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컷 세계사 - 사진으로 시대를 읽는다 온 세상이 교과서 시리즈 8
이성호 외 지음 / 해냄에듀(단행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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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컷 세계사

 : 이성호

 : 해냄에듀

읽은기간 : 2023/02/14 -2023/02/23


이런 특색있는 책이 좋다.

세계사를 사진으로 설명하다니... 

이미지가 주는 강렬함과 간결하게 그 시대를 설명하는 이야기라는 컨셉은 초보자나 청소년들에게 많이 도움이 될 것 같다.

한 컷 한국사보다 한 컷 세계사를 먼저 읽었는데 한 컷 한국사도 재미있을 것 같다. 

시간날 때 한 번 씩 넘겨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확실히 시대가 변해서인지 그림 또는 사진이 들어가야 책이 풍성해지는 것 같다. 


p15 현생 인류는 단 하나의 종 호모 사피엔스만 존재한다. 진화 과정에서 수많은 인류가 멸종하고 하나의 종만 살아남은 것이다. 이는 앞으로의 생존과 진화에서 매우 불리하다.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 진화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전략이기 때문이다. 별종들을 차별하지 않고 소중히 보듬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p23 길가메시는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달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돌판에 새기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은 두렵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니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일하고 사랑하는 것이 행복을 누리는 비결임을 신화는 말하고 있다.

p25 문제는 범람기(8-11월)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피라미드 공사는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고, 일거리가 없는 농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피라미드 공사는 가혹한 노동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괜찮은 돈벌이기도 하였다

p27 예전에는 아리아인의 침입으로 모헨조다로가 멸망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환경 파괴에 주목하고 있다. 인구가 늘면서 집을 짓고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벽돌을 구워야 했는데, 땔감을 얻기 위해 인근 숲을 망가뜨리다 보니 홍수나 가뭄에 취약해졌다. 또한 계속되는 하천 제방 공사로 인더스강의 바닥이 올라와 결국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무분별한 확장과 개발이 결국 모헨조다로를 죽은 자의 언덕으로 만든 셈이다.

p39 완적과 유령은 모두 위진 남북조 시대 죽립칠현에 속한 인물들이다. 대나무 숲에 숨어 상식에서 벗어난 기행을 일삼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예술에 귀의하는 삶을 살았던 7명의 현인, 이들을 죽립칠현이라고 부른다.

p41 대운하의 끝자락에 해당하는 베이징은 초원길로, 장안은 비단길로, 항저우는 바닷길로 다시 연결되어, 중국이 동아시아 교역 네트워크의 중심지가 되도록 도왔다. 대운하는 중국의 정치, 경제, 군사, 교역의 중심지를 연결하는 대동맥으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p45 돌궐 장수 톤유쿠크는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기 살아남을 것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이처럼 유목 민족에게 이동 생활은 그들의 정체성과도 같았다.

p69 서양의 사정을 알아볼 정보원이 필요하였던 에도 바쿠후는 나가사키 항구에 인공섬을 건설한 후, 네델란드 상관을 지어 이곳에서만 제한적으로 교역하게 하였다. 이 인공섬이 바로 데지마이다.

p85 아바스 왕조는 탈라스 전투에서 이겨 당의 서진을 저지하고 동서 교역의 중계자 위치를 지켜냈지만, 우마이야 왕조처럼 이슬람 세계 전체를 하나로 다스리지는 못하였다. 우마이야 왕조의 후손이 이베리아반도에서 왕조를 재건하여 자신이 진짜 킬리프라고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p87 넓어진 이슬람 제국 곳곳의 무슬림들이 메카로 오기 위해서는 지도가 필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막이나 초원 지대에서 방향과 시간을 알려면 하늘의 별을 봐야 했다. 이에 따라 지리학과 천문학이 자연스레 발달하였다.

p89 이들은 막강한 전투력으로 망치라는 별명을 얻었던 프랑크 왕국의 카룰로스 마르텔에게 크게 패하였다. 카롤루스 마르테른 이슬람 군대를 저지한 공으로 크리스트교 세계의 구원자가 되었고, 그 명성은 아들 피핀 3세, 손자 카롤루스 대제에게까지 이어졌다.

p105 힌두교에서는 수많은 신을 섬기지만, 그중 창조의 신 브라흐마, 유지의 신 비슈누, 파괴의 신 시바를 가장 중시한다. 특히 비슈누는 세상의 질서가 무너질 때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 세상을 유지하는데, 힌두교는 석가모니도 비슈누의 여러 모습 중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p109 무굴 제국의 포용성은 아버지 샤자한을 쫓아내고 황제가 된 아우랑제브 때 사라졌다. 그는 정복전쟁으로 무굴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지만, 인두세를 부활하고 개종을 강요하였다. 이런 억압 정책은 그의 사후 무굴 제국이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다.

p123 로마인들은 길은 직선이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산에 터널을 뚫기도 하고, 골짜기에 높은 다리를 놓기도 하였다. 도로 양옆으로 배수로를 만들고, 일정한 간격으로 과실수를 심어 그늘과 비상식량까지 마련하였다. 로마인이 만든 도로의 길이는 3세기말까지 약 80,000km에 이르렀다.

p127 황후의 확고한 태도에 정신을 차린 유스티니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되찾았던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은 그의 죽음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탈리아는 다시 이민족의 손에 넘어갔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영토를 빼앗았다.

p129 800년 12월 25일,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성탄절 미사에서 교황 레오 3세는 카롤루스의 머리 위에 서로마 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오래전 사라진 서로마 황제가 다시 탄생한 순간이었다.

p139 위기에서 벗어나자 샤를 7세는 생각을 바꾸었다. 잔 다르크가 수도 파리를 되찾기 위해 전투에 나섰을 때, 샤를 7세는 오히려 공격을 중단시키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아무런 도움 없이 전투에 나선 잔 다르크는 포로로 잡혀 영국에 넘겨졌지만, 샤를 7세는 잔 다르크를 구하지 않았다.

