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3 : 디럭스 에디션 시공그래픽노블
그랜트 모리슨 지음, 임태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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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의 특성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미래의 총입니다. 

내일의 전쟁에서는 보시는 바와 같이 동물을 원격 조종하여 싸우게 될 것입니다.

생물병기입니다. 의원님.

인간의 새로운 친구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미국 비밀 연구소에서 생체 병기가 완성되었다.

동물들을 소재로 한 Animal Weapon, 통칭AWE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이다. 세 기의 시험기가 탄생했고, 그들에게 WE3 라는 코드명을 붙였다. 개犬가 팀의 리더로서 코드명 원One, 고양이는 투Two, 토끼는 쓰리Three 로 불리게 되었다. 팀 WE3는 작은 몸집과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빠른 감각으로 통풍구와 하수구를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며 위험한 임무들을 충실히 수행한다. 테러조직을 소탕하고, 미국의 적이 될만한 요인들을 성공적으로 암살해 낸다. AWE 프로젝트를 총괄한 상원의원은 대량으로 양산형 모델을 생산하기 위해, 시험기들을 폐기처분 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물인 로잔느 베리 박사는 그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베리박사는 자신의 자식같던 WE3 멤버들을 베이스 연구소에서 탈출시킨다.  



최첨단 탱크 한 대 급의 화력을 갖추고 있는 개犬- 원 , 스텔스 기술이 접목되고 강력한 살상무기로 무장된 고양이 - 투, 지뢰와 독가스 등 대량 살상 무기를 장착하고 있는 토끼 - 쓰리. 이 위험한 병기들을 제압하기 위해 수많은 군인들이 동원된다. 

하지만, 인간의 수배가 넘는 반응속도와 감각을 가지고 있는 WE3에게 군인들과 평범한 무기들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최첨단으로 무장되었으며,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는 것은 가차없이 말살시키도록 프로그램 되어있는 최첨단 생체병기였으니까. 







 이 작품은 이제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미국의 메이져 만화사 '마블'과 'DC'가 아닌 '버티고VERTIGO' 라는 회사에서 나온 작품이다.  버티고는 히어로물 일색인 마블과 DC와는 달리 성인 취향의 진지하고 어두운 작품들을 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V 포 벤데타] 같은 작품들도 버티고가 발굴해낸 역작이다.

WE3 역시 잔인하고 참혹한 묘사가 여과없이 등장한다. 사실, 이정도 묘사는 요즘 아이들이 즐기는 게임이나 만화 등에 비하면 별 것 아니긴 하지만, 국내에서는 [19금] 딱지를 붙이고 발간되었다. 


 작품의 플롯은 아주 단순하다. 

불가능한 임무들을 충실히 수행했던 생체병기 WE3. 하지만, 인간도 아닌 동물 - 그것도 미국 전역의 어느 가정에서나 쉽게 만나볼법한 개와 고양이 그리고 토끼가 모여있는 팀의 해체와 팀원들의 '처리' 는 그들에겐 너무나 쉬운 명령이었다. 이들은 프로그램 유지를 위한 약물 공급만 끊겨도 죽어 없어질 존재들이었다. 그런 WE3 였지만, 인간들의 제어를 벗어난 이상 그들은 우리를 벗어난 맹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특히 정식으로 AWE 프로젝트를 국책사업으로 지원을 받고자 하는'윗대가리' 들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았을 터. 결국 군대를 동원해 연구소를 탈출한 WE3를 제거하려고 하고, WE3 멤버들은 생존을 위해 그들만의 전쟁을 시작한다.


 할리우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전쟁에 특화된 유능한 요원들이 실컷 부려먹히다가 결국엔 효용가치가 떨어져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으로부터 쫓기게 되는 내용. 그런 내용에 주인공을 '동물'로. 게다가 인간들이 가장 사랑하는 동물로 바꾸면 된다. 충분히 교육받고 약간의 말을 할 정도로 언어능력까지 습득했지만, 그래도 동물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 부분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 개犬 인 원은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아주아주 충실한 살인병기 애완견이고, 고양이인 투는 비록 제멋대로인 성격이긴 하지만, 리더인 원을 존중하는 살인병기이다. 토끼인 쓰리는 역시 제멋대로인 모습을 보일때도 있지만, 순한 초식동물의 습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살인병기이다. 

 동물들은 살인병기로 개조되었음에도 애완동물로서의 모습을 유지한다. 주인에게 사랑받던 애완동물로서의 본능이 또렷하지만 자신들에게 적의를 갖는 대상은 가차없이 '처리' 하도록 '프로그램' 되었을 뿐이다. 주인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간다.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한다. 물론 '자신에게 적의를 갖지 않는 한.' 

