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 삶을 위한 성경 강독
한동일 지음 / 인티N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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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 한동일

 : 인티N

읽은기간 : 2024/05/10 -2024/05/13


한동일님의 에세이?

사제를 내려놓고 일반인으로 돌아와 성서강독을 하듯 쓴 글들을 모았다. 

설교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큐티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카톨릭 교인이 아니라서 사제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몸담았던 공동체를 떠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닐듯 싶다.

일반인의 시각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바라본다면 또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일반적인 종교인으로 이분의 글에 많이 공감하게 된다.

결국 사제나 전문 종교인에게 바라는 기대수준이 있기에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신교가 박물관에 들어갈 날이 얼마 멀지 않은 시점에 이분의 글이 크게 와 닿는다.. 


p21 인간이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봉헌물은 ‘매일 매 순간 결심한 것들에 대한 반복된 실패’일 거라고요.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p32 저는 그와 같은 예수의 모습에서, 그가 인간처럼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 50)하고 탄식하는 모습에서 예수가 인간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아는 분이라는 사실을 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한낱 인간인 저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도 나처럼 번뇌하고 방화하고 힘들어한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p41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니(마니피카트 아니마 메아 도미눔) 마음이 몸시 힘든 사람이 거룩함을 체험하게 되면, 그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찬미는 마니피카트 아니마 메아 도미눔일 것입니다.

p64 키케로는 “다가올 일을 알아봐야 아무 쓸모가 없다. 얻는 것도 없이 괴로워한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p70 생각이 결심히 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몰입도 몰입에 이르기까지의 시간과 훈련이 요구됩니다. 다만 제자들도 그런 노력을 통해 나중에는 스승처럼 하게 되지요. 배움은 분명 힘들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배우고 습득하게 된다는 것이 희망입니다.

p89 지금까지 나에게 걸림돌이었던 일이 디딤돌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p102 영혼의 독방, 이곳에 머무는 것은 이 방의 문을 닫고 물리적으로 타인과 자신을 격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열어두었던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시간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p131 우리의 마음 밭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느 ㄴ좋은 선택을 무수히 쌓아서 내 마음 밭을 비옥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좋은 방향, 선한 방향으로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그ㅓㅅ은 대부분 나의 삶에 대한 결과로 드러납니다.

p145 간음하다 걸린 여인에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처럼, 베드로의 나는 아니오라는 말에도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 순간, 그 상황에 내가 없었을 뿐입니다.

p155 무엇이 허용되는지뿐만이 아니라 무엇이 존경받을 만한가도 고려되어야 한다.

p160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되는 거야. - 1904년 1월, 카프카. 저자의 말. 변신 중에서

p195 만일 예수가 쓴 내용이 중요했다면 전승이 알려주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내용보다는 행위가 더 중요했음을 뜻합니다.

p202 교회에서 발행되는 수많은 교회 문헌을 보며 아름다운 문장에 탄복하다가도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성경 구절이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쓰기와 말하기 기술자가 쓴 글과 말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힘듭니다.

p218 독일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을 때 “당신들은 왜 종교세를 냅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런 대답을 하더라고요.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을 교회가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종교세를 낸다”

p225 신자들 주머니에 있는 것 말고 너희 주머니에 있는 것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실 수도,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너희 각자는 가난할 수도 있지만 너희가 속한 교회와 교구는 부자가 아니더냐?” 하고요

p245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너 자신이 너에게 괴로움이 되는 때일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이 괴로움을 경감시켜줄 수 있는 약도 위로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때까지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p284 당신이 잘 있는(지내는) 것이 내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저도 잘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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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 서울편 4 - 한양도성 밖 역사의 체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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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2

 : 유홍준

 : 창비

읽은기간 : 2024/04/25 -2024/05/13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을 읽은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처음 책을 읽어가면서 느꼈던 감동이나 감흥은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이렇게 아름답고 좋구나...

그렇게 읽어가던 책이 어느덧 12권이 됐다. 그리고 종착지에 다달았다.

그러는 사이에 난 어느새 중년이 됐다.. 책과 함께 늙어가는 느낌이 이런 기분인가보다.

마지막 답사지는 서울의 강북과 강남이다.

강남은 내가 근무하는 선릉이어서 더 반가왔다.. 

선릉과 정릉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특별히 더 알게된 건 없었다. 그렇지만 이야기꾼의 글로 풀어지는 내용이 재미있고 알찼다.

강북은 성북동과 망우리였다. 

성북동은 내가 고등학교를 나온 곳이고, 간송미술관은 고등학교때 종종 가서 청소했던 곳이다. 

