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 삶을 위한 성경 강독
한동일 지음 / 인티N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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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

 : 한동일

 : 인티N

읽은기간 : 2024/05/10 -2024/05/13


한동일님의 에세이?

사제를 내려놓고 일반인으로 돌아와 성서강독을 하듯 쓴 글들을 모았다. 

설교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큐티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카톨릭 교인이 아니라서 사제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몸담았던 공동체를 떠난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닐듯 싶다.

일반인의 시각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바라본다면 또 다른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일반적인 종교인으로 이분의 글에 많이 공감하게 된다.

결국 사제나 전문 종교인에게 바라는 기대수준이 있기에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실망할 수 밖에 없다. 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신교가 박물관에 들어갈 날이 얼마 멀지 않은 시점에 이분의 글이 크게 와 닿는다.. 


p21 인간이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봉헌물은 ‘매일 매 순간 결심한 것들에 대한 반복된 실패’일 거라고요.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p32 저는 그와 같은 예수의 모습에서, 그가 인간처럼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 50)하고 탄식하는 모습에서 예수가 인간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아는 분이라는 사실을 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한낱 인간인 저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도 나처럼 번뇌하고 방화하고 힘들어한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p41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니(마니피카트 아니마 메아 도미눔) 마음이 몸시 힘든 사람이 거룩함을 체험하게 되면, 그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고의 찬미는 마니피카트 아니마 메아 도미눔일 것입니다.

p64 키케로는 “다가올 일을 알아봐야 아무 쓸모가 없다. 얻는 것도 없이 괴로워한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p70 생각이 결심히 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몰입도 몰입에 이르기까지의 시간과 훈련이 요구됩니다. 다만 제자들도 그런 노력을 통해 나중에는 스승처럼 하게 되지요. 배움은 분명 힘들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배우고 습득하게 된다는 것이 희망입니다.

p89 지금까지 나에게 걸림돌이었던 일이 디딤돌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p102 영혼의 독방, 이곳에 머무는 것은 이 방의 문을 닫고 물리적으로 타인과 자신을 격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향해 열어두었던 마음의 문을 닫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라는 시간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p131 우리의 마음 밭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느 ㄴ좋은 선택을 무수히 쌓아서 내 마음 밭을 비옥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좋은 방향, 선한 방향으로의 무의식적인 움직임이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그ㅓㅅ은 대부분 나의 삶에 대한 결과로 드러납니다.

p145 간음하다 걸린 여인에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는 것처럼, 베드로의 나는 아니오라는 말에도 그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 순간, 그 상황에 내가 없었을 뿐입니다.

p155 무엇이 허용되는지뿐만이 아니라 무엇이 존경받을 만한가도 고려되어야 한다.

p160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되는 거야. - 1904년 1월, 카프카. 저자의 말. 변신 중에서

p195 만일 예수가 쓴 내용이 중요했다면 전승이 알려주었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내용보다는 행위가 더 중요했음을 뜻합니다.

p202 교회에서 발행되는 수많은 교회 문헌을 보며 아름다운 문장에 탄복하다가도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성경 구절이 떠오를 때가 많습니다. 쓰기와 말하기 기술자가 쓴 글과 말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힘듭니다.

p218 독일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을 때 “당신들은 왜 종교세를 냅니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런 대답을 하더라고요.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을 교회가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종교세를 낸다”

p225 신자들 주머니에 있는 것 말고 너희 주머니에 있는 것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실 수도,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너희 각자는 가난할 수도 있지만 너희가 속한 교회와 교구는 부자가 아니더냐?” 하고요

p245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너 자신이 너에게 괴로움이 되는 때일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이 괴로움을 경감시켜줄 수 있는 약도 위로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때까지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p284 당신이 잘 있는(지내는) 것이 내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저도 잘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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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 서울편 4 - 한양도성 밖 역사의 체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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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2

 : 유홍준

 : 창비

읽은기간 : 2024/04/25 -2024/05/13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을 읽은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처음 책을 읽어가면서 느꼈던 감동이나 감흥은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이렇게 아름답고 좋구나...

그렇게 읽어가던 책이 어느덧 12권이 됐다. 그리고 종착지에 다달았다.

그러는 사이에 난 어느새 중년이 됐다.. 책과 함께 늙어가는 느낌이 이런 기분인가보다.

마지막 답사지는 서울의 강북과 강남이다.

강남은 내가 근무하는 선릉이어서 더 반가왔다.. 

선릉과 정릉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특별히 더 알게된 건 없었다. 그렇지만 이야기꾼의 글로 풀어지는 내용이 재미있고 알찼다.

강북은 성북동과 망우리였다. 

성북동은 내가 고등학교를 나온 곳이고, 간송미술관은 고등학교때 종종 가서 청소했던 곳이다. 

미술관을 청소할 때는 그저 놀기 바빴는데 이렇게 대단한 곳인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역시 나이가 들고 정신연령이 올라가야 좋은 걸 좋다고 할 수 있나보다.. 

망우역사공원은 정말 새롭게 알았다. 유관순누나가 무연고묘에 잠들어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나름 역사책 열심히 읽는다고 생각했는데 구멍이 너무 많다. 

문화유산답사기가 끝나는 건 아쉽지만 박물관 순례가 있으니 기대가 된다..

