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거리
아사노 이니오 지음, 이정헌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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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한 소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타스쿠. 

원래 언덕이었던 토지를 깎아 아파트 단지를 세워서 채광이 좋다고 주민들은 '빛의 거리' 라고 부르는 이 뉴타운에 아빠와 단둘이 거주하는 타스쿠는 뜻밖에도 '자살 도우미' 이다. 학교에도 가지 않고 시간이나 죽이려고 아빠의 노트북을 빌렸다가 자살 지원자들의 커뮤니티 사이트를 발견한 타스쿠가 생각해낸 돈벌이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비용으로 자살 지원자를 찾아 자살을 도와주고 그 최후를 지켜봐 주는 것이다. 타스쿠는 자살할 사람들이 자살하는 그 순간까지 용기를 갖고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자살하는 사람의 휴대폰을 챙김으로써 소임을 다한다. 

 기껏해야 중학생 정도인 타스쿠에게는 하루코라는 열 여섯살 짜리 여자친구가 있었다. 

연인까지는 아니고, 호감은 가지고 있지만, 서로가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는 묘한 관계인 친구였다. 학교를 안 가고 텅 빈 아파트 단지안에서 마음을 나눌 만한 사람은 타스쿠에겐 하루코, 하루코에겐 타스쿠 뿐이었다. 어느날, 타스쿠는 밤에 자판기 앞에 나왔다가 총을 머리에 대고 있는 한 중년의 남자를 발견한다. 딸과 아내를 죽이고 나왔다며, 신세한탄을 늘어놓은 남자는 타스쿠에게 방아쇠를 당겨달라고 부탁하고, 타스쿠는 자살 도우미의 본분을 살려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 남성의 머리에 총을 쏜 것이다. 

타스쿠는 평소처럼 죽은 남자의 휴대폰을 챙기던 도중, 누군가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을 발견한다.

귀찮아하며 휴대폰을 끄려고 했던 타스쿠는 휴대폰 액정화면에 뜬 발신인의 이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바로 하루코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타스쿠는 하루코의 아빠의 머리에 총을 쏜 것이다. 



 이야기는 크게 세 덩어리의 이야기가 서로 연관을 맺고 있다. 

가장 중심적인 이야기는 타스코와 하루코 이야기이고, 그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호이치에게 딸려 있는 가족인 사토시와 호이치인지 사토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둘 중 한명의 딸이라고 생각되는 모모코로 이루어진 묘한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약간은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으며 작가 자신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만화가인 노츠와 사요 커플이 등장한다. 

이 셋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착실하게 진행되어 나가며 '빛의 거리' 에 살고 있는 다른 주변 인물들도 골고루 등장하며 전체적인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도심과 멀찍이 떨어져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모여있는 이른바 '뉴타운' 은 처음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심 주변의 위성도시에 이른바 '신도시' 를 개발하는 방식으로 도심지역에 집중되어있는 인구를 분산시키고 위성도시들을 발달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 방식은 일본으로 유입되었고, 뒤이어 우리나라에도 유입되어 지금은 서울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일찌감치 이 방식의 실패를 인정하고 대규모 뉴타운 건립 계획을 모두 철회했으며, 일본에서 역시 그 부작용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우후죽순으로 개발된 수많은 뉴타운들은 더이상 새로운 인구 유입이 되지 않아 고령의 노인들만이 거주하는 일종의 유령도시처럼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의도했던 도심의 인구분산도 이뤄지지 않고, 주변 개발 역시 이뤄지지 않으며 일종의 고립된 섬처럼 정체되어 버렸다. 

이런 현상을 소설로 옮겼던 것이 '오쿠다 히데오' 의 [꿈의 도시] 라는 작품이었다.


[꿈의 도시] 와 [빛의 거리]를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글로 묘사된 '꿈의 도시' 의 황량한 느낌과  아사노 이니오의 펜터치로 묘사된 '빛의 거리' 의 황량한 느낌은 대단히 흡사하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거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도 묘하게 접점이 있지만, 시기상으로 뉴타운이 고스트타운이 되기 전에 발표된 아사노 이니오의 [빛의 거리]가 좀 더 희망적인 이야기들을 담아내고 있다. 만화의 장점을 살린 넉넉한 상상력과 자극적인 소재들 역시 눈에 띈다. 