미술관을 청소할 때는 그저 놀기 바빴는데 이렇게 대단한 곳인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역시 나이가 들고 정신연령이 올라가야 좋은 걸 좋다고 할 수 있나보다.. 

망우역사공원은 정말 새롭게 알았다. 유관순누나가 무연고묘에 잠들어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나름 역사책 열심히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구멍이 너무 많다. 

문화유산답사기가 끝나는 건 아쉽지만 박물관 순례가 있으니 기대가 된다..

유홍준 선생님이 오래오래 글쟁이로 있었으면 좋겠다.. 


p9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는 작곡가 쇼팽, 소설가 발자크, 화가 쇠라, 가수 에디트 피아프 등이 묻혀 있는 명소다. 무덤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거기 그분들이 있기 대문에 찾아가는 것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망우산에 위치한 우리 망우역사문화공원도 역사인물들의 넋이 그렇게 서려 있는 귀중한 공원묘지다

p29 조선시대에 별장, 별서가 발달한 것은 우리나라의 자연 풍광이 수려하기 때문이었는데 북둔도화의 성북동에도 자연히 문인 묵객과 권세가들이 경영하는 별장, 별서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유득공의 붇둔초당을 비롯해 오로정, 성북정, 백운정사 등이 이곳에 있었다.

p38 의친왕은 독립투사들과 교류해 공의 지위가 박탈되기도 했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주색에 빠진 광인으로 가장하면서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p50 1930년대에 들어서면 도심과 가깝고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성북동이 새로운 주택지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이때 특히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p60 이태준은 1946년에 월북하면서 이 집을 두 누이에게 넘겨주었다. 월북문인이라는 빨간딱지 대문에 한동안 이태현의 집으로 이름을 감추었다가 1988년에 해금되면서 이름을 되찾아 1998년부터 누님의 외손녀인 조상명 씨가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의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p63 조선의 그릇들은 일본 것들처럼 상품으로 발달되지 않은 것이어서 도공들의 손은 숙련되었으나 마음들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였다. 손은 익고 마음은 무심하고 거기서 빚어진 그릇들은 인공이기보다 자연에 가까운 것들이다.

p66 그런 문학적 취향으로 학예진 휘문의 학예부장을 맡으며 글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상급생으로 정지용과 박종화가 있엇고 교원으로 가람 이병기 선생이 있었다 이것이 이태준의 문학적 자산이었던 것이다.

p67 누가 뭐라 해도, 또 누구나 말하듯 이태준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빛나는 별이다. 시에 정지용이 있다면 소설에 이태준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이다.

p78 백양당의 출판 활동은 1946년 7월경, 이태준, 이여성, 임화 등 조선문학가동맹의 주요 문인들이 다 월북하면서 급속히 위축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공안기관은 백양당을 인공 지하의 심장적 기관으로서 좌익 지하출판을 했다고 지목하고 배정국을 불러 강도 높은 조사를 했다. 이에 백양당은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p84 암울했던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화가와 미술평론가 그리고 문장가로 빛나는 지성과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열심히 살아갔던 근원 김용준, 자신의 소신과 기대를 안고 월복하여 학문적, 예술적 최선을 다하지만 끝내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은 그의 인생편력이 이렇게 전집 5권에 들어 있는 것이다.

p91 내가 어느날 동주 선생에게 근원이 왜 월북했느냐고 묻자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근원은 항시 거기는 어던지 한번 가봐야겠다고 말했어요”

p95 실상이 이러하니 문장 전26호는 우리 근대문학과 국학의 보석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이 점을 생각할 때 수연상방 별채의 북카페 이름은 구인회보다 문장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p99 김용준은 양주 고든골 반야초당으로 이사했고, 김환기는 수화와 김향안에서 한 글자씩 따서 당호를 수향산방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노시산방을 사랑하는 후배 화가 김환기에게 넘겨준 김용준은 신혼부부가 이 집에 사는 것을 기념해 수향산방 전경을 그려주었다.

p105 이를 미술사적으로 논증하며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린 이는 수화와 가까이 지냈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혜곡 최순우였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백자 달항아리의 미학에 비로소 눈으 ㄹ뜨고 그 아름다움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국보, 보물로 새롭게 지정된 백자들을 선보이기 위해 마련한 백자달항아리 특별전이 열린 이후 마침내 한국미의 아이콘이 되었다.

p111 김향안은 수필집 파리를 펴낸 문필가이기도 했지만 우리 근현대사 소설가 이상과 최고의 화가 김환기의 부인으로 살며 이들의 예술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다는 것이 그의 보람이자 자랑이었다.

