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끝 2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0
켄 폴릿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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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분단과 함께 시작된다. 

1부인 [거인들의 몰락] 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된 원인을 심도 깊은 통찰력으로 절묘하게 간추려 소개했던 역량이 그대로 발휘된다. 소련과 미국이 일제의 패망 이후 남한과 북한을 갈라 놓았듯이 독일도 연합국과 소련이 승전국으로써 독일을 둘로 나누었다. 한동안 동독과 서독은 쉽게 왕래할 수 있었지만, 소련과 미국의 냉전체제가 가속화 되면서 장벽이 생겨나고 자유가 사라지는 과정이 모드의 손녀인 레베카와 발터를 통해 그려진다. 

케네디 정부의 이야기와 미국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은 레프의 아들 그레그가 결혼 전에 관계를 가졌던 흑인 여가수 재키 제이크스(2부 '세계의 겨울' 참조) 사이에서 얻은 아들 조지 재이크스를 통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특히 케네디 형제의 불운한 퇴장과 베트남 전쟁, 닉슨과 워터게이트 사건, FBI와 정치 공작 등 예민한 이슈들이 담백하고 읽기 쉽게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버스 안타기 운동' 으로 시작되는 미국 흑인들의 오랜 인권운동의 역사가 인상적이다.

이 책을 읽을 때 마침 국내에서도 박근혜 탄핵을 위한 촛불시위가 한창이었다. 그와 관련해서 닉슨과 워터게이트, 국민들의 운동과 흑인 인권 운동이 많이 비견되곤 했는데, 마침 이 책에 특히나 그런 부분들이 상세하게 그려져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기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영원의 끝]은 그 두터운 볼륨만큼 엄청나게 많은 이슈들을 다루고 있지만, 아주아주 단순하게 간추려본다면, "재스퍼 머리" 를 통해 미국 언론의 발달사를, "조지 제이크스"를 통해 미국 사회 내의 흑인 인권의 변화를, "레베카 호프만" 을 통해 분단 독일과 그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상황을, "딤카" 와 "타냐 드보르킨" 남매를 통해 당시 소련의 중심이었던 러시아의 정치, 경제상황을 보여준다고 압축시킬 수 있다. 

"대지의 기둥" 때도 느꼈지만, 켄 폴릿은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일을 해내는 이야기를 너무나 잘 쓴다.

지방을 떠돌며 돌을 깎던 평범한 사람이 단지 "살아남기 위해" 했던 일들이 역사의 흐름을 타고 평탄한 길에서 밀려나는 과정. 험준한 길에서 평탄한 길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떠밀리고, 떠밀리고, 또 떠밀리다보니 그가 지나온 길들이 하나의 지표가 되는 과정의 이야기 말이다.

위에 언급했던 인물들도 살아남기 위한 길을 찾아 헤매이다가 결국 뒤따라올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를 하나씩 남긴다.

목적지는 모두 같다.

"자유"


시리즈 3부작을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에설 윌리엄스" 일 것이다.

1919년. 웨일즈 에버로언에서 피츠허버트 백작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백작가의 하녀 에설은 미혼모로써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투사였고, 결국 노동당의 하원의원, 나아가 상원의원이 되어 여성의 참정권과 복지, 무상의료 그리고 이제는 박해받는 동성애자를 위해 싸웠다. 작은 몸짓이 그녀의 조국을 바꾸는 큰 동력이 되었고, 결국 해냈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이 참정의 기회를 얻었다. 

그녀는 거동이 불편해진 순간에도 손자 데이비드의 경애어린 시선 앞에서 금박이 입힌 상원의사당으로 들어가 동성애자를 위한 사안에 표를 행사한다. 

1부의 첫장을 열었던 그녀는 3부에서도 화려하게 등장해 자신의 삶을 훌륭하게 매조지한다.

장르의 특성상 1,2부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데, 그 때마다 가슴이 울컥울컥 했다. 

실존 인물도 아니고, 가상 인물인데. 그렇게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역사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 아니겠는가.

그리고, 인류의 진보란, 결국,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처음 밟아나간 길을 다져가는 과정 아니겠는가. 

아직도 수많은 곳에서 어리석은 짓들이 반복되고 있지만, 그리고, 때로는 유턴을 하기도 하지만, 더디더라도 계속 전진하고 있다고 믿는다.



