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2011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공지영 작가는 수상작이었던 "맨발로 글목을 돌다" 에서 작가 자신이기도 한 작품속의 주인공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한다.

"인간이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꿔놓는 일을 저는 가장 증오하고 있습니다."

 

공지영 작가의 이런 메시지는 이미 전작인 "도가니" 를 통해 먼저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인간이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꿔놓는 일"

공지영 작가의 장편소설인 "도가니" 에서는 장애아동들을 학대하는 보육원이 등장하였고, "맨발로 글목을 돌다" 는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일제 시대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H, 그리고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었던 유태인들이 등장한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에 휘말린 바다위의 낙엽같은 생生.

 

한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꾸는 일은 그런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들에게만 허락된 능력은 아니다.

당신도, 나도, 아주 쉽게 한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뒤바꿀 수 있다.

 

작품 속에는 그렇게 너무도 쉽게 생 전체가 폭력으로 뒤바뀐 두 남녀가 등장한다.

 

'따뜻한 콩' 이라는 의미의 '온두' 는 대형 유아용품 전문백화점인 '베이비앤마미' 의 1층 유모차 판매장에서 근무하는 여성 판매사원이다.

시크하고 냉정하지만 번득이는 통찰력과 논리정연한 소개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는 뛰어난 사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한가지 비밀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슬트모' 의 회원이라는 사실이었다.

슬트모가 뭐냐고?? 슬트모는 '슬'리핑 '트'렁크 족의 '모' 임 의 줄임말이다. 슬리핑 트렁크. 말 그대로 자동차 트렁크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잠잘 시간이 되면 수면용품이 든 백을 들고 공터에 주차해 놓은 자신의 자가용으로 간다. 그리고, 잠자기 좋게 각종 도구들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는 트렁크 안으로 들어가서 아침까지 자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차 옆에 또다른 슬리핑 트렁크족이 자리잡는데, 그 남자의 이름은 '이름' 이었다.

온두와 이름은 왜 자신의 집, 방 안의 침대를 장식용 가구로 만들면서 굳이 좁디 좁은 트렁크 안에 지친 몸을 누이는 것일까??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 도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

 

 

 

 

 

트렁크 안에서 잠자는 사람들.

'트렁커' 라는 제목과 재미있는 일러스트의 표지처럼 작품의 초반은 가볍고 경쾌하다.

시크한 온두라는 캐릭터도 얄밉지만 안타깝고 꽤나 매력적이다. 귀엽고 작아서 보듬어주고 싶은 의미의 '사랑스러움' 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미로 '사랑스러운' 캐릭터이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여린 속살 밖에 날카로운 가시를 돋우고 있는 고슴도치 같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름이라는 청년 또한 사랑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역시나 어딘가 무심하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왠지 따뜻할것만 같은 그런 남자.

전형적인 로맨스물의 캐릭터들 같다. 작품의 초반을 읽어 나가면서 '이거 그냥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 아냐?' 싶어서 책을 편 것을 후회했더랬다.

웅진 "뿔" 블로그에서 리뷰어에 당첨되었으나, 어찌 된 이유에선지 한달이나 늦게 책을 받기도 했었고. 유쾌한 마음으로 펴든 것이 아님은 확실했다.

게다가 달달한 로맨스 소설 따위, 난 보고싶지 않아고오!!!

 

하지만,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가슴이 턱턱 막히는 부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리뷰의 서두에 언급했던 "인간의 생을 폭력으로 바꿔내는" 장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온두와 이름이 트렁크에서 잠을 자게 된 이유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이 엄청난 사건들은 말 그대로 가슴이 턱턱 막힌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누군가의 인생을 폭력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폭력에 가장 무방비하며, 인생 전체를 저당잡을 수 있는 존재들이 바로 우리 옆에 항상 있기 때문이다.

 

바로 아이들이다.

나의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의 자식이 될 수도있는.

누군가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

바로 어린 아이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변이 세상의 전부라고 인식한다.

바로 그 시기에, 그들의 주변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그들은 세상 전부가 어그러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세상 전체가 어그러지는 충격. 그 충격은 단순히 잊어넘길 수 없는 거대한 사건이 되고, 당연하게도 그것은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 세상에서의 숨을 다 하는 순간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고통으로 각인될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그 엄청난 사건에 대항할 신체적, 정신적인 능력도 부족하다. 

그렇기에, 세상의 법은 미성년에게 저지른 죄는 몇배로 강하게 처벌한다. 아, 국내에서는 예외로 하겠다.

지구상에서 한국을 제외한 모든 법치국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저지르는 범죄, 특히 폭력에 대한 범죄는 최소한 몇배의 처벌을 받고, 많게는 몇십배까지도 처벌의 수위를 높인다.