p120 이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자야는 백석을 평생 잊지 못해 그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금식을 하고 그를 기렸다고 한다.

p122 당시 대원각의 재산은 시가 1천억원이 넘는 것이었다. 기자 간담회 때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자야는 “1천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p147 북정마을은 아름다운 마을이라기보다 오히려 정겨운 옛 동네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00불대에 머물던 1960년대 가난한 시절로 되돌아온 듯한 서민 동네로 그 옛날을 보여주는 고향 같은 곳이다.

p156 이제라도 존경하는 국회의원이나 고지식한 전문가의 소수의견보다도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내어 이 안은 꼭 실현시키고 싶다. 아무튼 나는 지금 성종대왕 선릉과 중종대왕 정릉을 안내한다

p162 왕릉의 진입 공간은 반드시 작은 냇물에 걸쳐 있는 금천교에서 시작된다. 오늘날에는 많은 경우 금천교가 사라졌지만 원래 왕릉 앞에는 반드시 작은 내가 흘렀으며 이는 곧 현세와 죽음의 공간을 가르는 경계였다. 금천교는 이 양자를 연결하는 다리로 기능한다. 금천교를 건너면 왕릉의 존재를 알려주는 홍살문이 우뚝 서 있다.

p165 두 건물은 비슷해 보이지만 수라간은 별돌 담장으로 닫힌 공간이고 수복방은 콩떡 담장에 툇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건축에서 보여주는 비대칭의 대칭이다.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면서 디테일을 달리하여 은근히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p174 왕릉 석인상의 이런 변화는 곧 시대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 중기, 후기의 문화사적 분위기와 일치한다. 대체로 조선 초기인 15세기에는 되도록 규정에 충실하려고 했다가 조선 중기인 16-17세기에는 과장과 자신감이 들어갔고, 조선 후기인 18세기에는 사도세자 융릉과 정조 건릉에서 보이듯 섬세한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있다.

p198 가지런히 기와돌담을 쌓아 주차장과 차단하고 그 아래로 물이 흐르게 해서 도심 속의 사찰답게 단정하면서 차분한 분위기를 주려고 합니다. 그다음엔? 아직 생각중예요. 좋은 생각이 있으면 알려주구려. 그러면 나무를 심으세요. 절집의 가장 큰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라고 했어요.

p212 성균관 유생들은 동맹휴학을 하고 전국의 사림들이 극렬하게 상소를 올렸다. 보우죽이기라는 마녀사냥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반이성적 광풍이 몰아칠 때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같은 대학자들은 역시 합리적 지성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p213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15년 동안 휴정, 유정같은 엘리트를 비롯하여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한 것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이 맹활약을 펼치는 기틀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보우 스님은 사라져가는 조선불교에 새 불씨를 일으켜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다.

p230 추사의 판전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은 고졸한 멋이 우러나온다. 이쯤 되면 뛰어난 솜씨는 어리숙해 보인다는 대교약졸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p251 65세 되는 1740년 12월 겸재는 양천현령에 제수되어 70세 되는 1745년 1월까지 5년간 근무했다. 이 양천현령 시절은 그의 인생의 황금기였고 겸재 예술의 전성기였다. 이 시절 겸재는 경교명승첩을 비롯하여 한강을 소재로 한 많은 진경산수를 그렸고, 또 임진강에서 경기도 관찰사, 연천군수 등과 셋이서 소동파의 적벽부를 본받아 뱃놀이하며 연강임술첩이라는 대작도 남겼다.

p262 겸재의 진경산수는 인왕제색도에서 보이듯 짙은 먹을 사용한 웅흔한 필치의 작품이 많다. 그러나 그의 한강 그림들은 은은한 담채를 사용한 아주 부드러운 그림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겸재는 산을 그릴 땐 남성적, 강을 그릴 땐 여성적인 필치를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p279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간혹 의주로 피란한 무능한 임금으로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조는 문예를 아끼고 키운 인문군주였다.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펴내게 지시하며 왕실 소장본까지 내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석봉을 만년에 조용한 곳으로 가서 편안히 작품활동 많이 하라며 한직인 가평군수로 내려보낸 것도 감동적이다.

