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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어느 물고기의 이야기
마크 쿨란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 최재천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2월
평점 :
제목 : 대구
작가 : 마크 쿨란스키
출판사 : RHK코리아
읽은기간 : 2025/06/04 -2025/06/13
대구라는 생선 하나로 이렇게 광범위한 역사서와 인문서가 나오다니..
저자의 필력에 놀랐다.
책을 읽다보면 대구로 인해 인류 문명이 발달하고, 인류가 이동하고 역사가 씌여진 것 같은 생각에 빠진다.
거기에다 인류와 생태학이라는 거대한 주제도 씌여진다...
재미있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부럽다. 하나의 주제로 인류를 아우를 수 있는 그 지식과 섬세함, 그리고 글쓰는 재주가..
내용도 좋고, 글쓰기 공부에도 좋은 책이다.
p9 우리 정부도 지금 명태 복원을 위해 수족관에서 기른 치어를 방생하고 있지만,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없고 야생에서 살아남는데 필요한 적응력을 갖추지 못한 양식 치어들이 큰 덩치를 활용하여 작짓기에 성공하는 비율이 높아지면 열성 유전자가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p54 바다에 나선 지 겨울 35일이 지난 1497년 6월에 캐벗은 육지를 발견했다. 하지만 그곳은 아시아가 아니었다. 방대하고도 바위투성이인 해안은 생선을 소금에 절이고 말리기에 이상적이었으며 인근 바다에는 대구가 한가득했다. 캐벗은 대구에 관해 보고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땅의 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새로 발견한 땅, 즉 오늘날의 뉴펀들랜드가 잉글랜드의 소유임을 주장했다.
p60 이에 비해 대구는 그 살이 하얗다는 사실 때문에 격찬을 받는다. 그 살은 흰 살 생선 중에서도 가장 하얀 편으로, 이것이야말로 대구목의 특징이다. 이 살은 워낙 순수하게 하얀색이어서 커다란 덩어리 같은 경우는 접시 위에서 반짝이며 빛을 발할 정도다.
p66 상업적 어민에게 대구목이라고 하면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다섯 가지 종류뿐이다. 바로 대서양대구, 해덕대구, 폴락대구, 화이팅대구, 헤이크대구였다.
p79 유럽인이 처음 북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차마 유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냥감과 낚시감이 풍부했다. 물고기뿐 아니라 새도 마찬가지여서, 지금은 멸종된 나그네비둘기가 무리 지어 날아가면 하늘이 몇 시간 동안이나 깜깜해질 정도였다.
p100 1603년 브리스톨의 상인들은 고스널드의 이야기를 실제로 확인했고, 이곳에 풍부한 대구 어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메인주에) 생선을 말리기에 최적인 바위투성이 해안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p104 문제를 더운 악화시킨 요인 하나는 이들이 전형적인 잉글랜드인이었던 까닭에 뭔가 친숙하지 않은 식품은 아예 먹으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p110 버지니아 북쪽에 있는 아메리카의 공동체 중에서 가장 번창했던 뉴잉글랜드는 무역에 최적인 완벽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유럽과 유럽의 식민지들이 원하던 상품이 대구가 있었으며, 이 대구 덕분에 유럽산 상품을 열망하며 상당한 소비력을 보유한 인구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도시가 바로 훗날의 보스턴이다.
p120 당시 노예무역은 워낙 은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런 기록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한 가지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말았다. 노예를 운반하는 데 가담한 선박이 실제로 몇 척이나 되는지, 그리고 아프리카인을 사고파는데 가담한 뉴잉글랜드의 상인이 실제로 몇 명이나 되는지와는 무관하게 뉴잉글랜드에서 대구를 매매했던 상인들은 모두 노예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p127 영국정부는 한 세기 넘도록 뉴잉글랜드인들이 자유무역을 맛보도록 방치하다가 1733년에 가서야 비로소 상업에 대한 자국의 통제를 재차 확립하기 위한 조치로서 당밀을 규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대영제국의 해체로 나아가는 최초의 부주의한 조치가 되고 말았다.