또하나, 켄 폴릿의 20세기 3부작은 오롯히 근대를 버텨온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동생들의 학비를 보태기 위해 영민했지만 백작가 하녀가 된 에설부터, 적국인 독일 남자를 사랑했고, 전쟁통에도 첩보물 같은 결실을 맺었던 모드. 딱 한번 어리석은 선택을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폭탄이 떨어지는 런던 시내 한복판에서 엠뷸런스를 몰았던 데이지, 소련군들에게 강간당할 뻔 한 생면부지의 어린 유대인 소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졌던 모드의 딸 카를라. 그리고 카를라에게 구해졌던 그 소녀 레베카는 카를라에게 입양되어 동독의 외무부 공무원이 되어 통일에 힘을 보탠다. 

쿠바와 체코에서 격동의 순간을 체험했던 그리고리의 손녀 타냐는 목숨을 걸고 소련의 작가가 체제 비판적인 자신의 소설을 국외로 빼돌릴 수 있게 돕고, 애나 머리가 그 편집을 담당해서 세계에 알린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는 "유신" 이라는 책을 통해 "한국의 근대화와 발전을 이뤄낸 것은 공장에서 일하던 수많은 우리의 누나들" 이라고 말했다. 악덕한 사장이 화장실도 제때 보내주지 않아 물조차 마음대로 마실 수 없었던, 그럼에도 남자들의 1/3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을 받았던, 그리고 그렇게 번 돈 역시 모두 부모님과 남동생을 위해 바쳤던 누나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틋함을 토로했다.

역사는 언제나 의도적으로 여성들을 배제시켜 "히He"스토리를 만들었고, 켄 폴릿은 그에 반박하듯 "허Her"스토리로 풀어냈다.

누나들과 어머니들을 결코 잊지 않았고, 역사라는 지맥에 굳게 새겨진 그녀들의 활약상 역시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2017년 5월 18일이다. (글을 시작한 것은 한참 전이긴 하지만...ㅋㅋ)

옆길로 새기도 했고, 유턴을 하기도 했지만, 36년 전에 형과 누나들이 밟아 놓았던 길에 다시 안착했다. 

갈 길이 멀지만, 사람의 삶은 유한하고, 이 길은 무한하다. 

하루하루, 살아가고, 근근히 살아낸다.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삶이다.

그뿐이다.


그런 삶들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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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Vol. 3 시공그래픽노블
브라이언 K. 본 지음, 피오나 스테이플스 그림, 이수현 옮김 / 시공사(만화)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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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1권을 읽은 감상은 "그저 그랬다."

별로 특별할 것 없었고, 특히나 세련되지 못한 캐릭터 디자인들이 맘에 안들었다. 

하지만, 데셍이 안정적이며 표정 묘사가 좋은 작화와 복잡한 설정을 마치 양념처럼 중심적인 서사 부근으로 툭툭 흩뿌리는 스토리 텔링이 인상적이었다. 


2권에 접어들어 독자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복잡한 설정들이 중심 서사와 어우러지면 캐릭터가 힘을 얻고, 내러티브가 풍성해지면서 한결 흡입력이 생겨났다. 

2권을 읽은 감상은 "어라, 이것봐라." 였다. 

3권은, "하악하악, 짱인데!!! "


"랜드폴" 은 일종의 행성 연방이다.

스타워즈의 팬이라면 공화정과 공화국 수도 코러스칸트를 연상하면 쉬울 것이다. 

랜드폴 연방의 수도라 할 수 있는 랜드폴 행성은 진보한 문명과 과학을 바탕으로 그 세력을 우주 만방에 떨치는 강대국이었고, "날개족" 이라는 인류가 살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날개를 한 쌍 씩 달고 태어난 랜드폴인은 날개의 크기와 힘에 따라 그걸 써먹어 날아다닐 수도 있었고,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한사람인 '알라나' 처럼 너무 작고 약해서 쓸모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종족들은 이들을 쉽게 "날개족" 이라고 불렀다. 

랜드폴은 현재 로봇 왕국이 장악하고 있었다. 인공지능의 통치는 안정적이고 진보적이었다. 왕정의 형태였지만, 공정하고 평등했기에 랜드폴은 태평성대를 이뤄나갔다.   