유홍준 선생님이 오래오래 글쟁이로 있었으면 좋겠다.. 


p9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는 작곡가 쇼팽, 소설가 발자크, 화가 쇠라, 가수 에디트 피아프 등이 묻혀 있는 명소다. 무덤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거기 그분들이 있기 대문에 찾아가는 것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망우산에 위치한 우리 망우역사문화공원도 역사인물들의 넋이 그렇게 서려 있는 귀중한 공원묘지다

p29 조선시대에 별장, 별서가 발달한 것은 우리나라의 자연 풍광이 수려하기 때문이었는데 북둔도화의 성북동에도 자연히 문인 묵객과 권세가들이 경영하는 별장, 별서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유득공의 붇둔초당을 비롯해 오로정, 성북정, 백운정사 등이 이곳에 있었다.

p38 의친왕은 독립투사들과 교류해 공의 지위가 박탈되기도 했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주색에 빠진 광인으로 가장하면서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p50 1930년대에 들어서면 도심과 가깝고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성북동이 새로운 주택지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이때 특히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p60 이태준은 1946년에 월북하면서 이 집을 두 누이에게 넘겨주었다. 월북문인이라는 빨간딱지 대문에 한동안 이태현의 집으로 이름을 감추었다가 1988년에 해금되면서 이름을 되찾아 1998년부터 누님의 외손녀인 조상명 씨가 수연산방이라는 이름의 전통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p63 조선의 그릇들은 일본 것들처럼 상품으로 발달되지 않은 것이어서 도공들의 손은 숙련되었으나 마음들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였다. 손은 익고 마음은 무심하고 거기서 빚어진 그릇들은 인공이기보다 자연에 가까운 것들이다.

p66 그런 문학적 취향으로 학예진 휘문의 학예부장을 맡으며 글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상급생으로 정지용과 박종화가 있엇고 교원으로 가람 이병기 선생이 있었다 이것이 이태준의 문학적 자산이었던 것이다.

p67 누가 뭐라 해도, 또 누구나 말하듯 이태준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빛나는 별이다. 시에 정지용이 있다면 소설에 이태준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이다.

p78 백양당의 출판 활동은 1946년 7월경, 이태준, 이여성, 임화 등 조선문학가동맹의 주요 문인들이 다 월북하면서 급속히 위축되었다. 그리고 1948년 8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기점으로 공안기관은 백양당을 인공 지하의 심장적 기관으로서 좌익 지하출판을 했다고 지목하고 배정국을 불러 강도 높은 조사를 했다. 이에 백양당은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p84 암울했던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화가와 미술평론가 그리고 문장가로 빛나는 지성과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열심히 살아갔던 근원 김용준, 자신의 소신과 기대를 안고 월복하여 학문적, 예술적 최선을 다하지만 끝내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은 그의 인생편력이 이렇게 전집 5권에 들어 있는 것이다.

p91 내가 어느날 동주 선생에게 근원이 왜 월북했느냐고 묻자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하셨다. “근원은 항시 거기는 어던지 한번 가봐야겠다고 말했어요”

p95 실상이 이러하니 문장 전26호는 우리 근대문학과 국학의 보석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이 점을 생각할 때 수연상방 별채의 북카페 이름은 구인회보다 문장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p99 김용준은 양주 고든골 반야초당으로 이사했고, 김환기는 수화와 김향안에서 한 글자씩 따서 당호를 수향산방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노시산방을 사랑하는 후배 화가 김환기에게 넘겨준 김용준은 신혼부부가 이 집에 사는 것을 기념해 수향산방 전경을 그려주었다.

p105 이를 미술사적으로 논증하며 그 아름다움을 세상에 알린 이는 수화와 가까이 지냈고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혜곡 최순우였다.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백자 달항아리의 미학에 비로소 눈으 ㄹ뜨고 그 아름다움에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개관하면서 국보, 보물로 새롭게 지정된 백자들을 선보이기 위해 마련한 백자달항아리 특별전이 열린 이후 마침내 한국미의 아이콘이 되었다.

p111 김향안은 수필집 파리를 펴낸 문필가이기도 했지만 우리 근현대사 소설가 이상과 최고의 화가 김환기의 부인으로 살며 이들의 예술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다는 것이 그의 보람이자 자랑이었다.

p120 이후 둘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자야는 백석을 평생 잊지 못해 그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금식을 하고 그를 기렸다고 한다.

p122 당시 대원각의 재산은 시가 1천억원이 넘는 것이었다. 기자 간담회 때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자야는 “1천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p147 북정마을은 아름다운 마을이라기보다 오히려 정겨운 옛 동네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100불대에 머물던 1960년대 가난한 시절로 되돌아온 듯한 서민 동네로 그 옛날을 보여주는 고향 같은 곳이다.

p156 이제라도 존경하는 국회의원이나 고지식한 전문가의 소수의견보다도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내어 이 안은 꼭 실현시키고 싶다. 아무튼 나는 지금 성종대왕 선릉과 중종대왕 정릉을 안내한다

p162 왕릉의 진입 공간은 반드시 작은 냇물에 걸쳐 있는 금천교에서 시작된다. 오늘날에는 많은 경우 금천교가 사라졌지만 원래 왕릉 앞에는 반드시 작은 내가 흘렀으며 이는 곧 현세와 죽음의 공간을 가르는 경계였다. 금천교는 이 양자를 연결하는 다리로 기능한다. 금천교를 건너면 왕릉의 존재를 알려주는 홍살문이 우뚝 서 있다.

