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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새벽 - 다시 쓰는 인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외 지음, 김병화 옮김, 이상희 감수 / 김영사 / 2025년 5월
평점 :
제목 : 모든 것의 새벽
작가 : 데이비드 그레이버
출판사 : 김영사
읽은기간 : 2025/06/27 -2025/09/20
벽돌책답게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처음 대여를 했는데 책이 두꺼워 다 못읽고 반납을 했다가 다시 빌려서 봤다.
제목이 매우 매력적인데 읽는데는 쉽지 않았다.
인류 역사 초기의 문명에 대한 이야기인데 흥미롭긴 하지만 머릿속으로 정리하기엔 쉽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기존 역사와 믿음과는 다른 내용이다 보니 더 수용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초기 문명시절에도 평등한사회에서 왕과 권력자가 생겼다는 단선적인 방향이 아니라, 평등한 사회, 민주사회, 왕 및 귀족사회등 다양한 사회가 파노라마처럼 함께 있었고, 단선적인 방향으로 역사가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특히 그동안 많은 내용을 알지 못하는 아메리카의 초기 문명을 중심으로 내용이 설명이 되니 흥미롭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다.
저자는 수십년 내에 이와 같은 문명발달사가 주류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실제로 그렇게 될지 아니면 기존의 이론이 더 많은 증거를 보강해 강화될 지는 모르지만 초기 문명의 다양한 아규와 토론이 문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는 도움이 될 것 같다.
재미있지만 읽기는 쉽지 않았다.
p19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물질적 자원(토지, 칼로리, 생산수단)이 확실히 중요하다고는 해도 인간의 역사에서 궁극적인 질문은 그런 것을 얻을 기회가 평등한지가 아니라 함께 살아갈 방법에 관한 결정에 도움을 줄 능력이 평등한가다.
p28 고대 무덤의 증거에서 얻어진 건강 관련 지표들이 발견되는 통계적 빈도를 근거로하여 인간 사회가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 일반적 결론을 내리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면 우리는 홉스와(그리고 핑커와도)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원래 인간이라는 종은 기르고 보살핌을 베푸는 종이며, 삶이 불쾌하고 잔혹하거나 짧아야 할 필연성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p34 그녀는 야노마미족의 습격의 잔혹성을 묘사한다. 하지만 그는 1956년에 그녀가 야노마미족을 떠나 원래 가족을 찾아 나섰고 다시 서구 문명에서 살게 되었지만, 수시로 굶주리고 끊임없이 거부당하여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얼마 뒤 충분한 상황 인식에 근거하여 판단할 능력이 생기자 엘레나 발레로는 야노마미족과의 삶이 더 좋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돌아갔다.
p48 갑자기 유럽의 더 강력한 몇몇 왕국들이 지구상의 방대한 지역을 장악했고, 유럽 지성인들은 중국과 인도문명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사회적, 과학적, 정치적 이념을 접하게 되었다 이런 세 이념의 홍수가 초래한 최종 결과가 계몽주의라 알려진 현상이다.
p51 우리는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점차 그들 나름으로 유럽의 제도에 대해 놀랄만큼 일관성 있는 비평을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비평이 유럽 자체에서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p53 토머스 홉스, 휘호 흐로티위스, 존 로크같은 저자들은 다들 출발점으로 삼는 성경의 서사를 건너뛰고, 다음의 질문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인간이 가진 것이 인간성뿐이라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p61 그들은 호의에 응답하며 읍과 마을에 거지가 한 명도 없도록 서로 필요한 것을 제공하며 도와준다. 그리고 프랑스에 그토록 궁핍한 거지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그것을 아주 나쁜 일로 여겼고, 그것이 우리에게 자선의 마음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여 우리를 심하게 비난했다.
p68 정치적 기준에서 프랑스인들과 아메리카인들이 토론한 것은 평등이 아니라 자유에 대해서였다.