 그런 연출들이 굉장히 감성적이면서도 만화적, 문학적으로 잘 그려져있다. 모든 컷들이 굉장히 많은 고민을 통해 앵글과 시선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림들도 모두 일러스트처럼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 컷 하나를 봐도,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알 수 있는데, 각 컷의 많은 앵글들이 동물의 시각을 표현하기 위해 애쓴 흔적들을 가지고 있다. 주로 인간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점이라던가,  인간보다 훨씬 빠른 동체시력을 가지고 있는 동물들의 시선을 정적인 네모칸 안에 넣기 위해 시도한 여러가지 표현방법들이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디럭스 에디션' 이라는 제목답게 책의 말미에 DVD의 서플먼트처럼 작가들의 말이 실려있다. 특별한 컷에 대한 작가들의 의도와 아이디어 발상 과정, 작업 과정등이 상세하게 실려있는 것이다.  이런 친절함들을 통해 작품을 더욱 깊이있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


미국 만화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 나아가 미국 문화의 근간이나 다름없다. 

만화는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고, 글과 그림을 통해 다양한 연상작용을 도와주기에 전달력이 그 어떤 매체들보다 빠르다. 미국 만화는 히어로물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했지만, 수많은 스토리 텔러들은 그런 만화를 통해 수많은 메시지들을 전해왔다. 슈퍼맨은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에서 수많은 친구들, 자식들을 전쟁터로 내보내고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태생 자체가 반전反戰과 생명존중에 대한 메시지가 있는 것이다. 배트맨, 스파이더맨, 헐크와 같은 히어로 캐릭터들은 물론이고, 렉스 루터나 조커 같은 악당들 역시 모두 범인류적인 메시지는 물론, 문학작품들 처럼 인간의 본성이나 사회의 이면들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WE 3] 는 보다 또렷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대단히 쉽게 펼쳐내고 있다.

생명 존중은 비단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동물과 식물들. 

그런 메시지들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애완동물들을 통해 적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시종일관 비극적으로 흘러가던 이야기는,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몇 사람에 의해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된다.

해피엔딩의 키는 두명의 과학자와 한명의 노숙자가 쥐고 있다. WE3 멤버 중 하나였던 토끼와, 토끼를 닮은 박사 한명이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다른 둘을 살려낸다.

인간들에 의해 길러지고, 인간들에 의해 개조되고, 인간들에 의해 다른 인간을 죽이도록 명받은 순수한 동물들은 다시 자신들의 자리인, 사람의 품과 무릎 위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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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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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사의 굴욕' 에서부터 시작된 유럽과 오리엔트의 '종교 분쟁' 은 약 250여년 동안 이어졌다. 

1권에서는 십자군 원정의 시작과 예루살렘을 탈환한 1차 원정대의 성과가 그려졌고, 2권에서는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이슬람 세력 안에 자리잡은 십자군 국가를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끈질기게 지켜 나가다가 살라딘의 등장으로 예루살렘을 다시 잃고 큰 위기에 처하는 내용이 그려졌다.   

 250여년간의 분쟁을 매조지하는 [십자군 이야기] 3권은 두권의 책을 합친 것 만큼 방대한 볼륨을 자랑한다. 일단, [십자군 이야기] 3권의 1권에 해당하는 전반부에서는 십자군 국가에게 전략적 요충지인 항구요새도시 '티루스' 까지 뺏길 심각한 위기 에서 구세주처럼 등장한 사자심왕 리처드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전술, 전략은 물론 전투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리처드는 티루스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순식간에 전황을 뒤엎는다. 리처드가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성과를 올린 결정적인 무기는 바로 '함대' 였다. 리처드가 이끈 십자군은 거대한 투석기를 실은 제노바와 피사의 함대를 이용해, 현대전에서의 '함포 사격'과 같은 방식으로 원호를 받으며 바닷가를 따라 이동하며 전략적 요충지들을 점거해 나갔다. 결국 리처드는 열세였던 전황을 우세로 뒤바꿔,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 측과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십자군 이야기] 3권의 중~ 후반부에 걸쳐 중세 유럽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발전과 이슬람 왕국 내에 섬처럼 세워진 십자군 국가의 몰락, 교황 중심이었던 유럽사회의 변화, 그리고 불처럼 타올랐던 '성지 수복' 에 대한 열망이 사그라드는 과정이 차분하게 그려진다. [십자군 이야기] 3권 중~후반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성당 기사단의 최후에 관한 내용이다. 현대의 많은 스토리 텔러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는 성당 기사단에 대한 전설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들이 프랑스와 유럽 정세와 얽혀 상당히 신빙성 있게 풀어진다. 

 [십자군 이야기] 1권에서는 탄크레디와 보두앵 1세가, 2권에서는 문둥왕 보두앵 4세와 살라딘이 인상적인 인물들이었다면, 3권에서는 단연 사자심왕 리처드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일 것이다. 탄크레디와 보두앵 1세, 보두앵 4세, 살라딘과 리처드가 모두 영웅적인 활약으로 인상에 남는다면, 프리드리히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인상에 남는다.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가 매력적인 이유는 거침없는 '인물평' 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들은 추측성 문장을 넣기를 꺼린다. 하물며, 인물평에 대한 부분은 거의 겁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굳이 사가가 인물에 대한 평을 넣을 때는, 다른 권위있는 역사가의 인평을 인용하던지, 참고한 사료와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다른 사료를 참조해 인용하는 데 그친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인물에 관해서만은 거침없이 "~~ 이랬던 것 같다." 와 같은 추측성 문장을 과감하게 쓰곤 한다. 