p290 이렇게 시작된 망우리 공동묘지는 40년 동안 47,700여 기가 들어서면서 묘역이 가득 차게 되었다. 이에 1973년 3월에 폐장시킴으로써 매장이 종료되었다.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는 신규 분묘 조성이 금되었고 이장과 폐묘만 허용되면서 현재 약 7,0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p295 그때 나는 위창 선생의 묘소에 드리워진 소나무 그늘에 한참을 앉아 망우리 공원이 갖고 있는 문화사적 무게를 느꼈다. 어느덧 공동묘지에 대한 통념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곳이 우리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당나라 시인 유우석은 누추한 서재를 읊은 누실명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요 물은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스럽다

p306 박인환은 짧은 인생에 몇 편의 시만 남겼고, 김수영 시인 같은 분에게서 낭만적 센티멘털리즙이라고 호된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세월이 가면이 가요로 크게 히트하면서 오늘날까지 대중에게 사랑받는 시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p311 나에게 이중섭을 한마디로 소개하라면 그리움의 화가라고 하겠다. 인간 누구나 품고 있는 그리움의 감정을 이중섭처럼 가슴 저미게 형상화한 화가는 드물다. 이중섭의 황소, 달과 까마귀, 매화꽃 그리고 수많은 은지화 모두 그리움의 감정으로 읽으면 그의 예술이 더욱 절절히 다가올 것이다. 시에 소월이 있다면 그림에 이중섭이 있다

p333 육당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여 위창에게 보여드렸을 때 “생존권이 박탈됨이 무릇 기하뇨”라고 쓴 것을 보면서 박탈은 빼앗아간 것을 말하는 것이고 빼앗긴 입장에서는 박상이라고 해야 한다며 글을 수정한 다음 “요새 애들은 한문을 몰라서 큰일이다”라고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p342 여기는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이다. 다쿠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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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살고 있습니다 - 유튜버 하루데이가 기록한 낭만적인 도시 풍경
하루 지음 / 상상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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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욕에 살고 있습니다. 

 : 하루

 : 한경 arte

읽은기간 : 2024/05/07 -2024/05/08


뉴욕은 여행이나 한달살기 정도 할 곳이지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지하철도 맘에 안들고, 집값은 미친듯이 비싸고, 집의 내구시설은 너무 안좋고, 거기에 엄청난 물가와 팁문화까지..

나같은 사람이 살기엔 너무나 버겁다.

그러나 센트럴파크와 같이 아름다운 공원이 있고, 박물관이 컨텐츠가 좋고, 뮤지컬이 나를 부르니 안갈 수는 없을듯...

멋진 도시이자 살기에 너무 힘든 뉴욕을 잘 소개해주고 있다..

이런 곳에 사시는 분 정말 존경스럽다. 


p18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건물에는 집 안에 세탁기가 없다. 부동산 직원이 이 아파트는 건물 안에 공용 세탁소가 있으니 안심하라며 대단한 장점처럼 홍보하는데,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p39 센트럴파크를 중간에 두고 오른쪽에는 어퍼 이스트 사이드, 왼쪽에는 어퍼 웨스트 사이드라는 뉴욕 최고의 부촌이 형성되어 있다. 비록 우린 부촌이 아닌 그 아래 어두운 그림자 속에 살고 있지만, 그래도 센트럴파크 근처에 산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다.

p87 그저 평화로워 보이는 독립서점의 이면에는 서점의 쇠락을 막기 위한 피땀 어린 노력이 있었다. 단지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행사를 열어 동네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고자 했고, 서점의 역사를 내세운 기념품을 팔며 관광객들의 성지가 된 곳도 있었다.

p119 그저 낯설기만 하던 뉴욕이란 도시가 익숙한 동네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이 소중한 경험 덕분에 고양이가 그랬어 행복은 빈 상자 속에 있다고라는 책까지 낼 수 있었으니, 델리와 델리에 사는 야옹님들은 나의 뉴욕살이에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다

p140 일본에서는 라멘과 돈지루가 그랬고, 싱가포르에서는 락사와 바쿠테가, 그리고 뉴욕에선 앞서 말한 파스트라미 샌드위치와 베이글 그리고 뉴욕 피자가 추가되었다.

p156 나도 세 시간 간격의 수유와 서툴던 화장실 처리에 적응해 가며 냥초보에서 정식 집사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야옹님들을 지켜보는 건 그야말로 기쁨 그 자체였다.

p169 이런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장점은 있다. 예전보다 훨씬 건강에 신경 쓰게 되었다는 것. 열심히 운동하고 골고루 영양을 섭취하며 병원에 가는 일을 최소화하도록, 거의 집착 수준으로 건강관리를 하게 됐다. 비록 시작은 돈이었지만 결국 건강도 얻게 되었으니 나름 일석이조의 효과라며 필사적으로 웃어본다.

p199 공짜라면 사족은 못쓰는 짠순이 심보와 한번 빠지면 답도 없는 덕질 근성이 합쳐져 자발적으로 구렁텅이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뉴욕 문화생활의 구렁텅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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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 명화의, 그때 그 사람
성수영 지음 / 한경arte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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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

 : 성수영

 : 한경 arte

읽은기간 : 2024/04/27 -2024/05/05


미술을 좋아하지 않던 내가 화가의 삶과 작품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진다.

