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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박물관 순례 2 - 백제, 신라, 그리고 비화가야 ㅣ 국토박물관 순례 2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3년 11월
평점 :
제목 : 국토박물관 순례2
작가 : 유홍준
출판사 : 창비
읽은기간 : 2024/03/05 -2024/03/10
두번째 책.. 앞으로 계속 나올 시리즈가 기대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와 비슷한듯 하면서 좀 다른 느낌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지역을 돌면서 씌여진 책이라면 이 책은 지역을 돌기는 하지만 박물관을 끼고 이야기가 전개된다.
덕분에 몰랐던 박물관을 알게 되는 수확이 있다.
내가 지방에 여행을 가면 가능하면 들리는 곳이 성당, 동네책방인데 지역 박물관을 추가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백제와 가야에 대한 답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사실 둘 다 가본곳이 별로 없다.
백제에 대한 내용도 재미있고 가야, 특히 비화가야는 처음 들어본 곳이다.
창년이라는 곳이 이렇게 매력적인 곳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쓰면 이렇게 가보고 싶게 글을 쓸까? 부럽기만 하다.
창녕도 가봐야 하고 부여도 가봐야 해서 올해도 갈 곳이 참 많다..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겠다..
p17 부연 설명하기를 인물 : 탑 옆에서 (관람하며)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관람 포인트다. 이 탑은 무조건 탑을 바라보며 관람하는 인물과 함께 찍어야 사진이 제대로 나온다. 그래야 실물크기가 확실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p35 이에 창왕은 자신을 대신하여 백성 100명을 출가시켜 부처님을 받들게 하고 자신은 왕위를 이어갔다. 젊은 시절의 패기로 엄청난 실수를 했던 경험이 그를 크게 성장시켰던지 이후 창왕은 45년간의 치세 동안에 백제문화를 꽃피워 사실상 문화적 전성기를 이룩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가 능사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이다.
p58 위덕왕 재위기는 진실로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다. 지금 나성에서 떠올리는 유적과 유물 외에 백제의 미소로 칭봉받는 서산마애삼존불, 미스 백제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규암 출토 금동보살입상, 비록 국적과 시대가 명확치 않지만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이 6세기 후반 백제 미술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위덕왕 때 유물이다.
p70 사비성의 인구는 5만 명에서 기껏해야 10만 명 정도였으니 궁녀가 3천이 될 수가 없고 부소산 관북리 왕궁은 3천 명의 궁녀가 머물 공간도 없었다. 시인들은 단지 시어로 삼천을 읊었는데 대중이 그것을 곧이곧대로 새기면서 낙화암은 의자왕의 호화방탕한 삶의 상징처럼 회자되었던 것이다.
p80 키 큰 상수리나무에 기대 쉬면서 곁에 있는 학부모에게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대재각을 다시 찾아온 것이 한 6,7년 만인것 같은데 그사이 근력이 쇠해진 것 아닌가 싶네요”라고 슬픈 듯이 말했더니 곧바로 받아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만만치 않은 산길이네요. 교수님 따라가는 우리가 더 힘드네요”라고 하여 금방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나도 남과 이야기할 때는 이 학부모처럼 상대방이 듣기 좋은 얘기를 먼저 해야겠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p85 매화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거의 광적으로 좋아한 식물이라 좋은 매화나무 갖기를 너도 나도 원했다. 오죽했으면 퇴계 이황 선생이 운명하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저 매화 화분 물줘라”였겠는가.
p93 의자왕은 삼천궁녀와 향락에 빠졌던 왕이 아니라 재위 20년(641-660) 내내 신라를 공략한 전쟁의 제왕이었다.
p129 이 합장묘는 먼저 만든 북분은 돌무지덧널무덤이고 나중에 만든 남분은 돌방무덤이어서 신라의 묘제가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p133 각기 연구원들을 대동하고 10월 12일 경주에 도착하여 유물들을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겨 놓고 21일까지 열흘간 조사했다. 금관총에서는 금관, 금제 관식, 금제 허리띠, 금제팔찌, 금제반지, 금제귀걸이, 금동신발, 유리잔, 청동제초두 등 1만 여점의 유물을 확인했다.
p145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는 모두 세 자루로 판명됐고 두자루에서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확인되었다. 금관총 출토 금속편 중 칼집과 은제 허리띠에 이, 십, 팔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무덤의 주인이 이사지왕인 것만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p151 신라 고분의 의미와 함께 우리의 전시 디스플레이 수준이 이렇게 높아져 있음에 높은 문화적 자부심이 생기기도 했다.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내던 15년 전에는 꿈도 못 꾸던 전시를 보면서 울컥하는 감격이 일어나 어른답지 않게 절로 눈물이 나왔다.