p165 두 건물은 비슷해 보이지만 수라간은 별돌 담장으로 닫힌 공간이고 수복방은 콩떡 담장에 툇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건축에서 보여주는 비대칭의 대칭이다.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면서 디테일을 달리하여 은근히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p174 왕릉 석인상의 이런 변화는 곧 시대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조선 초기, 중기, 후기의 문화사적 분위기와 일치한다. 대체로 조선 초기인 15세기에는 되도록 규정에 충실하려고 했다가 조선 중기인 16-17세기에는 과장과 자신감이 들어갔고, 조선 후기인 18세기에는 사도세자 융릉과 정조 건릉에서 보이듯 섬세한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있다.

p198 가지런히 기와돌담을 쌓아 주차장과 차단하고 그 아래로 물이 흐르게 해서 도심 속의 사찰답게 단정하면서 차분한 분위기를 주려고 합니다. 그다음엔? 아직 생각중예요. 좋은 생각이 있으면 알려주구려. 그러면 나무를 심으세요. 절집의 가장 큰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라고 했어요.

p212 성균관 유생들은 동맹휴학을 하고 전국의 사림들이 극렬하게 상소를 올렸다. 보우죽이기라는 마녀사냥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반이성적 광풍이 몰아칠 때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같은 대학자들은 역시 합리적 지성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p213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15년 동안 휴정, 유정같은 엘리트를 비롯하여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한 것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이 맹활약을 펼치는 기틀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보우 스님은 사라져가는 조선불교에 새 불씨를 일으켜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다.

p230 추사의 판전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은 고졸한 멋이 우러나온다. 이쯤 되면 뛰어난 솜씨는 어리숙해 보인다는 대교약졸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p251 65세 되는 1740년 12월 겸재는 양천현령에 제수되어 70세 되는 1745년 1월까지 5년간 근무했다. 이 양천현령 시절은 그의 인생의 황금기였고 겸재 예술의 전성기였다. 이 시절 겸재는 경교명승첩을 비롯하여 한강을 소재로 한 많은 진경산수를 그렸고, 또 임진강에서 경기도 관찰사, 연천군수 등과 셋이서 소동파의 적벽부를 본받아 뱃놀이하며 연강임술첩이라는 대작도 남겼다.

p262 겸재의 진경산수는 인왕제색도에서 보이듯 짙은 먹을 사용한 웅흔한 필치의 작품이 많다. 그러나 그의 한강 그림들은 은은한 담채를 사용한 아주 부드러운 그림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겸재는 산을 그릴 땐 남성적, 강을 그릴 땐 여성적인 필치를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다.

p279 선조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간혹 의주로 피란한 무능한 임금으로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선조는 문예를 아끼고 키운 인문군주였다.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펴내게 지시하며 왕실 소장본까지 내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석봉을 만년에 조용한 곳으로 가서 편안히 작품활동 많이 하라며 한직인 가평군수로 내려보낸 것도 감동적이다.

p290 이렇게 시작된 망우리 공동묘지는 40년 동안 47,700여 기가 들어서면서 묘역이 가득 차게 되었다. 이에 1973년 3월에 폐장시킴으로써 매장이 종료되었다.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는 신규 분묘 조성이 금되었고 이장과 폐묘만 허용되면서 현재 약 7,0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p295 그때 나는 위창 선생의 묘소에 드리워진 소나무 그늘에 한참을 앉아 망우리 공원이 갖고 있는 문화사적 무게를 느꼈다. 어느덧 공동묘지에 대한 통념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곳이 우리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찍이 당나라 시인 유우석은 누추한 서재를 읊은 누실명에서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던가. 산은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요 물은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스럽다

p306 박인환은 짧은 인생에 몇 편의 시만 남겼고, 김수영 시인 같은 분에게서 낭만적 센티멘털리즙이라고 호된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인 세월이 가면이 가요로 크게 히트하면서 오늘날까지 대중에게 사랑받는 시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p311 나에게 이중섭을 한마디로 소개하라면 그리움의 화가라고 하겠다. 인간 누구나 품고 있는 그리움의 감정을 이중섭처럼 가슴 저미게 형상화한 화가는 드물다. 이중섭의 황소, 달과 까마귀, 매화꽃 그리고 수많은 은지화 모두 그리움의 감정으로 읽으면 그의 예술이 더욱 절절히 다가올 것이다. 시에 소월이 있다면 그림에 이중섭이 있다

p333 육당 최남선이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하여 위창에게 보여드렸을 때 “생존권이 박탈됨이 무릇 기하뇨”라고 쓴 것을 보면서 박탈은 빼앗아간 것을 말하는 것이고 빼앗긴 입장에서는 박상이라고 해야 한다며 글을 수정한 다음 “요새 애들은 한문을 몰라서 큰일이다”라고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p342 여기는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무덤이다. 다쿠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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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밤의 미술관 : 이탈리아 - 내 방에서 즐기는 이탈리아 미술 여행 Collect 13
김덕선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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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0일 밤의 미술관 - 이탈리아

 : 김덕선

 : 동양북스

읽은기간 : 2024/03/14 -2024/04/12


'90일 밤의 ...'는 시리즈인것 같다. 음악도 있고, 미술도 있다.

이 책은 그중 이탈리아 미술에 대한 이야기다.

밤에 잠자기 전에 읽어야 하는 책 같아서 침대 옆에 두고 중간중간 읽었다.

제목의 의도대로라면 한장씩 읽어야겠지만 보통 2-3장씩 읽어갔다.

워낙 좋은 작품들이 많은 이탈리아여서 그런지 소개되는 작품의 수준이 높았고, 아는 작품도 많았다.