아사노 이니오는 일본에서도 문학적인 만화가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만화가 소설이 되고, 드라마가 되는 이른바 '원소스 멀티 유즈' 가 활발한 컨텐츠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전작인 [소라닌]의 경우에는 원작이 거의 그대로 텍스트로 옮겨져 소설로 발표되기도 했고, 영화 역시 원작의 시나리오가 거의 그대로 브라운관에 옮겨지기도 했다. 

만화만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문학적인 묘사를 즐기며 현실의 이야기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원고지 위에 옮겨 넣기를 갈구하는 그의 성향은 [소라닌], [빛의 거리]를 이어 최근작인 [잘자, 뿡뿡] 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사실, [빛의 거리] 는 전작인 [소라닌]과 근작인 [잘자, 뿡뿡] 에 비하면 가장 단점이 많은 작품이기도 하다.

일단 중심적인 인물인 타스코가 가지고 있는 지나치게 싸이코패스, 쏘시오패스 적인 성향에 대한 설득력이 거의 없다. '아니 대체 이 애는 나이도 어린게 어떻게 이렇게 된거야?' 라는 의문에 대한 힌트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것 만으로 아이가 이렇게 되기에는 너무 근거가 빈약하다. 오히려 더 끔찍한 과거를 겪은 하루코의 성격과 비교해봐도 타스코는 지나치게 달관한 느낌이다.

이런 캐릭터가 작가의 의도였을 수는 있겠으나, 조금 더 근거를 튼튼하게 만들었으면 이야기 전체가 보다 단단해졌을 것이다. 

그 외에 이야기의 흐름과 큰 관계가 느껴지지 않는 뜬금없는 에피소드들 역시 이야기의 완성도를 상당히 떨어뜨리는 요소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문학적인 느낌이 폴폴 풍기는 멋진 작품임은 확실하다. 


언제나 현대문학에서는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획득되는 행복에 관해 이야기해왔다.

사람은 독자적인 존재이기에, 혼자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행 역시 타자와 얽히면서 생겨난다. 불행이 두려워 소통을 거부하면, 행복 또한 얻을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행복에 가장 가까운 것은 '돈' 일 터다. 이 작품 안에서도 '돈' 은 등장인물들이 행복에 가까워지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연인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돈' 은 너무나 중요한 요소가 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물약이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신비의 물약이다.

하지만, 바로 이 '돈' 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한 '인간' 의미는 그 사람의 연봉, 부동산, 통장 안의 잔고로 결정되어진다. 때로는 자기 자신마저 스스로를 그 숫자들로 이해한다.

통장에 찍혀있는 숫자를 보며 행복해하고, 때론 불행해한다.  

 

글쎄, 과연 어떤 삶이 옳을까?

과연 삶의 의미는 어떻게 잴 수 있는걸까?


문학이나 만화, 예술, 철학이 그런 답을 내려주지는 않고, 내려줄 수도 없다. 

작가나 철인들도 그저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니까.


일단 아사노 이니오는 이렇게 말한다.


"의미가 있든 없든, 그런거 상관없잖아. 

중요한 건 무엇을 믿으면 행복해 질 수 있나... 그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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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오스 폴립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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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딱 한마디로 소감을 풀어보자면, 퓰리쳐 소설상에 노미네이트 된 미국 현대소설을 한 편 감상한 느낌이었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들 중,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풀어낸다는 점을 포함시키는 데에 동의한다면, 이 한 편의 만화는 문학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하리라.

만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들 중, 주인공의 내면이나 자아를 시각적인 표현, 즉 그래픽 내러티브로 구현해 낸다는 점을 포함시키는 데에 동의한다면, 이 한 편의 만화는 충분히 높은 반열에 올려 놓아도 무방하리라.

 

 유망한 건축학과 교수로서 탄탄대로의 인생을 걸어왔지만, 이혼남. 돌싱인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오십번째 생일에 차가운 비를 맞으며 자신의 전재산이 화마에 집어 삼켜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반백년을 산 몸뚱이 하나와 지갑안에 든 얼마간의 현금만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보금자리였던 맨하탄을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페이퍼 아키텍트' 라고 불리우는 인물이었다. 그는 존경받는 건축가였지만, 그의 명성은 어디까지나 설계 때문이었고, 그 설계를 가지고 실제로 지어진 건물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설계 가운데 실제로 지어진 건물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많은 공모전에서 입선했고, 온갖 상을 받았으며 이것만 가지고도 상당히 성공적인 경력을 얻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가 전재산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고 무작정 떠나서 도착한 '어포지' 라는 시골 마을에서 얻게되는 직업은 자동차 수리공이었다.

