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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ㅣ 패러독스 10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12년 7월
평점 :
품절
궤변 같은 이야기 속의 진실성,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그동안 사두기만 하고 끝까지 읽지는 못했던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 덕분에 피에르 바야르의 책들을 하나하나 독파하고 있는 중이다. 몇 년전에는 어렵다고 생각했던 책들인데, 그 동안 내가 정신적으로도 자라긴 한 모양인지 조금은 이해가 갈 듯도 한 것 같아 나름 뿌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바야르의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이번에 읽은 책은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책이었다. 제목을 보면 이전에 읽었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과 뭔가 비슷한 형식임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논리적 속편이라고 저자가 언급하고 있다. 결국 저자는 이전의 주장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실제적인 상황에서의 사례로 '여행'이라는 소재를 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장은 바로 이것이다.
두 책 모두 핵심은, 구체적인 삶의 여러 상황에서 출발하여, 어떤 주제에 대한 우리의 부분적이거나 완전한 무지가 반드시 그것을 일관성 있게 논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 세계를 좀 더 잘 아는 용도로 활용될 수 있음을 제시하는 데 있다. (p.20~21)
결국 실제적인 경험이 항상 어떤 것의 진실된 의미를 파악하는 최고의 방법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려 하고 있다.
먼저, 그는 여행하지 않은 네 가지 여행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각각 '가보지 않은 곳', '대충 지나친 곳', '귀동냥으로 들은 곳', '잊어버린 곳'인데, 이 것은 그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에서 이야기한 읽지 않은 사례를 여행 버전으로 바꾼 것이다. 또한 이 사례들은 모두 '책'과 관련된 방향으로 제시된다. 이 각각의 사례는 여행을 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행지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 혹은 서술하는 형태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책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과 굉장히 많은 관계가 있는 만큼 그 책도 읽어보면 책의 이해에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이 네 가지 사례는 각각 마르코 폴로,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 자신의 아내를 대신 이스터 섬으로 보낸 에두아르 글리상, 어느 한 섬에 대한 기억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서술한 샤토브리앙의 사례이다. 각각의 사례는 모두 인상적이지만 특히 이해가 비교적 쉬웠던 것은 '정보원'을 활용한 세번째 사례였다.
에두아르 글리상은 이스터 섬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가는 데에 현실적 어려움이 있어 대신 그의 아내가 이스터 섬에 가서 그 곳의 상황을 전하게 되었다. 동시에 그의 아내는 이스터 섬의 주민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까지 전달한다. 결국 에두아르 글리상에게 이스터 섬에 대한 정보를 주는 정보원은 두 사람이 되는데, 사실 이 '정보' 자체는 정보원이 가진 주관에 따라 오염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에르 바야르는 에두아르 글리상이 이스터 섬을 직접 방문한 것 이상으로 멋지게 이스터 섬에 대한 묘사를 이뤄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얼마든지 우리는 그가 그곳을 안다고, 어쩌면 섬의 어느 주민보다도 더 잘 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섬 주민은 지각 대상에 너무 가까이 있어, 감상에 필요한 거리를 두고 섬에 대해 말하기가 불가능하니 말이다. (p.76)
여행은 직접 가보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런데 모든 여행지는 동시에 누군가의 일상의 공간이다. 그런데 잠시 스쳐가는 여행자는 발견하게 되는 것들을 그 곳에서 일상을 보내는 인물들은 오히려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여행 에세이들을 읽을 때 이미 많이 보았던 사례들이다. 결국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볼 때 그 대상에 대해 좀더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다각도의 정보를 분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해가 가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피에르 바야르의 책에서 주장하는 이론은 머리로는 나름의 이해가 가지만 몇몇 사례에서 일반적인 상식의 범위, 특히 윤리적인 측면을 넘어서는 내용이 있어 온전히 공감하기 쉽지 않다. 이 책의 경우, 특히 이 책에서 실제적인 적용 내용 사례로 등장했던 저널리스트의 사례와 마라토너의 사례가 그랬다.
특히 저널리스트의 사례. 이 저널리스트는 기사를 지어서 썼다. 기자의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취재에 대한 최대한의 정보를 모아서 썼다. 다만 직접적인 정보를 얻어서 쓴 것이 아닐 뿐이다. 그런데 그의 기사는 심지어 신문 1면에 나기도 했다. 그만큼 진실성이 느껴지는 글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그 점에 의이를 둔다. 하지만 그건 기사가 아니다. 기사와 문학은 전혀 다른 유형의 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어서 쓴' 기사가 가지고 있을 위험성을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윤리적인 문제가 있는 사례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점이 있기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피에르 바야르의 주장 자체는 흥미롭다. 그가 주장하는 '텍스트'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 경우를 접한 적이 분명히 있고, 또 이 주장을 펼치기 전 풀어놓은 사례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실 텍스트란 단지 어떤 장소와 어떤 상상세계의 만남인 것만이 아니라, 어떤 독특한 담론의 상황의 틀 안에서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p.216)
피에르 바야르의 책을 읽다보면 어쩌면 이제까지 궤변이라고 치부해온 이야기들 안에 나름의 진실성이 담겨 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읽으면서 찬성하는 마음과 반대하는 마음이 계속 충돌을 일으킨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고, 결국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도 확실한 입장을 정할 수 없었다. 어쩄든, 독서에 대한 획기적인 가능성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많은 방향으로 생각이 펼쳐져 나갔는데, 그 내용을 리뷰에 다 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만약 독서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만나보고 싶다면, 피에르 바야르의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