p149 위그노가 왕이 될 수는 없다며 카톨릭 측이 강하게 반발하였지만, 앙리가 카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발표하자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결국 나바르의 앙리는 앙리 4세로 즉위하였다. 앙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해 위그노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p155 이 선언의 배경에는 1791년 국민 의회가 새롭게 만든 헌법이 있었다. 새 헌법은 여성의 권리를 매우 제한하였다. 특히 가난한 여성의 정치적 권리는 남성 시민과 비교할 수 없이 낮았다. 이러한 불평등에 반발하여 올랭프 드 구주가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p165 산업 혁명 이후 등장한 노동자 계급은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고 나섰고, 1838년에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라는 차티스트 운동을 전개하였다.

p169 미국 국립 공원은 눈물의 길이라는 역사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9개 주에 걸쳐 뻗어 있는 이 길은 고향을 강제로 떠나야 했던 체로키 원주민을 기억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p183 이토록 정의롭지 못하며, 수치스러운 전쟁으 ㄴ일찍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도 나왔지만, 이후 표결에서 아홉 표 차로 에산안이 통과되었고, 영국은 전쟁을 개시하였다.

p189 의화단은 외세 없는 세상을 꿈꿨지만, 도리어 열강의 중국 간섭을 더욱더 심화시켰다. 청 정부 역시 의화단을 통해 서양에 대항하려 하였지만, 열강에게 여러 이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의화단 사건은 10년 후에 일어날 신해혁명을 부채질한 건 아니었을까?

p197 일본에서 근대 일본의 사상적 선구자로 칭송받는 요시다 쇼인은 “일본이 열강에 잃은 것을 마회하려면 훗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차지하고 조선과 만주를 침략해야 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지인에게 보냈다.

p203 인도 북부에 있는 잔시 지역의 영왕 락쉬미바이가 이끄는 저항군의 반영 항쟁은 인도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전국 전신망과 앞선 무기를 갖춘 영국군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세포이 항쟁은 2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인종과 종교의 차이를 넘어 여러 계층이 힘을 합해 외세의 지배에 맞선 경험은 이후 인도의 민족 운동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p229 애국심으로 가득한 남성들은 꽃장식을 한 열차에 올라타 줄줄이 전선으로 떠났고, 공장에는 여성들이 투입되어 밤낮으로 무기를 생산하였다. 전례 없이 거대해진 전쟁의 규모와 강도를 지탱하기 위해 국가의 모든 힘을 동원하는 총력전이 펼쳐진 것이다.

p239 평생을 바쳐 장애인, 여성, 노동자 등 소외된 사람을 위해 목소리를 내던 헬렌 켈러는 자국 내의 불평등과 착취 구조에 무관심해 온 미국 정부가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 수호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전쟁에 가담하려는 진짜 이유를 꿰뚫고 있었다.

p247 1919년 2월 19일, 프랑스 파리의 외곽에 있는 베르샤유 궁전에서 제1차 세계 대전의 뒤처리를 위한 승전국들의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파리의 다른 한편에서는 15개국 57명의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듀 보이스를 의장으로 하는 제1회 범아프리카 의회가 열렸다.

p255 난센은 “난민을 감당할 수 없는 부담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값진 자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국제 사회를 끊임없이 설득하였다.

p263 나치당원이었던 란트페서는 이 당시 어떻게 전체주의의 최면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독일 전체주의에서 극도로 혐오하고 탄압하던 유대인이기 때문이었다.

p265 더 큰 인정을 받고픈 욕망은 어린이들을 독재자의 눈과 귀로 만들었고, 유대인을 숨겨준 자신의 친부모까지 고발하게 하였다. 어른이 되어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었던 어린이들이 역설적이게도, 전체주의 체제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만 것이다 .

p267 조선의용대와 타이완 의용대는 활동 지역이 달랐지만, 서로 긴밀하게 교류하는 돈독한 사이였다. 1939년 10월 10일 조선 의용대 창립 1주년 기념식장에 타이완 의용대가 보낸 축하 현수막이 걸렸고, 1940년 3월 1일 조선 의용대의 기념행사에는 리요우팡이 참석하였다. 조선 의용대는 타이완 의용대에게, 3.1 소년단은 타이완 소년단에게 각각 비단으로 만든 깃발 한 폭을 선물하기도 하였다.

p269 저자 프란시스 골튼은 바람직한 혈동이 덜 바람직한 혈통보다 더욱 신속하게 퍼져나갈 수 있도록 도모하는 과학이라는 용어로 우생학을 규정하였다. 골튼은 19세기 말 영국에서 탄생한 이 사이비 과학이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 학살로 이어질 거라 생각하였을까?

p283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이 실요주의 정책으로 인기를 얻자, 마오쩌둥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이 사회주의가 아닌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말을 듣고 격앙된 젊은이들은 거리로 뛰쳐나왔고, 이때부터 10년간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광풍의 정치 운동이 전개되었다.

p287 1964년 통킹만에서 미국 전함이 북베트남의 공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미국의 군사 개입이 본격화되었다. 미국은 이 전쟁에 50여만 명을 파병하였고, 무기와 물자에서 북베트남을 압도하였다. 한국도 미국을 도와 32만 명을 파병하였다.

p289 68운동은 젊은이들이 기성 권위에 저항하며 공동체 정신을 강조한 운동이었다. 그동안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 흑인, 제3 세계 민중이 점차 전면에 드러났고, 이들에 대한 존중과 지지가 68 운동의 기본 정신이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베트남 전쟁과 인종 차별, 성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라는 구호에서 드러나듯이 부모 세대가 하지 말라고 한 것들에 대한 저항도 활발하였다.

p291 1963년 8월 28일, 20만 명이 넘는 흑인들이 인종 차별 철폐를 외치며 워싱턴까지 행진하였다. 이날 마틴 루서 킹 목사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내 아이들 네 명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이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1968년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암살당하였다.

p295 회의 마지막 날 참석자들은 지구는 하나라는 제목으로 인간 환경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이후 제1차 유엔 인간 환경회의가 열린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로 지정되었다.

p299 사고가 일어날 지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원자력 발전소 30km 이내는 허가 없이 출입할 수 없고, 수십만 명의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p299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악렉시예비치는 체르노빌의 목소리에서 “체르노빌에서는 모든 것 후의 삶이 더 기억에 남는다. 사람없는 물건, 사람 없는 풍경… 목적지 없는 길, 목적지 없는 전선… 또 생각해보면 이것은 과거일까, 미래일까?”라는 독백 인터뷰를 하였다.

p307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는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여러 가지 규제를 없애는 것을 지향하였다. 또한 사회 복지 예산을 줄이고, 수도, 전기, 가스 등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 기관들을 민영화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상품과 서비스, 자본, 노동 등이 국경을 넘어서 자유롭게 이동하였다.

p313 매주 금요일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남녀노소가 미래를 위한 금요일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 운동은 스웨덴 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2018년 8월 매주 금요일에 의회 앞에서 기후를 위한 등교 거부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이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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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 그림의 침묵을 깨우는 인문학자의 미술독법, 개정증보판 미술관에 간 지식인
안현배 지음 / 어바웃어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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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관에 간 인문학자

 : 안현배

 : 어바운어북

읽은기간 : 2023/02/05 -2023/02/10


특별한 책은 아니다. 