한편, 랜드폴 행성의 궤도를 도는 위성 "리스" 는 자연을 보전하고 마법과 예언, 조상을 숭배하는 뿔 달린 인류가 살고 있었다. 

과거에 리스에서 기반한 무슨 일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랜드폴 행성과 군사적 충돌을 야기했다. 이후로 리스의 뿔 달린 종족은 "달(月) 것" 이라는 비하섞인 호칭을 얻게 된다. 

랜드폴 행성과 리스 행성을 오가는 대규모 군사행동은 양 쪽 모두에게 득 될 것이 없었다. 

실제로 리스 행성은 랜드폴 행성의 궤도를 도는 행성으로 만약 소실되기라도 한다면 그 여파는 랜드폴 행성에도 고스란히 전달될 것이었다. 

결국 전쟁은 랜드폴 연방의 다른 행성으로 번져 대리전 향상으로 변해갔다. 

(역시 스타워즈의 팬이라면 분리주의 연합이 공화국 연방의 행성들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압박하며 공화국에서 탈퇴할 것을 종용하고, 공화국에서 파견한 제다이들이 그 음모를 분쇄하는 내용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 오랫동안 전쟁중인 랜드폴과 리스의 젊은 군인 남녀, 마르코와 알라나가 허름한 집안 어딘가에서 아기를 낳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랜드폴 사람의 특징인 날개와, 리스 사람의 특징인 뿔을 모두 갖고 태어난 아기. 



이야기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 스페이스 오페라, 과학, 마법이 뭉뚱그려져서 처음 인상은 자못 '괴랄'하기 이를 데 없는 작품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주 세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랄 수 있는 마르코와 알라나가 힘겨운 사랑의 결실을 맺는 내용이 아니다. 

작품의 시작부터 이미 마르코와 알라나는 아슬아슬한 연애의 결실을 맺은 상태. 

문제는 두 남녀의 소속 행성들이 아직도 전쟁중이며, 이 두 커플을 환영할 만한 곳이 그들이 속한 우주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환영은 커녕 랜드폴 행성측은 이 '연놈' 들을 잡아오라고 황자를 급파하고, 리스 행성측은 이 '연놈' 들을 잡아 죽이라고 '프리랜서' 라 불리는 킬러를 보내 놓은 상황. 

마르코와 알라나는 리스인들의 고대 마법 우주선(?)을 타고 간신히 우주공간으로 도피하고, 그 와중에 마르코의 부모님이 합승하게 된다.

알라나는, 팔자에는 있을지 모르지만, 외국어 사전에는 결코 없을 '시집살이' 를 하게 생긴 것이다. 

랜드폴의 황자와 무시무시한 킬러 프리랜서의 추격을 받으면서 말이다. 심지어 갓난쟁이까지 돌봐야 하니!! 

뿐만 아니라 마르코의 옛 애인까지 쳐들어와 깽판을 치니, 이거 엎친데 덮치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이야기의 거대한 스케일과 달리 에피소드들은 생각보다 소소하다.

장쾌한 스페이스 오페라를 기대했지만, 주말 드라마의 느낌이랄까.

마르코와 알라나의 소소한 갈등부터 부모님들과의 갈등, 오해, 풀림 등이 쏠쏠한 즐거움을 준다. 

꽤나 복잡하고 다층적인 구조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만, 모든 이야기의 포인트는 결국 연애와 가족 이야기 아니겠는가??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장르에도 충실하고, 판타지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와중에도 그 포인트를 잃지 않는다. 

단 세권 사이에 갓난쟁이 아이를 갖게 된 이 초보 엄마 아빠는 몇번이나 싸우고 화해하며 목숨이 다급한 와중에도 서로의 미래를 걱정하고, 또 사랑을 나눈다.  

3권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이야기의 화자인 마르코와 알라나의 딸 헤이즐이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

과연 또 이 험난한 여정 속에서 이 가족은 어떤 일들을 겪게 될까?

이러고 저러고 지지고 볶고 사랑하겠지만, 앞으로의 이야기가 참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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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기슭 새벽의 하늘 십이국기 8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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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국기의 세계는 답답할 정도로 정체되어 있다.