p88 칸디아롱크의 의견은 독일어, 영어, 네델란드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고, 한 세기가 넘도록 여러 판본으로 계속 출판되었다.
p92 프랑스의 관찰자들은 거의 모든 아메리카 선주민들이 개인의 자율성과 행동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본다는 것-어떤 인간 존재가 다른 존재의 의지에 복종하는 일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운영하며, 그런 이유로 프랑스 사회를 본질적으로 파벌적 노에의 삶으로 본다는 것-을 명백히 깨달으면서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다.
p113 칸디아롱크 같은 선주민 비평가들의 안내를 받아 인간의 과거에 대한 증거에 새로운 눈으로 접근해야 한다.
p121 우리가 고대 선조들의 사회적 조직에 대해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지극히 다양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고대의 인간은 해안과 열대우림부터 산지, 사바나까지 무척 다양한 자연환경에서 살았다. 그들은 오늘날의 인간보다 훨씬, 훨씬 더 신체적으로 다양했다.
p124 사피엔트 패럭독스(유적적, 해부학적 현생 인류의 등장과 현생 인류와 관련된 복잡한 행동의 발달 또는 문명의 등장 사이에 왜 긴 시간 간극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리킨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왜 후기 구석기 문화가 나온 이후 오랜 정체 상태를 거쳐 마지막 빙하시대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신석기 문화가 등장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다-옮긴이)라고, 몇몇 연구자들은 심지어 인간 두뇌에 어떤 뒤늦은 변이가 있다고 가정하고 후기 구석기 혁명에서 보이는 외견상 탁월한 문화적 능력을 그것으로 설명하려고도 있지만, 그런 견해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
p131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가 낳은, 그래서 고고학자들로 하여금 선사시대 수렵 채집인에 대한 견해를 바꾸게 만든 또 하나의 예상치 못했던 상황은 거대 구조물의 출현이다. 유라시아에 있는 이런 구조물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튀르키예 남동부의 하란 평원을 바라보는 게르무스산맥에 위치한 석조 신전이다. 1990년대에 그 평원의 북쪽 경게를 조사하던 독일 고고학자들이 그 지방에서 괴베클리 테페라 부르는 장소에서 아주 오래된 고대 유적을 발견했다.
p142 어떤 인간 사회에나 회의론자와 비순응주의자가 있다고 믿을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차이점은 타인들이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있다.
p146 남비콰라족 족장을 그토록 유달리 눈에 익은 정치적 인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특성이었다. 공동의 이익과 개인적 야망 간의 규형을 맞추면서도 사실상 다른 두 가지 사회 시스템 사이를 이동하면서 유지하는 차분한 지혜라는 특성 말이다.
p151 거의 모든 사람은 아예 매장되지도 않는 와중에 일부 사람들이 풍부한 부장품과 함께 매장되는 상황이 문제되는 것이다.
p154 다른 말로 하면, 또 그 자체로 놀랍기는 하지만, 기우너전 3000년대에도 분명히 영국제도의 많은 지역에서 모종의 협동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스톤헨지가 지배 씨족의 고위급 설립자들에게 바쳐진 신전이라면-현재 몇몇 고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들 계보의 일원들이 중요한 역할을 요구했을 가능성은 크다.
p158 로위가 관찰했듯이, 이런 명명백백한 독재는 엄격히 게절적이고 일시적인 수준에서만 작동했다. 사냥철이 -그리고 그 다음에 집단적으로 거행하는 선댄스 제의가- 끝나면 그런 독재는 그가 아나키스트적 조직 형태라 부른 것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면, 사회는 다시 한번 작고 기동력 있는 무리로 쪼개진다. 로위가 관찰한 내용은 놀랍다.
