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절대왕정이 무너져간 과정들은 드라마틱하기 짝이 없었다.

수천년간 한낱 '평민' 이었던 대다수의 백성들은, 역시 수천년간 자신들을 '지배' 해온 계급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동일한 계급 안에서 의지를 하나로 모으는 것이었다. 왕이나 나나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인간이고, 단지 누구의 아들이냐, 딸이냐에 따라 삶 전체가 달라지는 것은 결코 '인간다운 일' 이 아님을 인지하고 받아들였다. 그 과정도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서서히 수천년의 절대왕정이 무너졌다. 그리고 '왕' 을 잃어버린 국가들은 새로운 이념들을 받아들였다. 세계 최초의 공화정이 시행되고, 엄청난 사람들이 목숨을 바쳐 새로운 이념을 정립시켰다. 누군가는 새로운 이념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넓디 넓은 바다를 건너 신대륙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렇게 '민주주의' 라는 이념은 유럽식 민주주의와 미국식 민주주의로 나눌 수 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유럽식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시민들의 단결과 응집력, 그리고 투쟁을 떠올릴 수 있다.

자유와 평등을 싸워서 쟁취해낸 유럽의 시민들은 권력층을 견제할 수 있는 단일 세력으로 성장했다.

미국식 민주주의는 개개인에 대한 무한한 자유와 권리보장 그리고 자본주의를 떠올릴 수 있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가 발달한 것이다. 

유럽식이든 미국식이든, 그들의 민주주의는 최소한 100~200년의 시간동안 서서히 이루어져 왔으며,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웠던 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얻어냈으며, 영위하게 되었다.

 

한편, 대한민국의 왕정은 일제의 침략과 강제병합, 그리고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군정의 신탁통치를 통해 무너졌다.

엊그제까지 평민이었던 백성들이 하루 아침에 국민이 된 셈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반상의 구별이 명확했는데, 아침에 그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사실 국민들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어제 일본군의 앞잡이었던 경찰서장은, 오늘 대한민국의 경찰서장이 되었고, 일제의 비호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오늘 대한민국 정부의 비호를 받아 더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웠던 이들은 빈민으로 전락했다. 세상이 바뀐걸 실감도 하기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로 인헤 미국의 신탁통치는 더욱 강력해 졌으며, 민족 차원에서 정치 수뇌부를 자정할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일제의 똥구멍을 핥으며 배를 채워온 부류는 미국의 똥구멍을 핥으며 여전히 권력의 상석을 차지했고, 허울좋은 '민주주의' 세상에서 돈을 쓸어담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의 정부는 일제 침략기의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국민들은 대통령과 왕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못했고, 정치가와 양반들을 구별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공무원과 벼슬아치들을 동일시했다. 수십년 뒤, 고등교육으로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스스로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고, 미군정의 신탁통치와 군사 쿠데타가 만들어낸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한다.

화염병과 죽창을 들고 세상을 바꾼 이들. 우리는 이들을 386세대라고 부른다. 30대, 80년대 대학을 다닌, 60년대생들.

지금 그들은 40대일테니, 486세대로 명명하면 되겠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바꾸었지만, 자신들이 무너뜨린 그들과 똑같이 변해갔다.

물론, 세상이 그들이 원하는대로 바뀌지 않았다는 점도 있었다. 정치 수뇌부들은 지나치게 촘촘히 얽혀있었고, 그들에게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있었으니 바로 '돈' 이었다. 일제를 등에 업고, 미국을 등에 업고 돈을 쓸어모았던 그들은 정권을 지배하고 있었고, 결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열의 맨 앞에서 죽창과 화염병을 들었던 그들은 결국 고개를 숙이고 굴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싸웠지만, 진 사람이 없었고, 쟁취했지만, 얻은것이 없었으며, 변혁을 꿈꾸었지만, 바뀐것이 없었다.

 

작가는 바로 그런 386 세대. 특히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의 상위 10% 안에 드는 엘리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진정한 의미의 '사회 지도층' 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수많은 드라마나 작품들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상위계층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본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작년, 절찬리에 종영한 '자이언트' 라는 드라마에서도 정경유착의 단면과 한국에서 재벌이 부를 축적해가는 과정이 비교적 설득력있게 그려졌으며, 최근 역시 엄청난 인기속에 종영한 '시크릿 가든' 에서도 유명 백화점 VVIP 파티나 상속자의 생활상이 잠깐 보여졌었다.

이 작품 '허수아비 춤' 은 그런 드라마속 이야기의 리얼 버전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이다. 

 

'아리랑' '태백산맥' 에 이어 '한강' 까지, 한국사 100여년을 종이위에 고스란히 글로 녹여냈던 노작가는 '허수아비 춤' 을 통해 한국 근대사에 방점을 찍어낸다. 작품은 크게 4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작가가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메시지가 훨씬 더 많다.

 

2~3년 전, 우석훈 교수의 '88만원 세대' 라는 작품을 통해 386세대가 만든 세상에 살아가는 현대의 20대의 현실을 분석하여 큰 호응을 받았던 책이 있다. 그 작품에서도 20대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싸울 줄  모른다' 는 점을 들었다. 독재정치와 군정에 화염병에 짱돌, 죽창을 들었던 세대들의 자식들로 자라난 20대는 당연하게도 투쟁심 자체를 배우지 못한 것이다. 우리 세대는 부조리 속에 있지만, 부조리 속에 있는 줄 모르고, 억압받고 있지만 억압받는 줄 모른다. '민주주의' 를 처음 맞닥뜨렸던 50년~60년대의 한국 국민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386 세대가 굳건히 만들어 놓은 대한민국 자본주의 제국에서 살아남기만을 위해 노력한다. 대학은 더이상 고등교육기관이 아닌 취업준비기관으로 전락한지 오래고, 싸워서 쟁취하는 것보다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들을 386세대에게 전가할 생각은 없다.

그들 또한 억압되고 부조리한 세상속에서 당당하게 맞섰고 자신들의 것을 쟁취한 선구자 들이다. 결국 노무현 정권과 참여정부라는 눈부신 성과를 이끌어 냈던 것은 그들이었고, 그런 정권을 MB 정권으로 망가뜨린 주역은 결국 우리 세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그들로부터 그런 점들을 배웠어야 했고, 끊임없이 사회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 윗세대의 실책만큼 우리 세대 자체의 실책이 있는것이다.  