이전까지는  종이 위에서나 가능한, 이론과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돈을 벌었지만, 이제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자동차를 수리하게 되고, 나아가 부품들을 가지고 거의 못 움직이게 된 자동차를 수리하게 되기도 한다.

자동차 수리점 사장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지난 50년과는 완벽히 다른 환경속에서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된다. 그다지 화목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 자동차 수리점 사장 '스티플리 메이저' 부부와 그 아들, 그리고 주변인들과 섞여들면서 지나온 세월들을 돌아보게 된다. 

 

 작가는 마치 현실인식, 자아성찰, 현대문명, 자본주의, 가족, 연인, 외로움, 사랑, 타인과의 관계 등 인생의 거의 모든 것들을 모두 담아내려 한 듯 보인다. 어쩌면, 작가인 데이비드 마추켈리가 품고있는 모든 사상을 그려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터다. 재미있게도 모든 페이지에 넘버링이 되어있지는 않지만, 책 정보에 적혀있는 344페이지에 달하는 볼륨이 그것을 증명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작품 초반에 작가는 "만약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이 단순히 자아의 연장이라면 어떨까?" 라는 질문을 던진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각 개인이 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줄 것이고, 그 때문에 어떤 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서로 잘 지내는 듯 보이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안 그런지 설명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한다.(더불어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 초반에 던지는 이 화두야말로 아스테리오스 폴립의 삶을 통해 작가가 증명코자 하는 명제이다.

 대학이라는 공간과 교수라는 직함은 아스테리오스 폴립에게 다른 사람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했다. 때문에 그는 각자 자신의 세계를 가진 수 많은 학생들을 평가하고, 때론 모욕할 수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세계관을 주장하고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였던) '하나', 그리고 그 주변의 예술가들과 아스테리오스 폴립이 어포지에서 겪고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각자가 경험하는 자기만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어포지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동안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들을 깨닫게 된다. 특히 그가 사랑하는 아내, 하나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인식하게 되는데, 그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녀만의 세계를 충분히 존중하고 인정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모든 상황을 자신의 현실속에서 풀어내려 했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인 하나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라는 필터로 걸러내기 바빴던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너무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의 그러한 행동 방식이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한대로 주변 환경들이 그에게 그런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와 가장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하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의 근원이었던 셈이다. 

 

 나는 작가가 아스테리오스 폴립의 삶을 통해 우리가 타인들과 맺는 관계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 각자가 경험하는 현실은 오롯하게 그 사람만의 것이다. 대학교수에서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고, 그것은 결코 타인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다. 각자에겐 그들 각자만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타인과 교감할 수 없고, 결국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특히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파국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상당히 심오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아스테리오스 폴립과 하나의 말다툼 장면이나, 발바닥의 물집에서부터 시작되는 파노라마같은 하나와의 기억 같은 씬들(다시 언급하지만, 책 전체에 페이지 넘버링이 전혀 없어서 페이지수를 적을수가 없다) 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단순하고 평범한 듯 하면서도, 디테일하고 사랑스럽다. 종종 등장하는 팝아트와 모던아트를 넘나드는 참신한 발상의 그림들로 자아나 현실인식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풀어내기도 하고, 평이한 흐름의 이야기를 실험적이고 기발한 컷 연출로 단조로움을 극복하기도 하고, 특히 깜짝 놀랄만한 마지막 페이지는 작품 전체의 여운을 오랫동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 세상에 60억명이 있다면, 60억개의 현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현실들 중, 가장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 이라고 말하고 있다.  

 

평생, 한번쯤은 꼭 읽어보고, 두번 세번 곱씹어볼 만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왜 타인과의 관계에 몰두하는가?

그래, 어쩌면, 인간은 태생이 외롭기 때문일수도 있다.

다들 자기만의 현실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외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타인을 갈구한다. 

수많은 의문과, 고민과, 고통 속에서도,

한순간의 행복. 

그것이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고, 살아갈 힘을 주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 행복은 아마도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생겨나게 되리라.

 

마지막으로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아스테리오스 폴립과 하나가 키웠던 고양이 '노구치'의 죽음에 관해 나눈 대화 부분을 옮겨보고자 한다. 나도 고양이를 키워서인지 쉬이 보아넘길 수 없었다.

 

하나: "...내 생각에 그 녀석은 잘 살다 간 것 같아."

아스테리오스 폴립: "그게 다 당신 덕분이지."

하나:"당신도 알겠지만, 그 녀석은 내가 어떻게 생겼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어. 가끔은 밤에 내가 정말 안좋은 모습을 보이는 때도 있었는데도...