p162 그들은 교대디는 사회적 설정 사이에서 계속 왕복하고, 거대한 구조물을 지었다가 다시 허문다. 한 해의 특정한 시기에 전제주의적 구조가 등장하도록 허용한 다음 그것들을 해체한다. 그 모든 행동은 특정한 사회적 질서가 결코 고정되거나 불변적이지 ㅇ낳다는 것을 아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p173 왜 위계 형식들을 구축했다가 해체하면서 수천 년을 보낸 뒤에, 호모 사피엔스-영장류 가운데 가장 영리하다고 하는-는 영구적이고 고치기 어려운 불평등 시스템이 뿌리를 내리게 허용했는가?
p178 동부 아프리카의 하드자족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마르투족 그룹들에 대한 연구는 현재의 채집인 사회가 수적으로는 작은 규모일지 몰라도 구성원들의 성격은 놀랄 만큼 국제적임을 보여준다.
p184 만약 모든 사회가 특정한 핵심 가치(부, 경건성, 미, 자유, 지식, 전투 기량)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면, 평등 사회는 모든(혹은 거의 모든) 구성원이 최상의 가치가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하고, 일반적으로 그렇게 분배되어 있다고 동의하는 그런 사회다.
p193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최초의 질문을 다시 다듬어볼 수 있다. 진짜 수수께끼는 족장이나 심지어는 왕과 여왕이 처음 등장한 게 언제인가가 아니라, 그들을 웃음의 대상으로 치부하여 궁정에서 몰아내는 것이 언제부터 불가능해졌는가이다
pp198 살린스가 제시한 큰 그림이 옳은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해둘 필요가 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평균적으로 억압하에서 살아간 중세 농노도 아홉 시에서 다섯 시까지 근무하는 현대의 사무직이나 공장 노동자보다 적게 일했으며, 스톤헨지를 짓기 위해 큰 석판을 끌고 온 헤이즐넛 채집인과 유목민의 평균 작업 시간은 분명히 그보다 더 적었다.
p200 그들이 농사를 짓지 않은 것은 단순히 농사를 지어야 할 이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몽공고 넛이 사방에 천지인데 왜 식물을 심어야 하는가? 쿵족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p203 인간은 농업에 손을 대기 오래전부터 수만 년 동안 상이한 삶의 방식을 실험해왔다. 차라리 변화의 전반적인 방향을 찾아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것이 우리가 던진 질문에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인간은 어찌하여 한때는 우리의 사회적 관계의 본성이던 유연성과 자유를 잃고 영구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고착되었는가
p216 정착민이 야만적이고 손대 않은 황무지라고 여기는 땅은, 대개 알고 보면 선주민들이 소각 관리, 잡초 제거, 잡목림 식립, 비료 주기, 가지치기를 통해 또는 특정한 야생 식물군의 서식지를 넓히기 위해 하구 땅을 계단식으로 관리하고, 조개의 번식력을 높이기 위해 개펄에 대합 밭을 조성하며, 연어, 농어 등을 잡기 위한 보를 만드는 등의 방법으로 수천 년 동안 능동적으로 관리되어온 땅이었다.
p249 이런 특에 의거하여 볼 때, 재구성된 문화 지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질문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질문이 된다. 그것은 농경을 수용할지 말지와 같은 결정이 단순히 칼로리상의 이익 계산이나 무작위적인 문화 취향의 문제만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질문,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그리고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여기는 지)에 대한 질문, 그리고 서로서로 어떤 관게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p284 그들이 그런 수탈이 자신들의 사회에서도 가능한 줄 알고 있었지만 거부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노예 보유는 자신들 사회의 중요한 가치를 훼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살이 찌고 게을러질 것이다)
p293 우리는 미래의 사건을 예견할 수 없지만, 그런 사건이 발생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가 힘들어진다.
p307 김부타스는 이런 식의 논리를 제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중동과 신석기시대의 유럽에 여성의 자율성과 제의적 우선권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자 그녀의 생각 가운데 많은 부분이 에코페미니즙이나 뉴에이지 종교, 또 다른 수많은 사회운동의 현장에 수용되었다.
