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 서울편 4 - 한양도성 밖 역사의 체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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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2

 : 유홍준

 : 창비

읽은기간 : 2024/04/25 -2024/05/13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을 읽은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처음 책을 읽어가면서 느꼈던 감동이나 감흥은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이렇게 아름답고 좋구나...

그렇게 읽어가던 책이 어느덧 12권이 됐다. 그리고 종착지에 다달았다.

그러는 사이에 난 어느새 중년이 됐다.. 책과 함께 늙어가는 느낌이 이런 기분인가보다.

마지막 답사지는 서울의 강북과 강남이다.

강남은 내가 근무하는 선릉이어서 더 반가왔다.. 

선릉과 정릉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특별히 더 알게된 건 없었다. 그렇지만 이야기꾼의 글로 풀어지는 내용이 재미있고 알찼다.

강북은 성북동과 망우리였다. 

성북동은 내가 고등학교를 나온 곳이고, 간송미술관은 고등학교때 종종 가서 청소했던 곳이다. 

미술관을 청소할 때는 그저 놀기 바빴는데 이렇게 대단한 곳인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역시 나이가 들고 정신연령이 올라가야 좋은 걸 좋다고 할 수 있나보다.. 

망우역사공원은 정말 새롭게 알았다. 유관순누나가 무연고묘에 잠들어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나름 역사책 열심히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구멍이 너무 많다. 

문화유산답사기가 끝나는 건 아쉽지만 박물관 순례가 있으니 기대가 된다..

유홍준 선생님이 오래오래 글쟁이로 있었으면 좋겠다.. 


p9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는 작곡가 쇼팽, 소설가 발자크, 화가 쇠라, 가수 에디트 피아프 등이 묻혀 있는 명소다. 무덤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거기 그분들이 있기 대문에 찾아가는 것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망우산에 위치한 우리 망우역사문화공원도 역사인물들의 넋이 그렇게 서려 있는 귀중한 공원묘지다

p29 조선시대에 별장, 별서가 발달한 것은 우리나라의 자연 풍광이 수려하기 때문이었는데 북둔도화의 성북동에도 자연히 문인 묵객과 권세가들이 경영하는 별장, 별서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유득공의 붇둔초당을 비롯해 오로정, 성북정, 백운정사 등이 이곳에 있었다.

p38 의친왕은 독립투사들과 교류해 공의 지위가 박탈되기도 했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주색에 빠진 광인으로 가장하면서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p50 1930년대에 들어서면 도심과 가깝고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성북동이 새로운 주택지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이때 특히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p60 이태준은 1946년에 월북하면서 이 집을 두 누이에게 넘겨주었다. 월북문인이라는 빨간딱지 대문에 한동안 이태현의 집으로 이름을 감추었다가 1988년에 해금되면서 이름을 되찾아 1998년부터 누님의 외손녀인 조상명 씨가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의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p63 조선의 그릇들은 일본 것들처럼 상품으로 발달되지 않은 것이어서 도공들의 손은 숙련되었으나 마음들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였다. 손은 익고 마음은 무심하고 거기서 빚어진 그릇들은 인공이기보다 자연에 가까운 것들이다.

p66 그런 문학적 취향으로 학예진 휘문의 학예부장을 맡으며 글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상급생으로 정지용과 박종화가 있엇고 교원으로 가람 이병기 선생이 있었다 이것이 이태준의 문학적 자산이었던 것이다.

p67 누가 뭐라 해도, 또 누구나 말하듯 이태준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빛나는 별이다. 시에 정지용이 있다면 소설에 이태준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이다.

p78 백양당의 출판 활동은 1946년 7월경, 이태준, 이여성, 임화 등 조선문학가동맹의 주요 문인들이 다 월북하면서 급속히 위축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공안기관은 백양당을 인공 지하의 심장적 기관으로서 좌익 지하출판을 했다고 지목하고 배정국을 불러 강도 높은 조사를 했다. 이에 백양당은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p84 암울했던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화가와 미술평론가 그리고 문장가로 빛나는 지성과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열심히 살아갔던 근원 김용준, 자신의 소신과 기대를 안고 월복하여 학문적, 예술적 최선을 다하지만 끝내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은 그의 인생편력이 이렇게 전집 5권에 들어 있는 것이다.

p91 내가 어느날 동주 선생에게 근원이 왜 월북했느냐고 묻자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근원은 항시 거기는 어던지 한번 가봐야겠다고 말했어요”

p95 실상이 이러하니 문장 전26호는 우리 근대문학과 국학의 보석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이 점을 생각할 때 수연상방 별채의 북카페 이름은 구인회보다 문장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p99 김용준은 양주 고든골 반야초당으로 이사했고, 김환기는 수화와 김향안에서 한 글자씩 따서 당호를 수향산방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노시산방을 사랑하는 후배 화가 김환기에게 넘겨준 김용준은 신혼부부가 이 집에 사는 것을 기념해 수향산방 전경을 그려주었다.

p105 이를 미술사적으로 논증하며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린 이는 수화와 가까이 지냈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혜곡 최순우였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백자 달항아리의 미학에 비로소 눈으 ㄹ뜨고 그 아름다움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국보, 보물로 새롭게 지정된 백자들을 선보이기 위해 마련한 백자달항아리 특별전이 열린 이후 마침내 한국미의 아이콘이 되었다.

p111 김향안은 수필집 파리를 펴낸 문필가이기도 했지만 우리 근현대사 소설가 이상과 최고의 화가 김환기의 부인으로 살며 이들의 예술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다는 것이 그의 보람이자 자랑이었다.

p120 이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자야는 백석을 평생 잊지 못해 그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금식을 하고 그를 기렸다고 한다.

