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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 ㅣ 문학동네 소설상 17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5월
평점 :
국민학교가 아직 국민학교였던 무렵, 우리 반에도 지능지수가 약간 모자란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때는 그렇게 모자란 아이는 반 아이들이 다 조금씩 도와주는 분위기였다. 학기 중간에 아이들에 대해 어느정도 파악이 끝나면 선생님은 짝바꾸기를 실행하셨었는데, 그 여자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남자아이를 짝으로 하게 해주고, 그 여자아이와 집이 가까운 아이들을 주변에 앉게 해서 자연스럽게 등하교를 챙겨줄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여자아이에게 찍힌 남자애는 무슨 잘못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땐 어린 마음에도 다들 배려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그때 그 여자아이가 좋아하던 남자아이에게 선택권을 주시던 선생님의 모습도 기억난다.
"어떠니, 네가 짝 해줄래?"
남자아이는 조금 고민하더니, 그 여자아이 옆에 가서 앉았고, 그 여자애는 조금 부끄러워 하며 엄청 환하게 웃었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그리고 난 그 여자아이와 집이 가까웠기에, 역시 그 여자아이와 집이 가까운 다른 여자아이와 짝이 되어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해 내가 집안 사정으로 다른 학교로 전학 갈 때 까지 우리는 자연스레 학교 안팎에서 자주 어울렸더랬다.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세명의 주인공 중 한명인 '일우' 도 지능지수가 약간 모자란 아이다.
하지만, 사람이 달랐던 건지, 아니면 세상이 달라진 건지. 일우는 보호받기는 커녕 학대당했다. 그렇게 깊은 상처를 가지고 안으로, 안으로 자꾸 파고 들게 된 일우. 나는 국민학교 이후로도 쭉 그렇게 지능지수가 약간 모자란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게 되었다. 사실 그런 친구들은 주변에 굉장히 많다. 굳이 만나려고 하지 않아도, 한 학년에 서너명쯤은 있었고,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간 그 아이들 중 한명과 한 반이 될 확률은 생각보다 높았으니까. 20세 이후 나름 열심히 활동했던 교회 청년부 안에도 그런 형이 한명 있었다.
7~10세 사이의 지능지수를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주변에서 잘 챙겨주며 사회성을 길러주면, 지능지수가 15~18세 정도까지는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당연히 적절한 교육을 받으면 일반인 수준까지는 못 되더라도, 꾸준히 성장한다.
단지, 그 속도가 느릴 뿐이다. 일우는 그 때문에 가족들에게 학대 당하고, 동네에서 학대당하고, 학교에서도 학대당했다.
애초에 남들과 동등한 기회조차 얻을 수 없었다.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들인 세오시장 상인협회 총무 정기섭과 네오 프로덕션 PD 박상운은 서로의 꼼수가 맞아 떨어지면서 [더 챔피언] 이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일우가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면서 세명의 인생이 맞물리기 시작한다.
최근 우리 나라의 방송용 TV쇼들은 그야말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천국이다. 대부분의 방송사는 동일한 플롯, 심지어 소재마저 동일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고, 소재만 조금씩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여러개가 난립하고 있다. 이런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치열한 경쟁을 담보로 성공을 꿈꾸는 수많은 도전자들의 드라마를 보여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많고, 문의 갯수는 적다 . 문을 통과하기 위해 옆 사람보다 잘해야 한다. 문을 통과할 때 마다 다른 문이 나타나고, 그 수는 점점 더 적어진다. 단순하게 말해,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시종일관 발랄하고 경쾌한 필치로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들을 그려나간다. [더 챔피언] 이라는 프로그램 안에 속해있는 일우도, 프로그램을 만든 기섭과 상운도 모두 똑같은 상황이다. 다른 선택지가 없는, 외길위의 상황. 모두 큰 성공을 바라지도 않았고, 뭔가 대단한 보상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 뿐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회는 거짓말처럼 왔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와 함께, 균형을 이루며 공생의 모습을 하고 있던 상운, 기섭, 일우의 상황 역시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같은 형태로 흘러간다. 세 명이 모두 성공의 달콤함을 맛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셋은 서로를 물고 늘어져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하고 만다. 서로에게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각자 큰 야망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살기 위해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작품은 아주 잘 만들어진 한편의 블랙 코미디 영화처럼 우리 사회의 한 부분을 경쾌한 필치와 짜임새 있는 이야기로 담아냈다. 무엇보다 작가의 메시지가 뚜렷하고 군더더기가 별로 없다는 점이 매우 큰 미덕이다. 문장은 간결하고 재기 발랄하면서도 전달력이 뛰어나고, 캐릭터들은 굉장히 입체적이다. 그 와중에도 [더 챔피언]이라는 서바이벌 게임의 소재가 되는 '쓰리컵 대회' 자체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무맹랑하지만, 그것이 이야기의 얼개 속에서 입체적인 캐릭터들과 만나 놀라울 정도의 현실감으로 가공된다. 그것이 작가의 문장과 캐릭터들의 적절한 균형, 적당한 밀고 당기는 호흡과 어우러져 대단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특히, 공생의 모습으로 시작된 세 주인공들의 구도가 서바이벌로 변해가는 과정의 인과관계가 대단히 설득력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우가 맞이하게 되는 클라이맥스가 너무 안타깝다. 결국 생존을 위해 다시 공생을 시도하는 박상운, 정기섭, 김일우이지만, 일우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삶의 본질적인 문제는 현실에서 해갈 할 수 없는 법 아니던가.
" 순간 김일우는 여기가 어디고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왔는지 잊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붉은 방.
나가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슬퍼. 불쌍해. 한심해.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뭐가 될까.
그때 멀리 어딘가에서 쾅 하고 커다란 빛이 터졌다. 순간 김일우의 심장도 펑 하고 터졌다.
심장이 터지며 가슴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도망쳐!"
p. 297
일우가 들은 소리들은, 그 소리들로 느낀 세상은, 그리고 그 안에 속해있는 자기 자신은, 과연 어떻게 느껴졌을까?

[더 챔피언]의 티져 포스터를 만들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