그 녀석은 늘 나를 찾아와서 내 옆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잤어.

심지어 마지막까지도 말이야. 그 녀석 신장이 고장나고, 폐가 고장나고...

그런데 난 차마 그 녀석을 보낼 마음이 없었어. 그럴 힘도 없었고...

그래도 그 녀석은 여전히 오는 거야. 마치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건 마치, 자기가 무슨 일을 겪든 간에 아무 상관없이, 언제든지 가능한 한 행복을 부여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어. 

그게 겨우 매일 5분에 불과한 시간이라도 말이야.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내내 나는 그 녀석이 정말로 행복했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아스테리오스 폴립:" 아마도...그거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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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 - 신화가 된 영웅들의 모험과 변신, 그리고 사랑
구본형 지음 / 생각정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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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문명의 상징인 기독교의 성경은 헬라어(그리스어)로 쓰여졌다. (신약은 라틴어)

성경이 처음 쓰여졌던 당시에 서구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였던 언어가 그리스어였기 때문이었다. 철학, 종교, 과학, 예술. 모든 서구문명은 모두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인간의 지적인 능력은 이미 그 시대에 모두 개화되었고, 실제로 지적인 능력은 그 시대의 인간으로부터 단 1mm도 성장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단지 축적된 지식의 차이만 있을뿐, 기본적인 인지능력과 사고력, 창조력등은 그 시기의 인간들과 거의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에 찬성하든 반박하든 상관없다. 어쨌든, 서구문명의 근간은 그리스에 기인한다. 종교는 물론이고 크게는 유럽 대륙의 이름부터 작게는 원소의 명칭까지 그리스에 기인한다. 그 어떤 분야이건, 그리스에 대한 지식이 있는지와 없는지에 따라 그 깊이가 많이 달라진다. 그래서일까, 최근들어 부쩍 그리스에 관련된 서적들이 눈에 띄는 것 같다. 물론, 최근 몇년간 불고 있는 인문서적에 대한 관심이 반영된 것일 터다. 결국 모든 인문서적의 근간도 그리스에서 찾을 수 있을테니까.


 [구본형의 그리스인 이야기] 는 미케네 문명부터 차근차근 그리스의 역사를 풀어주고 있다. 

일단은 호메로스의 작품들과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을 기저에 깔고,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역사와 신화를 구분하여 신화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유추해 내고, 인물의 성향을 분석하는 방식이다. 시기별로 크게 3개의 부로 나뉘어 있고, 각 부는 다시 크게 시기별 문명으로 목차가 나뉘어 있다. 각 목차 안에는 각 문명시기의 중요한 인물들이 소문단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명은 물론 미케네.  인간에게 불을 전해줌으로써 문명시대의 문을 열어준 프로메테우스와 그리스 최초의 모험가였던 페르세우스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메두사와, 카시오페이아, 안드로메다가 핵심적인 인물로 등장하고, 미케네의 화려한 서막을 열어젖히는 페르세우스로 마무리된다. 뒤이어 크레타, 아테네, 테베 목차가 등장하고, 1부가 마무리되어, 2부에는 트로이 전쟁이 주로 다루어진다. 3부는 오디세우스의 지난한 여정이 그려지고, 로물루스가 로마시를 세우면서 마무리된다.   

 각 인물 목차는 작가의 비평으로 마무리되는데, 인물의 행동방식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유추하여 당시 그리스의 시대상이나 사회 구성 과정등을 풀어내고, 당시의 개념들이 현대까지 계승되어 발전하거나 변화된 방향등을 설명하기도 한다. 인물 목차를 담고 있는 큰 문명별 목차의 말미에는 따로 작은 목차를 준비해서 신화들을 풀어낸 부분도 좋았다. 신화와 역사를 확실히 구분하면서도, 주고받은 영향등을 풀어내기에 좋은 방법이었다고 생각된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나 그리스 역사의 개괄 정도로 이해하고 보면 좋을 듯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깊이가 얕은 책은 절대 아니다. 인물의 성향을 유추하여 그리스 시대상을 그려내는 방식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설득력도 충분하다. 문장력도 충분하고, 내용도 아주 풍성하며, 특히 많은 도판들이 적절하게 들어있어 이야기에 몰입되는 것을 충분히 도와준다. 두께에 비해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버릴부분은 충분히 버리고 폭넓게 흥미를 끌 수 있는 주제와 소재들을 매우 적절히 선택했다.