 

하지만, 그만큼 어린아이들에게 저지르는 범죄는 세상의 법을 피해갈 수 있기도 하다.

특히 아동 보호시설이나,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더더욱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폭력을 잘못된 것이라고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동 보호시설의 경우엔 인지력과 나이, 신체적 특징이 비슷한 처지의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시에 폭력을 당하기 때문에, '원래 이렇구나' 라고 인지하게 된다.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저항하고 대항할 능력이 없음을 인지하고 세상이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때문에 그것을 법에 호소하거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먹여주고 살려주는 어른을 놓친다면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기 때문에 도망가지도 못한다.

그냥 그 폐쇄된 세상 속에서 평생을 '사육' 당하는 것이다.

 

가정 안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가정 또한 하나의 사회이고, 특히 한국에서는 더더욱 폐쇄된 공간이다.

우리는 옆집에서 자식을 패는 소리를 듣더라도, '가정교육' 이라고 치부하기 일쑤이다. 우리나라는 '우리' 문화가 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정교육을 중시하고, 아이들을 교육하는데는 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전통도 있어왔 때문이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비인격적인 폭행이나 폭언에도 저항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많고, 특히 어렸을때부터 그렇게 자라온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들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연옥이자, 헤어날 수 없는 거미줄이며, 끈질긴 물귀신과도 같다.

하지만, 그 속에는 기본적으로 사랑이 있고, 가끔은 즐거움과 행복도 있으며, 때로는 의지가 되기도 하고 최후의 도피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주인공들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울타리를 벗어나 더 좁은 공간으로 숨어들어간다.

자신의 몸에 딱 맞는 공간을 좋아하는 고양이처럼 말이다. 고양이과의 동물들 중 가장 강한 동물인 호랑이는 언제나 사방이 탁 틔이고 높은 곳을 좋아한다. 동물 사파리에 가보면 호랑이 무리의 두목이 자리잡는 곳은 언제나 그런 곳이다. 누구에게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곳 말이다. 반면, 고양이과의 가장 약한 동물인 고양이는 자신의 몸 하나만 딱 들어갈 수있는 좁은 공간을 좋아한다. 벽과 벽의 사이, 자동차의 뒷바퀴와 자체 사이, 보일러의 연통 안, 벽에 세워진 매트리스 사이 같이 말이다. 옆과 뒤가 모두 막혀있어서 정면에서 다가오는 적을 가장 빨리 보고 도망갈 수 있고, 대적하더라도 뒤와 옆에서 협공받을 수 없는 그런 곳 말이다.

작품안에 등장하는 '트렁크' 는 주인공들에게 딱 그런 장소인 셈이다.

최후의 도피처. 가족으로부터. 공동체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각종 감정으로부터.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있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작가는 시종일관 시공간을 베베 틀면서 혼란스럽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책의 대부분을 지하철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읽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음악을 끄고 정신을 집중해서 앞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도 했다. 이야깃속의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고, 단편적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연두의 과거와 이름의 과거가 규칙없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꽤 혼란을 주기도 한다. 

작가가 독자들을 잡아 당기는 흡인력의 부분에서는 선정적이고 잔인한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지나치지 않은 선을 적당히 유지하면서 정서적으로 큰 거부감을 주지는 않는다. 작품 전체적으로 행동묘사가 굉장히 적은데, 역겹거나 잔인한 장면들을 디테일하지 않게 넘어가면서도 일관성을 유지하며 완성도를 높인 작가의 좋은 의도였다고 보여진다.  독자의 상상력에 적절히 기대면서도 이야기의 맥을 짚어내는 작가의 기술이 상당히 돋보인다.  

 

작품은 초반의 가벼움과 경쾌함을 지나, 중반에는 정서적인 위화감과 감정의 폭발을 유발시킨다. 그러다가 후반에 접어들면 앞에 꼬아놓았던 새끼줄을 풀듯이 감정과 정서를 다시 차분하게 안정시켜 나간다. 정신없이 꼬여 없는듯한 플롯들이 그 정체를 드러내며 문장들과 더불어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배가시킨다. 확실히 정말 좋은 소설이다.

 

최근 한국문학, 특히 소설쪽에서는 신인 여성 작가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그녀들은 서사의 구조나 시공간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자재로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지면 위에 풀어내는 느낌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더니즘의 작가주의적인 그것이라기 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중주의에 가깝다는 사실이 놀랍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관념적으로 풀어내면서도 대중들에게 지지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작가들이 포스트 모던한 대중주의 자체에 뿌리내리고 성장한 덕택일 것이다. 그녀들의 작품은 순수문학을 지향하면서도 편협하지 않고, 자유롭다.

앞으로 한국 여성작가들은 더욱 더 많이 나올것이고, 21세기 한국 문학의 최고봉에는 언제나 여성 작가들이 서 있을 것 같다.