 

조정래 작가는 '허수아비 춤' 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상위 2%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우리 세대는 분명, '그래서 어쩌라고?' 라고 시크하게 대답할 것이다. 그게 '쿨' 한거 아니냐며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놈들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라고 분에 차서 소리지르면, 우리 세대는 분명 '짜증나게 열폭하지 말고 네 일이나 잘해' 라고 말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세대는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다. 상위 2%안에 못들어간 98%는 다 자신들이 잘못해서 그모양 그 꼴인 것이다.

상위 2%만 넉넉하고, 나머지 98%는 배고픈 사회의 시스템을 붙들고 늘어져야 겠다는 생각따위, 우리는 못한다.

그 시스템이 잘못된 시스템이라는 것. 우리가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모두가 적들뿐이다. 이것을 세대 안에서의 싸움이라고 한다. 우리 세대는 세대 내 갈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뜻을 모을 수 없고, 공동의 전선을 펼칠 수 없다. 안타깝지만, 우석훈 교수와 여러 시민운동가들이 주창했던 '생협' 같은 세대간 연대는 너무나 힘들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터다.

작품 안에서도 언급는 '시민연대' 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반 시민들이 권력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임에도 말이다.

 

아마, 우리 88만원 세대들은 영원히 가난과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식들에게도 이 가난과 절망은 고스란히 물려줄 터다.

우리 세대는 허수아비 세대이다.

짧디 짧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무능하고 가장 별 볼  일 없는 세대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의 88만원 세대. 우리들 말이다. X세대와 N세대 사이에 어설프게 걸쳐있는 어설프고 불쌍한 세대.

 

조정래 작가가 이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디테일하게 들려준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이 '그릇되었음' 을. 우리 사회의 구조가 '불합리함'을. 그리고, 이런 세상에 태어난 우리 세대에게 잘못이 있는게 아니라, 우리 세대가 살고 있는 세상이 잘못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 짱돌을 집어들 수 는 없을것이다. 우린 너무나 나약하고 온순하며 무력하게 자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다음 세대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88만원 세대' 라는 용어가 태동했을 즈음에 국내에서는 많은 촛불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위 안에는 당연하게도 88만원 세대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보였다고 해도 일부였고, 대다수의 88만원 세대들은 그 와중에도 어디 도서관에 쳐박혀 취업준비에 열중이었고, 공무원 시험 준비에 열중이었다. 물론 시위는 88만원 세대들과 386 세대 선배들이  10대~20대. 80년대 중후반~90년대생들이었다. 우리가 취업몰입교육에 물들어 있을때 그들은 수많은 대안학교를 통해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인터넷 세상의 무한한 정보를 통해 더 많은 것들을 흡수하기도 했다.

 

'허수아비 춤' 은 88만원 세대인 나에게는 정말 큰 과제처럼 다가왔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데 나는.

설마 내가.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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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Space Fantasia (2001 야화) 세트 1~3(완결) 2001 Space Fantasia
호시노 유키노부 글.그림, 박상준 감수 / 애니북스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아주 어렸을때 남산 어린이 우주과학센터(?) 였던가 에서 단체로 관람했던 거대한 실내 별자리를 기억한다.
아마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이다. 커다란 강당안에 약간 위쪽으로 고정되어있는 좌석이 있고, 천장은 거대한 돔의 형상으로 되 있어서, 영사기를 통해 돔 형 천장에 밤하늘을 쏘아서 별자리를 보여주는 공간 말이다. '플라네타리움' 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십수년 뒤에 알게 되었던. 실내 별자리 관람관(?) 말이다. 영상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엄청난 자연의 경이 앞에 입을 쩍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새까만 밤하들에 박혀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보석들. 그 뒤로 별자리 책을 사다가 밤하늘에서 북두칠성을 찾아보고 카시오페아를 찾아보던 기억이 난다.
 
십수년 뒤 군대 시절, 해발 1407m 고지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대공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서다가 밤하늘에 박힌 무수한 별들 중 하나가 뚝 떨어지는 광경을 목격한 적도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주 선명하게 본 별똥별이었는데, 소원을 빌 겨를도 없이 뚝 떨어지고 말았고, 일단 그 이질감에 할 말을 잃었더랬다. 별이 떨어지는 광경은 엄청난 위화감이 들었다. 마치 컴퓨터 그래픽 같은 느낌이었다. 진짜인데, 가짜 같았다. 이래서 많은 옛 사람들은 별이 떨어지면 나라에 위기가 찾아들거나 위대한 성인이 목숨을 다했을거라고 생각했을터다. 그정도로, 현대인인 나에게도 위화감이 있었으니까.
 
밤 하늘도 그럴진데, 우주라면 어떨까.
그 엄청난 무한의 공간. 죽음과 어둠, 영원한 무無의 공간. 아이러니하게도 죽음과 무의 공간속에서 생명과 유가 태어난다.
 
우주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의 원조는 단연 '아서 클라크' 일 것이다. 
당대 최고의 SF작가들이었던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 과 함께 3대 SF의 '레전드' 인 그는 다른 두 작가에 비해 훨씬 체계적이고 방대한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학자이자 발명가이기도 했던 아서 클라크는 보다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우주를 다룬 작품들이 특히 더 많다. SF 문학계에 '아서 클라크' 가 있다면, 일본 만화계에는 바로 이 작가, '호시노 유키노부' 를 꼽을 수 있다.
 