 서두에도 언급했지만, 그리스 문명은 서구문명의 근원으로써, 이에 대해 아는것과 모르는 것은 문학이나 미술 등 여러 예술품들을 감상하는 데에도 큰 차이를 준다. 심지어 니체나 마르크스 같은 현대 철학의 선구자들 역시 그리스 문화를 충분히 깨우치고 있었다.  

그리스 문명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도, 어느정도 알고 본격적으로 들어가볼 사람에게도 추천할만한 질 좋은 입문서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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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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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이라는 작품을 기억한다.

나에게 심윤경이란 작가를 알려준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만난 계기는 꽤나 독특했다.

그러니까, 내가 군대를 전역하고 3년째인가, 4년째. 동원 예비군 훈련을 2번째였나, 3번째 받았다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 지역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향하는 중이었다. 

 공군 특기병 출신인 나는 동원훈련을 병과에 따라 서울에서 3시간 내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공군 비행단으로 2박3일동안 받으러 갔어야 했는데, 그 때가 충북 청주비행단이었는지, 대전 공군대학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군사훈련이란 어지간한 남자들은 군복을 벗는 순간 다 잊어버리는(잊기위해 노력하는) 것들이니까. 오죽하면 총쏘는 방법도 매번 까먹어서 4년 내내 매년 새로 배워야 할까. 

 여하튼, 그러던 시절, 그 지방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던 지역방송 라디오에서 '어디시청과 함께하는 독서캠페인 이달의 책~ 이번달 책은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이라는 책입니다.' 라며 짧은 책 소개를 해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책의 줄거리는 거의 다 비껴가고 작품의 주제의식과 작가의 문장력, 전체적인 짜임새등을 5~10분정도 간략하게 정리한 매우 세련된 리뷰였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무튼 몇시간을 더 기차였는지 버스였는지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서 3일동안 훈련받는다고 용쓴 몇몇 동네 사람들과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해치우고 집에 와서 열심히 검색했다. 당연히, 저자 이름도, 책 제목도 반쯤 잊혀져 있었으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자 이름은 떠오르지 않고, 제목은 계속 황석영 작가님의 [오래된 정원] 만 떠올랐더랬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한겨레' '수상' '정원' 이런 단어들을 조합하여 검색해가며 힘들게 찾아서 구입한 기억이 난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은 정말 너무나 멋진 작품이었다.

소년의 성장기였고, 소년은 나처럼 여동생이 있었고, 광주항쟁과 80년대 한국의 격동기를 다루되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하지만 그 주제의식은 또렷하게 띄우는 무척이나 세련된 작품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는 언제 읽어도 눈물을 삼키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따스하고 정겨웠더랬다. 

이 작품은, '심윤경'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지만, 한 작품으로 작가의 역량을 평가할 수 는 없다는 웃긴 생각을 했더랬다.(내가 뭐라고!!ㅋㅋㅋ) 


 그 다음으로 접한 책은 [이현의 연애] 였다.

10대 중반에는 순정만화가를 꿈꿨던 나는 20대 초반까지 사실 어지간한 연애소설은 수두룩하게 섭렵했더랬다. 일찌감치 채털리 부인을 알았고, 남회귀선과 북회귀선의 은유를 깨우쳤으며, 홍루몽은 물론 할리퀸과 캔디캔디,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와 마리 앙뜨와네뜨(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주인공들. 오스칼은 작품상의 가상인물) 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숱한 연애 창작물들이 사실은 현실 연애와 견주어 접점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는 '연애' 를 소재로 다룬 책들은 여지없이 내쳐버렸더랬다. 심지어 [닥터 지바고]와 [대위와 딸]조차도 '이건 연애얘기 주제에 왜 세계문학이냐!!! [설국] 이건 뭐야, 이건 그냥...불륜인지 아닌지 애매모하지만 어쨌든 문란한 연애질이야기잖아!!! 이런 소설이 노벨 문학상인거냐!!! 셰익스피어, 이 사람은 -비극들 빼면- 다 연애얘기야!!!  그 와중에 [폭풍의 언덕] 은 인생의 책으로 자리잡았다. 그렇지, 사랑과 연애는 이런거라고. 고통, 기다림, 엇갈림, 고통, 괴로움, 또 고통, 또 괴로움, 이게 진짜, 레알, 현실연애다!! 

이런 나였는데...