영원불멸의, 말 그대로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이 된 인간이 통치하는 세계.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아니, 해서도 안된다. 

마치 과일처럼 나무에서 태어나는 인간들은 부모의 신분에 따라 자신의 신분이 결정되고, 불로불사의 삶을 사는 '상류층' 인간들은 아이를 가질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막막한 세상인가.

왕이 실정을 해서 대지가 피폐해지고 재해가 몰아쳐도 선적에 들어있는 상류층의 삶은 굳건하다. 

평민들만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재해가 멈추고 풍요로운 날들이 시작된다.

여전히 선적에 들어있는 상류층은 배부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원불멸의 왕이지만, 인간. 실수를 한다. 신의 화신인 기린이라는 영특한 존재가 옆에서 보좌하지만, 기린은 정에 치우친 존재.

기린이 왕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기린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가여이 여긴다. 우리가 바라는 진짜 신의 자애로움이다.

국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사사로운 정에 휩쓸리면 안된다. 

병에도 걸리지 않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 이정도면 사실 사사로운 욕망이 생길 수 없을 터다.

원한다면, 가족, 친지들을 선적에 올려 함께 영생을 누릴 수도 있다. 자녀에게 물려줄 재산을 축적할 필요도 없고, 가족 비리에 휩쓸릴 염려도 없다.

걸림돌이 있다면, 바로 조정 대신들이다.

왕이 실정을 해서 죽음에 이르면 짧게는 수년, 길게는 수십년동안 풍수해와 요마의 습격이 끊이지 않을 수 있다.

이 풍요로운 시기에 조금이라도 곳간을 채워 놓아야 하는 것이다.

왕이 바뀌어도 이 대신들은 거의 대부분 그자리에 그대로 존재한다. 

그리고,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왕의 실정은 오로지 왕의 잘못만이 아닐진대, 그 책임은 오롯하게 왕이 진다.

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깨달은 자가 있었다. 

대국의 왕 태왕 교소였다. 그는 왕에 등극함과 동시에 고관 대작들을 단숨에 갈아엎고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다.

세제를 개편하고 혁신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지방관들을 새로 임명하고, 선적에 들었던 자들을 선적에서 지우고 새로운 인물들을 올렸다.

풍수해와 요마의 침탈은 잦아들었고, 이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겉보기엔 그럴 듯 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실무자들이 단숨에 빠져나가자 행정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눈 앞의 불안이 해소된 백성들의 불만이 폭주했다. 중앙정부의 명령이 지방까지 충실히 전달되지 못했고, 근시안적인 미봉책이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부족했다. 교왕의 주변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있었으나 수가 너무 적었다.

언제나 격무에 시달렸고, 그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교왕의 심중에 상처를 만들었다. 만들고, 만들고 또 만들었다.

그 뿐 아니었다. 간신히 숙청의 칼날을 피한 대신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또다른 칼을 품었다.

결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경왕 요코 역시 상황이 좋지만은 않았다.

갑자기 등극해, 가장 중요한 왕실의 예법을 혁파하는 취임 일성을 선보였던 요코는 지방의 반란을 한차례 진압하고 안정세에 접어드나 했지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기존의 대신들은 여전히 요코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고, 그녀의 시책들을 매번 꼬투리 잡고 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대국 리사이가 반란 진압 중 행방불명 된 태왕 교소를 찾아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타국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신의 명령을 받들고 있는 십이국기 세계에서 경왕 요코는 다시 한번 큰 갈등의 순간을 경험한다. 


실로 오래간만에 접한 십이국기 장편이었다. 실제 일본에서 이 작품이 출간된 것은 2001년이다.

그렇다. 십이국기 장편은 16년째 나오지 않는 중이다. )2001년 이후 발표된 몇몇 단편들은 바로 전에 출간된 [화서의 꿈]에 포함되어 묶였다.)

솔직한 감상으로는 십이국기 세계관 내에서 왕과 기린의 사례를 더이상 할 필요성이 없다고 느껴진다. 

나는 십이국기의 장편들보다 단편을 특히 좋아하는데, [히쇼의 새] 같은 경우는 정말 큰 인상을 받아서 읽고 읽고 또 읽었더랬다.