 

 

사람은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생에 관여한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절대 혼자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관여가 한 생을 폭력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고, 사랑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

책을 덮으면서 아이가 키우고 싶어졌다.

폭력이 아닌 사랑과 기쁨에 익숙한 아이를 키워내고 싶어졌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과 기쁨에 익숙한 아이를 키워냈으면 한다.

자신뿐 아닌, 타인에게도 사랑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이 익숙한 아이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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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 저승편 세트 - 전3권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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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출판 만화 시장이 무분별한 일본만화 수입과 무책임한 대여점의 난립등의 이유로 바닥까지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대중들이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온라인 게임, PC방, 모바일 인프라의 확대 등 여러 이유등이 거론되지만, 위에 언급한 저 두 가지가 가장 큰 원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출판 만화 시장은 무너졌지만, 만화라는 장르는 무너질래야 무너질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만화] 라는 컨텐츠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쉽고 편하게 접할 수 있는 대중매체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인프라가 발달한 인터넷 강국답게 한국에서 웹툰이라는 장르가 태동했다. 김풍, 강풀, 강도하등의 작가로 대변되는 웹툰 1세대들의 노력은 웹툰으로 만화가가 살아남는 법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웹툰은 전통적 만화문법의 파괴를 가져왔다.
출판기술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만화를 책으로 만들어 보기 시작했다. '책' 이라는 방식이 나온 뒤로 만화는 좌에서 우. 혹은 우에서 좌로 읽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흔히 우리는 이것을 '가로연출' 이라고 한다. 컷과 컷 사이의 그림들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책을 넘기는 방향으로 지그재그로 이어지게 되어있다. 시선의 이동, 이것을 '코마' 라고 부르는데, 컷의 크기, 컷 안에 들어있는 인물들의 배치, 컷 안의 배치된 그림들의 카메라 앵글, 확대, 축소, 효과음과 미장센 모두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하지만, 웹툰은 세로로 내리면서 본다. 이것은 당연하게도 지금까지 만화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인 문법에 대치되는 방식이었고, 만화작가들은 새로운 방식을 연구해야 했다. 종이를 앞뒤로 넘기는 것이 아닌. 스크롤를 쭉쭉 돌리며 위아래로 빠르게 지나가는 컷들을 위해 작가들은 새로운 시도들을 접목시켰고, 강풀이나 양영순 같은 작가들이 영화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고안해내면서 새로운 만화적 문법들을 제시했다.

 

웹툰이라는 장르가 태동하고, 많은 작가들이 작품활동을 하다 보니, 웹툰의 세로 연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웹툰을 책으로 만들때 과연 어떻게 보일것인가? 에 대한 의문이었다. 작가들은 반드시 책을 팔아야 돈을 벌 수 있다.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유수의 포털 사이트들이 모든 웹툰에 가격을 매기고 네티즌들로 하여금 비용을 지불하게 하지 않는 이상, 작가들은 웹툰을 그려 먹고살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나라 웹툰 작가에 대한 비용 시스템을 언급해야 하는데, 간단히 말하면 포털 사이트에서는 작가에게 소정의 작업비를 보조해주는 정도이고, 작가는 포털 사이트를 통해 작품을 개재하고 출판업자를 통해 책을 내야지만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물론, 강풀, 강도하, 양영순 작가와 같이 A급 작가들은 사정이 좀 다르다. 기성 출판만화 작가들 또한 그렇고.)

그래서 최근의 웹툰 작가들은 책으로 묶일 것을 예상하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꽤 있다. 대부분의 프로 작가들은 지나친 세로연출을 자제하는 방향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애초에 책을 낼 약속을 하고 포털 사이트에 연재물을 개재하는 경우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전통적 만화 문법이 파괴되면서, "만화는 그림이 우선!" 이라는 고정관념도 깨지기 시작했다.

한국 만화는 특히 이야기와 그림 중, 지나치게 그림에 편중된 인식이 있었다. 일본이나 미국만 해도 그림작가보다 글 작가가 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다. 일본에서는 '원작자' 라고 하고, 미국에서는 '라이터' 라고 한다. 미국에서 '만화작가' 라고 하면 글만 쓰는 작가를 말하고, 그림작가는 '아티스트' 라고 부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스토리 작가는 그림작가가 고용한 형태로 운영되기도 하고,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꽤 있었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스토리 작가를 그림작가에 종속된 관계로 보는 관행은 뿌리 깊게 남아있다. 전에 어떤 포스팅에서 한국 만화가와 일본 만화가의 대담을 본 적이 있는데, 일본 작가가 "한국 작가들은 그림은 정말 잘 그린다. 정말정말 잘 그린다. 일본에서도 손꼽을 만 하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들의 만화에는 그림만 있다." 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한국 작가들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웹툰은 이렇듯, 기존의 만화가 가지고 있던 '작화' 에 대한 개념을 깨뜨리고 있다.