여전히 그림을 못 그리지만, 보는 것은 즐거워졌다. 

자주 보고, 작품에 대해 알게되니 궁금한 점은 늘어가고,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자꾸 읽게 된다. 좋은 선순환이다.

이 책은 작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림을 보니 눈에 익숙한 작품이 많은데 작가의 이름은 낯선 사람이 꽤 있다.. 

작가의 삶을 읽어보니 눈물없이 못 읽을 삶도 있고, 부자였다가 가난해진 사람, 끝까지 평탄하게 살던 사람 등 다양한 삶을 알 수 있었다.

상당수의 작가들은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이 가난하게 살다 갔다.

왜 작가가 죽고 나서야 그 진가를 알아보게 되는 것일까?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에는 아까운 책이다. 집에 두고 읽어야 작가들의 이름에 익숙해질 수 있을듯하다. 다만, 이렇게 책을 사모으다 보면 책장이 남아나지 않는다. 

책을 사야할 지 갈등이 들게 하는 책이다. 


p8 이 책은 그림을 작가의 삶과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그림의 주재료인 작가의 관점, 그리고 그 관점의 원료인 삶을 알게 되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습니다.

p21 1960년대부터 레이턴의 작품 세계에 대한 재평가 바람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레이턴은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영국 화가로, 프레이밍 준은 남반구의 모나리자로 불리는 세기의 명작으로 대접받게 됐습니다. 레이턴의 연인이자 배우였던 딘에 대한 관심도 커졌지요. 이에 따라 둘의 사랑이야기도 재조명받게 됐습니다.

p27 러시아에서 샤갈에게 미술을 가르쳤던 선생님(레온 박스트)은 파리에서 샤갈의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의 그림 속 색들이 제각기 노래를 부르는 것 같군”

p38 캐슬린이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었던 폐결핵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1882년 캐슬린은 불과 스물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둘이 함께한 시간은 고작 6년.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더라도 반드시 지키고 싶었던 단 하나의 사랑이 그렇게 허무하게 티소를 떠나갔습니다.

p58 모네는 꺾이지 않고 자신의 직감을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훗날 모네는 회고했습니다. “나는 위대한 화가가 아니다. 단지 내가 느낀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그 과정에서 세상의 그림 그리는 규칙들을 자주 잊어버렸을 뿐이다”

p63 10대 시절부터 늘 사이가 좋았던 둘. 하지만 1914년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모네의 아들은 당시 레옹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레옹의 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공장에서 사용하던 화학물질의 독성 때문에 모네의 아들과 레옹의 딸이 연달아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화학물질의 유독성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일로 형제는 서로의 탓을 하며 크게 다퉜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p80 그림을 지나치게 자세히 그리는 남편에게 “다 그릴 필요 없다”고 조언한 게 대표적입니다. “해부학 그림 같아. 그런 종류의 화가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나는 그런 그림은 재미없더라. 카드를 다 보여주지 말고 숨겨” 앤드루는 곧바로 조언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그의 그림은 더욱 신비로워졌습니다.

p84 헬가 사건은 곧바로 미국 문화계의 최대 스캔들로 떠올랐습니다. 앤드루가 그린 헬가의 그림은 1986년 8월 18일 자 타임과 뉴스위크의 표지를 동시에 장식했습니다. 피카소도 이루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 작품들은 1987년 워싱턴 D.C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공개돼 전시됐고, 미국 전역의 다른 주요 박물관 여섯 곳을 순회하며 총 백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끌어모았습니다.

p95 당시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결혼하면 예술은 종 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구스타브 쿠르베는 유부남은 예술에서 반동이다라고 했으며, 외젠 들라크루아는 당신이 사랑을 한다면 그건 안 좋은 일이야. 상대방이 예쁘다면 최악이지. 예술에 대한 열정이 완전히 죽어버리거든. 예술가는 다른 모든 걸 버리고 작품에만 열정을 가져야 해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p112 유언에 따라 그의 인상파컬렉션은 루브르박물관에 기부됐습니다. 관련 업무는 유언에 따라 친구였던 르누아르가 도맡았습니다. 인상파를 극도로 싫어하던 당시 미술계 주류와 박물관 위원회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결국 조건부로 기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작품들은 지금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하는 소장품이 됐습니다.