찰나의 순간 깨져 사라져버릴 도자기 새를 만들기 위해 영원의 시간을 소비하는 예술가라니...

그게 과연 지옥일까, 천국일까. 

십이국기 세계에서 공직자들 역시 선적에 들어 불사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영원히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같은 작품집에 있었던 영원히 죄인을 재판해야 하는 법사계 공직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낙조의 옥], 영원히 나무의 병충해를 쫓아다니는 [풍신] 같은 단편들도 너무너무 좋았다. 


십이국기 세계관에 대해서 몇번 언급한 적 있지만, 사실 이 작품은 깊이 들여다보면 허술한 면이 적지 않다.

타국을 침략하지 않는 시대의 군인의 역할이나 필요성, 그에 비해 너무 많은 숫자, 너무 적은 국민, 비정기적이지만 끊임없이 닥치는 환란, 그럼에도 구휼시설이 구비되지 않는 무능함, 구비 되더라도 왕의 실정과 함께 너무 쉽게 무너져버리는 시스템 등등.

하지만, 역시 좀 더 파보면, 작품의 세계관 내에서 어느정도 설득력 있는 결론을 얻어낼 수도 있다. 

십이국기의 세계관이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허술하고, 구멍이 뻥뻥 뚫려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허술함과 구멍들이 더욱 상상력을 자극하며 이야기의 전개를 유연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십이국기의 세계에 깊이 빠진 이유도 아마 이 부분 때문인 것 같다.

고민하고, 상상하고, 세계관 안에서 합당한 결론을 내리고. 

이러한 부분은 작가인 오노 후유미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처음부터 십이국기의 세계관은 완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출발한 것이다. 

작가는 이 답답한 세계 안에 현실의 인간, 요코를 던져 놓으면서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단편들을 통해 이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구멍들을 차근차근 메꿔나가고 있다. 

위에 살짝 언급했지만, 십이국기의 장편으로는 이 작품이 마지막이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그와 맥을 함께 한다. 

답답하기 짝이 없는,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정체되어 있던 이 세계에 돌 하나를 던졌다.

이 돌이 어떠한 파문을 일으킬지, [황혼의 기슭 새벽의 하늘] 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요코는 아직 왕이 아니던 시절, 연왕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됐다.

그리고 경왕이 된 지금, 타국인 대국의 왕을 찾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현실에 답답해 하고 있다.

그녀는 이 '정체' 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고, 납득할 수도 없다. 

그녀가 이 답보의 세계에서 함께 정체될지, 아니면 미답의 영역에 할 발 딛게 될지.

시시콜콜 작가가 다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궁금은 하겠지.

그럴 땐 단편의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 슬쩍 흘려주면 될 일.

왕과 기린보다 다른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십이국기의 세계관도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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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1~3 세트 - 전3권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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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대는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문란하다 싶을 정도로 성적으로 개방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 기독교 세계관이 정착되기 전의 서구 사회는 현대적 윤리의 관점에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성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당연하게도 그러한 자유는 남성에게만 허락되었다. 


하지만, 로마 사회에서 여성은 대단히 중요한 존재였다.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지위도 높았다.  

로마 사회가 혈통을 중시하는 사회였기 때문이고, 필연적으로 정계는 혈연으로 그물처럼 얽힌 형태였기 때문이었다. 

권력가들이 힘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동맹은 혈연 동맹이었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딸이라면 어느 정도 재산 상속권이 인정되었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계약 시스템도 인권과 분리해서 생각한다면 상당히 합리적이어서 이혼당한 여성의 삶을 보장하는 시스템도 존재했다. 

물론 이 작품이 다루는 주요 인물들이 사회의 최상위 계층이기에 그렇지, 평민 여성의 삶은 더더욱 괴로웠을 것이다. 이 작품이 크게 다루는 여성은 유력자의 딸이거나 그녀의 노예들뿐이니까. 

로마 권력의 핵심층에서 여성은 단순히 가장의 재산에 불과했고, 사랑이라는 감정은 여성들에게도 허용되지 않았지만, 사실 많은 남성들에게도 허용되지 않았다. 여성은 가문의 '재산'이었고, '결혼'은 가문 간의 '계약'이었다. 