p336 중요시해야 할 지점을 농경과 길들임이 아니라 식물학이나 텃밭농사로 옮겨본다면 어떨까? 우리는 단번에 신석기시대 생태학의 현실에 더 가까워질 것이다. 그들은 야성적인 자연을 길들이거나 한 줌의 풀씨에서 최대한 많은 칼로리를 쥐어짜내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졌던 것은 마당의 텃밭을 만드는 일이었던 것 같다.
p349 오랫동안 농업혁명의 요람이라 여겨져온 중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사실은 구석기시대의 채집인에서 신석기시대 농부로의 전환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로 야생 자원으로 먹고살던 단계에서 식량 생산에 근거하는 삶으로의 이행은 약 3,000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리고 농업으로 인해 부가 더 불평등하게 집중될 가능성이 생겼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거의 모든 경우에 그 가능성의 씨앗이 뿌려지고 나서 1,000년 뒤에야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의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사실상 시험 삼아 짓는 농사, 취미 농사를 시도하고 있었고, 각자의 사회적 구조를 이리저리 전환하면서 생산 양식을 바꾸었다.
p366 농경의 안팎으로 이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혹은 그 문턱에서 머무는 것은 결국 알고 보면 인간 종이 과거의 오랜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해온 일이었다. 그런 유동적인 생태적 설정-텃밭 경작, 호수나 오아이스 주변 범람 퇴수 농법, 소규모의 지형 관리(가령 불지르기, 가지치기, 계단식 밭 조성)와 반야생 상태에서 동물의 길들임과 사육과 광범위한 수렵, 어로, 채집 활동의 혼합-은 과거 세계 여러 지역 인간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p376 이런 반려동물은 흔히 사냥당해 잡아먹힌 동물의 새끼인 경우가 많다. 인간 양부모에게 받아들여지고, 어렸을 때는 먹이를 얻어먹고 보살핌을 받다가, 주인에게 완전히 의존하게 된다. 이런 복종은 성체가 되어서도 지속된다. 반려동물은 잡아먹히지 않는다. 또 그 주인들이 새끼를 치는 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반려동물들은 저마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사람들은 반려동물들을 아이들처럼 키우며 애정의 대상이자 즐거움의 원천으로 여긴다.
p394 마치 현대의 채집인 사회가 근본적으로 다른 두 규모로 동시에 존재하는 것과도 같다. 하나는 작고 친밀한 규모이며, 다른 것은 광대한 영토, 심지어는 대륙에까지 확장되는 규모다. 이는 이상해 보일지 모르지만 인지과학의 시각에서 볼 때는 완벽하게 타당하다.
p411 주민들의 식물성 식단에는 밀, 보리, 공과 식물 외에 사과, 배, 체리, 자두, 도토리, 헤이즐넛, 살구도 포함되어 있다. 메가 유적의 거주민들은 농사를 짓고 삼림을 활용하는 동시에 붉은 사슴, 노루, 멧돼지를 사냥했다. 그것은 거대한 규모의 취미 농사였다. 이는 도시 인구가 엄청나게 다양한 야생 식품과 함께 소규모의 재배와 목축을 통해 자급자족하는 형태다.
p429 우루크가 유명해진 것은 그쓰기 덕분이다. 그곳은 우리가 문자 기록을 대량으로 갖게 된 최초의 도시이며, 이런 자료 가운데 일부는 왕의 지배가 들어서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석하게도, 그런 자료는 읽을 수는 있지만 해석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p449 지금까지 우리는 유라시아의 별개의 세 구역에서 도시가 처음 출현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펴보았다. 각 경우에 우리는 군주제나 전사 엘리트가 존재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는 것과, 그와 함께 각각의 도시가 공동체의 자치 제도를 개발했을 가능성도 지적했다.
p454 투웨이 강변의 스마오에서 이루어진 발굴은 이 모든 것과 함께 복잡한 공예와 전쟁의 증거를 풍부하게 제시했으며, 기원전 2000년경 있었던 전쟁, 대량 살해와 포로 매장의 증거도 보여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후대의 궁정 전통의 연감에서 상상되던 것보다 훨씬 더 활발한 정치적 장면을 발견한다.