 [로마인 이야기] 가 로마제국 전반에 걸친 방대한 역사서이지만, [로마 이야기] 가 아니라 [로마인人 이야기] 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역사서들이 각종 사료를 통해 사건의 인과관계를 추론하여 서술하는데 그치는 반면, 시오노 나나미는 그 사건들 직면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추론한다. 당연히 그러려면 일반 역사가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료를 참조해야 할 것이고, 훨씬 더 많은 탐방을 해야 할 것이며, 훨씬 더 많은 비교를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수많은 사료들을 날카롭고 정확하게 정리해서 펼쳐낸 뒤 "이러므로 이랬던 것 같다." 라고 주장하는데, 그 누군들 설득되지 않을쏘냐!! 

 [로마인 이야기] 에서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인간 본연의 권력욕을 파고들었던 그녀의 뛰어난 통찰력은 '신앙' 에 기초했다는 '십자군 원정' 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결국 당시 유럽 사회에서 종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볼모로 한 강력한 권력이었다. 정말 불가사의 하지 않은가? 모든 사람이 한 신을 믿고, 한 책을 믿는다. 완벽하게 점 하나까지 다 믿는다. 그 책에 '태양이 뜨는 쪽이 서쪽이다' 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면, 아마 전 세계는 태양이 뜨는 쪽이 동쪽이냐, 서쪽이냐를 갖고 수세기동안 전쟁을 치를 것이다. '신앙' 이란 그런 것이다. 신앙의 지도자는 신과 비슷하게 추앙받았을 터다. 하늘이 내려준 권력. 교황의 권위는 그런 것이었다.  [십자군 이야기] 에서도 인간의 근원적인 종교적인 본성보다는 권력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렬하게 드러난다. 


역사란 대부분이 '추측', 가설에서부터 시작된다.

기록이란 것은 언제나 100% 객관적일 수 없다. 특히 역사의 기록은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었고,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기록을 날조하고 왜곡시킨다. 우리는 그런 일을 실제로 겪었던 민족이다. 중국에게. 일본에게. 중화 사상에 젖어있던 무렵의 기록,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 의해 무수하게 왜곡 되었던 기록들, 그리고 그에 맞서기 위해 무수하게 각색된 기록들. 결국 후대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중국과 일본, 우리의 각각의 기록들을 비교해 보는 수밖에 없었을 터다. 때문에 국내에서는 역시 비교사학이 크게 우위를 점하고 있다. 

 어떤 기록이든 그것이 절대적인 진실이고, 완벽히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고 접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십자군 이야기] 안에서도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이 접한 기록의 허구성에 대해 명백히 밝히고,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하고 있다. 우리가 [십자군 이야기] 안에서 읽어야 할 부분은 사건과 인물 뿐 아니라 시오노 나나미의 이런 부분들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유럽 사관들의 기록은 물론, 이슬람측의 기록들까지 꼼꼼히 살피고, 중첩된 부분들은 서로 비교하며, 때로는 다른 사학자의 역사서까지 비교해가며 자신이 기록을 접하는 방식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서들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평은 단어 선택 자체가 틀린 것이다. 역사서는 원래 모두가 주관적이다. 역사서는 결코 객관적이 될 수가 없다. 누가 얼마나 더 뚜렷한 인과관계를 가지고 '주장' 을 펼쳤느냐가 '역사' 이다. 얼마나 '덜 주관적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기록들을 모아서, 얼마나 '더 그럴듯한 인과관계' 를 그려서, 얼마나 더 '설득적으로' 풀어내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한 인간이 한 행동을 하는 데에도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다. 내가 이 리뷰를 쓰는 요인만 따져봐도, 족히 열가지는 될 터다. 나는 언제나 읽은 책은 리뷰를 쓰는 습관을 가지고 있고, 일이 다 끝나서 약간의 한가한 틈이 있기도 했고, 마침 컴퓨터가 켜져 있기도 했고, 인터넷도 서버 점검 없이 원활히 잘 돌아가고 있으며, 졸립거나 피곤하지도 않았고, 딱히 다른 할 일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마침 이 책의 리뷰대회가 있기도 했고, 무려 오늘이 그 대회 마감일이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그것에 대해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적었다." 는 기록을 했다면, 후세의 역사가는 바로 그 한줄의 글을 가지고 가설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올린 다른 리뷰들도 찾아보고, 내가 끄적거린 다른 잡문들도 찾아보며,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의 글도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추측으로 가설을 만들어 '주장' 하는 것이 바로 역사이다. 하물며, 한 사람이 아닌, 한 집단이, 한 국가가, 아니, 유럽 전체가 움직인 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십자군 이야기] 는 내가 [로마인 이야기]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이후 세번째 작품이다.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는 [십자군 이야기] 1권을 읽고 난 후 당시의 시대상을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 찾아 읽었다. 확실히 [십자군 이야기] 는 [로마인 이야기] 나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보다 주장을 보다 또렷하게 개진한다. "이 부분은 내 주장이야," 라는 부분이 보다 확실히 와닿는다. 그것은 역시 사료의 빈약함 때문일 터다. 위에도 언급했듯 십자군 이야기는 유럽 전체는 물론 중동지역 전체가 맞물린 거대한 '연합체' 의 충돌이었다. 정말 다양한 성격의 사료들이 정말 다양한 언어로 기록되었을 것이고, 정확성을 가늠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의 서문에 쓴 글귀가 생각난다.