유력한 혈통의 딸들은 언젠가 자신에게 주어질 의무 -가문을 위해 어떤 남자에게 시집가서 헌신해야 한다는 내용의 -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았고, 그것은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의 4부인 "카이사르의 여자들" 은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의 이야기와 함께 시작된다.

브루투스는 세르빌리아의 아들로 세르빌리아는 2부 [풀잎관] 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드루수스의 여동생인 리비아 드루사의 딸이다. 독자들은 기억하시겠지만, 리비아 드루사는 카이피오의 부인이었지만 불륜으로 이혼당한다. 어린 세르빌리아는 잔혹할 정도로 날카롭게 엄마인 드루사의 부정을 비난하고, 자신을 거부하는 친아버지 카이피오에게 인정받기 위해 큰아버지인 드루수스의 정보를 훔치는 등 그야말로 악녀에 가까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였었다. 특히 엄마인 리비아 드루사가 카이피오에게 이혼당한 뒤 결혼한 카토와의 사이에서 낳은 이부형제 카토를 끔찍하게 싫어했다.('카토'는 정말 너무 많다...ㅠㅠ) 세르빌리아는 지독한 혈통주의자였고, 대단한 야심가인 동시에 정치를 보는 안목도 뛰어났다. 그는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 브루투스가 도무지 눈에 차지 않았다. 용모도, 체형도, 지적 능력도, 성격도 모두 부족해 보였기에, 그것들을 채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들이 대부분이 상당한 부작용을 일으켰음을 알아챌 수는 없었다.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를 쭉 따라온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콜린 매컬로는 종이를 낭비하지 않는다. 한 두 권 안에 죽어 없어질 인물이라면, 아예 등장시키지도 않는다. 가뜩이나 길고 어려운 이름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부자, 모녀, 형제, 자매 간에 이름이 완벽하게 똑같아서 '작다' '크다' 등의 수식어를 앞이나 뒤에 붙이거나 로마식 닉네임이랄 수 있는 코그노멘으로라도 일단 등장했다면, 이야기의 흐름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특히 '카이사르의 여자들'에서는 지금까지의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 같아서, 3권께에서는 사실 이름 기억하기를 포기하기도 했다. 1~3부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의 자식들은 물론이고 손주뻘들이 등장해서 작가가 친절하게 누구의 아들이나 누구의 조카 등등을 소개해 주긴 하지만, 일일이 기억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해서, 카이사르의 여자들을 원활히 즐기기 위해서는 딱 두 가지만 구분하면 된다.

카이사르의 아군인가, 적군인가 - 정도. 


'포르투나의 선택' 에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사이를 오가며 균형 잡힌 활약을 펼치던 카이사르는 어마어마한 빚을 청산하기 위해 반드시 권력의 정점으로 다가가야 했다. 당시 로마의 중앙 정계의 수구세력이라 할 수 있는 '보니파' 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연상시키는 변방 출신의 신진세력인 폼페이우스의 발호를 경계했고, 로마의 최대 갑부인 크라수스가 정계를 기웃거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보니파에게 있어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사이를 오가며 이 둘의 중앙 정계 진출을 도왔을 뿐 아니라, 보니파의 중심축 중 한 명인 비불루스에게 오래된 원한까지 있는 카이사르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심지어 하층민들의 주거지인 수부라에 살며 계급을 넘나드는 그의 어마어마한 인기 역시 계급과 혈통을 중시하는 보니파에게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카이사르 역시 보니파를 적으로 인식했다. 일찌감치 그들의 속성과 약점을 알아챘고, 보니파 의원의 부인들을 유혹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곯려먹기에 바빴다. 보니파 의원들의 지속적인 방해해도 불구하고 카이사르는 최고 신관 자리에 당선되고, 역시 어마어마한 권력 다툼 끝에 집정관에 당선되는 이야기가 숨막히게 펼쳐진다.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두 번째 삼두 연합을 하기도 하고, 이혼과 결혼을 되풀이하며, 카이사르가 숨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세르빌리아와 불륜으로 쌓아나갈 애증의 역사를 시작하기도 한다. 


전쟁에 관한 내용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마스터즈 오브 로마 시리즈 중 가장 강력한 서스펜스를 느꼈다.

권력 다툼이란 실제 칼과 창을 들고 뒹구는 전쟁만큼 치열하고 잔혹하다. 카이사르의 행보는, 비록 그의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내내 뒤통수가 근질거리며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로 과감하고 대담하다. 