p459 지금 우리는 도시 테오티후아칸이 멕시카족이 오기 전 여덟 세기 동안, 그리고 스페인인들이 오기 1,000년도 더 전에 전성기를 누렸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세워진 시기는 기원전 100년경이며, 몰락한 것은 기원후 600년경이었다. 또 그 몇백 년 동안 테오티후아칸은 제국으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의 로마와 쉽게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장엄하고 수준높은 도시가 되었다.
p474 거대 구조물 건설의 모든 작업에는 노동력과 자원만이 아니라 인간 생명을 바치는 공양이 요구되었다. 건설의 중요한 단계마다 항상 제의적 살해의 고고학적 증거와 결부된다. 피라미드 두 기와 신전에서 나온 인간 유골을 합치면 희생자의 수는 수백에 이를 것이다. 그들의 시신은 대칭적으로 배열되어 그 위로 솟아오를 구조물의 평면도를 그리게 될 구덩이나 참호에 놓였다.
p482 이 설명에는 기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틀라스칼라에는 왕이 없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의미로도 왕국의 연합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만은 왜 그렇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수상 경력이 있는 과학 분야의 언론인이지만, 16세기 중앙아메리카 역사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아닌 그는 2차 자료에 의존했고 결과적으로는 수많은 문제가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p491 의회는 합리적인 논의와 장시간의 숙고를 통해, 필요하다면 몇 주일씩이라도 심의한 뒤에 결정을 내리고 합의를 추구했다.
p495 틀락스칼라 의회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개인적 카리스마나 경쟁자를 능가할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비하, 심지의 수치의 정신을 실행해야 한다. 그들은 도시 주민들에게 복종하도록 요구받는다.
p525 저서 문화 성장의 설정에서 크로버는 인류의 전체 역사에서 예술, 철학, 과학, 인구의 관계를 살펴보았지만 어떤 일관된 패턴이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또 그런 패턴은 같은 노선을 계속 밟아나간 더 최근의 몇몇 연구에서도 파악되지 못했다
p529 장래의 이집트학자들이 아무리 그것들을 높이 평가하게 될지라도, 중왕국 때 쓰인 시누헤 이야기 같은 문학의 우아함과 오시리스 숭배의 번영은 수천 명의 징집 병사, 강제 노역자, 처형된 소수민족 들에게는 전혀 위안을 주지 못했다. 그 이전의 암흑시대에 그들의 조부 세대는 대부분 아주 평화롭게 살았는데 말이다
p536 올멕에서도 그랬지만, 그 영향력의 놀랄 만큼 많은 부분이 행정적, 군사적 혹은 상업적 제도와 관련된 기술의 전파보다는 이미지의 형태-안데스의 경우, 작은 도기그릇과 개인 장신구와 직물에 그려져 분포되었다-로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p544 위대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반 나체즈족은 매우 다른 삶을 살았던 것 같고, 그들의 표면상의 지배자의 소원을 기쁘게 무시하는 모습도 흔히 보인다. 그들은 독자적인 상업과 군사적 원정을 행하며, 때로는 위대한 태양이 보내는 신하들이나 친척들을 통해 전해진 명령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p548 지금까지 우리는 처음에 시작한 세 원칙-폭력, 지식, 카리스마-각각이 1차 체제에서 어떻게 하여 어떤 면에서는 우리가 국가라 여기는 것과 닮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명백히 닮지 않은 정치 구조의 토대가 되는지 살펴보았다.