p118 40대에 들어 그는 본격적으로 빛과 색채의 실험을 시작합니다. 프랑스에서 인상주의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가 태어나기 수십 년도 전에 인상주의와 추상화로 발을 내디딘 겁니다. 하지만 너무 일렀던 걸까요. 그림에는 병에 걸려서 앞을 제대로 못보는 노인이 본 장면 같다. 무미건조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혹평이 쏟아졌습니다.

p134 전 세계 언론들이 수백 개에 달하는 부고 기사를 썼고, 그 내용 대부분은 위인전에 가까운 칭찬이었습니다. 당시 기사들을 읽다보면 “이렇게 착하고 친절하고 헌신적인 사람이 어디 있어? 세상을 떠났다고 너무 칭찬만 한 것 가니야?”라는 생각이 잠깐 들 정도지만, 어던 편지나 기록에서도 그의 인품에 대한 기록은 오직 칭찬뿐입니다. (조지 프레더릭 와츠)

p140 초현실주의에 대한 사랑조차도 아내에 대한 사랑에는 못미쳤습니다. 초현실주의자 모임의 대표 격인 앙드로 브르통이 모임에서 조르제트의 십자가 목걸이에 대해 “낡은 질서와 부르주아의 상징이니 당장 치워달라”고 모욕적인 말투로 요구하자 마그리트는 조르제트의 손을 잡고 나와버렸고, 초현실주의자 모임에서도 탈퇴했습니다. 마그리트는 말했습니다.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는 남자는 얼마나 행복한다”

p142 마그리트의 유명한 작품 이미지의 배반에는 담배 파이프가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밑에 쓰여 있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그림일 뿐이다. 이런 뜻입니다. 단순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숨겨진 뜻은 좀 더 심오합니다. 파이프를 아무리 잘 그려도 그건 파이르 그림일 뿐, 파이프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말은 말이고 그림은 그림일 뿐, 아무리 잘 쓰고 그려봤자 대상의 본질 자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p152 마네는 끊임없이 살롱의 문을 두드리며 정면 돌파를 고집했습니다. 좋은 집안 출신이라는 배경, 사회 주류의 인정을 갈구하는 성격 때문이었지요. 안타깝게도 이런 시도는 마네가 필요 이상으로 미술계의 집중적인 조롱과 비난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p158 남들은 전설이라고 추켜세우지만, 아내 수잔과 아들 레옹에게 마네는 그저 형편없는 가장일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레옹은 마네의 성을 이어받지 않고 사생아 시절 성을 고수했거든요. 마네의 아내와 아들은 마네가 남긴 그림을 정리하고 기록을 남겼지만, 이는 그저 작품을 현금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p159 은퇴 뒤 그는 노르망디에서 말년을 보냈고, 1927년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레옹의 이런 평범하고 소박한 은둔자 같은 삶은, 화려하게 살다 죽어서 전설이 된 아버지와 정확히 반대입니다.

p166 하지만 묀스테드는 그러지 못했씁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오늘날 예술 작품이라기보다는 장인이 만들어낸 공예품에 가까운 취급을 받습니다.

p169 이런 맥락에서 묀스테드의 작품에는 다른 위대한 명화들에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자연은 아름답고 나는 그걸 잘 그려놨잖아. 어때, 멋지지?”하는 듯한 친근함과 편안함이 있습니다.

p175 그의 작품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움직임은 다소 가장돼 있고 원근법과 단축법도 독특하지만, 그래서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빛을 비추는 실험을 직접하며 공부해서 그런지 명암 대비는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주지만, 강렬하고 신비롭습니다.

p176 티치아노는 서른 살이나 어린 틴토레토가 뭐가 그리 맘에 안 들었는지 틈만 나면 틴토레토의 욕을 하고 뒤로 손을 써서 일감 수주를 방해했습니다. 틴토레토가 티치아노에 대해 항상 좋은 말만 했던 걸 감안하면 졸렬하지요.

p181 그들은 틴토레토가 그린 천국과 성서 속 장면들을 올려다봤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지요. ‘지금 삶이 힘들지만, 착하고 성실하게 살면 언젠가 나도 복을 받을 거야’ 끊임없는 견제와 배척을 견디며 화가가 그토록 열심히 살았던 건 바로 이런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틴토레토라는 이름은 그렇게 전설이 됐습니다.