거침없는 그의 행보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명확한 비전과 인간에 대한 철학에서 기인한다. 인간과 권력에 대한 그의 통찰은 비록 어딘가 비뚤어져 있음에도 당시의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그는 시대의 흐름과 로마의 발전에 대한 인상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로마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혈통과 로마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으로 똘똘 뭉쳐있었지만, 로마라는 거대하게 팽창한 국가가 더이상 계급과 지역에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사실 역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기존의 수구 세력들에게 그의 비전은 지나치게 급진적이었고,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땅 전체를 뒤집으려는 시도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런 카이사르를 이해할 수 있었던 자가 정계에 아무런 욕심이 없었던 크라수스라는 점이 참 재미있게 다가왔다. 크라수스는 오로지 돈의 흐름을 뒤쫓는 자였다. 어쩌면 크라수스는 변화하는 돈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나아가 카이사르가 제시하는 비전을 일부나마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크라수스가 일부나마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동료였다면,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사용해야 할 날카로운 창이었고 넓고 튼튼한 우산이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유용성을 일찌감치 인지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아래에서 힘을 키운 술라, 그리고 술라를 등에 업고 힘을 키운 폼페이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폼페이우스의 우산 아래 들어가야 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딸을 폼페이우스와 결혼시키고 그가 경계를 푼 사이 동방에서 엄청난 부와 힘을 쌓을 터다. 


'카이사르의 여자들' 까지 읽고 보니 새삼 BBC의 역사드라마 "ROME" 가 콜린 매컬로의 작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아직 등장하지 않은 카이사르의 심복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훗날 카이사르의 이름을 쟁취하고 왕좌에 오르는 옥타비아누스가 어떻게 묘사될지 너무너무 궁금해진다. 


주로 로마의 정치 이야기가 나오는 "카이사르의 여자들" 은 현실 정치와 맞물려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권력욕과 성욕의 적나라한 묘사들이 쉼 없이 쏟아져 나와 진부한 표현이지만 "책을 덮을 수 없었다!!" 

진보세력과 수구세력의 이전투구도 그렇지만, 세력 안에서도 명예를 지키는 자들과 명예를 저버리는 자들의 대립이나, 법안을 통해 상대방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과정, 수많은 민중들이 관람하는 원로원 연설에서 특정 의원을 선동가라고 공격하는 장면도 포퓰리스트라 공격하는 현실 어딘가의 누군가와 무척 닮아있다. 

저자도 밝히지만, 이 즈음의 이야기는 실제 보존되어 있는 사료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제부터야말로 진정한 실재와 상상이 견고하게 맞아떨어지는 지점일 터.  


일단, 뒷권들을 기다리는 사이 다시 1권을 펴봐야겠다.

이번에는 카이사르 말고 다른 인물들을 중심으로 읽어봐야지. 참고로 이번 작품에는 키케로의 분량도 대단하다. 사투르니누스의 국가 전복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으니, 1부 "로마의 일인자" 의 3권을 다시 읽어 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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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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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소년이 좋은 선생님을 만나 훌륭한 복서가 된다.


이 작품의 스토리는 이 단 한 줄로 요약된다.

소싯적에 만화 좀 읽은 내 또래 친구라면 불멸의 명작 일본만화 "내일의 조" 를 떠올릴 것이다. 

일본에서 19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까지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단순히 만화계 뿐 아니라 당시 일본 복싱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 '망가' 를 대표하는 작품들 중 하나이고, 수십편의 애니메이션과 영화로 재탄생한 작품이다. 


영웅 서사의 플롯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수없이 재활용되고 변주되는 공공재이기때문에 오히려 창작자에겐 도전하기 쉽지 않은 분야이기도 하다. 비교대상이 너무나 많기에, 말 그대로 수 없이 많은 도마 위에 올라 수 없이 여러번 난도질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클리셰와 내러티브, 플롯의 레퍼런스를 용납하지 못하는 독자들은 가차없이 표절이나 도작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를 쏟아내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등돌리기 일쑤이다. 


그래서였을까, 40대를 훌쩍 넘어 수천권의 책에 대한 리뷰를 남겼던 블로거의 입봉작으로는 정말 잘 어울리는 서사라고 느껴졌다. 