 ""상상해보라, 종교 없는 세상을." 자살 폭파범도 없고, 911도, 런던 폭탄테러도, 십자군도, 마녀 사냥도, 화약 음모 사건도, 인도 분할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도(...)없다고 상상해보라."

이런 문장을 서두에 적었지만, 리처드 도킨스도 종교가 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나 또한 종교 자체가 이런 거대한 비극을 불러 일으킨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십자군 이야기]를 다 읽은 지금, 시오노 나나미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위에도 썼듯, 인간의 행동 요인은 그리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가 결정적인 '구실' 로 작용했음은 확실하다. 십자군 전쟁의 후반부는 단순한 영토 분쟁이었다. 신앙의 힘은 초반에만 활활 타올랐고, 중반부터는 서서히 연료로써의 동력이 떨어져갔다. 

 인류가 '역사' 를 시작한 이래 종교가 함께하지 않은 적은 없다. 그것은 즉, 종교를 구실삼은 분쟁이 끊인 적도 없다는 의미이다. 종교란 지구 위에서 죽음을 자각하는 유일한 생명체가 인간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신과, 사후 세상에 대한 꿈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많은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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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문학동네 소설상 17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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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가 아직 국민학교였던 무렵, 우리 반에도 지능지수가 약간 모자란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때는 그렇게 모자란 아이는 반 아이들이 다 조금씩 도와주는 분위기였다. 학기 중간에 아이들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이 끝나면 선생님은 짝바꾸기를 실행하셨었는데, 그 여자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짝으로 하게 해주고, 그 여자아이와 집이 가까운 아이들을 주변에 앉게 해서 자연스럽게 등하교를 챙겨줄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여자아이에게 찍힌 남자애는 무슨 잘못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땐 어린 마음에도 다들 배려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그때 그 여자아이가 좋아하던 남자아이에게 선택권을 주시던 선생님의 모습도 기억난다. 

 "어떠니, 네가 짝 해줄래?"

 남자아이는 조금 고민하더니, 그 여자아이 옆에 가서 앉았고, 그 여자애는 조금 부끄러워 하며 엄청 환하게 웃었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그리고 난 그 여자아이와 집이 가까웠기에, 역시 그 여자아이와 집이 가까운 다른 여자아이와 짝이 되어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해 내가 집안 사정으로 다른 학교로 전학 갈 때 까지 우리는 자연스레 학교 안팎에서 자주 어울렸더랬다.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세명의 주인공 중 한명인 '일우' 도 지능지수가 약간 모자란 아이다.

하지만, 사람이 달랐던 건지, 아니면 세상이 달라진 건지. 일우는 보호받기는 커녕 학대당했다. 그렇게 깊은 상처를 가지고 안으로, 안으로 자꾸 파고 들게 된 일우. 나는 국민학교 이후로도 쭉 그렇게 지능지수가 약간 모자란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게 되었다. 사실 그런 친구들은 주변에 굉장히 많다. 굳이 만나려고 하지 않아도, 한 학년에 서너명쯤은 있었고,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간 그 아이들 중 한명과 한 반이 될 확률은 생각보다 높았으니까. 20세 이후 나름 열심히 활동했던 교회 청년부 안에도 그런 형이 한명 있었다. 

7~10세 사이의 지능지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서 잘 챙겨주며 사회성을 길러주면, 지능지수가 15~18세 정도까지는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당연히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일반인 수준까지는 못 되더라도, 꾸준히 성장한다.

단지, 그 속도가 느릴 뿐이다. 일우는 그 때문에 가족들에게 학대 당하고, 동네에서 학대당하고, 학교에서도 학대당했다. 

애초에 남들과 동등한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들인 세오시장 상인협회 총무 정기섭과 네오 프로덕션 PD 박상운은 서로의 꼼수가 맞아 떨어지면서 [더 챔피언] 이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일우가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면서 세명의 인생이 맞물리기 시작한다.