p553 수십 명, 수백 명, 때로는 수천 명에 달하는 인간 제물, 특별히 이 행사를 위해 살해된 인간 제물로 둘러싸인 왕의 무덤은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왕조적 도시국가인 우르에서 누비아의 케르마 정치집단, 중국의 상 왕조에 이르기까지 군주제가 결국 확립된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국, 티베트, 일본, 러시아 초원에도 믿을만한 문장으로 된 묘사가 있다. 이와 비슷한 일은 남아메리카의 모체와 와리 사회, 그리고 미시시피강 유역의 도시 카오키아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569 사실상 왕이 내린 모든 결정은-전쟁이든, 동맹이든, 새 도시의 건설이든, 심지어 왕실의 사냥터를 확장하는 것 같은 외견상 사소해 보이는 문제든- 신과 조상 혼령, 즉 지고의 권위에 의해 인증되어야만 진행될 수 있었다.
p591 전쟁은 대체로 농사를 짓지 않는 계절에 하는 일이었다. 사제와 법관 역시 전업인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사실 이집트 고왕국, 중국의 상 왕조,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왕조, 또는 고전기 아테네의 거의 모든 정부 기관을 맡은 직원들은 순환제로 일했고, 시골 영지의 관리자, 상인, 건설업자, 그 밖에 다른 직업인으로서 다른 삶을 살았다.
p597 이 책 전체에서 계속 다루었듯이, 세계 전역에서 작은 공동체들은 확대된 도덕적 공동체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명을 형성했다. 영속적인 왕, 관료나 상비군 없이도 그들은 수학적 지식, 달력과 관련한 지식의 성장을 촉진했다. 몇몇 지역에서는 야금술을 개발했고, 올리브, 포도, 대추야자를 재배했으며, 발효 빵과 발효 밀백주를 발명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옥수수를 기르고 식물에서 독과 약품, 향정신성 물질을 추출하는 법을 익혔다. 이 참된 의미에서의 문명은 직물과 광주리짜기에 적용된 주요 직물 기술과 도자기 제작용 물레, 석재 산업과 구슬 가공, 돛과 항해술 등등을 개발했다.
p604 학자들은 여사제 집단이 다스린 도시란 민족지학적 기록이나 역사적 기록에 전례가 없었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동일한 논리에 따라 남성이 지배하는데도 시각적 표상에서는 권위 있는 인물이 모두 여성으로 묘사된 왕국의 전례 역시 없었다고 똑같이 지적할 수 있다. 크레타에서는 뭔가 색다른 일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었다
p631 투커의 지적에 따르면 씨족은 외교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단순히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외교적 임무의 의전을 정하고 전쟁을 막기 위한 보상을 지급하거나 포로를 받아들이는 일도 포함된다.
p651 체로키, 치카소, 촉토, 크리크, 세미놀레 부족을 말한다. 그런 부족들은 모두 참여자가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며 합의 도출의 과정에 의해 운영되는 공동체 위원회가 다스리는 패턴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 모두가 원로 사제들, 카스트, 군주의 흔적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세습적 지도부가 19세기까지도 남아 있으면서 더 민주적인 정부 형태를 선호하는 광범위한 추세에 거역하면서 최대한 버텼다.
p663 북아메리카의 사례는 전통적인 진화론 구도를 혼란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국가 형성의 덫에 한번 걸리게 되면 출구가 없다는 말이 전혀 사실이 아님을 명확하게 입증했다.
p677 드농비유를 무찌른 뒤 기조나세는 군대를 해산하고 대위원회를 재구성하기 위해 새 공직자를 선출하는 과정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다르게 행동하기로 선택했더라도 전례없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p691 아이러니한 일인데, 앞에서 보았듯이 이제 그의 성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현대 고고학의 결과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놀랐지만, 호카트가 예언한 대로, 구석시대 후번은 거창한 부와 명예를 대부분 죽었을 때 끌어모은 것으로 보이는 개인들을 위해 꼼꼼하게 연출된 장대한 매장의 증거를 정말로 남겼다.
p704 그들을 진정으로 경악하게 한 것은 채찍질하고, 끓는 물에 넣고, 낙인을 찍고, 살을 베는-때로는 요리하여 먹기까지 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웬다트족 마을이나 소도시의 거의 모두가, 여성들과 아이들까지도 거기에 참여한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