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노운
디디에 반 코뵐라르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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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먼저 개인적으로 정신없이 이야기를 줄줄 따라갈 수밖에 없는 미스테리나 스펙타클한 장르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는 점을 명시해야 하겠다. 특히 최근 유행하는 기욤 뮈소 작가 풍의 헐리웃 식 간결하고 빠른 묘사, 이야기가 주로 주인공의 행동과 대화만으로 진행되어 나가는 작품들은 더더욱 피하고 있다. 물론 일본 장르문학도 마찬가지. 한 때는 정신없이 심취한 적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작가가 '자, 나만 따라와!' 라는 느낌의 작품들에 치였다고 할까, 지쳤다고 할까, 질렸다고 할까.

 

[언노운] 은 위에 언급한 모든것들의 총 합이다.

작가는 마치 작정한 듯, 독자들을 정신없이 자신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이런 류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미덕은 '흡인력' 일 것이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사건들, 끊임없이 등장하는 인물들, 실마리들. 대화, 혼잣말, 대화, 혼잣말.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책을 손에 드는 순간 좀처럼 내려놓지 못 할 것이다. 두께도 200페이지 정도이기에 부담없이 순식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길 수 있을것이다.

 

일단, 이 작품의 스토리나 인물, 반전 등에 대해서는 딱히 트집잡을 만 한 구석이 없다. 이미 영화로도 나왔듯이, 이 작품은 아주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뛰어난 발상으로 절묘하게 서사를 뒤틀고 식물에 관한 최신 과학을 소재로 버무려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영상보다는 글과 상상력이 조화되어야 더욱 큰 즐거움을 줄 터이다.

 

이야기는 무척이나 황당한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

큰사고를 당하고, 코마의 세계를 헤맸던 우리의 주인공 마틴 해리스. 마틴은 간신히 혼수상태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아파트로 찾아간다. 하지만, 그 곳에서 자신이 '마틴 해리스' 라고 주장하는 또 다른 사내를 만나게 된다. 신분증도 없고, 아내조차 자신을 모른 체 하는 상황.

마치 몰래 카메라인 듯 한 이런 엉뚱한 상황속에서, 마틴은 자신이 '진짜 마틴' 임을 증명해야 한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

실존과 실증. 이것은 분명한 서양 철학의 기본이다. 동양 철학에서 '나' 는 꼭 '나' 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동양 철학에서 자아란 무의미한 것이다. 자아는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다르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을 뚜렷히 구분하기를 바랬고, 그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자아였다. 동양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그저 스스로 그러할 뿐이었지만, 서양에서는 그것이 그러한 이유를 찾아야 했고, 증명해야 했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증명할 필요성을 재미있게도, '종교' 때문에 느끼게 되었다. 난 모태신앙 크리스천이다. 어렸을 때 죽은 사람은 모두 천국에 간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궁금증은 '그럼 그 사람의 외모는?' 이었다. 할아버지는 늙어서 돌아가셨고, 나는 어린 아이인데, 죽으면 어떤 모습으로 천국에 갈까? 만약 모두 젊은 모습으로 간다면. 나는 본 적도 없는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젊은 모습을 과연 '알아볼 수 있을까?' 였다. 그리고, 과연 그들은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

나중에 나이를 먹어가면서, 조금씩 의문은 확장되어 갔다.

그곳은 영혼의 세계라서 외모가 없다고 하더라. 그리고, 과거의 기억도 없다고 한다. 고통과 미움, 분노, 슬픔같이 마이너한 감정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고 한다.

 

'잠깐. 근데. 그럼. 그게 나야? 외모도 없고, 과거의 기억도 없고, 내가 느끼는 감정들도 일부분만 남아있는데. 그걸 정말 '나' 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의문은 불교의 윤회사상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내 영혼이 만약 윤회해서 다시 사람이나 동물로 환생한다고 쳐도, 내 지금의 삶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싹싹 지워지는 것이다.

즉, 다음 생에 태어나는 '나' 는 절대로 '나' 가 아닌 것이다. 내생의 '나' 가 현세의 '나' 라는 증명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완벽히 다른 개체가 되는 것이다. 과연  그것을 '환생' 이라고 말할 수 있는건가? 내가 지금 이 생에서 좋은 선업을 쌓아도, 결국 남 좋은일 하는거다. 아니,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그럼 저기 저 아기가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일 수도 있다는 말? 아니, 저 고양이가, 아니 저 바퀴벌레가, 아니 저 하루살이가.  