 최근 우리 나라의 방송용 TV쇼들은 그야말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천국이다. 대부분의 방송사는 동일한 플롯, 심지어 소재마저 동일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고, 소재만 조금씩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여러개가 난립하고 있다. 이런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치열한 경쟁을 담보로 성공을 꿈꾸는 수많은 도전자들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많고, 문의 갯수는 적다 . 문을 통과하기 위해 옆 사람보다 잘해야 한다. 문을 통과할 때 마다 다른 문이 나타나고, 그 수는 점점 더 적어진다. 단순하게 말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시종일관 발랄하고 경쾌한 필치로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들을 그려나간다. [더 챔피언] 이라는 프로그램 안에 속해있는 일우도, 프로그램을 만든 기섭과 상운도 모두 똑같은 상황이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외길위의 상황. 모두 큰 성공을 바라지도 않았고, 뭔가 대단한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 뿐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회는 거짓말처럼 왔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와 함께, 균형을 이루며 공생의 모습을 하고 있던 상운, 기섭, 일우의 상황 역시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같은 형태로 흘러간다. 세 명이 모두 성공의 달콤함을 맛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셋은 서로를 물고 늘어져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하고 만다. 서로에게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 큰 야망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살기 위해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작품은 아주 잘 만들어진 한편의 블랙 코미디 영화처럼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을 경쾌한 필치와 짜임새 있는 이야기로 담아냈다. 무엇보다 작가의 메시지가 뚜렷하고 군더더기가 별로 없다는 점이 매우 큰 미덕이다. 문장은 간결하고 재기 발랄하면서도 전달력이 뛰어나고, 캐릭터들은 굉장히 입체적이다. 그 와중에도 [더 챔피언]이라는 서바이벌 게임의 소재가 되는 '쓰리컵 대회' 자체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무맹랑하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얼개 속에서 입체적인 캐릭터들과 만나 놀라울 정도의 현실감으로 가공된다. 그것이 작가의 문장과 캐릭터들의 적절한 균형, 적당한 밀고 당기는 호흡과 어우러져 대단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특히, 공생의 모습으로 시작된 세 주인공들의 구도가 서바이벌로 변해가는 과정의 인과관계가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우가 맞이하게 되는 클라이맥스가 너무 안타깝다. 결국 생존을 위해 다시 공생을 시도하는 박상운, 정기섭, 김일우이지만,    일우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는 현실에서 해갈 할 수 없는 법 아니던가. 


순간 김일우는 여기가 어디고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왔는지 잊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붉은 방.

나가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슬퍼. 불쌍해. 한심해.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뭐가 될까.

그때 멀리 어딘가에서 쾅 하고 커다란 빛이 터졌다. 순간 김일우의 심장도 펑 하고 터졌다.

심장이 터지며 가슴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도망쳐!"

p. 297

 

일우가 들은 소리들은, 그 소리들로 느낀 세상은, 그리고 그 안에 속해있는 자기 자신은, 과연 어떻게 느껴졌을까? 











[더 챔피언]의 티져 포스터를 만들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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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호 글 그림 / 애니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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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림수사대]는 사실 아주 새롭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아주 익숙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풍을 쏘고, 하늘을 걸어다니는 환타스틱한 무협의 세계를 서울이라는 도시로 끌고 왔을 뿐이다. 녹림방, 흑룡방, 개방 처럼 무협지나 무협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무림 세력들이 존재하고, 치열한 암수와 화려한 무공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절정의 무공과 절세의 비급, 신묘한 무술들도 모두 등장하며, 세상의 일과 무림의 일을 구분짓는 무협물의 특색도 여지없이 등장한다.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면, 무림이 아닌 무림 바깥, 즉 세상일을 담당하는 '경찰' 이 주인공인 것이고, 이 경찰 내부에 '무림' 일에 관여하는 부서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무림' 이란 일종의 초인집단이다. 우리 사는 세상 속에 일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또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셈이다. 무공을 사용하는 인물들은 '초인' 으로서 일반 소시민들과 접촉하는 일을 줄여야 한다. "강호의 일은 강호에"(강호와 무림은 내용상 동의어이다.) 많은 무협물들은 고강한 무공을 이용해 정부와 역사에 관여하려는 집단과, 그것을 막으려는 집단간의 갈등을 그리기도 했다. 

 [무림수사대] 에서는 애초에 그런걸 막는 공권력을 지닌 무림인 집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목과 같은, 대한민국 경찰에 소속되어있는 무림수사대인 것이다. 이들은 무림인들이 무공을 사용해 평범한 시민들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는다. 무림인들끼리의 정당한 대결은 용인하지만, 그것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 시민들에게 해악을 준다면 공권력의 이름으로 응징하는 것이다. 


 주인공 '지후'는 바로 무림수사대 소속 경찰이다. 