미술관에서 설명을 들으면 더 좋았겠지만 책으로나마 사진으로 보니 아쉬움이 좀 달래지기는 했다.

나중에 여행가면 꼭 가서 봐야지 하는 작품이 참 많았다.

이탈리아는 참 복받은 나라인 것 같다. 부럽다..


p41 나는 붓으로 그렸거나 청동으로 구운 라오콘 군상도 여럿 보았는데 그 가운데 대리석으로 만든 이 작품이 제일 낫다. 한 덩어리의 돌을 재료로 사용해서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의 모습과 ㅎ뱀들이 이들을 휘감아 조이는 놀라운 형상을 재현했다. 로도스 출신 세 족각가 아겐산데르, 폴리도루스, 아테노도루스가 작업한 것이다

p48 바티칸에서 볼 수 있는 마르수피니 대관식은 마사초의 원근법으로 공간의 깊이감이 완벽하게 표현되었고, 배경은 플랑드르 화풍을 따라 세밀학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필리포 리피는 세 패널 상단에 푸른 하늘을 그려 넣어 답답하고 막힌 공간이 아닌 천상의 하늘위에 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p58 이 작품은 벽면에 생석회를 바른 후 젖은 상태에서 스케치와 채색을 마무리하는 프레스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페루지노가 화가로서 돋보인 기술을 밝고 명료한 색감입니다. 그는 이탈리아 중부 출신 화가답게 청명한 파란 하늘을 통해 깊이와 평안함을 넣고 지상에는 건축물, 단아한 나무를 수평으로 배치애 좌우 대칭의 안정되고 통일된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p69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문학가 로맹 롤랑은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생애의 저자이기도 한 그의 말을 확인해보려면 500년 전의 한 작품 아래 서야 합니다. 왜 작품 앞이 아니라 아래일까요?

p73 이전 화가들은 명암과 원금감을 사용해 정적인 3차원 공간을 표현한 것이 최선이었다면, 그의 첫 프레스코화는 각각의 장면이 움직이는 것 같은 입체감과 현실감이 있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도 하죠.

p79 헤라클레이토스 왼편에는 이 그림의 유일한 여성, 최초의 여성 수학자이자 철학자 히파티아가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육신으로 불리며 신격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얼굴은 율리우스 2세의 조카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라 로베레를 모델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그림 왼편에서 관람자의 시선을 맞추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에 라파엘로 애인의 얼굴이 모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p83 라파엘로는 페루지노 공방에서 일하며 스승과 당대 예술가들의 모든 기법을 받아들였습니다. 깊이 있는 색채 표현과 우아하고 서정적인 인물 묘사, 원근법을 이용한 균형 있는 공간 구성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죠. 가장 존경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푸마토 기법까지 연구하며 아테네 학당을 통해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뽐냈습니다.

p85 이전에 추구하던 깊이 있는 색감을 뛰어넘어 빛과 어둠의 완벽한 대비를 통해 다가올 바로크 사조까지 암시하고 있죠. 즉, 이 그림은 구도, 색채, 운동감까지 르네상스 미술이 추구하던 모든 가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p93 이전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선보인 수학적 규칙을 이용한 웅장한 건축적 배경이나 플랑드르풍 아름다운 자연은 그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습니다. 시선을 옮기는 화려한 배경은 지워버리고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 사이로 드러나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인물의 내면과 주제가 또렷하게 부각되는 강렬한 인상의 작품을 그려냅니다. 성화 속 인물들도 상상 속 이상적인 모습이 아닌 그가 일상에서 만난 하층민들을 모델로 하여 현실적으로 그렸습니다.

p127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그의 작품 분위기가 어느 정도 예상되지 않나요? 그의 작품은 그로테스크하고 폭력적이라는 평을 받았고 그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답했습니다. “현재 삶이 폭력적이지 그림은 폭력적이지 않다”

p132 라파엘로는 마르게리타가 자신의 연인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자신의 명성에 금이 가고 후원도 끊길지 모르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존재를 숨겼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마르게리타는 결국 라파엘로 곁을 떠났죠. 뒤늦게 마르게리타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달은 라파엘로는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사과의 마음을 담아 라 포르나리나를 그렸습니다.

p139 귀도 레니가 그린 베아트리체의 모습에는 눈물이나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얀색 두건을 쓴 소녀에게서 정결함이 느겨집니다. 그녀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가 생기가 도는 붉은 입술은 20대 초반 아름다운 여인의 생기를 부족함 없이 우리에게 보여주죠. 억울하고 처연한 모습이 아니라 무력한 현실과 절망을 지나 내면의 자유를 얻어 온화해진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는 우리에게 더 측은한 마음이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p143 라파엘로는 이러한 단점을 완벽하게 보완해 안정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고 역동적인 그림을 표현했습니다. 라파엘로가 그린 각 인물의 움직임과 근육의 표현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바티칸 시국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보고 배운 것입니다.

p160 청년이 된 바쿠스는 술에 취해 각지를 떠돌아다녔고, 사람들에게 포도 농사와 포도주 만드는 방법을 전수하며 수확물을 통해 축제를 즐기고 자신을 숭배하게 합니다.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그를 섬기며 벌인 축제는 유명했습니다.

p191 마에스타는 금빛 배경 중앙에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마리아가 정면을 응시하며 옥좌에 앉아 있는 구성으로 그려졌습니다.