미술관의 작품들에 대한 설명이다. 아는 작품이 많이 나온다. 

그래서 쉽고 재미있다. 

초보자인 나의 눈높이에 맞는다. 

이런 책들을 들고 다니면서 작품을 보면 감상이 훨씬 풍부해질 것 같다.

책은 새로운 걸 알려주거나, 재미있으면 된다.. 


p25 이탈리아가 나폴레옹에게 정복됐을 때,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프랑스정부를 위해서 조각을 해야 했던 카노바는, 그의 재능에 감탄해서 파리로 옮겨오라는 나폴레옹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카노바는 “나를 가르친 모든 것은 이탈리아에 있다”며, 죽을때까지 고국 이탈리아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p37 예술적 재능이 차고 넘칠 만큼 풍요로웠던 비제-르 브룅이 음지에서 더 이상 불행을 겪지 않도록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녀의 뒤에서 평화롭고 안정적인 곳으로 이끌어주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p102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피렌체와 양대 산맥을 이뤘던 곳이 바로 베네치아입니다. 이 두 도시는 마치 라이벌 같은 경쟁 관계에 있었어요. 피렌체가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3대 천재 예술가를 배출했다면, 티치아노, 틴토레토, 그리고 베로네제가 베네치아 출신이었습니다.

p122 들라크루아는 역사가와 증인들이 전한 사실을 충실하게 묘사하려 애썼다. 오스만 튀르크 병사에 의해 납치되는 젊은 여인과 이미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아기의 모습, 그 밖에도 망연자실한 인물들은 당시 유럽 언론에 전해져 사람들에게 회자되던 키오스 섬 참상의 일부분이다.

p127 제리코는 세상의 불의에 맞서 화가가 해야 할 일은 역시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메두사 호의 뗏목은 화가 제리코가, 비열한 정부에 보낸 경고의 그림입니다.

p130 세익스피어는 그의 희곡 리처도 3세에서 영국 왕실의 역사 중 가장 참혹한 에피소드 가운데 한 장면을 사람들에게 환기시켰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은 뒤 그의 두 아들이 런던탑에 갇혀 있다가 삼촌인 라처드 3세의 명령으로 목이 졸려 살해당하는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p168 하드리아누스의 흉상은 로마풍의 조각에서 조금 벗어나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를 닮고 싶은 하드리아누스 본인의 욕망이 작품에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p181 고대 로마제국 시대 이후 수백 년이 흘러 또 다른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강타하던 19세기경, 유럽인들은 식민지 문화재의 도굴과 약탈을 일삼았는데, 그때 유럽 여인도 처음 발굴됩니다.

p184 1830년 7월 2일 당시 프랑스의 왕 샤를 10세는 출판과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시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명령을 발표한다.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혼란을 막겠다고 내린 이 결정은,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계속되는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p200 신화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장치를 장식화하는 데 능했던 루벤스에게 이런 장면을 꾸미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림 속에 천사를 등장시켜 여왕의 대관식을 더욱 화려하게 묘사합니다.

p204 이 그림의 제목 오달리스크는 정확한 고증 없이 그저 자기들이 사는 곳보다 동쪽이면 오린엔탈하다는 형용사를 붙이던 당시, 아랍 세계의 문화는 상당히 관능적이고, 더 나아가 퇴폐적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하던 사회 분위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p233 아마도 에바 프리마 판도라는 프랑스 미술에서 최초의 누드화로 추정된다. 길게 누운 육체에서 우리는 차갑고 창백한 피부색을 마주하게 된다. 성경의 이브를 그리면서 동시에 판도라라는 장치를 넣은 것은, 그림 속 여인이 세상의 모든 악을 상징한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p271 보티첼리의 미인을 그려내는 솜씨는 이미 비너스의 탄생에서 입증되었습니다. 바르디니가 빌라 레미의 벽에서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보티첼리의 작품임을 확신했던 건 바로 이 여신들 때문 아니었을까요?

p295 들라크루아와 쇼팽은 미술과 음악에서 낭만주의 정신을 게승한 대표적인 에술가로 꼽힙니다. 낭만주의는 말 그대로 인간의 감성과 무한한 상상력을 강조하는 문예사조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문화를 지배합니다.

p300 아르침볼도의 봄에는 기괴하면서도 시대를 초월하는 뭔가가 있다. 20세기에 이르러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이 그림에 보낸 오마주가 이를 방증한다.

p307 바로크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에게서 드러나는 격렬한 명암 대비와 빛을 사용한 무대장치 같은 화면연출은, 시몽 부에를 포함해 동시대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프랑스 화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기법이었습니다.

p314 야사에 따르면, 이 그림에서 성모 마리아의 모델은 그 당시 라파엘로가 짝사랑하던 아름다운 정원사 아가씨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 그림이 종종 아름다운 정원사라고 불리는 것이다

p328 루브르의 네델란드관 한쪽 벽에 걸린 이 그림은 말 그대로 파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상화 위주로 전시된 이 방에 느닷없이 도살된 소를 그린 그림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네델란드 대표화가 렘브란트 작품입니다.

p334 플랑드르 화가들의 그림을 살펴보면, 흥미롭게도 이 지역의 산업적 특성이 배어있습니다. 이를테면, 이곳에서 발달한 정밀한 세공업과 직조업처럼 그림도 매우 섬세하고 정확합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마치 실을 짜고 장식을 하듯 화면에 작은 여백까지도 놔두지 않고 채워넣었습니다.