1년 전, 파트너를 잃고 방황하다가 서울 마포구 소속 무림수사대에 파견된 지후. 그곳에서 지후는 새로운 파트너, 팀원들과 새로운 사건을 맡게 된다. 대한민국 무림의 최고수들인 '오대신군' 들이 한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 무림을 떠받치는 큰 문파의 장문인들이기도 한 이들은 사실상 힘으로 모든것이 좌우되는 무림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적절하게 견제하면서 미묘한 균형을 이뤄내고 있기도 했다. 최고수들과 그들의 세력이 흔들린다면 무림은 다시 혼란 속에 빠져들 것이고 그것은 일반 시민들의 사회에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무림수사대는 그러한 점을 막기 위해 오대신군의 살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고, 지후와 팀원들 역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사건을 조사하면서 지후는 1년전에 죽은 파트너, '이현' 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의 큰 틀은 전형적인 무협물의 그것과 같다.

장르의 특성상, 클리셰는 피할 수 없다. 이미 '무협' 이라는 장르 안에서 나올 수 있는 플롯은 모두 다 나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무공' 이라는 소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핸디캡도 있다. 결국 정해진 틀 안에서 정해진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빚어내느냐가 관건이다. 결국은 클리셰를 얼마나 잘 갖고 노느냐가 관건이다. 

'만화' 는 이야기의 클리셰에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연출자의 역량이 너무나 크게 좌우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림 실력과 그림체, 컷의 모양과 크기, 배치, 앵글, 캐릭터 디자인, 디자인적 센스, 회화적 센스는 물론, 대사와 말 주머니 모양, 효과음의 레터링까지. 거기에 문학적인 연출기법까지 활용하면 한가지 플롯으로도 수백가지의 다른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이충호 작가는 오랜 필력답게 그 모든걸 다 활용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먼저 명랑 만화 [마이러브] 에서부터 시작되던 소년 만화틱한 그림체에 기괴할 정도의 변형을 대담하게 주고, 먹을 많이 사용해서 그림에 무게감을 얹었다. 비교적 어두운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그림체를 변화시킨 것이다. 덕분에 '무협' 과 '경찰' 이라는 소재들과 어우러져 느와르 영화같은 분위기를 잔뜩 풍기게 됐다. 컬러의 사용 또한 탁월했다. 전에 웹에 연재할 당시 작가 본인이 직접 설명하기도 했는데,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메시지를 컬러를 활용했다. 작가의 메시지를 전함과 동시에, 흑백의 나눔이 분명한 원화와 톤으로만 변화를 준 컬러링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끌어 올릴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마이크 미뇰라의 [헬보이], 마크 밀라의 [씬씨티] 등을 효과적으로 벤치 마킹하여 웹툰의 그래픽 노블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웹툰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 - 그림 퀄리티의 하락 - 를 일소하는게 크게 기여했다.  


가로 연출에 익숙한 출판만화 시대의 작가가 웹툰에 적응하기란 아주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훌륭하게 세로 연출 작품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다시 가로 연출로 편집한 애니북스 편집부측의 센스도 충분히 칭찬할 만 하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라고 할만한 강렬한 도입부인데, 마지막 부분, 책의 양면이 나뉘는 부분을 활용한 모양새가 정말 빼어나다.

책 곳곳에 이런 센서블한 편집들이 눈에 띈다. 웹툰으로서도, 웹툰을 책으로 옮긴 작품으로서도 대단히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강렬한 색채의 대비. 

작가는 의도적으로 테마 컬러를 적절히 활용한다. 

캐릭터의 성격과 시퀀스의 성격을 동시에 드러내며 그 안에서 작가의 함의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액션씬들을 빼놓을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하는데, 이 부분은 작가의 고집이 느껴지기도 한다. 전체적인 완성도에서는 훌륭하지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정련되고 무거운 느낌이라 다소 경직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부분에서 세로 연출을 처음 하는 가로 연출 전문 작가의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연재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픽 노블에 대한 의식을 많이 한 듯, 구어체의 대사도 지나치게 사용한 감이 있어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후속작들에서는 이러한 경향들이 많이 감소되었다.) 


[무림수사대]는 전반적으로 아주 훌륭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무협' 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권선징악' 이다. 작품의 성패는 나쁜놈은 얼마나 악랄한가, 주인공은 얼마나 큰 고비를 겪어내며 영웅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그리고 나쁜놈은 어떻게 응징되는가에서 갈린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100점짜리 무협장르물은 아닐수도 있다. 권선징악보다는 주인공 지후의 내면적인 성장과 과거의 청산에 대해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부분은 태생이 '소년'만화가인 작가의 본성일 터. 장르에 충실하지 못했다기보다, 장르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주인공 지후는 몸은 어른이지만 소년같은 인물이다. 소년만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지만, 가족처럼 따르던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이 깊게 박혀있다. 지후의 과거가 '이현' 이라면 지후의 현재는 '백운' 이다. 그리고, 지후는 '소년' 이기에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과거를 직시하고 현재를 밟아야만 가능하다. 이충호 작가는 이러한 메시지를 무협이라는 '과거' 와 웹툰이라는 '현재', 그래픽 노블이라는 '미래'로 담아냈다. 지후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일면이기도 하지만, 한국 만화가 처해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한국 출판만화 시장은 죽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일터다.