p140 애덥스에 따르면 뉴잉글랜드의 어업은 “뱃사람의 요람이며 해군력의 원천”이었다. 그는 뉴잉글랜드의 해저 어업 종사자들이야말로 “우리 독립의 달성과 보전을 위해 절대 불가결하게 필요한” 이들이라고 주장했다.
p145 북아메리카인들은 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노바스코샤가 거의 전적으로 어업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이곳에서 나는 생선은 품질이 좋지 않았고, 대개는 보스턴이나 카리브해에서 판매되었다.
p161 아무리 운이 억세게 좋은 어부라 하더라도 자칫 죽으 ㄹ뻔했던 경험담을 한두 가지씩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어민이야말로 북대서양 연안 국가의 모든 직업군을 통틀어 사망 사고의 비율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p184 이후로도 몇 년 동안이나 그는 자기 집의 싱크대와 욕조에 실험 재료를 가득 채워 실험했고 마침내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에는 세 가지 장비가 필요했다. 전기 프라이팬, 얼음덩어리, 소금물 한 양동이였다. 그는 이 간단한 장비로 래브라도의 겨울을 재현해냈다. 1925년 버즈아이는 글로스터로 이주해 물고기를 가지고 연구하다가 결국 제너럴 수산물 회사를 설립했다.
p190 그물 입구에 설치된 몰이용 쇠사슬(후릿줄)은 바다 밑바닥을 휘저어 소음과 티끌을 잔뜩 일으켰다. 대구와 다른 해저 어류는 위험을 감지하면 본능적으로 바닥에 숨는데, 이 몰이용 사슬은 마치 사냥꾼이 덤불을 막대기로 두들겨 새를 몰아내는 것과 똑같은 작용을 해서 겁에 질린 대구가 안전한 바다 틈새에서 빠져나와 그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p207 이 모든 간유는 바로 아이슬란드에서 오는 것이었다. 나아가 간유는 아이슬란드에서 전쟁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번영을 누린 부차적인 무역에 도움을 주었다. 영국 정부는 폭격과 배급에도 불구하고 간유 덕분에 잉글랜드에서 역사상 가장 건강한 어린이가 배출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1971년까지 이 프로그램을 지속했다.
p207 전쟁이 끝났을 때 아이슬란드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 있었다. 결코 사소하지 않았던 한 가지 변화는 1944년에 아이슬란드가 덴마크에서 완전 독립되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독자적으로 세계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협상할 수 있었다. 대구 때문에 이 나라는 불과 한 세대 만에 15세기의 식민지 사회에서 현대적인 전후의 국가로 바뀌었다.
p227 아이슬란드의 200마일 영해가 전 세계의 승인을 얻은 이후로 대부분의 국가는 저마다 200마일 영해를 선언하고 나섰다. 전 세게의 기존 어장 가운데 90퍼센트는 최소한 한 나라의 해안에서 200마일 범위 안에 속했다. 이제 어민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법률에도 따라야 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물고기를 가능한 한도 내에서 많이 잡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범위 내에서 많이 잡는 것으로 바뀌었다.
p243 마틴은 고래와 물범(바다표범) 사냥에 반대하는(예를 들면 그린피스가 하는 것 같은) 환경보호 운동에 주목하게 되었고, 뒤늦게야 그들이 너무 성급하게 법정까지 갔던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저인망 어선의 어획물을 구입하는] 맥도날드가 가장 큰 구매자였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맥도날드를 상대로 캠페인을 전개해야만 했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영리하지는 못했던 겁니다”
p268 어떤 조치를 취하든지 같에 뉴턴들랜드 근해에서 대구 어족의 회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 하나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의 병적인 집단 부정이다. 뉴펀들랜드인은 그들이 자연의 선물을 전멸시켰다는 사실을 한사코 믿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p275 이런 주장은 남획에 관한 영국의 긴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지금은 보편적인 비난의 대상인 저 무시무시한 에스파탸의 초대형 트롤선조차도 원래는 영국의 발명품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셈이 된다.
p305 선진국 가운데 어업이 자국 경제에 중대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나라는 오로지 아이슬란드뿐이며, 그조차도 어민의 수를 줄이려고 노력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