p193 1260년 몬타페르티 전투에서 시에나가 피렌체를 누르고 승리한 것을 기념해 도시를 성모에게 바치기로 결정합니다. 그 상징적인 의미로 시에나는 마에스타를 주문했고 시에나의 성직자와 시민들은 그림을 들고 전쟁에서 승리한 도시를 행진했습니다. 그래서 마에스타가 처음 탄생한 곳을 이탈리아의 도시 시에나로 보고 있습니다.

p203 필리포는 화가로서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수도자의 신분을 망각하고 늘 추문을 뿌리고 다녔습니다. 하루는 이를 보다 못한 코시모가 메디치궁으로 그를 데려가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조차 견디지 못하고 침대보를 잘라 밧줄로 만들어 도망쳤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속세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창문으로 도망친 수도사라니, 상상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려지지 않나요?

p215 그림을 정면이 아닌 좌우로 이동하며 살펴보던 학자들은 몸을 숙여 오른쪽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다가 이내 무릎을 탁 쳤습니다. 다빈치는 그림이 성당 제의실 오른쪽 벽위에 걸릴 것을 고려해 그린 것입니다. 오른쪽 하단에서 그림을 올려다보면 마리아의 오른팔 길이가 현실적으로 보이고 사물의 비율이 한 시선으로 제자리를 찾아간 듯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p238 이 그림은 르네상스 최초의 나체화로 매번 회자되곤 합니다. 당시 보수적인 기독교 사회에서 나체의 비너스를 그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당시 피렌체에서는 기독교를 그리스 로마의 전통과 결합하고자 하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이 연구되던 중이었습니다. 보티첼리 또한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읽고 그것을 연구하던 인문학자들과 자주 교류했습니다.

p271 르네상스라는 커다란 짐을 벗어 던지고 개인의 기교와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며 진정한 예술을 찾고자 노력한 파르미자니노. 300년이 지난 20세기에 이르러서야 그의 작품은 재평가되기 시작합니다.

p281 신화 속 메두사는 여자인데 남자의 얼굴로 그린 것은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 모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작품에서 표방한 것은 사실주의, 즉 그림 속 내용과 사건이 눈앞에서 일어난 듯 실감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p287 아르테미시아의 초상화를 보면 유디트와 닮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은 그녀를 능욕한 아고스티노 타시의 얼굴을 닮았습니다.

p305 이전 조각가들,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마저 손대지 못한 대리석 토막을 그가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던 겁니다. 조르조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고 작업에 방해되어 혼자 작업하는 내내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칸막이를 쳐 구경꾼들이 볼 수 없게 했다고 합니다.

p322 어떤 형태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을 조소라고 합니다. 조소는 조각과 소조로 나뉘는데, 조각은 단단한 재료를 밖에서부터 안으로 깎아 만드는 반면, 소조는 찰흙과 같이 부드러운 재료를 안에서 밖으로 붙여가며 만듭니다.

p338 피렌체 화가들이 수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선명한 선을 스케치해 원근법을 표현했다면, 베네치아 화가들은 선보다 색채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p385 창작에서 새로운 세계를 찾아내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는 사회가 변화했음을 알려주는 기준이 되기도 하죠. 성경에 등장하는 주제와 인물만 그리던 종교 중심 시대에 정물화는 대외무역으로 빠르게 부자가 된 새로운 사회 계층을 만족시킨 최고의 문화 상품이 되었습니다. 16-17세기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음식을 그린 그림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p391 당시 유럽은 흑사병이 창궐해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눈앞에서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피에타를 보며 성모 마리아에게 안긴 죽은 그리스도가 곧 부활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희망과 위로를 얻었죠.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주제의 숭고함으로 많은 예술가의 손끝에서 피에타가 완성되었습니다.

p392 미켈란젤로는 나이가 들수록 신앙심이 더 독실해지면서 창조의 영역은 곧 신의 영역이기에 인간의 창조물은 한낱 베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도 강해집니다. 신이 아닌 이상 그 어떠한 것도 완벽하게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여러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긴 미켈란젤로는 가시적인 형태에서 드러나는 의미보다는 미완성 작품을 통해 형체의 본질적 의미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p407 당시 이러한 기법이 얼마나 혁신적이었을까요? 그가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에서는 캔버스를 찢어 구명을 뚫는 데도 10년이 걸렸다라고 말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술의 전통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시도는 당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p432 그는 티치아노처럼 분위기 묘사, 질감, 색채가 뛰어났고, 특히 풍요롭고 화려한 잔치모습을 틴토레토처럼 극적으로 생생하게 잘 그려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규모가 큰 작품 주문을 많이 받았고 그 덕에 남겨놓은 작품도 많습니다.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는 베네치아의 3대화가로 꼽히기도 합니다.

p473 당시 로마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청동 작품을 모각 혹은 복제해 로마의 도로, 광장, 목욕탕 등 다양한 곳에 전시했는데, 헬레니즘 문화가 확산되는 것을 반대한 로마의 정치가 포르키우스 카토는 그 모습을 보고 “로마에게 정복당한 그리스가 도리어 로마를 정복하고 말았다”라며 탄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록 그리스 청동 조각의 진품은 볼 수 없어도 로마인들의 복제품 덕분에 현재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예술품을 가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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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우지 않고 통째로 이해하는 통세계사 1 - 인류의 탄생에서 중세까지 외우지 않고 통으로 이해하는 역사
김상훈 지음 / 다산초당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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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세계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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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4/03/12 -2024/03/22


예전에 나왔던 책인데 개정판이 새로 나왔다. 나는 개정판을 처음 읽었다.