현재 포털에서 A급 취급을 받는 작가들인 강풀, 조석 같은 작가들의 그림을 보면 분명 세련되고 멋진 작화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들이다. 2010 독자대상 만화를 수상한 [신과 함께] 의 작가인 '주호민' 작가 역시 세련되고 멋진 작화를 구사하는 작가가 아니다. 이들이 이렇게 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결국 만화에서 그림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는 증거인 셈이다. 

 



네이버에 연재될 당시의 타이틀 컷.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 는 만화가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의 위대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야기는 크게 두개의 축을 가지고 전개된다. '김자홍' 이라는 평범한 사람이 죽은 뒤 49일동안 재판을 받는 내용과, 억울하게 죽은 '유성연' 이라는 청년의 영혼을 뒤쫓는 저승차사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야기의 한 축은 법정드라마를 연상케 하고, 다른 한 축은 전형적인 퇴마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두 이야기 모두 단순하게 잘 짜여진 플롯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캐릭터에 활력을 불어넣어 이야기 자체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49일동안 김자홍이 받게되는 저승 재판은 우리가 잘 알고있는 한국의 전통 신화를 정확하게 따르고 있으며, 곳곳에서 작가의 만화적 상상력과 유머를 만끽할 수 있다. 유성연의 영혼을 뒤쫓는 저승차사들의 이야기도 굉장히 재미있다. 쫓고 쫓기는 전형적인 플롯을 적절하게 구사했으며, 역시나 풍성한 캐릭터들이 돋보인다.

이 작품이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은 위에 언급한 만화적 상상력과 한국의 전통 신화의 조화, 플롯과 캐릭터의 완벽한 역할도 분명하겠지만, 무엇보다 작품 자체가 가지고 있는 너무도 뻔하고 뻔하지만 큰 울림을 주는 교훈 덕분일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뻔한 훈계가 되어 오히려 반감만 가질게 뻔한 "착하게 살아라" 라는 교훈 말이다. 작품은 시종일관 이 교훈을 아주 부드럽고 능숙하게 이야기속에 녹여낸다. 이 세권의 책 속에 착하게 살아가는 모든 방법들이 녹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터. 그것들을 이야기로서 독자들이 스스로 깨치게 하는 능력은 정말 수준급이다. 글이나 말이었으면 설득력이 떨어졌을 그 말은 만화의 특징들을 통해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신과 함께] 또한 작가가 애초에 제책을 염두에 두고 작업한 작품이다.
 

 

 

네이버 웹툰에 연재될 당시의 화면.

 


 
 

책으로 묶인 장면.

 
딱 봐도 책의 사이즈에 맞게 3단으로 연출한 것을 세로로 길게 이어붙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식으로 작업을 하면, 웹 연재가 끝남과 동시에 바로 제책 디자인에 들어갈 수 있고, 결과적으로 책이 빨리 나올 수 있다. [신과 함께] 가 2010년 시작과 함께 네이버에 연재를 시작해서, 2010년의 마무리에 즈음해서 단행본까지 완벽하게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철저한 기획에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작품의 분량도 더하거나 덜 함 없이 3권에 딱 끝낼만한 정도였다.
 
결국 만화의 힘은, 아니, 모든 컨텐츠의 핵심은 '이야기' 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신과 함께] 는 만화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장점들을 적절하게 살린 수작임은 분명하다.
현재 네이버에서 [신과 함께] 의 '이승편' 이 연재되고 있다. 올해 말이면 이것 또한 책으로 만나볼 수 있을터.

주호민 작가의 건필을 기원한다.


 

마지막으로 이건 저의 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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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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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왕정이 무너져간 과정들은 드라마틱하기 짝이 없었다.

수천년간 한낱 '평민' 이었던 대다수의 백성들은, 역시 수천년간 자신들을 '지배' 해온 계급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동일한 계급 안에서 의지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다. 왕이나 나나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인간이고, 단지 누구의 아들이냐, 딸이냐에 따라 삶 전체가 달라지는 것은 결코 '인간다운 일' 이 아님을 인지하고 받아들였다. 그 과정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서서히 수천년의 절대왕정이 무너졌다. 그리고 '왕' 을 잃어버린 국가들은 새로운 이념들을 받아들였다. 세계 최초의 공화정이 시행되고, 엄청난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새로운 이념을 정립시켰다. 누군가는 새로운 이념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넓디 넓은 바다를 건너 신대륙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렇게 '민주주의' 라는 이념은 유럽식 민주주의와 미국식 민주주의로 나눌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유럽식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시민들의 단결과 응집력, 그리고 투쟁을 떠올릴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을 싸워서 쟁취해낸 유럽의 시민들은 권력층을 견제할 수 있는 단일 세력으로 성장했다.

