 것에는 깜짝 놀랐다
P356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5년, 그러니가 기원전 4년 항목에 이런 말이 나와요. 춘정월에 궁실을 새로 지었는데 검이불루 화이불치라고 했어.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라는 뜻이지
P367 산성은 방위목적상 본래 그늘이 적기 마련이어서 한여름엔 가지 말라는 경고성 교훈이 있지만, 젊은 시절엔 이를 무시하고 땡볕 아래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돌아다니며 성벽 아래 빈터에 탐스럽게 자란 도라지, 옥수수, 참깨, 열무를 보면서 계절을 가득 느끼기도 했다
P379 이 실수는 단지 김원용 자신만의 실수가 아니라 1971년 한국 문화의 실상을 남김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김원용 관장의 나이는 49세였다. 그는 그 나이에 우리 고고학계의 원로 역할을 해내야만 했다
P393 육당은 말년에 친일행각으로 오욕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지만 전라도 절집을 찾아간 심춘순레와 이 삼도고적순례는 우리나라 근대기행문학의 백미이고 내가 쓰는 답사기의 원조 격인 희대의 명문이다
P411 5층이 약간 커야만 했던 이유는 도면상의 문제가 아니라 완성된 탑을 절집 마당에서 바라보는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실제로 느끼는 체감률 때문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