p361 루브르의 설명대로 그림 속 카스틸리오네의 표정과 눈빛, 얼굴의 각도 등에서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겹쳐지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라파엘로는 모나리자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꼼꼼히 살펴 자신의 작품에 벤치마킹했습니다.

p380 왕족이나 귀족의 초상화에는 옷차림이나 소품에서 허세가 담기기 마련입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초상화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 당시 화려했던 로코코 미술은 그런 풍조를 반영합니다. 모리스는 가진 자들의 허세를 그리는 게 싫었던 모양입니다.

p412 프랑스 고전파와 낭만파 화가들이 그린 대형 회화 작품들은 루브르가 자랑하는 컬렉션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목록으로 꼽힙니다. 다비드, 앵그르, 들라크루아, 제리코 등의 작품이 루브르의 넓고 화려한 방을 차지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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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 -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2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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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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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기간 : 2022/12/21 -2023/01/11


믿고보는 역사 선생님 임용한님의 책

중동전쟁은 말만 들었지 사실 잘 모른다. 6일전쟁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제대로 내용을 알지는 못한다.

중동전쟁때 미국에 유학간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아랍사람들은 도망가기 바빴다는 이야기로 애국심을 강조하던 이야기도 있었고, 미국의 첨단무기지원으로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이스라엘이 쉽게 아랍의 손목을 비틀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중동전쟁이라는 게 우연, 실수, 무기, 미국과 소련의 외교, 아랍의 분열 등 정말 여러가지 요인들이 뒤섞여있던 전쟁이라는 걸 알게 됐다.

4차전쟁이야기까지 나오는데 각 전쟁들이 단순하지 않다보니 실타래같이 엮여있어 한 번 읽어서는 잘 모르겠다. 몇 번 읽고 그림을 그려봐야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번 읽은 느낌으로는 아랍의 분열과 무능력이 정말 대단했구나라는 것.

그리고 무능한 지도자들의 김칫국 마시기가 국민들, 그리고 군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것.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 않다. 지금 우리나라도 전시작전권도 없으면서 연일 선제타격하겠다거나, 핵무장을 하겠다는 미친 지도자가 대통령이니까...


p13 운동권은 어떤 말을 해도 신념을 꺾지 않는다. 타인은 공평과 정의의 이름으로 공격하고, 자신의 행동은 궤변과 상황 논리로 옹호한다. 강자의 오인 사격은 학살이고, 자신들의 테러는 정의다

p21 유대인은 자신들만의 지하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군수품 조달, 밀수, 비밀 조직, 정보기관의 전문가가 되었다. 고급 정보를 계속 조달해야 했기에 뉴욕타임스, 로이터 통신 등 언론사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p47 첫 번째 전투는 도시 쟁탈전이었다. 그래서 이를 도시 전쟁이라고 한다. 격전이 벌어진 도시는 아크레, 하이파, 야파, 티베리아스 같은 지중해 항구도시와 예루살렘이었다. 이곳들은 십자군시대에도 요충지였던 도시들이다

p73 라빈에겐 또 하나의 고민이 있었다. 바로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무자비한 명령이다. 지금까지 유대인은 피해자였지만, 이제부터는 가해자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 정치가들은 군인들에게 악마가 되라고 강요할 것이다. 사실 1947년부터 그랬다

p126 이상주의자의 타협안은 이상주의의 길을 걸었다. 모두가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 전쟁 자체가 아랍과 이스라엘 모두가 공존하는 세상에 몸서리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베르나도트의 제안은 하나하나가 자국 영토에 뇌관을 심는 행위였다

p132 1970년대 팔레스타인 난민이 레바논으로 대거 밀려들면서 종파 간 균형이 파괴되었고,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레바논 내전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p136 이스라엘군은 베르셰바로 진격하면서 주변의 아랍 촌락들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주민들을 몰아냈다. 진격과 파괴를 동시에 수행하는 달레작전은 모든 전선에서 한결같이 끈질기게 수행되었다. 팔레스타인 주민 추방과 거주지 파괴는 전쟁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었다. 주민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 승리가 필요했다

p141 제1차 중동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팔레스타인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이었다. 팔레스타인 난민은 이때 생겨난 것으로 무려 65만여 명이었다. 자신들이 전쟁을 일으킨 것도, 전쟁을 원한 것도, 전쟁을 주도한 것도 아닌데 아랍의 공격으로 인해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p159 중동전쟁사를 살펴보면 어떤 상황에서건 이스라엘은 사전에 예측하고 이미 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 예측이 항상 옳지는 않았다. 대응 방법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더 많다. 그러나 옳든 그르든 이스라엘은 결정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 아주 짧았다

p183 아랍연합공화국이 탄생하자 미국과 소련의 태도가 즉시 바뀌었다

p189 중동전쟁이 주는 교훈은 미국이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알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p215 첫 번째 공격에서 이집트군은 전체 공군력의 절반을 잃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스라엘 공군은 피나는 훈련을 거쳐, 귀환한 항공기를 재정비하고 다시 이륙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을 8분으로 줄였다. 반면 이집트군은 8시간이었다.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10분간 휴식하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p216 변하지 않는 전쟁사의 철칙이 있다. 대단한 승리는 적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p239 이스라엘의 신화는 과장되었다. 이집트의 실수가 없었다면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원래 전격전 최고의 경지는(손자병법에도 나와 있다) 적을 흔들고 당황하게 만들어 적이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만드느 것이다

p266 장갑차가 대전차포에 맞아서 격파되면 남은 병사들이 다시 돌을 치우며 진격했다. 죽으러 올라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최정예부대로 알려진 그 유명한 골라니 여단의 신화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p272 이스라엘이 이때 공격하지 않았다고 해서 시리아가 가만히 있었을까? 언젠가는 양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시리아와 이스라엘 중 오직 한 나라만이 골란고원을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점이 바로 국제정치의 딜레마이고 외교의 어려움이다

p280 군인의 목적은 승리지만, 정치가의 목적은 평화다. 이스라엘 군인의 전술은 선제공격도 불사하는 빠르고 가차 없는 전술로 상대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는 공존을 요구한다. 공존은 분리된 두 세계를 인정하고 양보해야만 얻을 수 있다