정말 엄청나게 저변이 넓은 일본 만화속에서 SF장르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테츠카 오사무의 '아톰' 도 그 장르에 넣을 수 있을 것이고,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사이보그 009' 같은 전설적인 작품들도 포함시킬 수 있다. 오토모 가츠히로는 '아키라' 라는 전설적인 작품으로 '사이버 펑크' 라는 SF의 한 갈래를 개척하기도 했다. 마츠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 와 '우주전함 야마토' . 토미노 요시유키의 '건담' 시리즈 같은 애니메이션도 SF일 것이고, 최근으로 넘어오면 오타가키 야스오의 '문라이트 마일' 같은 작품들도 손에 꼽을 수 있을것이다. 여기 언급된 작품들은 국내에도 소개된 아주아주 일부의 작품들일 뿐이고, 일본의 SF의 다양성은 바다 건너 우리에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임은 분명하다. 이렇게 엄청나게 넓은 일본 SF만화의 바운더리 안에서도 언제나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작가가 있으니.
바로 '일본 SF의 아서 클라크' 라 불리우는 '호시노 유키노부' 이다.
 
그리고, 이 작품 2001 夜物語.   '物語' 는 일본에서 '~이야기' 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니, '밤의 이야기' 정도로 보면 좋다.
번역판에서는 결국 '천일야화' 에서 따온 듯 한 '야화夜話' 라는 제목을 붙였다. '물어物語' 라는 단어는 한국에는 없는 단어이니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원작의 구성 또한 '천일야화' 처럼 '첫번째 밤의 이야기' '두번째 밤의 이야기' ~ 등등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잘 어울린다.
 
작품의 도입부는 SF팬들에게 아주 익숙한 장면이 나온다.
원시인이 어떤 동물의 뼈의 뾰족한 부분으로 사냥을 하고, 기쁨에 겨운 듯 그 뼈를 하늘로 던져 올린다. 그리고 공중에 뜬 그 뼈의 모양은 점차 길쭉한 로켓으로 변화한다. 바로 '아서 클라크' 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의 오프닝이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에서도 원작 그대로 사용되었던 이 장면은 호시노 유키노부의 작품에서도 그대로 쓰여진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아서 클라크에 대한 오마쥬인 것이다.
 
작품은 여러 단편들이 차곡차곡 쌓여있고, 언듯 별개인 듯 한 각 작품들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사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작품들 안에는 아서 클라크의 작품이 연상되는 소재나 주제, 사건이 등장하기도 하고, 반물질 이론이나 상대성이론등이 아주 완벽한 모습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정확한 과학적 근거들로 과하거나 부족함 없이 활용되고 있다.
 
사실 작품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면, 언젠가 한번 씌였던 발상들이 등장하곤 한다.
그것은 SF라는 장르의 특성상, 정해진 과학적 이론 안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발상은 서로 비슷할 수 밖에 없는데, 로저 젤라즈니나 스타니스와프 렘 등의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작품에서 '플롯' 이라는 부분이 작가들 사이에서 공공재로 인식되듯, SF 장르에서도 한번 발표된 발상은 여러 작가들이 되사용하기도 한다. 역시 실례로, 웜홀을 이용한 우주선 도약 항해기능이라던가, 광속으로 날아가는 우주선 안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지구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시간적인 틈이 생긴다던가 하는 발상들 말이다. 이런 발상들은 역시 작가들 사이에서는 공공재처럼 인식되고, 그것을 이용한 다양한 이야기들과는 별개로 평가된다.)
 
지식을 작품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그 분야의 준 전문가 수준이 되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만화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어떤 작품을 위해 전문가를 고용해서 감수를 부탁하기도 한다. (간단한 일례로 '고스트 바둑왕' 같은 작품은 실제 프로 바둑기사가 작품에 등장하는 바둑에 대한 부분을 디테일하게 감수하기도 했고, 복싱만화나 격투기 만화 또한 실제 선수들이 감수를 맡기도 한다.)
호시노 유키노부가 일본의 아서 클라크라고 불리우는 이유들 중 하나도 이 방대한 지식과, 그것을 작품에 녹여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이성적인 해석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부분은 역시, 작가로서의 호시노 유키노부. 바로 단편 작품들이 서로 가지고 있는 유기성이다.
이 단편에서 쓰였던 어떤 작은 소재가, 훨씬 뒤의 다른 단편에 영향을 준다던가, 이 단편에서 일어났던 작은 사건이, 다른 단편의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던가 하는 점들이다. 뿐 만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같다보니 작품집 자체로서의 완성도가 대단히 뛰어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큰 틀 안에서 변화되는 주제의식도 대단히 흥미롭다.
 
이 작품이 쓰여진 건 1980년대 중~후반이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인 한국에서는 신경을 돌릴 틈이 없었지만, 당시 세계적으로 우주개발 열풍이 불었더랬다.
우주정거장과 달기지 계획이나, 우주레이져빔 계획인 스타워즈 프로젝트, 화성 탐사계획 등이 등장했고, 일본의 로봇기술이 유명세를 탔으며, 우주에 대한 낭만적인 꿈들이 가득했더랬다. 풍족한 90년대를 바라보며 희망들이 가득했고, 전 세계젹으로 SF문학 열풍 또한 강렬했더랬다. 우주전함 야마토나 건담시리즈의 본격적인 붐이 일어난 것도 이 시기였고, 호시노 유키노부의 '2001 야화' 도 이 시기에 씌여졌다.
 
그래, 그 당시엔 2000년이라는 해가 멀게만 느껴졌었다.
그 당시의 SF작품들을 보면 2011년엔 세상에 로봇들이 가사를 대신해주고, 전자동 자동차가 거리를 활보하며, 달기지와 화성기지를 오가는 셔틀우주선이 등장할 것만 같았다. 분명 그 당시보다 많은 것들이 발전하긴 했지만, 우주에 대한 부분은 아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달은 여전히 황무지이고, 화성엔 아직 사람이 도달하지 못했으며, 우주를 관광하는 셔틀로켓이 개발되지는 않았다.
1980년대의 SF소설이 2000년대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SF소설일 수 있는 이유이다.
이 작품이 여전히 꿈같은 작품일 수 있는 이유이다.
 
새삼, 그때의 꿈과 희망들이 가슴 한켠에서 울컥 솟아오른다.
 
이 거대한 지구 속에서도 '나' 라는 인간은 티끌인데. 무한한 우주 속에서는 무엇일까.
 
이 무한한 공간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왜 생겨났을까.
그리고, 그 속에 나라는 생명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왜 생겨났을까.
 
그래, 그건 아마도 '너' 를 위해서 일 것이다.
 