미국식 민주주의는 개개인에 대한 무한한 자유와 권리보장 그리고 자본주의를 떠올릴 수 있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가 발달한 것이다. 

유럽식이든 미국식이든, 그들의 민주주의는 최소한 100~200년의 시간동안 서서히 이루어져 왔으며,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웠던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얻어냈으며, 영위하게 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의 왕정은 일제의 침략과 강제병합, 그리고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군정의 신탁통치를 통해 무너졌다.

엊그제까지 평민이었던 백성들이 하루 아침에 국민이 된 셈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반상의 구별이 명확했는데, 아침에 그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사실 국민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어제 일본군의 앞잡이었던 경찰서장은, 오늘 대한민국의 경찰서장이 되었고, 일제의 비호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오늘 대한민국 정부의 비호를 받아 더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웠던 이들은 빈민으로 전락했다. 세상이 바뀐걸 실감도 하기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로 인헤 미국의 신탁통치는 더욱 강력해 졌으며, 민족 차원에서 정치 수뇌부를 자정할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일제의 똥구멍을 핥으며 배를 채워온 부류는 미국의 똥구멍을 핥으며 여전히 권력의 상석을 차지했고, 허울좋은 '민주주의' 세상에서 돈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의 정부는 일제 침략기의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국민들은 대통령과 왕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했고, 정치가와 양반들을 구별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공무원과 벼슬아치들을 동일시했다. 수십년 뒤, 고등교육으로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스스로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고, 미군정의 신탁통치와 군사 쿠데타가 만들어낸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한다.

화염병과 죽창을 들고 세상을 바꾼 이들. 우리는 이들을 386세대라고 부른다. 30대, 80년대 대학을 다닌, 60년대생들.

지금 그들은 40대일테니, 486세대로 명명하면 되겠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바꾸었지만, 자신들이 무너뜨린 그들과 똑같이 변해갔다.

물론, 세상이 그들이 원하는대로 바뀌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다. 정치 수뇌부들은 지나치게 촘촘히 얽혀있었고, 그들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있었으니 바로 '돈' 이었다. 일제를 등에 업고, 미국을 등에 업고 돈을 쓸어모았던 그들은 정권을 지배하고 있었고, 결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열의 맨 앞에서 죽창과 화염병을 들었던 그들은 결국 고개를 숙이고 굴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싸웠지만, 진 사람이 없었고, 쟁취했지만, 얻은것이 없었으며, 변혁을 꿈꾸었지만, 바뀐것이 없었다.

 

작가는 바로 그런 386 세대. 특히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의 상위 10% 안에 드는 엘리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진정한 의미의 '사회 지도층' 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수많은 드라마나 작품들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상위계층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본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작년, 절찬리에 종영한 '자이언트' 라는 드라마에서도 정경유착의 단면과 한국에서 재벌이 부를 축적해가는 과정이 비교적 설득력있게 그려졌으며, 최근 역시 엄청난 인기속에 종영한 '시크릿 가든' 에서도 유명 백화점 VVIP 파티나 상속자의 생활상이 잠깐 보여졌었다.

이 작품 '허수아비 춤' 은 그런 드라마속 이야기의 리얼 버전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아리랑' '태백산맥' 에 이어 '한강' 까지, 한국사 100여년을 종이위에 고스란히 글로 녹여냈던 노작가는 '허수아비 춤' 을 통해 한국 근대사에 방점을 찍어낸다. 작품은 크게 4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작가가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훨씬 더 많다.

 

2~3년 전, 우석훈 교수의 '88만원 세대' 라는 작품을 통해 386세대가 만든 세상에 살아가는 현대의 20대의 현실을 분석하여 큰 호응을 받았던 책이 있다. 그 작품에서도 20대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싸울 줄  모른다' 는 점을 들었다. 독재정치와 군정에 화염병에 짱돌, 죽창을 들었던 세대들의 자식들로 자라난 20대는 당연하게도 투쟁심 자체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우리 세대는 부조리 속에 있지만, 부조리 속에 있는 줄 모르고, 억압받고 있지만 억압받는 줄 모른다. '민주주의' 를 처음 맞닥뜨렸던 50년~60년대의 한국 국민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386 세대가 굳건히 만들어 놓은 대한민국 자본주의 제국에서 살아남기만을 위해 노력한다. 대학은 더이상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취업준비기관으로 전락한지 오래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보다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들을 386세대에게 전가할 생각은 없다.