p300 이렇게 전군에 퍼져있는 두터운 자신감으로 인해 전쟁 대비는 과학 것보다 부족함을 걱정하라라는 진리를 망각하고 있었다

p309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리더의 중대한 책임이자 능력이기에 제이드가 책임을 벗어날 핑계는 되지 않는다. 리더가 정치적 욕심이 생기면 중간 관리자들은 인정사정없이 변한다

p337 모든 상황을 복기해보면, 시리아군은 준비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다. 세계에서 훈련이 가장 잘된 군대를 상대하면서 물량으로만 밀어붙였다. 여기사 말한 물량에는 인명도 포함된다

p378 이스라엘과 아랍은 똑같이 초보적인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제대로 군생활을 경험한 전문 군인은 오히려 이집트나 시리아에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차 중동전이 벌어질 때까지도 가장 준비가 잘되었다는 이집트군마저도 이런 대비가 부족했다. 오늘날 미군이 강한 이유는 그들이 실전을 가장 많이 경험해서가 아니라, 그 실전 경험을 제대로 소화하고 반영하는 시스템이 가장 잘 되어 있기 때문이다.

p384 아랍이 다시 단결하고 양면 전쟁과 소모전을 되풀이한다면, 이스라엘은 견딜 수 없다. 사실 이스라엘이 제일 무서워한 것은 소모전쟁이었다. 이스라엘 국민도 전쟁에 승했다고 무조건 관대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경제력은 소모전을 버텨낼 수 없으며, 승리를 해도 후유증이 너무 컸다

p391 골란고원의 중심지이자 격전이 벌어졌던 쿠네이트라는 고대 도시의 유허처럼 완전히 페허가 되었다. 도로의 형태는 완연한데, 건물과 회당은 폭풍에 쓸려간 듯이 밑동만 남아 있다. 전차의 잔해도 그대로 방치돼 있어 꼭 시간마저 떠나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p392 필자는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에 조금이라도 다가서는 데는 선의의 이해가 아니라 현장의 이해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한 줄의 지식, 교훈, 이념은 인간은 더 잔인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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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한국사 1 - 전근대편 시민의 한국사 1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돌베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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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의 한국사1

 : 한국역사연구회

 : 돌배게

 : 2022/11/08 - 2022/12/18


오랜만에 제대로 된 한국사 통사를 읽었다.

내용도 꼼꼼하고 최근 발견된 내용들도 많이 업데이트됐다.

새롭게 추가된 내용들을 생각하면서 읽으려니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시험용 서적이 아니다보니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배경도 같이 설명해준다.

한번 읽어서 이해될 수는 없을 것 같고 앞으로 4-5회정도 더 읽어서 머릿속에 정리해야할 것 같다.

2권도 기대된다. 


p34 후기 구석기시대에 들어서면서 여러 쓰임새에 맞춰 찍개, 주먹도끼, 긁개, 자르개 등으로 다양한 석기를 만들어 썼다. 돌날의 아랫부분을 손질한 슴베도 만들었다. 이것을 나무자루에 꿰어 창이나 작살로 쓰거나, 더 작게 만들어서 화살촉으로 사용했다. 슴베찌르개는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일본 열도로 전해졌다

p39 한반도와 그 주변의 신석기문화는 대략 기원전 8,000년 전부터 시작됐다

p42 신석기인은 이전처럼 막집도 지었지만, 조금 발전된 움집을 짓고 사는 경우가 많았다

p53 청동기가 보급된 이후에도 농기구는 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었는데, 반달돌칼, 돌보습, 나무 쟁기 등이 대표적이다

p56 최근에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민무늬토기의 등장 시점을 근거 삼아 기원전 15세기로 보기도 한다. 다만 만주와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비파형동검이나 청동거울은 기원전 12세기 무렵에 등장했고, 한반도 지역에 청동기 문화가 널리 보급된 것은 기원전 10세기 무렵이다.

p95 문헌과 금석문에 보이는 동부여라는 나라가 부여와 별개로 존재했는지, 위치가 어디였는지 등은 명확히 알 수 없다

p105 동해안의 옥저와 도예는 예족이라는 동일한 종족이다

p107 집단끼리 서로 침범할 경우 노비나 소,말로 배상하도록 했는데 이를 책화라고 했다. 특별히 음력 10월에는 무천이라는 제천행사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p115 전연의 모용황은 용성을 도읍으로 삼고 중원 진출을 도모했는데, 342년 중원 공략에 앞서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는 모용황의 전략을 간파하지 못해 도성인 국내성이 함락됐다. 전연군은 고국원왕의 부왕인 미천왕릉을 파헤쳐 시신을 탈취하고, 왕모와 왕비 등 주민 5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철군했다

p117 고국원왕은 미천왕대에 점령한 낙랑군과 대방군 지역을 본격적으로 경영하며 남진정책을 추진할 기반을 다졌는데, 이때 중국계 망명인을 활용했다. 이는 안악 3호분2의 무덤주인인 동수가 중국계 망명인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p123 백제국은 대외적으로 목지국을 압도하며 점차 마한의 중심 국가로 올라섰다

p133 마립간 시기부터 경주에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널에 시신을 넣고 그 위에 껴묻거리를 넣은 덧널을 덧세운 다음, 그 주위에 돌을 쌓고 흙을 덮어 봉분을 만든 것이다

p181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륜의 아들 진평왕이 즉위했다. 진평왕은 신라사에서 유례없이 긴 재위 기간을 누리면서 정치적 안정과 함께 제도정비를 이뤘다

p215 고구려는 372년에 태학을 두었다. 여기서 박사들이 학생들에게 유학 경전 등을 강의했는데,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는다. 이와 별도로 경당이 있었는데, 여기서 청년들이 활쏘기를 익히고 중국 고전을 공부했다

p221 이른 시기 금석문은 한자를 우리말 어순으로 작성한 것이 많다. 그러나 6세기 중엽 이후의 비문들에는 순한문투의 문장이 일반화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신라사회에서 한자와 한문에 대한 이해가 심호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p253 수의 고구려 원정이 임박함에 따라 각국의 외교적 대응이 더욱 활발해졌던 것이다

