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필의 진보를 위한 역사 - 진짜 진보의 지침서 & 가짜 극우의 계몽서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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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현필의 진보를 위한 역사

 : 황현필

 : 역바연

읽은기간 : 2025/05/22 -2025/06/02


목적의식이 뚜렷한 역사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역사를 볼때 바라보는 역사관은 있겠지만 역사관에 역사를 집어넣는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보를 위한 역사라니.. 좀 너무 나간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제목이다. 

물론 요즘 극우적 사고로 역사를 재단하고 재편집하는 쓰레기들이 있다보니 반작용으로 이런 책도 나오는게 아닌가 싶다. 

책은 역사책이라기보다는 웅변을 보는 것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뉴라이트, 극우들.. 잘 들어.'의 느낌이다. 

역사적 사실과 진실이 저자의 큰 소리에 가리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이런 책도 있어야지.. 모든 책이 조곤조곤하기만 하면 그것도 재미없으니까.. 

역사책의 다양성면에서는 좋았다. 

다만, 나는 그 소리가 너무 크다보니 좀 꺼려지긴 했다. 


p64 1887년 경복궁 내 건청국에 전등이 켜질 수 있었던 것은 동양에서 가장 뛰어난 16촉 백열등 750개를 점등할 수 있는 역량의 발전 설비가 갖춰졌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에디슨과 한양에 전기가 들어왔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서신을 주고받았다.

p91 일본인이 일본인을 사냥하여 외국에 판 것이다. 그것도 남성도 아닌 여성들을, 그것도 아시아도 아닌 유럽에 판 것이다. 오죽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인신매매금지령(1587)을 내려 포르투갈로의 인신매매를 금지했을까

p98 징용과 징병, 근로정신대와 위안부 등 한반도 바깥으로 끌려간 조선인이 170만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반도 내 공장과 댐, 공항 건설 현장 등에 동원된 인구까지 합치면 약 450만 명이었다. 카이로선언에서 괜히 조선인을 일본의 노예라고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p107 제암리학살사건은 한국을 조국처럼 사랑했던 선교사 스코필드가 제암리로 달려가 유골을 수습하면서 학살의 증거들을 모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3.1운동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일제의 만행과 학살사건은 분명히 더 존재한다

p141 그렇다면 독립운동을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라는 질문에 김원봉은 이렇게 말했다. 감히 우리를 식민지배하려는 것들은 죽이고, 식민지배 기관을 폭파하여 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면 되지

p142 1947년 여운형이 암살당했을 때, 김원봉은 여운형 국민장의 장례위원장이 되었다. 다음은 자신차례라는 것을 느꼈는지 김원봉은 남북협상운동(1948)에 참여하기 위해 김구와 북한으로 건너간 뒤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고 북한에 남았다

p211 미군정의 리처드 로빈슨 대령은 이렇게 말했다. “여운형은 가장 인기있고 유능한 조선의 지도자였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소련 편이지 않았고 언제나 한국편이었다.

p214 수영을 잘해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사람도 여럿 구할 정도였다. 서양식 체조를 조선에 보급한 인물도 여운형이었고, 철봉을 그렇게 잘했다고 한다. 경성축구단을 만든 사람도 여운형이었고, 이 땅에 야구를 보급한 사람도, YMCA 야구단을 창설한 사람도 여운형이다.

p261 최능진은 남한 경찰 조직의 구성이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친일파 출신의 인물들이 숙청되지 ㅇ낳고 버젓이 경찰로 활동하고 있음은 물론, 오히려 고위직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최능진은 북한의 공산주의를 거부하며 월남했는데,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보다 더 싫은 친일파가 설치고 있으니 이는 가의 가장 불만이었다.

p319 서울대학교 박태균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이 아시아에서 미국을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 6.25전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스탈린은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앞마당인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미국의 전쟁 참여를 유도했다. 이 주장은 체코의 고트발트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기되었다”

p376 한국인의 근면성과 성실함은 어느 국가와도 견줄 수 없다. 한국인은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잘 먹고 잘산다. 더군다나 한국인은 영리하고 학구열도 높다. 여기에 부정할 수 없는 천민자본주의적인 마인드가 더해져, 남보다 잘살고 싶은 열망이 우리의 경제성장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요소들을 무시한 채, 오로지 박정희가 없었다면 우리는 가난했을 것이라는 자학적이고 피동적인 마인드를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p381 김대중은 신민당 대선 후보 시절인 1971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고속도로 건설 취지를 반대하지는 않으나, 남북 간보다는 동서간을 뚫는 일이 급한 일이다” 김대중의 주장은 국제개발협회, 한미합동조사위원회, 국토개발부의 주장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았다

p392 김대중 교통사고(1971), 김대중 납치사건(1973), 장준하 사망사건(1975)이 모두 우연이거나 박정희와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박정희 신격화의 범인들다.

p479 보수 대통령 박근혜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통일은 대박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갑자기 개성공단 운영을 전면 중단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김대중정부에서 일궈 놓은 남북한 간의 성과는 모두 무너졌다.

p497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결코 무혈입성이 아니었다. 경복궁을 지키려는 경복궁 수비대와 일본군 사이에 처절한 전투가 있었다. 조선은 경복궁을 그냥 내어 준 게 아니라, 힘이 없어 빼앗긴 것이다.

p507 이완용이 사망하자 동아일보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팔지 못할 것을 팔아서, 누리지 못할 것을 누린 자. 이완용은 아들 이항구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아들아, 앞으로는 미국이 득세할 것이다.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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