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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찾아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저명한 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버트란트 러셀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인간의 무한한 욕망들 중 [권력] 에 대한 욕망을 가장 강렬한 것으로 보았다. 권력. 그것은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 누구나 한번쯤은 만인지상에 오른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 있을 것이다. 반장이나 회장, 학교의 '통' 이나 '짱'. 회사의 사장이나 회장, 나아가 대통령과 왕을 꿈꾸지 않는가. 권력은 남보다 뛰어나다는 증거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출나게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거나 특출나게 뛰어난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권력은 저절로 따라 들어온다. 한국의 전통 사회에서 나이는 권력과 비슷했다. 신분을 제한다면, 나이 든 사람은 언제나 어린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권력은 돈이고, 돈은 권력이다.
작은 지방에 살던 장원두는 친구 재천으로부터 '마사오' 라는 인물의 부음을 듣는다.
마사오. 일제시대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이 인물은 원두가 살던 지역을 주름잡던 최고의 건달이었다. 마사오가 지역 최고의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는 일단 그가 특출나게 뛰어난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터다. 남보다 큰 체격, 단련된 주먹, 켜켜히 쌓인 실전 경험. 그리고 주요 도로가 언덕과 안개로 둘러 있는 지리적 특성은 지역을 고립시켰고,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드나들 타지역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터라 마사오에 대한 소문은 좁은 지역 안에서 돌고 돌며 끊임없이 확대재생산 되며 [소문] 은 [신화] 가 되었다. 수컷들의 세계에서 폭력은 타인을 굴종시킬 수 있는 가장 쉽고 단순하며 직접적인 수단이다. 게다가 고립된 지방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젊은 축들은 모두 선후배 아니면, 옆학교에 그 옆학교 선후배들일테니, 폭력에 관한 한 누구보다 특출났던 마사오가 지역의 왕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버트란트 러셀의 저서 [권력Power] 을 기반으로 중국황조를 재조명했던 뤄위밍의 [권력 전쟁]은 중국 역사에서 가장 처절했던 황위다툼이 소개되고 있다. 권력의 제 일 속성은 [시한부] 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아니, 그 전에 늙는다. 늙음이란 신체가 약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제 아무리 특출난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도 늙는데는 예외가 없다. 특출난 신체 능력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자는 신체 능력의 상실과 함께 권력을 잃는다. 중국 황조에서 가장 자주 일어났던 찬탈은 형제나 자식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것은 비단 중국 역사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서양은 물론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왕이 스스로 자식들을 죽이거나, 자식이 아비를 폐위시키거나 죽이는 사례가 꽤 많다. 그와 비등하게, 개국공신이나 왕의 군사였던 자가 반역을 일으키는 경우도 허다하다. 너무나 유명한 사례로 삼국지의 사마천은 결국 자신이 섬기던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3대에 걸쳐 무너뜨리고 '조' 씨 후손들을 남김없이 도륙하지 않는 단초를 제공하지 않는가. 한나라 고조 유방도 가장 큰 공을 세웠던 한신을 믿지 못하고 그를 축출해 내며 그 유명한 고사인 토사구팽을 완성하지 않았는가. 2인자의 자리는 언제나 위태롭다. 하지만, 잘만 이용하면 1인자보다 더 한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원두와 시냇가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날 한시에 태어난 친구 '재천' 은 그렇게 쉽게 권력을 손에 넣는 방법을 알고있었다.
왕을 죽일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과 싸울 필요도 없었다. 왕 옆에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왕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면, 왕의 오른팔은 만인지상 일인지하다. 만명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 한명에게만 머리를 숙이면 된다. 이처럼 간단한 일이 어디 있을까? 재천은 일찌감치 2인자의 자리를 택한다. 시대의 흐름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재천은 그것을 통해 능숙하게 자신의 권력을 튼튼하게 유지해 나간다. 마사오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누리고, 창용의 이름을 빌려 권력을 누렸다. 그는 흐름을 읽는 본능이 있었으며, 그것을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소문' 이었다.
언론은 대중을 통제하는데 핵심적인 요소이다. 예로부터 '민심은 천심' 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민심이란 대중들의 마음이다. 그리고, 대중을 통제하는 것은 바로 언론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들 중 하나인 연예계 스타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TV와 신문,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보여지는 수많은 '소문' 들이 대중들을 유혹하고, 필연적으로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한다.
재천은 바로 '언론 플레이' 를 깨달은 것이다.
작은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권력 다툼은 국가에서 일어나는, 그리고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권력 다툼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마사오에게 '왕' 이라는 칭호가 어울리고, 그를 둘러싼 다툼들 또한 다르지 않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작전을 수정하고, 권력을 얻기 위해 힘있는 사람들과 만나 인맥을 쌓고, 약점을 잡아 협박하고, 향응을 제공하며 얼르고 달래며 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공포와 욕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끈끈한 공동체. 지역이 작으면 작을수록 유착의 유대는 단단해지고 끈끈해진다. 윤태호 작가의 '이끼' 를 보면 이장과 동네사람들 사이에 연결된 고리를 확인할 수 있다. 경찰은 물론 검찰, 지역의 유지들간에 이뤄져있는 단단한 끈. 작은 지역이면 지역일수록 그것은 권력을 보호하는 성채가 되고 보호막이 된다.