이런 무한한 공간이 '나' 를 위해서 만들어졌을 리는 없다.
 
그래.
그건 아마도.
 
'너' 를 위해서인 게 확실하다.
 
 
 
"수많은 인간들의 드라마도 , 아득한 곳에서 반짝이는 덧없는 빛줄기일 뿐..." 3권 p. 253
 
 
 
 
 
 
잠깐 작품을 감상해 보시길.
 
 


 


 

 
 
1권의 표지와 도입부. 사실체의 그림이 돋보인다.
직사각형의 구멍이 뚫린 두터운 커버 디자인이 재미있다.
최근 일본만화들도 컬러링에는 디지털을 많이 이용하는데, 당시의 수작업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컬러 페이지들도 정겹다.
 
 
 
 



2권의 앞표지와 오프닝.
디테일하고 리얼한 우주선 묘사가 돋보인다.
반물질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반물질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 구체화 시키기는 아직 어려운 부분이다.
 
 
 
 


 
 
장대한 서사가 마무리에 도달하는 3권의 표지와 오프닝.
3권의 첫 단편인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라는 단편은 아주 서정적이면서도 경이로운 작품이다.
작가의 메시지는 바로 이 작품에 들어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나는 기원한다.
언젠가 또 다시 새의 노래, 사람의 목소리, 생명의 속삭임이 머나먼 우주로부터 돌아오기를..." 3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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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도시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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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풀' '공중그네' 등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오쿠다 히데오는 사실 정통 리얼리즘 작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단지 우리에게 그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코믹한 캐릭터인 '이라부' 의 강렬한 인상과 시덥지않은 글빨로 진정한 오쿠다 매니아들에게만 읽히는 몇몇 에세이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가볍고 코믹할 뿐, 그의 단편들이나 근작인 '올림픽의 몸값' 만 봐도 그가 일본에서도 보기 드물정도로 정통적인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작가임을 알 수 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사실 출판 마케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일례로 '마돈나' 같은 작품집의 작품들을 봐도 그의 작품속은 현대의 일본사회를 살아가는 인본인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꿈의 도시' 는 제목에서 풍기는 환상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너무나 평범하고 리얼한 현실 그 자체가 녹아들어 있다.

작품은 유메노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여러명의 등장인물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순서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30대의 이혼남 '아이하라 도모노리'. 유메노시의 사회복지 공무원으로 국가 보조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도시 빈민층을 상대로 보조금을 타러 오는 사람들의 서류를 심사하고 상담을 하며 그들이 보조금을 받을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고 판단하는 일을 하는 하급 공무원이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구보 후미에'. 부모님과 남동생이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이고, '가토 유야' 라는 전직 폭주족 출신의 20대의 세일즈맨이 그 다음으로 등장한다. 유야 역시 이혼남으로 전처가 자신의 아들을 키우고 있다.

'호리베 다에코' 는 유메노시 유일의 대형 마트인 '드림 타운' 에서 일하는 사설 경호업체의 파견직원이고, 40대의 독신여성이다. '사슈카이'라는 종교에 빠져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야마모토 준이치'. 2대째 유메노시를 터전으로 사업과 정치를 하고 있는 유지로서 자신도 2대째 시의원을 해먹고 있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자녀가 있으며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야쿠자 출신 형제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10대부터 50대까지, 유메노시에 살고 있는 다양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간다.

나이도 직업도 주변 인물들 마저도 상이한 이 5명의 인물들이 맺고 있는 거미줄과 같은 인맥은 정말 절묘하고 촘촘하게 짜여져 있어서, 전혀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배치가 절묘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연관되어 있지 않은 듯 해 보이지만, 이 5명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를 지나쳐 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주는 리얼함은 현대 사회의 수많은 문제점들을 적확하게 잡아서 이야기 속으로 완벽하게 녹여낸 부분일 것이다.

위에 소개한 인물들의 직업처럼, 이 작품은 도시 빈민층 문제, 교육문제, 청년 실업과 심각한 정경유착과 불륜과 매춘 등 성도덕 불감증 등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점들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일찍부터 지방자치가 발달한 일본이 안고 있는 지역 경제 침체의 고착화, 종교의 천국이라는 별명답게 여기저기 판치고 있는 사이비 종교에 관련된 문제, 유독 솔로, 싱글문화가 발달하여 프리터,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등 일본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도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것들이 너무 리얼하고 효과적으로 그려지고 있어서 문제라면 문제랄까.

유메노시의 겨울 한 계절동안 일어나는 이들의 어두운 일상들이 가슴 깊이 내려앉는다.

 

지난 '올림픽의 몸값' 에서는 작품 안에서도 유독 많이 나왔던 '진흙' 이라는 단어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였다면, 이번 '꿈의 도시' 에서는 '추위' 이다. 마침 한국에서도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치고 있는데, 작품속 도시인 유메노시 역시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치는 중이다. 기록적인 추위와 눈 속에서 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도 메마르게 얼어붙는다.

 

전에 다른 작품의 감상문을 통해 언급한 적이 있지만, 자본주의, 자유주의는 가장 인간의 욕망에 부합하는 사상이었다. 효율적이냐 아니냐는 차후의 문제이고, 인간의 욕망에 가장 부합되는 사상이었기에 가장 널리 퍼지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인 것 뿐이다. 자본주의과 자유주의가 인류사회에 뿌리 내린지 고작 몇백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는 어느덧 슬슬 한계에 접어들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민주주의 선진국인 유럽사회는 계급의 고착화가 이루어져 봉건사회와 다를 바 없는 구조가 여전히 이뤄지고 있고, 우리 사회에서 윗 계층으로 올라간다는 건 그때만큼이나 꿈과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부는 혈연을 따라 고스란히 세습되고, 가난 역시 그대로 세습된다. 자본주의와 결합된 민주주의의 말로는 이런 것이다. 경제성장은 둔화되어 한계를 보이고 있다.

곧 우리 사회는 썪어가는 물이 될 것이다.

정경유착과 부패는 심화될 것이고 세계는 글로벌 기업이라고 불리우는 소수의 대기업에 의해 좌지우지 될 터다.