 [이현의 연애] 이 제목이란. 이현이라는 사람이 연애질하는 내용일게 뻔하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감동을 다 잊어버리고 심윤경이라는 세 글자마저 잃어버릴 때 쯤, 병원 갈 일 있어서, 진료를 기다릴때 보려고 집어 들었더랬다. 시간은, 잘가겠지. 기다리는 지루함은 달달한 연애얘기로 잊어보자, 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현의 연애] 는 [폭풍의 언덕] 과 함께 내 마음속의 2대 현실연애+사랑이야기로 자리잡는다. 달달하기는 개뿔. 역시 진짜 연애란, 진짜 사랑이란,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덮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게 고통이 더 큰 고통으로 덮이면, 전에 겪은 고통은 오히려 행복이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행복해지리라는 희망을 지리하게 이어가며, 고통을 되풀이하는 것. 그것이 연애이고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 달리다] 는 바로 [이현의 연애] 에 등장하는 한 챕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꽤나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사랑의 감정이 그려질 것으로 예상했었다. 제목부터 '달리다' 이다. 폭주 기관차처럼. 광란의 질주를 거듭하는 스포츠카처럼. 폭력적이고 파괴적이어서 결국은 너도 나도 다 만신창이가 되고마는 그런 사랑 이야기. 


 일단, 거침없이 절반쯤을 읽어나간 첫인상은, '흐으으으으음???' 이었다.

유머와 위트를 가득 안고 김학원의 자가용처럼 거침없이 내닫는 문장과 스토리 텔링은 보다 원숙해지고 능란해졌지만 전작들이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주제의식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 혜나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이나 주변인물들까지도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큰 불편 없는 상황 설정도 그다지 와닿지 않았으며, 그런 상황 설정 속에서 돈없다고 징징대는 혜나나 그 가족들에게 또한 쉽게 몰입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심윤경 작가가 베틀에 앉아 물레를 돌려가며 꼼꼼하게 베를 짜듯 이야기를 얽어나가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단어들을 모아 문장의 실들을 잣고, 정해진 계획과 그에 맞는 규칙에 따라 씨실과 날실을 짜맞추듯, 인물과 상황들을 꼼꼼하게 짜맞추는 작가라고 생각해왔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에서도, [이현의 연애] 에서도 그 방식은 매우 달랐지만, 직조해나가는 느낌은 동일했더랬다. 

때문에 [사랑이 달리다] 의 인물과 이야기들 안에서도 그런 짜임을 기대했었다. 복선을 찾아보려 했고, 은유를 찾아보려 했다. 마치 커다란 그림 속에서 빨간 줄무늬 옷을 입은 월리를 찾듯 배경속에 숨겨있는 사람들에게서 작가의 의도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사랑이 달리다] 는 이야기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달리는 것이었다.

책의 중반을 넘어서야, 김학원이 사제끼는 자동차에도, 미친듯이 질주하는 그의 운전습관에도, 김철원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와 등기이전의 음모 속에도 그 어떤 다른 의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그냥 삶 속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사건인 것이다. 수백가지의 우연과 수십가지의 필연이 얽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사건. 음식을 먹었으면 화장실을 찾듯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생기는 화학적인 작용들로 인해 우연하도고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여러가지 '일' 들. 사건 인과를 얽기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사건이나 복선, 은유나 상징, 그런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작품은 이야기, 사건 중심의 작품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이 작품의 이야기의 핵심은 '인물이 무엇을 했느냐?' 가 아니라, '그걸 한 인물이 누구냐?' 인 것이다.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라, 인물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물을 보여주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래서 이게 뭔 이야기야?' 를 파고들기보다, '그래서 얘는 대체 어떤 사람인거야?' 를 파고들어보면 보다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그렇게 읽어가면, 각 인물들에 걸려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읽힌다. 작품의 중심 인물인 혜나와 학원. 거울처럼 똑 닮은 두 남매의 삶. 하지만, 거울이기에 반대편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인물들에 걸려있는 이야기가 읽히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이야기의 짜임새가 아닌 인물에 집중하며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역시나 세련되게 배치되어 있는 에피소드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혜나의 감정 흐름대로 틀 없이 자유분방하게 진행나가는 듯 하지만, 역시나 작가 특유의 세련된 호흡으로 길이를 조절하고 감정의 파고를 설정한다. 누르고, 잡고, 터뜨리고, 모으는 타이밍이 기가막히다. 문장 곳곳에 숨겨있는 유머와 냉소적인 위트도 적절하게 들어온다. 그런 전반적인 흐름의 기술이 탁월하다보니 이야기의 흡입력도 상당하다. 혜나와 함께 웃고 낄낄대고 안쓰러워하다보면 어느새 이야기는 종장을 향해 치닫는다.     