p257 당시 고구려는 왕권이 매우 약화된 귀족연립체체상태였다. 백제도 무왕대에 왕권이 많이 강화됐지만, 여전히 대성8족 등 귀족 세력의 권한이 막강했다. 신라도 선덕여왕의 측근세력과 반대파 진골 귀족의 대립이 깊어지고 있었다

p265 백제도 당과 관계를 소홀히 하면서 신라를 계속 공격하던 중에 나당 연합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삼국 사이의 갈등과 충돌을 넘어서 동북아시아 전체를 뒤흔드는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p271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663년 6월 부여풍이 복신을 제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군사 지휘를 총괄하던 복신의 죽음으로 부흥군은 크게 동요했다

p275 이 무렵인 670년 4월 티벳 고원의 토번이 당을 공격해 도성 일대를 위협했다

p279 신라의 당군 축출은 당의 동방정책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돌권의 부흥과 발해 건국으로 이어지는 국제 정세 변동의 단초를 열었던 것이다.

p283 즉위한 지 한 달을 갓 넘긴 681년 8월에 왕의 장인 김흠돌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모반의 주동자는 물론 가담한 모든 사람들 처형했다

p319 국왕권을 한층 강화해가던 682년에 예부 산하에 국학을 설치했다

p329 황룡사 종과 725년에 만든 오대산 상원사의 동종은 귀족 가문의 공방에 소속된 장인이 만들었다. 큰 사찰도 자체 공방을 운영하고 승려가 장인을 겸했다.

p335 가부장제를 바탕에 둔 사회이지만 여성의 재혼이나 사회 활동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는 홀로 된 뒤에 원효와 재혼했다. 그리고 궁궐에서 나온 삼모부인은 거대한 황룡사 종을 주조하는 사업에 대시주자로 참여했다

p345 문무왕이 의상에게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며 크게 지원하려 했다. 그러나 의상은 승려는 무소유를 지향하며 불교의 가르침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p351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부른 우리말 노래로 진성왕 때에 각간 위홍과 승려 대구화상이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했다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고 삼국유사에 수록된 14수만이 알려져 있다

p357 신라 범종은 걸개 옆에 종의 내부와 통하는 음관을 설치해 깊은 소리를 낼 수 있게 했는데, 다른 나라 종들에는 보이지 않는 한국 종의 특징이다

p365 무왕은 동생 대문예에게 원정을 명령했으나 그는 전쟁의 상대가 당까지 확대될 것을 우려하며 반대하다가 726년 당으로 망명했다. 이처럼 당시 발해 지배층은 외교노선을 둘러싸고 반당파와 친당파로 분열되어 있다

p379 내분기에 이탈한 말갈 부족을 9세기 초에 선왕이 다시 정복한 이후 지방통치제도는 5경 15부 62주로 완비됐다. 발행의 영역은 남쪽으로 신라와 접했고, 서쪽으로 거란과 이어지며 동쪽으로 연해주까지 미쳤고, 북쪽으로 동류 송화강 하류를 경계로 삼았다

p387 조각으로는 정혜공주 무덤에서 발견된 돌사자와 흥륭사 석등이 대표적이다. 돌사자는 눈을 무릎뜨고 머리를 치켜들고 있으며 혀를 만 채 입을 벌리고 있다. 가슴을 앞으로 내밀어 강한 힘을 표현한 조각 수법이 돋보인다. 상경성 2호 절터에 위치한 석등은 상륜부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다. 기둥돌 아래와 위에 새겨진 연꽃 무늬도 부조가 강하고 힘찬 느낌을 준다.

p349 그에 따라 화폐 제조를 담당하는 주전도감을 설치해 해동통보,삼한통보 등의 동전과 활구라고도 불린 은병을 주조,발행했다

p357 정치가 경색된 가운데 측근 세력의 문,무신 사이에 권력 다툼이 생겼다. 결국 1170년, 견룡군 장교들이 중심이 된 무신들은 보현원에서 왕이 연회를 벌이고 있는 틈을 타 무신정변을 일으켰다

p367 고려는 최우가 집권하던 1231년 처음 몽골의 침공이 잇은 후부터 1259년 강화가 논의될 때가지 장기간 맞서 싸웠다

p403 1269년 고려 세자 왕심(충렬왕)은 원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원에 도움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황실의 딸과 통혼할 것을 요청해 허락받았다

p407 쌍화점은 고려 충렬왕대에 지어진 고려가요 혹은 향악곡으로 알려져 있다. 남녀관계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이를 남녀상열지사라 하기도 했다

p447 노비는 호적에 등재됐지만, 재산으로 취급해 상속되거나 매매됐다. 국가에 역을 부담할 의무가 없는 대신 권리가 제한돼 과거에 응시하거나 관리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집과 토지 등 재산뿐 아니라 노비를 소유하는 것이 가능했다. 부유한 노비는 주인에게 재물을 주고 양인이 될 수도 있었다

p452 이혼과 재혼을 대하는 당시 분위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려시대에는 남녀 모두 의무적으로 정조를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호 신의의 원칙에 입각한 개념에 가까웠다. 이규보가 한 남성의 묘지명을 지어주면서 “혼인한 이후에 다른 여성과 관계한 일이 없다”는 망자의 말을 기록한 것을 보면, 정조를 지키는 경우가 얼마나 흔치 않았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p460 죄가 의심스러우면 가벼운 쪽을 따른다거나 죄 없는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을 어기는 실수를 하라는 역대 국왕의 말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p464 화엄종은 교학불교를 대표하며 불교 교단에서 그 위상을 회복했다. 왕실에서는 화엄종에 관심을 표하며 원찰이나 진전사원을 화엄종 사찰로 지정했고, 왕자들을 화엄종에 출가시키자 문벌 자제가 화엄종으로 출가하기도 했다

p476 연등회와 팔관회에서의 연회는 왕과 신하 간의 위계질서를 확인하고, 서로의 우호를 다지는 행사인 동시에 관민이 어우러져 함께 즐기는 축제의 성격도 있었다. 이는 훈요10조에서 당부한 것처럼 군주와 신민이 함께 즐기는 행사였던 것이다