 

아마 마르크스는 이런 세상을 예측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사회 속에서 개인은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이다. '민주주의' 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자본주의' 는 사회의 모든 활동에 돈이 든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결국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되어있는 우리 사회에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돈이 없으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행복추구의 권리는 물론 생존의 권리조차 돈이 없으면 아무렇지 않게 무시되는게 현대 사회이다.

한국과 일본의 사회 발전사는 쌍둥이 처럼 닮아있다. 지금 일본이 보여주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인 문제들은 10년안에 우리도 동등하게 맞닥뜨린 문제들이란 의미이다. 한국은 일본이라는 거울이 있음에도 똑같은 실수를 그대로 되풀이하며 그 부작용들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소위 '장르문학' 들은 이야기의 중심이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경우가 많다.

오쿠다 히데오,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등을 비롯한 일본문학들의 인기나 마이클 코넬리, 제프리 디버 등의 인기도 국내 독자 사이에 불고 있는 장르문학의 붐 덕택이기도 하다. 때문에,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손에 드는 독자들 대부분 또한 그런 속도감 있는 '사건 전개' 를 기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올림픽의 몸값' 에서 보여졌듯 그는 더이상 그런 엔터테인먼트 소설에 큰 관심을 두고있지 않다. '올림픽의 몸값'은 제목 그대로 테러범과 형사 사이에 벌어지는 서스펜스 스릴러 처럼 보여지지만 플롯이 사건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 위주로 그려진다. 사건 자체에도 일련의 트릭과 재미요소가 충분하지만, 지면의 대부분은 '왜' 테러범이 이런 테러를 하세 되는지 그 심경의 변화가 심도깊고 대단히 리얼하게 그려진다.  

이 작품 또한 '올림픽의 몸값' 의 연장선으로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건의 전개는 대단히 호흡이 느리다. 거의 한 인물의 한 챕터는 아주 소소하고 디테일하게 시간단위의 심경과 주변환경 묘사가 대부분이다. 그냥 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의 순간순간 이야기들이 펼쳐진다고 보면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 국내 독자들에게 일본문학은 장르문학을 통해 전래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게 아니라면 에쿠니 가오리 식의 칙릿이나 만화적인 상상력이 가미된 '라이트 노벨' 부터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나쓰메 소세키등으로 일본문학을 접하는 사람들은 아주아주 일부분일 터다. 그래서 일본소설 = 장르문학 이라고 인식하는 독자들이 많고, 오쿠다 히데오 역시 '공중그네' 풍의 경쾌하고 위트있는 풍자로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일본 작가들은 대부분 굉장히 다작하는 편이다. 1년에 한권씩 꼬박꼬박 신작을 내는 것은 예사고, 1년에 2권의 신작을 내기도 한다. 그 덕분에 문단에 등단한 작가들은 굉장히 다양한 장르들을 시도할 수 있고, SF나 판타지 작가들이 미스테리 추리 소설을 집필하거나 로맨스물, 나아가 정통 현대문학으로 진출하는 경우도 꽤 있는데, 이런 현상은 컨텐츠의 멀티유즈가 일반화된 일본 문화의 특징이랄수도 있다.

 

이 작품역시 그런 범주에서, 오쿠다 히데오라는 작가에게 흔히 기대하는 위트있는 풍자나 가볍고 경쾌한 필치를 생각하고 손에 들었다가는 크게 실망할 수도 있다. 우선 위에 언급했던 내용상의 무거움과 디테일하고 리얼하게, 있는 그대로 현실을 옮긴 부분들을 들 수 있다. 만화스러운 등장인물들이나 문제점을 짚어내는 작가의 친절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리얼리즘 문학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 중 하나인 열려있는 결말 또한 국내의 독자들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유독, 드라마를 좋아하고, 언제나 딱 떨어지는 결말을 기대하지 않는가?

삶에는 언제나 완벽한 결말이란 없다.

그래서, 리얼리즘 문학들 또한 결말이 열려있거나, 흐리멍텅한 경우가 많다.

어차피 모든 삶은 힘들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고, 누구에게나 자신의 고통만이 고통이다. 남의 고통은 그저 구경거리일 뿐이다.

 

오쿠다 히데오는 자신의 모든 재능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안타깝지만, 삶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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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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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내딛는다.
온 삶의 과정은, 달리 말하면 죽음의 여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도 살면서 죽음을 실감하지는 못한다. 누구나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지만, 죽지 않을거라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고 하루 하루를 이겨낸다. 삶과 죽음은 그렇게 동전의 앞 뒷면처럼 서로 등을 맞대고 있지만, 결코 입을 맞출 수는 없는 관계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의 삶은 지난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또한 몸도 마음도 연약한 존재라서 외로움에 취약하다. 그래서, 지난하기 짝이없는 인간의 삶은 외로움과의 치열한 싸움의 기록이기도 하다. 작품속의 주인공인 '조연주' 는 외로움이라는 상태를 잘 이해하거나 체득하지 못하는 편이라고 했으나, 그녀 또한 사람과 말을 섞고 마음을 섞을 수록 외로움을 이해하고 체득해 갈 것이다. 사람은, '본래 그러한 것이라서 외롭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이해하거나 체득하지 못하는 편인 조연주는 민통선 안쪽, 북한에 가장 가까운 그곳에 위치한 수목원에 계약직으로 취직하게 된다. 뇌물죄로 징역 삼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아 복역중인 공무원 아버지와 홀로 계신 어머니를 뒤로 하고 고립무원의 세계로 넘어온다. 모든 생명들이 서로 굳게 연관하고 있는 광활한 숲. 그리고, 그 안에 들어앉아 있는 수목원의 연구실장인 안요한과 그 아들 시우. 조연주와 안요한, 그리고 시우는 모두 외로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체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폐증세가 있는 시우와 그의 아버지인 안요한 역시 비슷한 성정이고, 아이 엄마와는 이미 이혼한 사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뒤에 두고 온 연주. 각각 자신들의 등에 '가족' 이라는 거대한 베낭을 짊어매고 있고, 그것은 세상 누구나 지고 있는 짐이다. 연주는 가족이라는 짐의 무거움을 스스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매일 밤마다 들려오는 어머니의 넋두리를 통해 가족이라는 짐을 이해하고 체득한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안실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안실장과 이혼한 부인, 그리고 캥거루가 제 새끼를 배의 주머니에 넣고 다니듯 좀체 떨어질 줄 모르는 아들 시우. 안실장과 시우는 서로에게 짐인 동시에 위안이 되고 이유가 된다.