하지만, 언제나 생로生路는 사로死路 안에 있고,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는 법. 

웹툰은 새로운 만화의 활로로 발전해 나가고 있고, 지금도 수많은 작가들이 골방에서 종이와 펜과 잉크로, 타블렛과 모니터로 꿈을 그려가고 있다. 그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위로와,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  



ps. 비슷한 느낌의 무협만화를 한편 소개하자면, 단연 '브레이커'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충호 작가와 같은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스토리 작가 '전극진' 이 글을 쓰고 '카마로' 라고 필명을 쓰는 '박진환' 작가가 그림을 그린 '브레이커' 라는 작품이다. 1부가 10권으로 완결되었고, 2부[브레이커 N.W] 가 다음 웹툰에서 연재중이며 현재 3권까지 발간되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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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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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미국 문학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로빈쿡, 존그리샴, 리처드 매드슨, 스티븐 킹은 물론, 헤밍웨이, 레이몬드 카버, 토니 모리슨, 하퍼 리, 폴 오스터, 코멕 매카시는 물론 최근에 접한 마이클 셰이본과 팻 콘로이, 조너선 샤프런 포어 까지. 그래픽 노블 스토리 텔러와 드라마 작가들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할거다. 엔터테인먼트가 가득한 장르에서부터 르포타주에 가까운 리얼리즘까지. 

 뿐만 아니라 문학적 표현의 폭도 굉장히 넓다. 언제나 참신한 화법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실험적인 표현들이 시도된다. 아, 그러고 보니 잭슨 폴록,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도 미국 문화의 범주 안에 넣어야 겠구나. 다양한 문화가 모인 덕인지 미국 예술은 정말 다양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다양하다. 문학에서도 그러한 특징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우리의 편협한 시각 속에서 "이것도 책이야? " "이것도 소설이야?" 라고 부를만한 작품들은 대부분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일 것이다. 아 난 물론  가카같은 '종미'는 절대 아니다. 미국엔 가본적도 없고, 미국 친구도 없고, 사실 그닥 가고싶지도 않다. 하지만, 미국 문화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 만큼은 존중하고, 좋아한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에서 보았던 깜짝 놀랄만한 파격적인 '문학적 표현' 들을 [깡패단의 습격] 안에서도 여지없이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깡패단의 습격]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모든 세대에 고루 어필할만한 포인트가 있었으며, 메시지가 좀 더 보편적이었다는 점이 '2011 퓰리처 소설상' 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을 터다.   



작품상 가장 중요한 인물, 아니, 이 작품 안에서 이런 표현은 의미가 없을터다. 작품상 기준점이 되는 인물인 '베니' 는 음반 회사의 프로듀서이다. 밴드를 발굴, 기획, 관리는 물론 전체적인 활동의 컨셉까지 잡아주는 역할이다. 베니의 비서인 '샤사' 가 '알렉스' 와 만나 하룻밤을 보내는 내용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각 챕터별로 시간과 화자가 끊임없이 바뀌게 된다. 첫 챕터가 현재의 사샤의 이야기이고, 두번째 챕터는 첫 챕터보다 과거의 베니의 이야기이다. 세번째 챕터는 갑자기 베니가 고교시절이었을 무렵의 '리아' 라고 불리는 소녀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네번째 챕터는 리아가 친구 조슬린, 그리고 베니의 밴드가 함께 만났던 '루' 라는 늙은 음반 프로듀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시간은 세번째 챕터보다 훨씬 과거로 젊은 시절의 루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매 챕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간과 공간, 화법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주인공 시점으로, 3인칭과 1인칭을 왔다 갔다 하고, 각종 도표로 꽉 찬 PPT 화면 같은 연출로 한 챕터가 이어지기도 하고, 기사와 편짓글이 반씩 나뉘어 실려있는 연출도 있다. 한마디로, 집중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흐름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전 챕터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세 챕터쯤 뒤에 흘러가듯 지나가기도 하고, 몇 챕터 전 이야기 안에서 지나가듯 흘러간 인물이 이번 챕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앞에 나왔던 사건의 원인이 훨씬 뒤에 나타나기도 하고, 챕터 별 캐릭터의 행동 요인 역시 챕터 곳곳에 파편처럼 흩어져있다. 챕터가 총 19개인데, 19명의 화자,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정말 읽기 까다로운 작품이다. 이런 비슷한 화법을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 이름은 빨강]의 경우엔 서사의 흐름에 따라 화자만 바뀌는 형식이어서 읽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깡패단의 습격] 은 [내 이름은 빨강] 보다는 좀 더 까다롭다. 


 집중해서 책을 읽다보면, 예전에 한때 인터넷 상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케빈 베이컨 놀이' 가 떠오른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일군의 학생들이 '케빈 베이컨' 과 함께 다른 배우들을 함께 출연했던 영화로 연관시키는 놀이에서 시작된 이 법칙은, 최대 4다리만 거치면 모두가 케빈 베이컨과 연관이 되는 재미난 현상을 보여주었더랬다.