p184 대자연이야말로 세상의 섭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평범한 사물에서도 우주의 원리와 신의 존재를 떠올리던 그에게는 풍경화야말로 진정한 예술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여기서 한 걸을 더 나아갔습니다. 자신의 마음속 여러 풍경을 섞어 재구성한 겁니다. 대자연이 품고 있는 위대함과 무한성을 최대한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지요. 안개와 어둠, 빛에 대한 특유의 섬세한 묘사는 이런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p191 그의 삶에는 수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느루아르는 집요할 정도로 행복한 그림만을 그렸고, 행복의 화가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르누아르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p193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르누아르는 1866년 일곱 살 연하의 그림 모델인 리즈 트레오와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사랑이 담겨서였을까요. 르누아르가 그녀를 모델로 그린 작품들은 르누아르의 젊은 시절 그림 중에서도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p201 밥을 굶을 때도, 세상이 그의 작품에 돌을 던질 때도, 딸과 생이별했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거나 자신의 곁을 떠날 때도, 격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도 오직 행복만을 그렸습니다. 르누아르의 손이 붓을 건드리는 모든 순간마다 어김없이 캔버스에는 화사한 행복이 피어났습니다.

p202 르누아르의 사후 유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식들은 아버지에게 숨겨둔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고인의 뜻과 명예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를 비밀에 부치기로 했습니다. 르누아르의 아들 장이 1958년 출판한 아버지의 전기에도 이 사실을 빠져 있습니다. 르누아르가 리즈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는 사실은 2002년 한 편지가 발견되면서 뒤늦게 밝혀졌습니다.

p214 지금도 앙소르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것들은 1880~1895년, 한창 어려웠던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작품입니다. 이 시기 이후 앙소르의 작품 대부분은 초기 작품의 재탕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p237 부모님의 불화,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조금 뒤틀린 애정, 신체적인 장애, 그 속에서도 빛나는 눈과 섬세한 손, 비운의 천재 화가를 만들 재료는 이렇게 모두 갖춰졌습니다.

p243 그녀와 친했던 로트레크는 그 모습을 담은 그림과 포스터를 여러 장 그렸습니다. 하지만 결코 예쁘게 그려주지는 않았습니다. 완성된 그림에 충격을 받은 길베르가 애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제발 그렇게 못생긴 모습으로 그리지 말아주세요. 제발요. 당신이 보내준 스케치를 보고 많은 사람이 비명을 질렀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든 뒤 길베르는 자서전을 통해 로트레크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p259 형은 확실히 같이 살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본 빈센트의 재능과 예술적인 감성, 독창성은 독보적이었습니다. ‘역시 내 생각이 옳았어. 형은 천재야’ 그는 여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형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야. 몇 년만 더 있으면 형은 틀림없이 유명한 사람이 될 거야”

p274 페이메이르의 그림에 나오는 집들은 모두 완벽하게 정리돼 있고, 조용합니다. 그림을 사 갈만한 부유한 고객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해서인지, 어지러운 마음을 고용한 그림으로 승화한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p280 평범한 일상 속에도 위대함은 숨어 있다. 생업과 열 명 넘는 아이들의 육아, 집안일 등이 뒤섞인 번잡한 일과 속에서 생활인 페이메이르는 이런 깨달음을 얻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위대함의 본질을 포착해 자신의 그림에 완벽하게 담아냈습니다. 그리고는 일상의 위대함을 역설하는 영원불멸의 거장이 되었습니다.

p284 초상화를 그리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앙투아네트와 르 브룅은 동갑내기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말도 잘 통했습니다. 둘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 금새 가족처럼 친한 사이가 됐습니다. 르 브룅이 바닥에 실로 떨어뜨린 붓을 앙투아네트가 몸소 주워주는 일도 있었고 초상화를 그리다 쉬는 시간에 둘이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니까요

p299 아마도 루소의 이런 거짓말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비참한 현실을 견디기 위한 수단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지어낸 말을 스스로 믿는 어린아이처럼 루소 역시 자신의 거짓말을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요한 건 루소가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붓을 놓치 않았다는 겁니다.

p302 이를 통해 루소의 삶과 작품을 접한 예술가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런 그림은 처음 본다. 단순하다. 이국적이다. 어린아이 같다. 아무튼 이상하다. 그리고 매력적이다.” 이들은 그 이상한 매력의 비밀을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p305 이 대책 없는 알코올중독자의 이름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그의 삶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었고, 방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흥청망청 사는 게 미덕처럼 여겨졌던 20세기초 프랑스 파리에서도 그는 방종한 생활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습니다.

p317 정작 그림을 그린 화가 자신은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 그림은 농민을 그린 거야. 매일매일 땀 흘려 일하는, 초라하지만 위대한 사람들 말이야. 정치 싸움에 낄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하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마다 자기 멋대로 내린 결론에 그림을 꿰맞출 뿐이었죠. 1857년의 프랑스는 그렇게 좌우로 갈라져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곳이었습니다.