익숙한 플롯 안에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인상적이지만 신선하지 않은 대사를 쏟아낸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서사가 펼쳐지지만, 그 속도는 압도적이고, 독자의 호흡을 잡아끄는 특별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어째서일까? 서사 중심이긴 하지만,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문장들은 때론 한번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관념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꿈틀거리기 때문일까? 그런 문장들이 단순하고 단단하게, 무게가 실린 스트레이트처럼 감정에 쿡쿡 들이박히기 때문일까?


뻔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특별하게, 신선하게 보여주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재료라고 하더라도 쉐프의 능력에 따라 완성도가 바뀌는 요리처럼 '소설' 을 완성하는 요소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주인공 태주는 비합리와 부조리의 표상 같은 인물이다.

남들보다 많은 불행을 안고 태어났다면, 세상의 섭리가 비합리적이라는 의미일 것이고, 그 불행으로 인해 삶 전체가 어그러진다면 이 사회가 부조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복싱은 합리와 조화의 표상 같은 스포츠이다.

체중에 따라 세밀하게 나뉘어져 최대한 동등한 조건의 선수들이 맞붙는다.

트렁크 하나에 글러브 한 쌍. 선수들은 일정한 공간 안에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눈으로 보고, 팔을 뻗는다. 모든 신경과 근육들이 조화를 이룬다. 노력이 배신당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상대방보다 한 발 더 뛰고, 한 번 더 뻗고, 한 숨 더 쉬어야 이길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대부분은 노력을 통해 벼려진다. 

비합리와 부조리의 표상 같은 태주는, 링 안에서도 특별한 점이 있었다.

그에겐 재능이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선수들이 보기엔 비합리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복싱에는 '기술' 도 존재한다. 재능 없는 자들이 재능 있는 자를 이기기 위한 특별한 기술. 그것까지 배운 태주는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선수로 거듭나고, 그런 그를 꺾기 위해서는 링 밖의 권력을 끌어들여야만 했다. 

비합리하고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타고난 비합리로 간신히 삶을 살아내는 태주는 사회의 부조리와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강렬하고 흡입력 있는 서사는 예상 가능한 흐름대로 흘러가다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휙 고개를 꺾는다.

익숙한 서사를 쫓아가던 나에게, 이 클라이맥스는 엄청난 카타르시스로 다가왔다.

세 페이지에 불과한 이 클라이맥스를 위해 이렇게 전속력으로 달려왔구나, 싶었다. 

온몸이 짜릿할 정도의 카타르시스가 등줄기를 타고 뒷목을 치고 정수리로 터져나왔다. 


"찾아보면 어딘가에 있어...이곳은 당신에게 어울리는 세계가 아니야!" p.355


한 때는 소설 안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무언가 얻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설에는 답이 없다.

문학에는 답이 없다. 

문학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문제" 일 뿐이다. 


찰나를 영원으로 만들고, 영원을 찰나로 만들어 문장을 빚어 눈 앞에 보여준다.


"문제" 를.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계 안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작디 작은 사각의 공간을 찾아낸 태주.

하지만, 그 링은 태주에게 어울리는 세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태주가 찾아야 할 세계는 어디에 있을까? 그에게 어울리는 세계는, 어디있을까? 

무엇을 찾으면, 될까? 

이 작품은 끊임없이 문제를 던진다. 


찾아보면 어딘가에 있다. 이 문제를 풀어내는 방법이. 글 안에는 없다. 그 곳은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어울리는 세계가 아니니까. 

일단은 이불 밖으로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불 밖으로 나가도, 그 안은 사각의 철창으로 둘러싸인 좁디 좁은 사각의 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불 속일지도 모른다. 

답은, 글 안에, 모니터 안에, 이불 안에 있지 않다.

언제나 그랬듯이, 저 길위에 있다.

장지문과 대문을 지나,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저 큰 길 위에. 

 

 "먼저 덤벼서 자빠지는 거랑 남이 짓눌려 짜부라지는 거는 달라. 이놈 새끼야. 스스로 부딪쳐서 이겨내는 힘을 기르지 않으면 더 센 놈이 짓누를 때 짜부라진다."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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