작품은 권력의 기본 속성을 꿰뚫고 있다. 필연적으로 권력은 정치와 연관된다. 재천은 타고난 정치 수완을 가지고 있었고, 경쟁자들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그것은 재천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다른이들보다 더욱 강렬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인자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다. 재천은 아마 점점 더 위로 올라갈 것이다.
[아름다움] 또한 권력이다.
그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물론 아름다움의 기준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하지만, '아름다움' 이란 생존이나 번식과는 다른 능력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초능력이라고나 할까. 언제나 어디서나 그 시대에 맞는 아름다움을 타고난 사람들은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굳이 '미녀는 괴로워' 같은 영화를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위에도 언급했던 '연예계 스타' 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중심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외모의 아름다움'이 기반하지 않던가. '예쁘면 모두 용서된다' 는 말도 있다. 아름다움 또한 시한부이다. 때문에, 현명한 미인들은 아름다움으로 잡아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자식도 죽였다. 현대엔 좀 다를 터다. 돈이 있으면 그 아름다움의 한계점을 보다 멀리 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여자들은 그래서, 강한 남자들을 선택한다.
재천의 권력욕 뒤에는 한 여인이 있다.
세희. "대통령의 아내" 가 꿈인 세희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면, 대통령의 아내가 되고 싶은 인물이었다. 세희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많지 않지만, 재천의 권력욕을 자극하는 사람은 바로 세희가 확실하다. 책의 마지막장을 덮을 때, 세희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작전은 세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수도 있다. 그녀야말로 진정한 정치가. 진정한 권력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측천무후 처럼. 세희는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재천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대통령의 아내가 되기 위해, 대통령이 될 자질이 있다고 판단된 재천을 선택했고, 그를 정말로 대통령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마사오와 창용의 죽음 뒤에는 아름다운 그녀가 있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자인 '원두' 는 욕심도 적당하고, 의욕도 적당한,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더 뛰어나지도 않고, 더 못하지도 않다.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미움받지도 않는다. 우유부단하고, 결단성이 미약하고, 실수도 많이 하고, 기회도 자주 놓친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오래 살 것이기도 하다. 원두는 아마, 재천에게 끌려가기도 하고, 대경에게 끌려가기도 하며 모든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언제나 그런 사람들의 손끝에서 기록되는 법이니까.
성석제 작가의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필치는 변함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이 작품이 처음 출간된 것은 1996년이니, 그의 초기작이다. 독자들의 호흡을 빼앗고, 긴장감을 불어넣는 서사력은 그때부터 대단했구나, 라는 감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일까, 사실 호흡이 가쁠 정도로 여백이 없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정신없이 치달린다. 젊은 이야기, 젊은 문장. 화자인 원두의 인생을 훑어간 수많은 인물들의 명멸. 개인적으로는 이야기 중간 중간 쉬어갈 만한 부분이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다. 380여 페이지가 너무 짧게 느껴진다.
원두가 품고있는 마사오에 대한 신화는 어렸을 적의 동경인 동시에, 광자에 대한 첫사랑의 순정이기도 하다. 원두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인 세희를 재천에게 넘겨주듯, 마사오와 광자를 재천에게 넘기고 삶에 대한 모든 순수와 동경을 벗어낸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고이 간직하고 있던 동경, 순수, 순정. 그것이 그의 삶에 어떤 역할을 했던 것일까. 그것을 모두 벗어낸 원두의 앞으로 삶은 무엇이 될까? 원두는 자신이 벗어냈던 동경이자 순수이자 순정인 마사오를 장례시키는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본다.
누구나 마음속에 신화를 품고 산다.
어떤 인물일 수도 있고, 어떤 사물일 수도 있고, 어떤 꿈일 수도 있다.
원두에게 마사오는 신이었고, 영웅이었다. 신앙에 가까운 순수한 동경이자 우러름. 쫓을 수 없는 꿈이고, 이룰 수 없는 목표. 첫사랑인 세희와 첫 여자인 광자. 그리고 순정. 순수.
한편, 재천에게는 현실적인 목표이자 한계이자 넘어야 할 벽이었고, 창용에게는 눈엣가시였다.
그리고, 세희에겐 무엇이었을까? 일단, 그녀에게는 형부였다.
가까이에서 바라본 마사오는 세희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아마, 야심이 넘쳤던 그녀에게 마사오는 밟고 올라서야 할 존재였을 터다.
몸을 담 위로 일으킬 수 있는. 디딤돌.
어떤 삶이 더 나은 삶일까?
권력의 손잡이를 쥐기 위해 바둥거리는 삶.
그리고, 냉소어린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는 삶.
고장난 망원경을 보며 불평을 내뱉는다.
"망원경만이라도 밝고 어두운 세상 모두에 공평하게 설치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p.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