p327 밀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인 봄만 봐도 밀레의 매력을 알 수 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환한 빛과 무지개. 이를 통해 밀레는 “비 오는 날을 견디로 나면 언젠가 인생의 봄날이 온다”는 위로를 전하려 했던 게 아닐까요

p333 인상주의 작품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좋지 않아 그림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슬레가 할 줄 아는 것은 이때까지 그려온 풍경화를 계속 그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최승자 시인은 썼습니다. 당시 서른 즈음이었던 시슬레의 상황도 그러했습니다.

p337 세상을 떠난 뒤에는 대접이 나아졌지만, 지금도 동료 화가들보다는 명성이 뒤떨어지고 연구도 많지 않은 편입니다. 강렬한 색채 대신 옅은 색을 쓴 화풍, 극적인 장관 대신 소박한 시골과 마을 풍경을 그렸다는 점 때문에 임팩트가 덜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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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택의 재검토 - 최상을 꿈꾸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 되었는가
말콤 글래드웰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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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선택의 재검토

 : 말콤 글래드웰

 : 김영사

읽은기간 : 2024/04/14 -2024/04/20


글잘쓰는 말콤 글래드웰의 책..

그런데 이 양반이 쓴 책이 맞나싶다.. 

아무리 내가 잘 모르는 내용인 2차세계대전의 폭격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스토리의 중심을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워 하며 읽기는 처음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뜬금없는 비약은 좀 어이가 없다.

필력이 줄은 건지, 내용을 잘 몰라서 대충 얼버무린 건지, 아니면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은 별루다.

이름값이 있어서 한두권 더 보긴 하겠지만 다음번 책도 이러면 앞으로는 안볼 것 같다. 

2차세계대전에서 공군의 역할이 어땠고, 어떻게 발전해나갔는지는 좀 알게됐고, 재미있었다 


p19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꿈이 어떻게 빗나간 길을 가게 되는지, 그 사례를 연구한다. 새로운 빛나는 아이디어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는 우리 무릎 위에 부드럽게 착지하지 못하고 땅에 세게 부딪쳐서 산산조각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p35 그는 자신이 신의 위대한, 신의 창조물을 발겨하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신은 기꺼이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머리를 신의 진실을 발견하는 데 이용하려는 사람들을 통해 진실을 드러낸다고 말할 것입니다.

p56 그들은 펠로폰네소스전쟁이나 트라팔가 해전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공군은 내일에 집착한다. 기술을 통해서 공군이 어떻게 내일에 대비할 것인가에 집착한다.

p75 역사학자 타미 비들은 지역폭격을 장기적 시각에서 본다. “저는 폭격의 역사에서 이런 것을 수차례 목격했습니다. 표적, 그러니까 지금 얘기하고 있는 장기적인 대량 폭격의 표적이 된 국가들은 결국엔 심한 고통을 흡수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정말 그렇게 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죠”

p82 린더만은 적의 의지를 꺾을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차별적인 도시 폭격이라는 굳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다면 린더만에게는 그런 생각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사실, 그것이 스노의 강연 요지였다. 이 과학적인 사람, 이 지적인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사실을 만들어내고 왜곡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그 강연의 요지였다.

p117 슈바인푸르트에서의 근본적 문제는 전투 계획의 잘못된 실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조짐에 불과했다. 진짜 문제는 폭격기 마피아 이념의 기계적 초석, 바로 노든 폭격조준기와 관련이 있었다.

p120 그들은 별로 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에게만은 규칙이 다를 것이라고, 영국인이 이룰 수 없었던 것을 자신들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전장으로 뛰어든 건방진 미국인이었습니다.

p128 이 모든 것을 보고 페스팅거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일련의 믿음에 많은 것을 투자할수록, 그러니까 그 신념을 위해 희생한 것이 많을수록 사람은 실수라고 말하는 증거에 강하게 저항한다.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몰두한다.

p192 핸셀은 본토로 돌아가 애리조나에서 훈련 학교를 운영했다. 그의 전쟁은 끝났다.

p199 나가보니 비행기 바닥이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알았죠. 대부분이 그걸 자살 작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p204 헤이우드 핸셀이나 폭격기 마피아 다른 구성원들의 도덕적 비전은 이해하기 쉽다. 양심이 수긍하는 방식으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을까? 이처럼 그들은 그럴듯한 도덕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메이 같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하다

p222 한참 위에 있는 스팀슨이나 스틸웰 같은 사람들은 르메이가 하려는 일에 대해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르메이가 그해 여름 일본을 상대로 계획하고 실행한 파괴의 규모는 커녕 그 대담성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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