예를들어, 마이클 더글라스와 케빈 베이컨을 연결하려 해 보면, 마이클 더글라스는 블레어 브라운이라는 배우와 센티널이라는 영화에 함께 출연을 했고, 블레어 브라운은 러버보이라는 영화에 케빈 베이컨과 함께 출연을 했다. 마이클 더글라스는 두단계만 거치면 케빈 베이컨과 연결된다. 재미있는 점은 어떤 무명 배우를 떠올려도 거의 네 단계 안에 다 연관이 된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송혜교 같은 국내 배우를 떠올려봐도 된다.

송혜교는 이병헌과 '올인'이라는 드라마에서 함께 연기를 했었다. 그리고 이병헌은 '나는 비와 함께 간다' 라는 영화에서 엘리아스 코티즈와 함께 연기를 했고, 엘리아스 코티즈는 노보체인이라는 영화에서 케빈 베이컨과 연기를 했다.

이렇게 송혜교도 3단계만 거치면 케빈 베이컨과 연관이 된다. 

이 놀이는 여러 대학에서 SNS의 파급력을 연구할때 비슷한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페이스 북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나도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이 놀이에서 '함께 출연한 작품' 을 '함께 다닌 학교' '함께 다닌 교회' '함께 가입한 온라인 커뮤니티' 등으로 연관시키면 엄청나게 크고 복잡한 거미줄 같은 인맥을 발견할 수 있을터다. 

이 작품은 이런 사회 현상을 너무나 절묘하게 잡아내고, 묘사하고 있다.

사샤의 이야기로 첫 문을 연 [깡패단의 습격]은 케빈 베이컨 놀이와 비슷하게 챕터와 챕터; 인물과 인물의 이야기가 물리고 물린다. 사샤가  모시던 상사 베니, 베니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던 리아, 리아와 잠깐 인간적인 관계가 있었던 늙은 프로듀서 루, 루가 젊은 시절 낳은 아들 롤프, 루가 정부였던 민디, 아들 롤프, 딸 샬린과 함께 떠났던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죽어가는 루가 임종을 앞두고 불렀던 과거의 친구들, 그 자리에 참석한 리아, 학창시절 리아, 베니 등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던 스코티...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간다.  


우연같은 만남은 필연적으로 또다른 우연을 낳는다. 우연과 우연 속에서 인연과 인연이 연결되고, 촘촘하게 얽힌 인연과 우연의 거미줄 사이로 또다른 우연이 걸려드는 것은 필연일 것이다. 결과는 원인을 낳고, 원인은 결과를 낳으며, 그 결과는 또 다른 원인을 낳는다. 필연적으로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이 모두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 하나의 결과는 여러개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맞아 떨어졌을 때 발생되는 경우가 많다. 원인들이 우연히 결합되고, 그 결합된 것들이 우연히 결과를 도출해내고, 그 결과 역시 우연히 다른 무언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란 그렇게 우리에게 결코 선택권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는다.  


 누구나 늙는다

그리고, 누구나 죽는다. 

 시간의 흐름은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빨라진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마치, 죽지 않을 것만 같이 느껴진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다른 세상 사람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영원히 내 편일 것만 같고, 영유하는 모든 시간들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젊음을 지나 육체가 서서히 쪼그라들어가는 시점이 찾아오면, 시간은 더이상 내 편이 아니고, 모든 시간들은 칼날처럼 육신을 쪼아대기 시작한다. 무덤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가다, 옆에 놓여있는 삽을 주워들고 열심히 웅덩이를 파기 시작하면, 언젠가 그 웅덩이 위로 종잇장처럼 팔랑대며  고꾸라질 터다. 삶이 결국엔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젊음이 눈부시게 느껴진다. 

 그래, 어쩌면 [은교]의 이적요 처럼, 그런 눈부신 젊음 앞에 눈이 멀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젊음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질터다.

아아, 그래서 제니퍼 이건은 "시간은 깡패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우리는 깡패같은 시간에게 모든 걸 내어주고, 비참하게 쪼그라들어 죽어야만 하는걸까?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들이 수많은 결과를 낳고, 그 수많은 결과들이 또다시 수많은 행동 요인이 되어, 스코티는 시간이라는 깡패와 대면하게 된다. 한때는 화려한 뮤지션이었으나, 이혼당하고 노숙자로 살아가던 스코티 하우스먼. 


"시간은 깡패야. 그렇잖아?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p.451


 우리는 필멸의 존재이다. 태어나는 그 순간, 죽음으로 가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째깍째깍. 시간은 우리의 모든것을 앗아간다.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누구와 우연히 만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다른 누구를 우연히 만나고, 또 사랑하고, 또 미워하게 될 것이다. 사실, 시간이라는 깡패는,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늙더라도, 약해지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고, 자라는 법이니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시간이라는 깡패는 우리에게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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