그들 또한 억압되고 부조리한 세상속에서 당당하게 맞섰고 자신들의 것을 쟁취한 선구자 들이다. 결국 노무현 정권과 참여정부라는 눈부신 성과를 이끌어 냈던 것은 그들이었고, 그런 정권을 MB 정권으로 망가뜨린 주역은 결국 우리 세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그들로부터 그런 점들을 배웠어야 했고, 끊임없이 사회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 윗세대의 실책만큼 우리 세대 자체의 실책이 있는것이다.  

 

조정래 작가는 '허수아비 춤' 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상위 2%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리 세대는 분명,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시크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게 '쿨' 한거 아니냐며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놈들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고 분에 차서 소리지르면, 우리 세대는 분명 '짜증나게 열폭하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해' 라고 말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세대는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상위 2%안에 못들어간 98%는 다 자신들이 잘못해서 그모양 그 꼴인 것이다.

상위 2%만 넉넉하고, 나머지 98%는 배고픈 사회의 시스템을 붙들고 늘어져야 겠다는 생각따위, 우리는 못한다.

그 시스템이 잘못된 시스템이라는 것. 우리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모두가 적들뿐이다. 이것을 세대 안에서의 싸움이라고 한다. 우리 세대는 세대 내 갈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뜻을 모을 수 없고, 공동의 전선을 펼칠 수 없다. 안타깝지만, 우석훈 교수와 여러 시민운동가들이 주창했던 '생협' 같은 세대간 연대는 너무나 힘들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터다.

작품 안에서도 언급는 '시민연대' 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반 시민들이 권력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임에도 말이다.

 

아마, 우리 88만원 세대들은 영원히 가난과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식들에게도 이 가난과 절망은 고스란히 물려줄 터다.

우리 세대는 허수아비 세대이다.

짧디 짧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무능하고 가장 별 볼  일 없는 세대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의 88만원 세대. 우리들 말이다. X세대와 N세대 사이에 어설프게 걸쳐있는 어설프고 불쌍한 세대.

 

조정래 작가가 이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디테일하게 들려준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이 '그릇되었음' 을. 우리 사회의 구조가 '불합리함'을. 그리고, 이런 세상에 태어난 우리 세대에게 잘못이 있는게 아니라, 우리 세대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잘못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짱돌을 집어들 수 는 없을것이다. 우린 너무나 나약하고 온순하며 무력하게 자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 세대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88만원 세대' 라는 용어가 태동했을 즈음에 국내에서는 많은 촛불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위 안에는 당연하게도 88만원 세대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보였다고 해도 일부였고, 대다수의 88만원 세대들은 그 와중에도 어디 도서관에 쳐박혀 취업준비에 열중이었고, 공무원 시험 준비에 열중이었다. 물론 시위는 88만원 세대들과 386 세대 선배들이  10대~20대. 80년대 중후반~90년대생들이었다. 우리가 취업몰입교육에 물들어 있을때 그들은 수많은 대안학교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인터넷 세상의 무한한 정보를 통해 더 많은 것들을 흡수하기도 했다.

 

'허수아비 춤' 은 88만원 세대인 나에게는 정말 큰 과제처럼 다가왔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데 나는.

설마 내가.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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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엉....감사해요...ㅠㅠ

완전 초스피드 경품배송... 알라딘 게릴라 이벤트에 당첨되서 엊그제 밤 늦게 책을 받았습니다.

무려 밤 10시에 배송해 주신 한진택배 택배기사님. 감사하고요, 송장쓰신(읭?ㅋㅋ) 클레어님 역시 완전 감사합니다. ㅠㅠ  

 


'신과 함께' 세트의 위용!!!
고민을 많이 한 듯한 표지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내지와 권말부록들도 알차고요. DVD 스페셜 피쳐를 보는 듯한 구성이 맘에듭니다. ^^
자세한 사항은 나중에 리뷰로 함께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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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Space Fantasia (2001 야화) 세트 1~3(완결) 2001 Space Fantasia
호시노 유키노부 글.그림, 박상준 감수 / 애니북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아주 어렸을때 남산 어린이 우주과학센터(?) 였던가 에서 단체로 관람했던 거대한 실내 별자리를 기억한다.
아마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이다. 커다란 강당안에 약간 위쪽으로 고정되어있는 좌석이 있고, 천장은 거대한 돔의 형상으로 되 있어서, 영사기를 통해 돔 형 천장에 밤하늘을 쏘아서 별자리를 보여주는 공간 말이다. '플라네타리움' 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십수년 뒤에 알게 되었던. 실내 별자리 관람관(?) 말이다. 영상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엄청난 자연의 경이 앞에 입을 쩍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새까만 밤하들에 박혀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보석들. 그 뒤로 별자리 책을 사다가 밤하늘에서 북두칠성을 찾아보고 카시오페아를 찾아보던 기억이 난다.
 