 

결국 나에겐 사후세계도, 윤회도 모두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의 나?

지금은. 솔직히 천국 가는 것도, 다음 생에 태어나는 것도 모두 무無 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마틴 해리스가 맞닥뜨린 두려움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되었다.

사회와 시스템에 대한 의심은 굳건한 자기신뢰를 바탕해야만 가능하다. 그는 자기 자신이 '마틴 해리스' 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해야하는 과제는 그 확신을 증명하는 것이다. 마치 수학공식을 증명하는 것처럼, 여러가지 변수들을 집어넣고 수학적 지식을 총 동원해서 명제가 참임을 증명하면 된다. 하지만, 문제는 공식 자체에 오류가 있다는 의심, 명제 자체가 거짓이라는 의심을 하는 순간이다. 그 순간 해리스는 쓰나미와도 같은  거대한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이 작품의 백미는 바로 그 부분이다.

마틴 해리스가 세상의 시스템에 대한 의심에서 스스로에 대한 의심으로 넘어오는 부분.

작품속에서 그 부분은 복잡다단한 뇌에 대한 과학적인 정보들과 각종 식물학적 정보들이 뒤엉키는데, 정말 이해하기 쉽게 풀어 있으며, 이야기 자체에 대한 흥미는 물론 제공하는 정보 자체에 대한 흥미도 잡아끈다. 이 책을 읽고 '뇌' 에 관한 지적 호기심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그만큼 이야기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꽤나 방대하고 딱딱한 정보들이 유연하게 녹아들어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 마틴 해리스의 심리에 대한 묘사도 뚜렷하다. 과학, 초자연, 심리가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의 스릴을 제공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 이후 찾아오는 클라이맥스가 오히려 좀 편안할 정도였다.

 

모두가 입을 다물어야 할 작품의 클라이맥스는, 클라이맥스 대목만 떼놓고 봐도 완성도가 높을 정도로 대단히 다듬어져 있다.

아마 이 작품을 읽으신 독자들은 책의 나머지 5분의2. 즉, 절정을 지나 위기-결말로 이어지는 두 단락에 작가가 모든 심혈을 기울였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봐도 대단히 공들였음이 느껴지는 완벽한 클라이맥스. 충분히 박수 받을만 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간만에 만나본 심리 스릴러.

유럽의 장르소설은 확실히 헐리웃의 장점을 현명하게 끌어내 상당한 시너지를 만들어 냈음은 분명하다.

유럽문학 특유의 미장센이 듬뿍 녹아들어있는 문장에 적당히 녹여내는 철학과 전문적인 정보들. 덧붙여 헐리웃 식의 스피디하고 박력 넘치는 묘사는, 인물 자체에 대한 묘사에 수십페이지를 할애하며 '캐릭터 정립' 에 공들이던 지루함을 효과적으로 무장해제시켰다. 개인적으로는 보다 디테일 해도 되었을 부분들. 즉, 분량을 더 길게 가도 좋았을 부분들이 많이 보였다.

최근의 유럽 장르문학은 지나치게 스피디하고, 간결하다. 마치 일본 장르문학을 보는 듯 할 정도이다.

오히려 최근엔 미국쪽 장르문학이 훨씬 더 하드한 느낌이다. 국내에 그런 작품들만 소개되서 그런걸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무튼, 이런 점들은 완벽하게 개인적은 취향이고. 이 작품은 정말 잘 읽히는 작품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별점은 서두에 언급했던 개인 취향 때문이니 참고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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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마음 2011-03-0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노운 리뷰를 보다 서재까지 와보게 되었습니다.
여기 서재에서 몇 권의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공감하는 부분이 참 많네요.^^

열혈명호 2011-03-15 23:56   좋아요 0 | URL
와~ 감사합니다. ^^
리뷰를 보고 그 내용에 공감이 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되게 반갑죠!!
제 서재는 참 방문자들이 없는 편인데, 작은마음님의 댓글에 마음이 포근해지네요. 작은마음이지만 따뜻하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