 

 연주의 아버지는 딸인 연주와 부인이 삶의 이유이자, 범죄의 이유였다. 느낌은 많이 다르지만, 연주의 가족에서 정이현 작가의 [너는 모른다] 의 김상호와 진영옥 부부가 떠올랐다. 야심이나 명예는 남자에게 삶의 이유이자 목표가 된다. 권력과 욕망을 위해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남자들은 가족들을 위해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들이다. 가족을 위해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은 김상호나 연주의 아버지나 별반 다르지 않아보인다. 그리고, 그 안사람들은 어떠한가. 김상호의 부인인 진영옥은 자신의 남편이 뭔가 께름칙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만 구태여 파고들지 않고, 모른 척 한다. 아마 연주의 어머니도 그러했으리라. 자식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면, 돈의 출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이다.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는, 일단 '어떻게' 먹고 사는지를 해결해야만 따져볼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결국 그것들 또한 짐에 되어 어깨 위에 켜켜히 쌓이게 된다.

 

작품은 시종일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려진다.

김훈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는 여전히 감정이 절제 되어 있다. 대한민국 제일의 리얼리즘 작가라고 칭송받아 마땅한 그의 문장들은 감정은 절제되어 있지만,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연상시키듯 주관적인 인상 또한 녹아있다. 등장하는 주인공의 직업이 세밀화가여서 문장들을 자연스럽게 세밀화와 비교하게 되었지만, 그의 글속에서 난 세밀화보다는 모네와 마네, 그리고 비슷한 사조의 영향을 받은 바르비종파의 밀레나 테오도르 루소의 그림이 떠올랐다. 그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자연의 인상을 화폭에 담기를 갈구했다. 수련잎에 반사되는 찬란한 햇빛, 거대한 숲을 휘몰아 나가는 연무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잡아 화폭에 옮기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그의 문장들 또한 다르지 않다. 이번 작품 속에서 작가는 뛰어난 감각으로 자연을 묘사해낸다. 애초에 그림작가와 글작가의 지상과제는 동일하기 때문일까? 그가 묘사해내는 자연의 인상에는 사람의 감정들이 함께 휘몰아친다. 자음 하나 모음 하나에도 누군가가 숨쉬고 있는 듯 하다. 삶의 호흡. 삶의 무게. 삶의 의미. 질문들. 해답들. 또 질문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변화무쌍한 자연과 변화 없이 풍화되어가는 유해의 이미지는 서로 반대편에서 꿈틀대며 삶과 죽음을 가르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듯 하다 . 나무나 꽃. 자연은 혼자 고고하지 않다. 우리의 눈에는 언덕위에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가 제 혼자 고고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뿌리는 언덕 밑 땅속을 굳게 쥐고 있고, 수많은 곤충들을 품고 있으며, 주변의 수많은 수목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꽃이건 나무건 풀이건, 그들 또한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품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다.

그것들도 때가 되면 죽어서 주저앉고, 결국은 흙과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 흙을 붙들고 또다른 것들이 태어나고, 또 주저앉아 흙이 된다. 살아있음은 수많은 기회이다. 색을 낼 수도 있고, 쟁쟁쟁 하는 소리도 낼 수 있으며, 상추쌈도 먹을 수 있다.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고립을 선택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명함을 내밀수도 있고, 그것을 받아 갈무리 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볼 것이고, 나의 죽음을 보여줄 누군가를 만나기도 할 터다. 단한번의 우회전으로 고립된 세상을 만날수도 있고, 수많은 교차로투성이의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상을 만날 수도 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수많은 생각들이 나타나고 사라졌으며, 질문들이 생겼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인간이 외로움을 타는 이유는, 인간이 원래 외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인간은 원래 홀로 고독하게 태어났으며, 그 고독함이 외로움이라는 태생적인 감정을 야기한다고 여겨왔다. 

나 자신 또한 외로움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외로움이 주는 공포와 두려움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고립과 고독을 갈구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짐스러웠고, 사람들과 섞는 말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주거나, 나에게 남기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상처받고, 그 상처 역시 사람을 통해 치유된다면, 애초에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상처 받을 일도, 치유받을 일도 없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이 원래 외롭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고독하지 않게 태어났다.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감정 자체를 모른 채 태어난다.

살아있는 누군가의 몸 속에서 10여개월동안 함께 먹고, 싸고, 숨쉬고, 웃고, 울고, 움직이다가 어미의 뼈를 부수며 태어나는데, 어찌 인간이 태생적으로 외로울 수 있단말인가? 타인을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되지 않아도, 그것은 고독과 외로움의 원초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나무가 꽃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못 위의 수련이 소금쟁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살아가듯이 말이다.

 

그렇기때문에 누군가는 자신이 고독하지만 고독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외롭지만 외롭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 혼란과 혼돈은 입을 닫게 하고, 눈을 돌리게 한다. 점점 더 스스로의 안으로 파고들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알 수 없는 감정에 단지 외로움이나 고독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였을 뿐이다. 서어나무가 홀로 서어나무 될 수 없고, 패랭이 꽃이 홀로 패랭이 꽃이 될 수 없듯, 사람은 홀로 사람일 수 없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사람은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고독함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꽃에 각각의 고유한 색이 있는 이유는 스스로를 드러내기 위함일 것이다. 주변 색과 전혀 다른, 어디서나 한눈에 띌 수 있는 색을 몸 안에서 끌어내어, 쟁쟁쟁 하고 세상에 내뿜는 이유는 바로 그것일 터다. 외로워 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자신의 색을 만들어, 세상에 내보이면 된다. 누군가 나의 소리를 들을터다. 색이 바래지고 줄기에서 떨어져서 흙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요동치는 감정들을 갈무리 하여 켜켜히 쌓아 색을 만들어내면 된다.