십수년 뒤 군대 시절, 해발 1407m 고지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대공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다가 밤하늘에 박힌 무수한 별들 중 하나가 뚝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한 적도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주 선명하게 본 별똥별이었는데, 소원을 빌 겨를도 없이 뚝 떨어지고 말았고, 일단 그 이질감에 할 말을 잃었더랬다. 별이 떨어지는 광경은 엄청난 위화감이 들었다. 마치 컴퓨터 그래픽 같은 느낌이었다. 진짜인데, 가짜 같았다. 이래서 많은 옛 사람들은 별이 떨어지면 나라에 위기가 찾아들거나 위대한 성인이 목숨을 다했을거라고 생각했을터다. 그정도로, 현대인인 나에게도 위화감이 있었으니까.
 
밤 하늘도 그럴진데, 우주라면 어떨까.
그 엄청난 무한의 공간. 죽음과 어둠, 영원한 무無의 공간. 아이러니하게도 죽음과 무의 공간속에서 생명과 유가 태어난다.
 
우주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의 원조는 단연 '아서 클라크' 일 것이다. 
당대 최고의 SF작가들이었던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 과 함께 3대 SF의 '레전드' 인 그는 다른 두 작가에 비해 훨씬 체계적이고 방대한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학자이자 발명가이기도 했던 아서 클라크는 보다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우주를 다룬 작품들이 특히 더 많다. SF 문학계에 '아서 클라크' 가 있다면, 일본 만화계에는 바로 이 작가, '호시노 유키노부' 를 꼽을 수 있다.
 
정말 엄청나게 저변이 넓은 일본 만화속에서 SF장르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테츠카 오사무의 '아톰' 도 그 장르에 넣을 수 있을 것이고,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사이보그 009' 같은 전설적인 작품들도 포함시킬 수 있다. 오토모 가츠히로는 '아키라' 라는 전설적인 작품으로 '사이버 펑크' 라는 SF의 한 갈래를 개척하기도 했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 와 '우주전함 야마토' . 토미노 요시유키의 '건담' 시리즈 같은 애니메이션도 SF일 것이고, 최근으로 넘어오면 오타가키 야스오의 '문라이트 마일' 같은 작품들도 손에 꼽을 수 있을것이다. 여기 언급된 작품들은 국내에도 소개된 아주아주 일부의 작품들일 뿐이고, 일본의 SF의 다양성은 바다 건너 우리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임은 분명하다. 이렇게 엄청나게 넓은 일본 SF만화의 바운더리 안에서도 언제나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작가가 있으니.
바로 '일본 SF의 아서 클라크' 라 불리우는 '호시노 유키노부' 이다.
 
그리고, 이 작품 2001 夜物語.   '物語' 는 일본에서 '~이야기' 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니, '밤의 이야기' 정도로 보면 좋다.
번역판에서는 결국 '천일야화' 에서 따온 듯 한 '야화夜話' 라는 제목을 붙였다. '물어物語' 라는 단어는 한국에는 없는 단어이니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원작의 구성 또한 '천일야화' 처럼 '첫번째 밤의 이야기' '두번째 밤의 이야기' ~ 등등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잘 어울린다.
 
작품의 도입부는 SF팬들에게 아주 익숙한 장면이 나온다.
원시인이 어떤 동물의 뼈의 뾰족한 부분으로 사냥을 하고, 기쁨에 겨운 듯 그 뼈를 하늘로 던져 올린다. 그리고 공중에 뜬 그 뼈의 모양은 점차 길쭉한 로켓으로 변화한다. 바로 '아서 클라크' 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의 오프닝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에서도 원작 그대로 사용되었던 이 장면은 호시노 유키노부의 작품에서도 그대로 쓰여진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아서 클라크에 대한 오마쥬인 것이다.
 
작품은 여러 단편들이 차곡차곡 쌓여있고, 언듯 별개인 듯 한 각 작품들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사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작품들 안에는 아서 클라크의 작품이 연상되는 소재나 주제, 사건이 등장하기도 하고, 반물질 이론이나 상대성이론등이 아주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정확한 과학적 근거들로 과하거나 부족함 없이 활용되고 있다.
 
사실 작품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면, 언젠가 한번 씌였던 발상들이 등장하곤 한다.
그것은 SF라는 장르의 특성상, 정해진 과학적 이론 안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발상은 서로 비슷할 수 밖에 없는데, 로저 젤라즈니나 스타니스와프 렘 등의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작품에서 '플롯' 이라는 부분이 작가들 사이에서 공공재로 인식되듯, SF 장르에서도 한번 발표된 발상은 여러 작가들이 되사용하기도 한다. 역시 실례로, 웜홀을 이용한 우주선 도약 항해기능이라던가, 광속으로 날아가는 우주선 안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지구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시간적인 틈이 생긴다던가 하는 발상들 말이다. 이런 발상들은 역시 작가들 사이에서는 공공재처럼 인식되고, 그것을 이용한 다양한 이야기들과는 별개로 평가된다.)
 