p477 첫 번째는 1011년 거란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시작됐다

p495 천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사천대와 태사국은 고려 초기에 설치되어 일식이나 월식 등을 관측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역할을 했다

p500 초기에는 주로 대형 천불이 많이 제작됐으며, 대형석불은 지역적 특색이 반영된 경우가 많다. 불상 의외의 조각으로는 태조 왕건의 동상이 유명하다

p517 정도전은 국가 운영에서 국왕보다는 신료를 중심에 두는 방안을 모색했다. 주자성리학이 제시한 정치사상을 좇아서 재상 중심의 정치체제를 추구했던 것이다

p531 명은 다른 나라가 조공을 바칠 때는 입국 확인서인 감합을 요구했지만 조선의 경우 국왕의 표문만으로 허락할 정도로 조선을 인정했다

p577 유학에서는 정치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중요한 방법으로서 역사 기록을 중시했는데, 조선은 이러한 이념에 따라 사관제도를 정비하고 사관의 위상을 강화했다.

p596 사림은 피해를 입었지만 지방의 서원이나 향약을 기반으로 지지 기반을 확산하는 등 계속 성장했던 것이다. 명종 말 선조 초에 이르면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정치를 주도했다

p606 이는 스스로 작용할 수 없으며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하고 이가 올라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존재와 도덕을 일괄해 이기의 관계를 서술한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때문에 이황은 이기이원론자, 이이는 이기일원론자로 분류하기도 한다

p607 기대승과 벌였던 사단칠정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이황은 이를 중시했을 뿐 아니라 도덕 원칙과 명분을 강조하는 도덕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p611 대학이 성인의 수신부터 치국평천하까지 이르는 추상적 지침을 담고 있다면, 소학은 일상에서 실천해야 하는 도덕적 행실에 대한 지침을 담고 있다.

p615 조선에서 왜인에게 주던 혜택과 무역량을 줄이자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은 왜인이 폭동을 일으키거나(삼포왜란), 일본 국내의 혼란으로 통제가 느슨한 틈을 타 왜구가 조선의 해안을 약탈하는 사건(사량진왜변, 을묘왜변)이 발생했다

p630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에 비하면 극히 짧은 기간에 마무리됐음에도 오랑캐로 간주하던 여진에게 패배하고 조공국이 됐다는 사실로 인해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파장이 더욱 컸다. 아울러 항복의 책임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이 잠재됐다

p644 향약은 전쟁과 그 후유증으로 인한 사회적 동요를 완화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양반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향촌사회에서 양반층과 상천민 사이의 신분차별도 한층 공고화됐다.

p651 조선 후기 5군영은 일관된 계획을 갖고 설치됐다기보다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른 것이었기에 각 편제나 조직, 그리고 운영 방법 등이 제각각이었다

p655 정조가 추진한 탕평은 충과 역을 명확하게 구분하되, 붕당을 구별하지 않고 오로지 충성스러운 자만을 등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충은 와에게 중성하는 자만을 등용한다는 의미다

p670 대동법의 수취율은 시행 초에는 도마다 차이를 보였지만, 대동법이 확대 시행되면서 점차 12두로 고정됐다

p675 19세기 초 1,000만 석에 이르는 환곡은 더 이상 농민들에게 재분배의 혜택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과세 부담으로 작용해 농민항쟁의 불씨를 지폈다.

p687 조선시대 한양 주민 중에서 핵심 집단은 관료와 그 가족이었다. 대다수의 관료는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관료가 되면 상경했다가 은퇴하면 낙향했지만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며 한양에 세거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대대로 한양과 그 인근에 살면서 한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족층을 경화사족, 경화세족이라 부른다

p694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노비면 그 자녀는 모두 노비가 되는 일천측천의 가혹한 노비세전법은 1669년(현종 10) 양인의 증대 방침에 따라 종모법으로 전환됐다. 혼란을 거듭하던 종모법은 1731년(영조 7)에 확정돼 노비와 양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자녀에게 신분 해방을 가져다줬다.

p701 홍경래는 정주성에서 전사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그가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신화처럼 퍼져나갔다.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홍경래의 난에 고무되어 반란이 일어났고, 홍경래와 같은 영웅이 나타나 민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전국 각지로 퍼져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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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 코드로 읽는 유럽 소도시 - 돌·물·불·돈·발·피·꿈이 안내하는 색다른 문화 기행
윤혜준 지음 / 아날로그(글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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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개 코드로 읽는 유럽 소도시

 : 윤해준

 : 레드리버

 : 2022/06/29 - 2022/10/16


7개 코드로~ 로 진행되는 두번째 버전이다.

중간에 읽다가 다른 책들을 읽었더니 호흡도 끊겼고, 첫번째 책보다는 흥미롭지도 않았다. 

대신 유럽의 여러 소도시를 사진과 이야기로 만날 수 있어서 유럽 여행할 때 참고가 될 것 같다. 

어려서 유럽과 미국에 대한 환상을 많이 주입받아서인지 유럽은 다 좋아 보인다.

그나마 미국은 환상이 많이 사라졌지만 유럽에 대한 환상은 여전하다.

그리고 실제로 유럽을 가보면, 특히 소도시를 가보면 예뻐서 그 환상이 계속 유지된다.

유럽 참 좋다.. 사대주의인지는 모르겠지만..



p18 길을 낼 자리는 먼저 땅을 판다. 그리고 나서 그 속을 인근에서 구할 수 있는 돌들로 메운다. 표면에서 약 1미터 깊이까지 돌을 채운다음에는 빈 틈새를 모래로 채우고, 그 위는 자갈로 덮는다. 자갈 위에 다시 시멘트를 바른 후 숨마 크루스타라고 불리는 납작한 사각형 돌을 깔아 마무리한다

p24 사방에서 불러와 모아놓고 보니 기둥들의 색깔과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기둥 높이가 제각각이라는 더 큰 문제도 있었다. 혼합과 절충의 대가인 알안달루스의 장인들은 이 문제의 해결책을 이내 찾아냈다. 기둥이 짧으면 밑에 돌을 더 깔거나 위를 코린토스 양식 기둥머리로 덮었다.