 독서에는 많은 독법이 존재한다. 

문학성을 따지는건 학자들이지만, 다독가, 애독가들에게도 자신만의 독법이 있고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

누구는 [폭풍의 언덕] 을 인류역사상 최고의 소설이라고 하기도 하고, 누구는 최악의 소설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떤 대학의 어떤 교수들이 인류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문학으로 분류했다고 해서 그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그 책 안에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찾아낼 수는 없고, 찾아낼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는 [파리대왕]이 노벨문학상 감이지만, 누구에게는 어린애들을 미친 폭력 살인마로 몰아가는 미치광이 같은 작품일 수도 있다. [롤리타] 는 어떤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는? [채털리 부인] 은?? [더버빌가의 테스] 는?? 무엇이 음서와, 명작의 기준이 되는가?


 [사랑이 달리다] 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갖고있는 편협한 독법에 크게 놀랐고, 또 많이 생각했다. 

내가 참, 스토리, 사건에 천착하고 있었구나, 라고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모든 책들을 다시 읽어봐야 하는게 아닐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재미없다고 읽다 덮은 작품들이나, 취향이 아니라고 제껴둔 책들도 다시 다 읽어봐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서 거침없이 달려가는 혜나의 삶이 문득 부러워졌다. 

확실히 독법을 바꿔서 혜나를 바라보니, 혜나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지나치게 애정을 담았어!! 이건 비판받아 마땅한 부분이야! 라고 외치고 싶기도 하지만, 어쩌랴. 혜나는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너무나 사랑스러운걸. 


 한국 사람들은 유독 드라마를 좋아한다.

드라마란, 잘 짜여진 이야기의 틀 안에 딱 맞는 옷을 입은 캐릭터들이 모여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이 달리다] 는 그런 관점에서 볼땐, 잘 짜여진 틀 안에 잘 짜여진 인물들이 제자리에 들어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감정은 들쭉날쭉하고  이야기는 정신없으며 주제의 구심점도 잘 안 보인다.

그런데, 너무나 매력적이다.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이 아글다글 모여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간다. 그러다 보면 불쑥불쑥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좌충우돌 부딪히며 사고도 일어나고, 어이없이 사고가 봉합되기도 한다. 인연과 이연이 되풀이되고, 서로를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사랑했다 미워하고, 미워했다 사랑한다. 


  책속에 항상 답이나 길이 있지는 않다

책속에 있는 길은 책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길이고, 어쩌면 작가의 길이고, 어쩌면 작가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가보고싶은 희망의 길일수도 있다. 모두가 공자처럼 떠돌이 개마냥 돌아다닐 수는 없고, 싯달타처럼 아사직전까지 굶어가며 앉아있을 수도 없으며(일단 며칠안에 엉덩이에 부스럼 생기고 치질에 걸릴 확률 99.999999%), 율곡 이이처럼 신사임당 같은 엄마를 만날 수는 없다.(읭??), '성공하는 몇가지~습관' 이런 책들을 읽는다고 성공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시크릿 같은 책을 100번 읽고 외운다고 갑자기 부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동이나 성취감은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혜나의 삶이나 그 주변 인물들의 삶이 내 삶에 영향을 줄 리는 없다. 나 또한 그들의 삶에서 뭔가를 얻어내거나, 해답을 얻을 생각도 없다. 

하지만, 확실한 하나는,

내 삶 속에 혜나와 욱연, 그리고 학원이 불쑥 뛰어든 것이다. 유비와 조조가 뛰어들었던 것 처럼,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뛰어들었던 것 처럼, 롤리타와 험버트가 뛰어들고, 동구와 이현, 이진이 뛰어들었던 것 처럼.  

잠깐 미쳤다 돌아와도 별 일 없는 삶 속에서, 그들은 또 어떤 일들을 겪에 될까?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나의 삶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엉망진창 좌충우돌 내달린 이 리뷰를 어떻게 마무리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어떤 책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작품속에서 그와 대구를 아주 잘 이룰 것 같은 문장도 하나 떠올랐다. 이 두 문장이면, 이 사태가 어느정도 수습될 듯 싶다. 



"잠깐 미쳤다가 돌아와도 아무 일 없다구" 

[사랑이 달리다/ 심윤경]p.28

"그래, 그거였어.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다."