세계사를 동양과 서양을 구분해서 읽게 하는 책은 별로다. 동양과 서양 심지어 아메리카와 교류를 하면 발전했는데 따로따로 공부하다보면 숲을 보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같은 시대라면 동서양을 계속해서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 

동양의 한나라 이야기를 하면서 서양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중간중간 상기시켜준다.

시험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이처럼 좋은 팁이 없다.

시험이 아니더라도 동서양의 교류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기에 좋은 방법이다. 

다른 세계사 책에서는 한세기마다 동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르는 방식을 쓰기도 하던데 통사로 읽은 책은 이런 방법이 이해하기에 좋은 것 같다. 

청소년용인 것 같지만 성인이 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통사를 읽으면 각론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 나이가 얼만데 아직도 통사만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ㅜㅜ


p25 기원전 2350년경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어. 그가 바로 아카드 왕국의 사르곤 1세란다. 모든 도시국가들이 그의 용맹 앞에 무릎을 꿇었지. 사르곤 1세는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정복해 최초의 지배자로 등극했어.

p74 함무라비 왕이 사망하자 쇠퇴하기 시작한 거야.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1500년경부터 잇달아 이민족인 히타이트와 엘람의 지배를 받았단다. 이윽고 바빌로니아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가 등장했지. 그 나라가 바로 아시리아야

p96 로마신화에서는 로물루스라는 영웅이 나라를 세운 것으로 돼 있어. 하지만 실제로는 그때 이탈리아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의 한 종족인 루마족에서 로마라는 이름이 유래했을 것이란 주장이 더설득력을 얻고 있지

p110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300명의 정예전사를 이끌고 테르모필레 계곡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맞섰지. 그러나 적수가 되지는 않았어. 영화 300의 줄거리 그대로 스파르타 군대는 전멸했지. 페르시아는 아테네로 진격했어. 이때 등장한 그리스 영웅이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야. 그는 아테네 시민을 모두 대피시킨 후 해전을 준비했지. 마침내 페르시아 함대가 눈앞에 나타났어. 테미스토클레스는 조심스레 페르시아 함대를 살라미스 만으로 유인했어. 이 해안은 폭이 좁아 페르시아의 큰 함선이 잘 움직이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거지. 그 예상은 적중했단다. 후퇴하던 아테네 해군이 반격에 나서자 페르시아 함선들은 서로 부딪치며 우왕좌왕했어. 페르시아는 더 좋은 함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2차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어

p155 쿠시 왕국은 새로운 선택을 했어. 아프리카 고유의 문화권을 건설하기로 한 거지. 이후 쿠시 왕국은 더 이상 오리엔트 지역으로 진출하지 않았어. 그 대신 아프리카에 정착하려고 노력했지. 그 덕분에 쿠시 왕국은 아프리카의 가장 모범적인 국가가 됐단다.

p192 흉노의 왕국이 세워진 기원전 3세기 초반, 아소카 왕이 등극했어. 그는 왕에 오르자마자 정복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어. 얼마 후 타밀 지역을 뺀 인도 전역을 통일했지. 아소카 왕은 정말 냉혹한 정복왕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어. 그랬던 그가 갑자기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어. 수많은 정복전쟁을 치르면서 너무나 많은 목숨이 사라졌다는 데 생각이 미친거지.

p224 팍스 로마나의 범위를 좁히면 이 네르바 황제 시절부터라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범위를 넓히면 로마 공화정 말기의 내분과 혼란을 종결시킨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에 오른 시점부터 팍스 로마나로 보지

p256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로마 제국을 동방 지역과 서방 지역으로 쪼갰어. 각각의 지역에는 1명의 황제와 1명의 부황제를 두었지. 그러나 모든 권력을 혼자 쥐고 있었어. 사실 로마 제국을 분할한 것은 다른 3명의 황제와 부황제에게 국토 방위 임무를 맡기기 위한 정책에 불과했단다

p284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5년이 지났어.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방에서 프랑크족의 클로비스란 인물이 프랑크 왕국을 창건했지. 481년 클로비스가 세운 왕조를 메로빙거 왕조라고 불러. 751년까지 280년간 계속됐지

p335 이슬람 군대는 지금의 프랑스 보르도 지방에 도착했어. 그들은 보르도 지방을 초토화 시킨 다음에 투르 지방까지 진격했지. 프랑크 군대가 막아섰어. 프랑크 왕국의 권력을 쥐고 있던 궁제 카를 마르텔이 직접 군대를 지휘했어. 프랑크 군대는 푸아티에 평원에서 이슬람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 이게 그 유명한 투르-푸아티에 전투야. 이 전쟁의 승리는 프랑크에 돌아갔어. 그 후 이슬람 제국의 기세는 한풀 꺾였지

p350 샤를마뉴의 업적은 너무 많아. 프랑크 왕국은 유럽 역사상 서로마 제국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대제국이 됐어. 문화도 발달했단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로마의 전통적인 라틴 문화는 많이 잊혀갔어. 샤를 마뉴는 그 라틴 문화를 부활시키려고 노력했어. 신부들이 신을 섬기는 수도원도 이때부터 발달했지. 유럽 사람들은 샤를마뉴가 통치하던 이 때를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러. 매우 번영했다는 뜻이야