p51 아이다는 비극이다. 해피엔딩은 절대 금물. 라다메스는 아이다를 선택하고 이집트의 영웅은 반역죄인으로 추락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

p63 1878년 바스의 건축가 겸 고고학자 찰스 에드워즈 데이비스가 로마 목욕탕의 흔적을 발견하고 발굴에 착수했으며, 1897년에 처음 부분적으로 발굴된 유적이 공개된다. 그러나 로마 목욕탕이 신전과 함께 옛 모습 그대로 다시 복원된 것은 20세기 후반부다.

p81 교회를 파괴하고 기독교를 조롱하던 프랑스 혁명가들의 극단적 행각에 신물이 난 많은 이들이 기독교가 서구 문명을 지탱하는 문화와 예술 그 자체이며, 얼마나 자상하고 아름다운 종교인지를 설득한 샤토브리앙의 저서에 깊이 공감했다.

p85 그들은 맥주를 발명한 이가 다름 아닌 풍요의 신 오시리스라고 믿었다. 신이 준 음료로 목을 축이던 이집트인들이 포도주밖에는 마시지 않던 그리스인들에게 맥주를 전해줬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나 이들의 문명을 계승한 로마인들은 와인을 사랑했지만 맥주는 외면했다.

p91 맑은 안시 호수를 북쪽에서 바라보는 이 도시는 양편으로 셈노산과 베이리에산을 끼고 있는 분지에 단정하게 앉아있다.

p98 두 사람은 영국 리버풀 출신, 왜 그들이 북아일랜드 문제에 흥분했을까? 이들이 아일랜드 이주자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레넌은 부친, 매카트니는 양친 모두 아일랜드에서 리버풀로 이주한 집안이다. 이들 외에도 리버풀에는 아일랜드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비틀즈의 나머지 두 멤버인 드러머 링고 스타와 리드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 또한 아일랜드 혈통에 닿아있다.

p111 샤르트르 대성당은 유독 불에 취약했다. 지금의 우아한 고딕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 다섯 채의 선배 건물들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건물은 다시 지은 원인은 늘 불이었다.

p115 20세기 중반에 샤르트르는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독일군 간의 치열한 전투 한복판에 있었다. 이러한 사태를 예견하고 샤르트르 시민들은 스테인드글라스를 미리 제거해서 근처 시골에 분산해 보관해놓는다. 전쟁이 끝난후 이 유리들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p127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사람들을 집에 가둬놓기 전인 2019년 11월 루이스 본파이어에서는 뚱뚱한 보리스 존슨 수상 인형이 횃불 행렬에 끌려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p142 시위대의 배후는 이 교회의 젊은 목사 크리스토프 보네베르거와 크리스티안 퓌러. 무신론이 공식 이념인 공산주의 국가 동독에서 매주 월요일 5시에 몇 명의 용감한 기독교인이 모여서 열던 기도회는 몇 년 새 집권당과 정부가 가장 거북해 하는 반체제 모임으로 발전해있었다.

p150 이들이 코린토스에 도착하면 언덕 위에 하얀 대리석으로 아름답게 지어놓은 아프로디테 신전부터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이 도시의 섹스 산업을 주도하고 관리하는 본부였다.

p159 이렇게 지어진 아시시의 대표명소, 성 프란체스코 성당은 가난과 결혼했던 프란체스코와는 어울리지 않게 웅장하다

p173 크레모나가 바이올린의 성지가 된 것은 과르네리와 스트라디바리라는 두 현악기 명장의 가문이 크레모나 출신으로 이곳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p201 이 돌다리는 12세기에 지었으나 이후 여러 차례 망가졌다. 알프스산맥에서 흘러오는 론강의 물살이 워낙 세서 홍수가 나면 견디질 못했다. 17세기에 심하게 무너진 후의 모습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p220 1920년에 개시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이 작은 도시를 여름마다 유럽 최고의 고전음악 공연장으로 바꿔놓는다

p230 방랑하는 유태인 전설은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인 채 홀로 이 세상을 떠돌 수밖에 없다는 19세기 낭만주의 신조와 잘 맞아 떨어졌다

p253 세비야의 레알 마에스트란사는 투우사들로서는 가장 만만치 않은 경기장이다. 그곳에서 명성을 얻으면 스페인 최고의 투우사가 되지만, 작은 실수 하나도 놓치지 않는 까다로운 애호가들이 지켜보고 있기에 이곳에서 성공하기는 쉽지않다.

p257 주인공 토스카가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부르는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며는 푸치니의 대표적인 명곡 중 하나로, 오페라 무대가 아닌 일반 성악 공연에서도 자주 연주된다.

p263 바다가 남긴 소금과 육지 동물 돼지가 남겨준 라드가 자기 몫을 하면 그 이후는 시간이 책임진다. 시간, 기다림, 침묵. 매달려 있는 돼지 뒷다리는 몇 달에 걸쳐 서서히 숙성된다. 이 모든 과정은 시작부터 끝가지 사람의 손길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기계가 할 수 없다. 소금과 라드 외의 그 어떤 다른 물질도 개입할 수 없다. 프로슈토디 파르마는 오직 장인의 손길 속에서만 탄생한다

p269 독일군은 단치히에 진주하자마자 1천 500명의 열등인간을 폴란드인을 색출해 총살했다.

p276 부르고뉴 명품 와인 중 하나인 클로 드 부조는 혁명이전에는 부조 수도원 수도사들이 가꾸던 51헥타르의 포도밭에서 산출되었다. 오늘날 이 브랜드를 사용할 권리는 약 80명의 재배업자가 공유한다. 이들은 모두 원산지 통제법에 따라 클로 드 부조라는 이름을 쓸 수 있으나, 종교적 헌신의 자세로 포도밭을 관리하던 수도사들의 클로 드 부조와는 그 맛과 향이 같을 리 없다.

p290 루이 14세, 표트르 대제, 프리드리히 2세는 모두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는 데 들인 돈의 몇 배 되는 거금을 전쟁에도 소비했다.

p294 구스타브 2세는 30년 전쟁 기간인 1632년, 독일 작센 지방 뤼첸에서 전사했다. 몸을 사라지 않고 앞장서 부대를 지휘하다 무참히 살해되었다. 개신교도에게 그는 위대한 영도자이자 순교자였다. 그의 적들 눈에 그는 악랄한 전쟁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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