꽃이 피고, 꽃이 지는. 그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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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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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인간에게 '객관적인 시각' 이라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들 중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보고싶어하는 것만 본다.' 나 역시 이 말에 상당히 동의한다. 그나마 이 세상에 가장 객관적인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학일 것이다. 자연현상은 물론 사람의 마음까지도 '숫자' 라는 변하지 않는 값을 통해 추론하고자 하는 학문. 수학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텅 빈 상태인 '0' 을 만들 수 있지만, 현실에서 완전히 텅 빈 공간을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현실은 화학과 물리학, 철학까지 혼돈스럽게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수학이란 단지 현실을 약간 더 단순하게 객관화 하기 위해 고안된 학문인 셈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아주 약간이라도 더 쉽게 살기 위한 것이다.

 

세상을 숫자로 풀이하듯, 문학에서도 인간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한 시도는 꾸준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의 위치에서 인간을 바라보면 조금이나마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터다. 우선, 인간의 몇가지 특성들이 배재되어있는 존재를 만들어 보면 된다. '영양소' 대신 다른 것들을 섭취하면서 생명을 유지한다던지, 노화되지 않는다던지, 필멸이 아닌 영원의 존재라던지, 육체가 없이 정신만 있다던지, 입을 열어 공기의 떨림으로 의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텔레파시 같은 의식으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한다던지. 그런 관점에서 작품의 주인공인 '차상문' 은 인간과 인간 사회를 객관화 시키기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차상문은 인간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귀가 길고, 다리가 팔보다 훨씬 길고, 꼬리가 달렸고, 털도 있을 뿐. 아, 훨씬 뛰어난 이해력과 지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는, 아주 예민하고, 아주 똑똑하고, 아주 생각이 많으며, 외모가 다른 인간이다. 그렇게 딱히 차별점이 없었기에, 차상문이 우리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점이 큰 설득력을 얻는다. 만약 그에게 지능말고 인간보다 우월한 점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레푸스 사피엔스' 토끼 영장류들은 아마도 인간 사회에서 완벽하게 축출당했을 것이다. 차상문의 모습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지식층' 의 삶을 닮아있다. 우리가 역시 아주 잘 아는 말 중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아는 만큼 보인다." 차상문은 뛰어난 지능과 기억력을 통해 수많은 서적들을 접했고, 그 안에 녹아있는 수많은 지식들을 갈무리 할 수 있었다. 아는 것이 많아진 그의 눈에는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부조리들, 인간들간에 행하는 비이성 비도덕적 행위들. 결국 스스로 자멸케하는 파괴적인 행동들. 특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찬란한 것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70~90년대의 한국 사회. 보이는 것을 못 본 척 하고, 아는 것을 모르는 척 해야만 했던.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할때, 보이는 것을 보인다고 말할때 목숨을 걸어야 했던 그 시기에, 차상문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어떤 말을 했을까. 

 

작가는 시종일관 위트넘치는 필체와 흡인력있는 문장으로 혼란스러웠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솔직히 김남일 작가의 작품은 처음 접해 보았는데, '아니, 내가 왜 이런 작가를 이제 처음 읽었지?' 싶었다. 시간과 사건, 인물들을 조각냈다가 다시 조립하는 능력이 정말 엄청나다. 개인적으로 이런 느낌은 천명관 작가의 '고래' 를 보고 처음 느꼈었는데, 여기저기 막 집어 던진 조각들이 어느새 큰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내는 느낌이다. 아마 이런 기법에도 뭔가 이름이 있을것도 같은데...무지해서 잘 모르겠다..ㅋㅋㅋ  개인적으로 '작가' 의 재능이란 이런 것인 듯 하다. 사건, 시간, 장소, 인물. 이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구분해내는 능력.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의 큰 틀속에서 맞춰나가는 능력.

그러니까...

한 10000피스짜리 퍼즐 더미 속에서 아무 조각이나 하나 집어도, 그게 어디에 들어가는 조각인지 알아채는 능력이랄까.

'천재토끼 차상문' 의 도입부분이 그런 느낌이다. 10000피스짜리 퍼즐을 시작하는 듯 한 느낌. 뭔가 조각을 들긴 들었어. 거기 그림이 있긴 있어.

그래서 '아, 이거 퍼즐이구나' 한 기분. 앞으로가 기대되고, 완성되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두근두근. 그런 느낌.

게다가 작가의 필력도 정말 엄청나다. 이 말장난이라고 해야하나, 글장난이라고 해야하나, 무튼 인과 관계의 고리 안에서 단어와 단어를 이어내고 거기에 사건과 감정을 담아 독자들의 마음은 물론, 호흡도 빼앗아, 심지어 문장을 읽다가 헐떡거리게 만드는, 이 엄청난 필력... 그럼에도 그 안에 미사여구나 불필요한 잡 단어가 거의 없이, 명료하게 저자의 메시지가 들어있다는게 더 신기할 정도였다. 이 문장 읽는 맛도 엄청 쏠쏠해서, 이야기의 흐름이나 서사 따위는 다 버리고 문장에만 집중하고 싶을 정도였다. 위트 넘치고, 풍자와 은유가 세련되게 들어있는 멋진 문장들.

 

역시 혼란스러운 차상문은, 하지만 자연스럽게 시절을 살아간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거대한 시간의 흐름. 역사 속에서 한 명의 인간은 무력하다. 무능하다. 아무리 천재적인 지능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한명의 개인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천재적인 대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도 전쟁 속에서 무지한 병사에 의해 죽어갔고, 천재적이었던 시인 이상도 식민치하에서 무력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 뿐이랴. 나치 게쉬타포가 살해한 유태인들 중 그러한 천재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일본 731부대가 인체실험의 재료로 쓴 사람들 중에는 없을까. 911테러속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 미국이 쏟아부은 폭탄들 밑에서 죽어간 수많은 아프가스탄, 이라크, 사람들. 죽고 죽이기를 그치지 않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북한군이 입원실에 모아놓고 살육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있던 수많은 환자들. 광주의 그 날, 죽임을 당한 광주 지서의 경찰들, 그리고 도청 앞에 모여있는 수많은 시민들. 군부독재를 타도하자고 소리지르던 대학생 얼굴로 날아든 최루탄, 그리고 무수한 총알들. 외침들. 비명들. 피들.