지식을 작품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그 분야의 준 전문가 수준이 되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만화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어떤 작품을 위해 전문가를 고용해서 감수를 부탁하기도 한다. (간단한 일례로 '고스트 바둑왕' 같은 작품은 실제 프로 바둑기사가 작품에 등장하는 바둑에 대한 부분을 디테일하게 감수하기도 했고, 복싱만화나 격투기 만화 또한 실제 선수들이 감수를 맡기도 한다.)
호시노 유키노부가 일본의 아서 클라크라고 불리우는 이유들 중 하나도 이 방대한 지식과, 그것을 작품에 녹여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이성적인 해석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부분은 역시, 작가로서의 호시노 유키노부. 바로 단편 작품들이 서로 가지고 있는 유기성이다.
이 단편에서 쓰였던 어떤 작은 소재가, 훨씬 뒤의 다른 단편에 영향을 준다던가, 이 단편에서 일어났던 작은 사건이, 다른 단편의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던가 하는 점들이다. 뿐 만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같다보니 작품집 자체로서의 완성도가 대단히 뛰어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큰 틀 안에서 변화되는 주제의식도 대단히 흥미롭다.
 
이 작품이 쓰여진 건 1980년대 중~후반이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인 한국에서는 신경을 돌릴 틈이 없었지만, 당시 세계적으로 우주개발 열풍이 불었더랬다.
우주정거장과 달기지 계획이나, 우주레이져빔 계획인 스타워즈 프로젝트, 화성 탐사계획 등이 등장했고, 일본의 로봇기술이 유명세를 탔으며, 우주에 대한 낭만적인 꿈들이 가득했더랬다. 풍족한 90년대를 바라보며 희망들이 가득했고, 전 세계젹으로 SF문학 열풍 또한 강렬했더랬다. 우주전함 야마토나 건담시리즈의 본격적인 붐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였고, 호시노 유키노부의 '2001 야화' 도 이 시기에 씌여졌다.
 
그래, 그 당시엔 2000년이라는 해가 멀게만 느껴졌었다.
그 당시의 SF작품들을 보면 2011년엔 세상에 로봇들이 가사를 대신해주고, 전자동 자동차가 거리를 활보하며, 달기지와 화성기지를 오가는 셔틀우주선이 등장할 것만 같았다. 분명 그 당시보다 많은 것들이 발전하긴 했지만, 우주에 대한 부분은 아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달은 여전히 황무지이고, 화성엔 아직 사람이 도달하지 못했으며, 우주를 관광하는 셔틀로켓이 개발되지는 않았다.
1980년대의 SF소설이 2000년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SF소설일 수 있는 이유이다.
이 작품이 여전히 꿈같은 작품일 수 있는 이유이다.
 
새삼, 그때의 꿈과 희망들이 가슴 한켠에서 울컥 솟아오른다.
 
이 거대한 지구 속에서도 '나' 라는 인간은 티끌인데. 무한한 우주 속에서는 무엇일까.
 
이 무한한 공간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왜 생겨났을까.
그리고, 그 속에 나라는 생명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왜 생겨났을까.
 
그래, 그건 아마도 '너' 를 위해서 일 것이다.
 
이런 무한한 공간이 '나' 를 위해서 만들어졌을 리는 없다.
 
그래.
그건 아마도.
 
'너' 를 위해서인 게 확실하다.
 
 
 
"수많은 인간들의 드라마도 , 아득한 곳에서 반짝이는 덧없는 빛줄기일 뿐..." 3권 p. 253
 
 
 
 
 
 
잠깐 작품을 감상해 보시길.
 
 


 


 

 
 
1권의 표지와 도입부. 사실체의 그림이 돋보인다.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두터운 커버 디자인이 재미있다.
최근 일본만화들도 컬러링에는 디지털을 많이 이용하는데, 당시의 수작업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컬러 페이지들도 정겹다.
 
 
 
 



2권의 앞표지와 오프닝.
디테일하고 리얼한 우주선 묘사가 돋보인다.
반물질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반물질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 구체화 시키기는 아직 어려운 부분이다.
 
 
 
 


 
 
장대한 서사가 마무리에 도달하는 3권의 표지와 오프닝.
3권의 첫 단편인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라는 단편은 아주 서정적이면서도 경이로운 작품이다.
작가의 메시지는 바로 이 작품에 들어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기원한다.
언젠가 또 다시 새의 노래, 사람의 목소리, 생명의 속삭임이 머나먼 우주로부터 돌아오기를..." 3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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