p167 신라 고분의 출토품 중에 금관이 하이라이트로 여겨져 여타의 금속공예품들이 덜 조명받고 있지만 금관이 출토될 때는 금귀걸이, 금반지, 금허리띠, 금수식, 목걸이, 가슴걸이 등이 세트를 이룬다. 금령총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정교한 기교의 장신구들이 홀세트로 출토되었다
p176 출토 유물을 살펴보면 나무널 안에서는 동쪽으로 머리를 둔 피장자가 착장하고 있었던 금관과 관수식, 금제 태환식 귀걸이, 마노 대롱옥, 수정 다면옥, 각종 곡옥을 꿰어 만든 목걸이, 금,은,유리구슬을 꿰고 끝에 비취 곡옥을 단 가슴 장식, 금제과대(허리띠와 장식), 금은 팔찌와 유리 팔찌, 금반지 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로 미루어 서봉총은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p186 한국전쟁 중에는 서울에 남아 박물관을 지켰는데, 서울을 점령한 북한이 유물을 북쪽으로 반출하려고 조선물질문화조서 보존위원회 완장을 찬 사람들이 유물 포장을 지시했다. 그러나 최영희, 최순우, 김원용 등 박물관 직원들이 포장 시간을 길게 끌며 지연시켰고, 결국 서울 수복 후 미군의 도움을 얻어 유물들을 부산으로 대피시켰다.
p223 껴묻거리를 넣어두는 별도의 공간이 마련되어 새날개모양 관모장식, 환두대도, 금그릇, 은그릇, 유리그릇, 칠기 등이 출토되었다. 딸린덧널 안에서는 도기 1,500점과 철기 300점, 금동안장 등 각종 마구가 출토되었다. 그중 비단벌레 날개로 장식된 금동말안장과 페르시아풍이 역력한 봉수형 유리병과 유리잔은 당시 신라의 교역 범위가 상상 이상으로 넓었음을 말해주어 발굴단을 놀라게 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의 숫자는 공식적으로 남분 2만 2,700점, 북분 3만 5,648점으로 약 5만 8천 점이다.
p227 신라는 뛰어난 금속 세공 기술이 있었다. 금속판을 끌이나 톱으로 도려내고 음각으로 무늬를 새기는 투조 기법, 판판한 금속파네 일정한 무늬를 망치로 두드려 나타내는 타출 기법, 옥이나 칠보 같은 보석을 감싸는 감옥 기법, 그리고 고난도 기술이 누금 세공 기법까지 구사했다.
p264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현지 실사를 거쳐 등재 권고라는 의견을 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가야는 1세기 무렵부터 562년까지 한반도 남부에서 번성한 작은 나라들의 연합체로, 여러 가야 고분군은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
p270 비화가야의 비화는 빛들 또는 빛이 좋은 들이라는 뜻으로 비사벌이라고도 부른다. 비스듬한 기울기를 갖고 있는 창녕 비사벌은 과연 빛이 좋은 들판이다.
p276 오구라컬렉션보존회는 기증의 말에서 이 수집품으로 고대사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고 말하면서 미안한 마음의 표시는 어디에도 하지 않았다. 오구라의 법적인 잘못을 따지는 것은 별도로 해두더라도, 학술적 입장에서 그가 크게 잘못한 것은 장물아비였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구입 경위와 출토 장소에 대해 끝내 입을 다물었다는 점이다.
p276 송현이는 쌀과 보리, 콩과 견과류 등 식물류를 주로 섭취했는데 영양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송현이 머리의 수직 길이는 19.3 센티미터로 8등신이며, 허리둘레는 21.5인치로 현대 만 16세 여성의 평균 허리둘레 26.2인치보다 5인치가량 가는 개미허리였다.
p287 동삼층석탑은 진흥왕 척경비와 함께 일찍이 국보로 지정된 창녕의 자랑이다. 또한 갈항상 동삼층석탑, 불구사 석가탑과 함께 고전미의 3요소인 비례, 균형, 조화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삼층석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p305 요새 사람이 지으면 아마도 포클레인으로 반반히 평지를 만들어놓고 시작했을텐데 옛 분들은 주어진 지형을 그대로 끌어안으면서 배치했어요. 저 작은 건물들을 보세요. 층층이 높이를 달리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비켜앉아 건축적 리듬감이 있죠. 관룡서는 평면보다 입면의 배치가 탁월한 절집입니다. 건축이란 기본적으로 땅에 대한 컨트롤에서 시작하는 것이지만 우리 전통 건축은 이처럼 컨트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어요
p307 관룡사는 절집에서 정상 쪽으로 500미터 위쪽에 있는 용선대라는 벼랑에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이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인 사찰이다.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은 전체 높이 3.18미터로 대좌와 불상으로 구성되는데, 불상은 근엄하고 좌대는 제법 화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