p371 710년 일본은 아예 당나라의 수도인 시안을 그대로 본뜬 도시를 나라 지역에 건설했어. 단지 도시 모습만 따온 게 아니야. 율령을 비롯해 모든 제도를 당나라의 것과 비슷하게 고쳤지. 문화도 당연히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귀족적이었어. 이때부터 약 70년 동안의 일본을 나라시대라고 한단다. 8세기 말에는 수도를 헤이안으로 옮겼어. 헤이안시대가 열린 거야. 헤이안시대는 훗날 가마쿠라 바쿠후가 만들어질 때가지 약 390년간 계속됐어

p438 십자군이 왜 이렇게 흉악했는지 아니? 교황을 포함해 이때 유럽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그 책임이 있어. 그들은 성전을 촉구하면서 동방에 막대한 보물이 있다고 선전했단다. 그래야 군인들이 더 잘 모이니까. 많은 기사와 농민들이 이 선전에 마음이 움직여 심자군에 자원한 거야. 어쩌면 이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겠다는 종교적 순수함보다 돈을 벌려는 욕심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어

p492 일 칸국은 바그다드를 점령한 다음 페르시아인들과 투르크인들을 힘으로 다스렸어. 당연히 반발이 있었겠지? 이곳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어. 그 결과 14세기 중반이 되면 일 칸국은 여러 왕조들로 쪼개지고 말았단다. 이때 등장한 왕조 가운데 몽골 혈통의 티무르 왕조, 페르시아 혈통의 사파지 왕조, 투르크족 혈통의 오스만 왕조가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

p511 바이바르스 1세는 프랑스의 루이 9세 왕을 사로잡은 데 이어 몽골 군대까지 물리쳤어. 그는 이슬람 세계의 수호자이자 영웅으로 떠올랐단다. 바이바르스 1세는 이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 나가 4대 술탄을 제거하고 스스로 술탄의 자리에 올랐어

p527 합스부르크 왕조는 스위스 출신이었어. 독일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가 포함하는 신성로나 제국의 황제를 독점했지. 신성로마 제국에 속한 나라들은 근대로 접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영방 체제를 유지했어. 그 때문에 합스부르크 왕조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의 역사에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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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2 - 백제, 신라, 그리고 비화가야 국토박물관 순례 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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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토박물관 순례2

 : 유홍준

 : 창비

읽은기간 : 2024/03/05 -2024/03/10


두번째 책.. 앞으로 계속 나올 시리즈가 기대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비슷한듯 하면서 좀 다른 느낌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지역을 돌면서 씌여진 책이라면 이 책은 지역을 돌기는 하지만 박물관을 끼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덕분에 몰랐던 박물관을 알게 되는 수확이 있다. 

내가 지방에 여행을 가면 가능하면 들리는 곳이 성당, 동네책방인데 지역 박물관을 추가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백제와 가야에 대한 답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사실 둘 다 가본곳이 별로 없다. 

백제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고 가야, 특히 비화가야는 처음 들어본 곳이다.

창년이라는 곳이 이렇게 매력적인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쓰면 이렇게 가보고 싶게 글을 쓸까? 부럽기만 하다. 

창녕도 가봐야 하고 부여도 가봐야 해서 올해도 갈 곳이 참 많다..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p17 부연 설명하기를 인물 : 탑 옆에서 (관람하며)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관람 포인트다. 이 탑은 무조건 탑을 바라보며 관람하는 인물과 함께 찍어야 사진이 제대로 나온다. 그래야 실물크기가 확실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p35 이에 창왕은 자신을 대신하여 백성 100명을 출가시켜 부처님을 받들게 하고 자신은 왕위를 이어갔다. 젊은 시절의 패기로 엄청난 실수를 했던 경험이 그를 크게 성장시켰던지 이후 창왕은 45년간의 치세 동안에 백제문화를 꽃피워 사실상 문화적 전성기를 이룩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능사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이다.

p58 위덕왕 재위기는 진실로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다. 지금 나성에서 떠올리는 유적과 유물 외에 백제의 미소로 칭봉받는 서산마애삼존불, 미스 백제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규암 출토 금동보살입상, 비록 국적과 시대가 명확치 않지만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이 6세기 후반 백제 미술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위덕왕 때 유물이다.

p70 사비성의 인구는 5만 명에서 기껏해야 10만 명 정도였으니 궁녀가 3천이 될 수가 없고 부소산 관북리 왕궁은 3천 명의 궁녀가 머물 공간도 없었다. 시인들은 단지 시어로 삼천을 읊었는데 대중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새기면서 낙화암은 의자왕의 호화방탕한 삶의 상징처럼 회자되었던 것이다.

p80 키 큰 상수리나무에 기대 쉬면서 곁에 있는 학부모에게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대재각을 다시 찾아온 것이 한 6,7년 만인것 같은데 그사이 근력이 쇠해진 것 아닌가 싶네요”라고 슬픈 듯이 말했더니 곧바로 받아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만만치 않은 산길이네요. 교수님 따라가는 우리가 더 힘드네요”라고 하여 금방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남과 이야기할 때는 이 학부모처럼 상대방이 듣기 좋은 얘기를 먼저 해야겠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p85 매화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거의 광적으로 좋아한 식물이라 좋은 매화나무 갖기를 너도 나도 원했다. 오죽했으면 퇴계 이황 선생이 운명하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저 매화 화분 물줘라”였겠는가.

p93 의자왕은 삼천궁녀와 향락에 빠졌던 왕이 아니라 재위 20년(641-660) 내내 신라를 공략한 전쟁의 제왕이었다.