 

'역사' 라는 거대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개인은 그렇게나 무력하다. 보도블럭 사이를 흐르는 피의 강에 작은 몇방울의 피를 보태는 수밖에.

 

지구에 '민주주의' 라는 시스템이 자리잡은건 얼마나 되었을까?

소위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은 시스템의 한계에 부닥쳤다. 유럽 서구사회는 누구나 보기에도 한 눈에 확연한 계급을 완성했다. 소위 민주주의라고 하는 정부는 이 계급사회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바닥에 깔려있는 계급은 그 계급대로, 그 안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윗 계급으로 상승하려는 욕구 자체를 제한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민주주의 시스템이 인류에게 호응받은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 그 자체에 충실했던 시스템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시스템은 인간의 욕망 자체를 철저하게 제한하고 제어하려는 시스템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유물론과 사회주의 시스템이야말로 아이러니하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끌어낼 수 있음은 타당할지도 모른다. 허나, 인간은 욕망을 제어할 수 없다. 모든 인간에게서 욕구라는 부분을 거세시키지 않는 한 말이다.

 

'어슐러 르 귄' 이라는 유명한 작가는 '빼앗긴 자들' 이라는 작품을 통해 사회주의가 완벽하게 작용하는 세계를 그려낸 적이 있다.

추구할 수 있는 욕망과 추구해서는 안되는 욕망이 철저하게 제한되어있는 세상. 그 세상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자리잡은 우리 사회보다 훨씬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어슐러 르 귄 역시 작품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싸워서 쟁취할 수 있는  권리' 일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싸움을 걸 수 있는 자유' 가 있다. 집회, 결사, 언론의 자유가 그것이다.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결합될 때 가장 큰 시너지를 발휘한다. 싸워서 돈을 쟁취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뭐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세상.

일견, 민주주의란 결국 원시시대랑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결국 '약육강식' 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보다 원시적이고 비 이성적이며, 비 도덕적이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버릴 수 없다. 영원히 버리지 못할 것이다. 군국주의나 사회주의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구는, 인류는 결코 한 체제 안에서 공존할 수 없을 것이다.

 

차상문이 결국은 토굴 안에 들어가고, 그 입구를 벽돌로 발라버린 것은 결국 '인류는, 세상은 변할 수 없다' 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상문이 토굴 안에 들어가면서 입구를 벽돌로 발라버리는 장면은, 비록 차상문은 불교적인 단어를 입에 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십자가에 달린 뒤 굴 무덤안으로 인도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보였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거대한 돌문으로 막힐 토굴 안에 매장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을 근심하며 스스로 벽돌로 쌓아 막은 토굴 안에 들어간 차상문. 둘 모두 인류를 걱정했다는 점만이 같지만 말이다. 묘하게 연상되었다.

이 작품속에서 집중해 보아야 할 부분은 차상문의 삶이 아니라, 차상문을 겪어간 사람들의 삶이다.

천재적이며 세상 모든것을 걱정하는 토끼 영장류의 주변에서 위성처럼 돌다 간 평범한 사람들.

그들이 보는 차상문은 어떤 사람, 아니 어떤 토끼였을까??

 

 

아무리 걱정하고, 조심하고 아낀다고 하더라도, 글쎄. 인간. 인류. 언젠간 멸종하지 않을까??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니까.

공룡이 멸종하고, 세상에 빙하기가 오듯, 지구상의 모든 자연과 동물들을 절멸시키고 결국엔 인류 또한 멸종할 것이다. 뭐, 2012년에 외계인이 처들올지도 모르고 말이다. 땅이 뒤집히거나, 바다가 대지를 뒤엎거나 등등.

하지만, 지구는 여전할 것이다. 몇천만년? 몇억년?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황폐화된 지구는 또다시 생명들이 창생하는 푸른 별로 변할 것이고, 수많은 생명체들 중에 또다시 인류와 같은 지성체가 등장할 것이다. 그들은 지구 위에서 또 얼마만큼의 시간을 배겨낼 수 있을까? 만년? 이만년? 그들은 또 그렇게 똑같은 일을 영원히 되풀이할 것이다. 어쩌면, 다른 행성으로 건너갈 수도 있겠지만, 그 행성에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인간의 생은 고작해야 100년이다. 지구의 역사를 생각할 필요도 없고, 지구의 미래를 생각할 가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지금 우리의 생. 우리 자식들의 생. 우리 자식의 자식들. 딱 삼대 정도만 생각해봐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이 작품을 읽으면서, 비슷한 시기에 터진 구제역 파동을 보며 가슴 한켠이 쓰라렸다. 생매장되는 동물들, 지하수에서 솟아나온다는 핏물들.

조류독감의 창궐, 광우병의 습격. '암' 이나 '에이즈' 가 인간이 '진화' 하는 과정에 생긴 병이라면, 구제역이나 조류독감, 광우병 역시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병이다. 사냥해서 먹는것도 모자라서 그들을 죽이는 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인간이. 다른 종족을 말살시키는 병을 만들어냈다.

 

이제 정말 인간은 '이 동물만도 못한 놈아' 라는 욕을 들어먹을 만한 정도가 되었다.

어떤 부모들은 키우는 고양이나 개를 자식보다 더 사랑한다.

과연, 무엇이 인간다운 것이며, 어떤 삶이 인간다운 삶일까?

 

고민 고민 하다 결국,

"우주 생성의 비밀과 만유의 모순을 끝도 없이 파헤치다 최후의 순간까지 사라져가는 생물종에 대해 안타까운 관심을 거두지 못한 한 토끼 영장류에 대해 새삼 극진한 경외감을 표하게 되는 것이지만, 남북이 엄연히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배들이 불러 별 희떠운 소리도 다한다며 어디 한번 쫄쫄 배를 곯아보면 그 소리가 나오겠냐며 비판하는 이들도 수두룩하니, 한갓 가담한설도 정치적으로 해석되어 괜한 오해를 사기 전에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겠다." p. 369 [천재토끼 차상문]김남일, (2010) 

는 작가의 의견에 박수치며 동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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