p122 당시 대원각의 재산은 시가 1천억원이 넘는 것이었다. 기자 간담회 때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자야는 “1천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p147 북정마을은 아름다운 마을이라기보다 오히려 정겨운 옛 동네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00불대에 머물던 1960년대 가난한 시절로 되돌아온 듯한 서민 동네로 그 옛날을 보여주는 고향 같은 곳이다.

p156 이제라도 존경하는 국회의원이나 고지식한 전문가의 소수의견보다도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내어 이 안은 꼭 실현시키고 싶다. 아무튼 나는 지금 성종대왕 선릉과 중종대왕 정릉을 안내한다

p162 왕릉의 진입 공간은 반드시 작은 냇물에 걸쳐 있는 금천교에서 시작된다. 오늘날에는 많은 경우 금천교가 사라졌지만 원래 왕릉 앞에는 반드시 작은 내가 흘렀으며 이는 곧 현세와 죽음의 공간을 가르는 경계였다. 금천교는 이 양자를 연결하는 다리로 기능한다. 금천교를 건너면 왕릉의 존재를 알려주는 홍살문이 우뚝 서 있다.

p165 두 건물은 비슷해 보이지만 수라간은 별돌 담장으로 닫힌 공간이고 수복방은 콩떡 담장에 툇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건축에서 보여주는 비대칭의 대칭이다.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면서 디테일을 달리하여 은근히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p174 왕릉 석인상의 이런 변화는 곧 시대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 중기, 후기의 문화사적 분위기와 일치한다. 대체로 조선 초기인 15세기에는 되도록 규정에 충실하려고 했다가 조선 중기인 16-17세기에는 과장과 자신감이 들어갔고, 조선 후기인 18세기에는 사도세자 융릉과 정조 건릉에서 보이듯 섬세한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있다.

p198 가지런히 기와돌담을 쌓아 주차장과 차단하고 그 아래로 물이 흐르게 해서 도심 속의 사찰답게 단정하면서 차분한 분위기를 주려고 합니다. 그다음엔? 아직 생각중예요. 좋은 생각이 있으면 알려주구려. 그러면 나무를 심으세요. 절집의 가장 큰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라고 했어요.

p212 성균관 유생들은 동맹휴학을 하고 전국의 사림들이 극렬하게 상소를 올렸다. 보우죽이기라는 마녀사냥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반이성적 광풍이 몰아칠 때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같은 대학자들은 역시 합리적 지성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p213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15년 동안 휴정, 유정같은 엘리트를 비롯하여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한 것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이 맹활약을 펼치는 기틀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보우 스님은 사라져가는 조선불교에 새 불씨를 일으켜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다.

p230 추사의 판전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은 고졸한 멋이 우러나온다. 이쯤 되면 뛰어난 솜씨는 어리숙해 보인다는 대교약졸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p251 65세 되는 1740년 12월 겸재는 양천현령에 제수되어 70세 되는 1745년 1월까지 5년간 근무했다. 이 양천현령 시절은 그의 인생의 황금기였고 겸재 예술의 전성기였다. 이 시절 겸재는 경교명승첩을 비롯하여 한강을 소재로 한 많은 진경산수를 그렸고, 또 임진강에서 경기도 관찰사, 연천군수 등과 셋이서 소동파의 적벽부를 본받아 뱃놀이하며 연강임술첩이라는 대작도 남겼다.

p262 겸재의 진경산수는 인왕제색도에서 보이듯 짙은 먹을 사용한 웅흔한 필치의 작품이 많다. 그러나 그의 한강 그림들은 은은한 담채를 사용한 아주 부드러운 그림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겸재는 산을 그릴 땐 남성적, 강을 그릴 땐 여성적인 필치를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p279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간혹 의주로 피란한 무능한 임금으로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조는 문예를 아끼고 키운 인문군주였다.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펴내게 지시하며 왕실 소장본까지 내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석봉을 만년에 조용한 곳으로 가서 편안히 작품활동 많이 하라며 한직인 가평군수로 내려보낸 것도 감동적이다.

p290 이렇게 시작된 망우리 공동묘지는 40년 동안 47,700여 기가 들어서면서 묘역이 가득 차게 되었다. 이에 1973년 3월에 폐장시킴으로써 매장이 종료되었다.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는 신규 분묘 조성이 금되었고 이장과 폐묘만 허용되면서 현재 약 7,0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p295 그때 나는 위창 선생의 묘소에 드리워진 소나무 그늘에 한참을 앉아 망우리 공원이 갖고 있는 문화사적 무게를 느꼈다. 어느덧 공동묘지에 대한 통념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곳이 우리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당나라 시인 유우석은 누추한 서재를 읊은 누실명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요 물은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스럽다

p306 박인환은 짧은 인생에 몇 편의 시만 남겼고, 김수영 시인 같은 분에게서 낭만적 센티멘털리즙이라고 호된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세월이 가면이 가요로 크게 히트하면서 오늘날까지 대중에게 사랑받는 시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p311 나에게 이중섭을 한마디로 소개하라면 그리움의 화가라고 하겠다. 인간 누구나 품고 있는 그리움의 감정을 이중섭처럼 가슴 저미게 형상화한 화가는 드물다. 이중섭의 황소, 달과 까마귀, 매화꽃 그리고 수많은 은지화 모두 그리움의 감정으로 읽으면 그의 예술이 더욱 절절히 다가올 것이다. 시에 소월이 있다면 그림에 이중섭이 있다

p333 육당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여 위창에게 보여드렸을 때 “생존권이 박탈됨이 무릇 기하뇨”라고 쓴 것을 보면서 박탈은 빼앗아간 것을 말하는 것이고 빼앗긴 입장에서는 박상이라고 해야 한다며 글을 수정한 다음 “요새 애들은 한문을 몰라서 큰일이다”라고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p342 여기는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이다. 다쿠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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