p129 이 합장묘는 먼저 만든 북분은 돌무지덧널무덤이고 나중에 만든 남분은 돌방무덤이어서 신라의 묘제가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p133 각기 연구원들을 대동하고 10월 12일 경주에 도착하여 유물들을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겨 놓고 21일까지 열흘간 조사했다. 금관총에서는 금관, 금제 관식, 금제 허리띠, 금제팔찌, 금제반지, 금제귀걸이, 금동신발, 유리잔, 청동제초두 등 1만 여점의 유물을 확인했다.

p145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는 모두 세 자루로 판명됐고 두자루에서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확인되었다. 금관총 출토 금속편 중 칼집과 은제 허리띠에 이, 십, 팔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의 주인이 이사지왕인 것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p151 신라 고분의 의미와 함께 우리의 전시 디스플레이 수준이 이렇게 높아져 있음에 높은 문화적 자부심이 생기기도 했다.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내던 15년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전시를 보면서 울컥하는 감격이 일어나 어른답지 않게 절로 눈물이 나왔다.

p167 신라 고분의 출토품 중에 금관이 하이라이트로 여겨져 여타의 금속공예품들이 덜 조명받고 있지만 금관이 출토될 때는 금귀걸이, 금반지, 금허리띠, 금수식, 목걸이, 가슴걸이 등이 세트를 이룬다. 금령총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정교한 기교의 장신구들이 홀세트로 출토되었다

p176 출토 유물을 살펴보면 나무널 안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착장하고 있었던 금관과 관수식, 금제 태환식 귀걸이, 마노 대롱옥, 수정 다면옥, 각종 곡옥을 꿰어 만든 목걸이, 금,은,유리구슬을 꿰고 끝에 비취 곡옥을 단 가슴 장식, 금제과대(허리띠와 장식), 금은 팔찌와 유리 팔찌, 금반지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서봉총은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p186 한국전쟁 중에는 서울에 남아 박물관을 지켰는데, 서울을 점령한 북한이 유물을 북쪽으로 반출하려고 조선물질문화조서 보존위원회 완장을 찬 사람들이 유물 포장을 지시했다. 그러나 최영희, 최순우, 김원용 등 박물관 직원들이 포장 시간을 길게 끌며 지연시켰고, 결국 서울 수복 후 미군의 도움을 얻어 유물들을 부산으로 대피시켰다.

p223 껴묻거리를 넣어두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새날개모양 관모장식, 환두대도, 금그릇, 은그릇, 유리그릇, 칠기 등이 출토되었다. 딸린덧널 안에서는 도기 1,500점과 철기 300점, 금동안장 등 각종 마구가 출토되었다. 그중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금동말안장과 페르시아풍이 역력한 봉수형 유리병과 유리잔은 당시 신라의 교역 범위가 상상 이상으로 넓었음을 말해주어 발굴단을 놀라게 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남분 2만 2,700점, 북분 3만 5,648점으로 약 5만 8천 점이다.

p227 신라는 뛰어난 금속 세공 기술이 있었다. 금속판을 끌이나 톱으로 도려내고 음각으로 무늬를 새기는 투조 기법, 판판한 금속파네 일정한 무늬를 망치로 두드려 나타내는 타출 기법, 옥이나 칠보 같은 보석을 감싸는 감옥 기법, 그리고 고난도 기술이 누금 세공 기법까지 구사했다.

p264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현지 실사를 거쳐 등재 권고라는 의견을 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가야는 1세기 무렵부터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에서 번성한 작은 나라들의 연합체로, 여러 가야 고분군은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

p270 비화가야의 비화는 빛들 또는 빛이 좋은 들이라는 뜻으로 비사벌이라고도 부른다. 비스듬한 기울기를 갖고 있는 창녕 비사벌은 과연 빛이 좋은 들판이다.

p276 오구라컬렉션보존회는 기증의 말에서 이 수집품으로 고대사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고 말하면서 미안한 마음의 표시는 어디에도 하지 않았다. 오구라의 법적인 잘못을 따지는 것은 별도로 해두더라도, 학술적 입장에서 그가 크게 잘못한 것은 장물아비였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구입 경위와 출토 장소에 대해 끝내 입을 다물었다는 점이다.

p276 송현이는 쌀과 보리, 콩과 견과류 등 식물류를 주로 섭취했는데 영양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송현이 머리의 수직 길이는 19.3 센티미터로 8등신이며, 허리둘레는 21.5인치로 현대 만 16세 여성의 평균 허리둘레 26.2인치보다 5인치가량 가는 개미허리였다.

p287 동삼층석탑은 진흥왕 척경비와 함께 일찍이 국보로 지정된 창녕의 자랑이다. 또한 갈항상 동삼층석탑, 불구사 석가탑과 함께 고전미의 3요소인 비례, 균형, 조화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p305 요새 사람이 지으면 아마도 포클레인으로 반반히 평지를 만들어놓고 시작했을텐데 옛 분들은 주어진 지형을 그대로 끌어안으면서 배치했어요. 저 작은 건물들을 보세요. 층층이 높이를 달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비켜앉아 건축적 리듬감이 있죠. 관룡서는 평면보다 입면의 배치가 탁월한 절집입니다. 건축이란 기본적으로 땅에 대한 컨트롤에서 시작하는 것이지만 우리 전통 건축은 이처럼 컨트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어요

p307 관룡사는 절집에서 정상 쪽으로 500미터 위쪽에 있는 용선대라는 벼랑에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이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사찰이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전체 높이 3.18미터로 대좌와 불상으로 구성되는데, 불상은 근엄하고 좌대는 제법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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