[사우스 브로드/펫 콘로이]2권 p. 462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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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티미츠 Vol.2 : 국토안보 시공그래픽노블
마크 밀러 지음, 이규원 옮김, 브라이언 힛치 그림 / 시공사(만화)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엔터테인먼트의 강국인 일본과 미국의 '만화' 컨텐츠 활용법은 사뭇 다르다.

일본에서는 한 만화가 큰 인기를 끌면,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영화등을 제작한다. 매체의 특성상 전체 스토리가 압축되거나 생략되는 경우는 있겠지만 이야기의 큰 틀은 크게 다르지 않게 다른 매체로 '이식' 된다. 일본의 만화 구매층은 내용은 같지만, 각기 완벽히 다른 작품이라고 인식하고, 각기 그 매력을 만끽한다.

반면, 미국에서는 만화를 같은 내용으로 다른 매체로 이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파이더맨' 이나 '아이언 맨' 과 같은 영화들은 그래픽 노블을 기반하고 있지만, 단지 '모티프' 에 불과할 뿐이다. 영화는 영화대로, 그래픽 노블은 그래픽 노블대로 '캐릭터' 를 재해석한다. 때문에 같은 주인공을 여러번 등장시켜서 매번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도 미국의 관객들은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스파이더맨' 같은 경우도 이미 1편부터 3편까지 나왔지만, 관객들은 완전히 새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을 큰 위화감 없이 '새로운 시리즈' 라고 받아들인다.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이런 새로운 시리즈에 '리부트REBOOT' 라는 개념을 설명하게 이해시켜야 하지만, 여전히 위화감이 남는다.  

이러한 차이는 일본의 만화도 캐릭터 중심이고, 미국에서도 캐릭터 중심이지만 이야기를 대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일본 만화는 캐릭터 중심이지만, 연속된 긴 이야기를 통해 캐릭터를 드러내고, 미국에서는 단막으로 끊어져 있는 옴니버스식 이야기를 통해 캐릭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일본 만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에피소드와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만, 미국 만화는 기본적으로 그렇지가 않다. 가끔 에피소드를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선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국문화의 수많은 스토리들은 옴니버스형식을 기반한다.

 

지금 소개할 [얼티미츠] 라는 작품 또한 그렇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어벤저스] 의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영화와 스토리적인 연관성을 찾는다면 제대로 된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미 국내에 정식 발매된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 나 [시크릿 워][시빌 워] [토르] 등의 작품들과 스토리의 접점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얼티미츠] 에 등장하는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토르, 헐크 등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배경 지식들을 깡그리 잊고, 새로 접한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진정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딱 2권짜리 [얼티미츠] 를 충분히 즐긴 뒤에, 다른 작품에 등장한 캐릭터들과의 차이점이나 연관성을 찾으면 더욱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얼티미츠]는 히어로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냉소적이다.

아이언맨은 기존의 다른 시리즈에서처럼 백만장자에 천재이지만 재수없고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졸부로 그려지고, 토르는 자연주의자 사기꾼, 캡틴 아메리카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지식한 군인, 헐크는 제어 불가능한 폭탄처럼 다뤄진다. 쉴드의 수장이자 사뮤얼 잭슨과 굉장히 비슷하게 그려놓은 캡틴 퓨리는 음흉한 속내를 지닌 정부 고위급 관료로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도 작가가 히어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팀이지만 좀처엄 융화되지 않고 애초에 각자의 이익을 위해 모였기 때문에 물과 기름처럼 서로가 둥둥 떠있을 뿐이다.

그나마 1권에서 헐크가 폭주하는 대사건이 생긴 이후로 서로가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하고, 지구에 오랫동안 잠복해있던 차타우리와의 2권에 접어들며 각 캐릭터들의 진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시나, '말 안듣는 것들은 헐크가 패주면 됨'. 이라는 사실은 [얼티미츠] 에서도 여지없이 증명된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짜임새는 영화 [어벤져스] 보다 좀 더 나은 편이다. 특별히 캡틴 아메리카에게 이야기의 포커스가 집중되어있긴 하지만, 다른 캐릭터들의 역할도 비교적 높은 비중으로 잘 분산되어 있고, 매력들도 잘 드러나 있다. 사건의 인과 관계나, 캡틴 아메리카의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연관되는 부분의 드라마는 상당히 잘 표현되어있다. 물론 화려한 일러스트를 연상시키는 탄탄한 뎃셍의 작화도 대단히 멋지다. 

 하지만, 역시나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미미한 미국 그래픽 노블의 블록 버스터급 프로젝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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