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투르니에 산문집, 유려함에 빠져들고 간간이 웃으면서 봤다. 생각이 복잡해지지 않는 부분만 일부 느리게 읽었고, 어젠 계단 얘기를 정말 재밌게 봤다. 소제목은 [계단의 정신].


“집을 구성하는 유별난 상상 구조에 있어서 가스통 바슐라르는 다락과 지하실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송두리째 지상 단층뿐인 집-아파트도 결국은 그와 마찬가지지만-에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 걸어올라가고 그에 맞먹도록 걸어내려오는 행위로 이루어진 수직적 차원이 빠져 있는 것이다. 이 수직적 차원을 물적으로 실현해놓는 것이 바로 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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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두 가지 계단들은 다같이 어떤 신비스런 느낌과 동시에 오르내리기 불편하게 가파르다는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돌로 되어 있어 써늘하고 눅눅하다. 거기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고 너무 익은 사과가 물러터진다. 후자는 뽀송뽀송한 나무계단으로 밟으면 삐걱거린다. 그 두가지는 각자가 우리를 인도해가는 세계의 분위기를 미리부터 예고해주는 것이다. 포도주를 숙성시키는 동안 그 술냄새가 짙게 배어든 세월로 컴컴해진 지하실, 다른 한편에는 어린 시절의 먼지를 뒤집어쓴 요람과 인형과 그림책과 리본이 달린 밀짚모자가 뒹구는 다락.

그렇다, 바로 그거다. 계단은 그것이 안내하는 장소를 앞질러 맛보게 해준다.” 25


앞질러 맛보기라니. 말 찰지다. 다락과 지하실로 가는 계단을 내 발로 겪어본 적은 없어도, 어렸을 때부터 촉촉히 서구미디어에 절여진 나도 그거 몬주 알쥬.. 여기선 공간을 앞질러 맛보게 해주는 계단의 “속성”을 말하지만 나는 정작 수많은 스릴러물, 공포영화와 미드로 ”계단“을 앞질러 맛보았네ㅋㅋ 더 딴 길로 빠져보자면 계단의 정수가 앞질러 맛보기에만 있는 건 아닐테다. 위태로움과 안정감을 동시에 품고 있는 발디딤의 이중성도 계단의 정신이라 할 수 있을까. 




예전에 넬라 라슨의 패싱을 영화로 먼저 보고 책을 뒤이어 읽으면서 궁금한 게 있었다. 영화에서 배경으로 다양하게 등장하는 계단이 책에서도 구체화된 공간으로 지시되었던 걸까, 하는. 영화를 보면서 계단이 나올 때마다 몰입감이 커졌던 탓에 책도 그런지 헤쳐보며 읽었는데 딱히 찾지 못했다.

영화 클라이막스 직전에 등장하는 계단신(대사는 스포일러일까)이 상징적이다. 정반대의 방향성을 띠고 있는 아이린과 클레어가 초대받은 집을 향해 함께 계단을 오르는 중인데 이 둘의 인생 동선이 교차할 때마다 일으켰던 그간의 크고작은 스파크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행위, 그 속성에서 증폭된다. 영화 중반쯤, 둘이 계단참에 앉아 얘기하는 순간이 느긋했던 것 같지만 계단은 언제나 조금 후 바뀔 공간을 암시하며 그런 둘을 지켜본다. 둘의 관계에서처럼 영화 속 계단에는 긴장이 서렸다





사실 세상에는 무용하고 절대적이며 기념비적이고 장엄한 계단이 없지 않다. 그런 계단은 절도와 무관하다. 날이 갈수록 우리들에게 차례 오지 않는 두가지, 즉 공간과 노력을 그 계단은 집의 주인 자격으로 당당하게 요구한다. - P25

그러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힘들고’ 계단을 내려가는 것은 ‘위태롭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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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3-04-20 05: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스릴러물과 공포물의 계단!!!!! ㅠㅠ

저는 계단에 위태로움과 두려움(?)을 훅 느끼는 나이에 접어든 지 오래되었어요…@@ 음 아이들 어릴 땐 또다른 두려움(앞선 걱정)의 대상 ㅎㅎㅎ 참 단순하쥬 ㅎㅎㅎ

유수 2023-04-20 12:59   좋아요 1 | URL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있었는 걸요. 높은 곳이나 다른 건 괜찮았는데 계단은.. 내 발, 내 눈을 못 미더워한 건지도 모르고요ㅎㅎ

공쟝쟝 2023-05-05 15:35   좋아요 1 | URL
이 글의 내용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저도 계단 무서워해요. 근데 유수님 말대로 내 발 내 눈을 못 미더워하는 것이 좀 더 옳은 표현 인 듯. 가끔 지금도 그 서울의 지독한 에스컬레이터 지하철을 오르내리면서 후둘후둘할 때가 있어서 손잡이 꽉 잡아요. 많이 익숙해져서 괜찮지만 상태 안좋을 때는 내가 미끄러지면서 뒷사람들까지 도미노로 넘어지는 참혹한 상상을 하면서 ㅜㅜ 나 진짜 서울이랑 안맞다고 지금이라도 서울에서 탈출하게 해달라고 막 그랬던 적 한달에 두어번씩은 있었어요.. 그래서 시간 걸려도 주로 버스를 타고 퇴근을 했다능.
결론은?
출퇴근 안해도 되게 나를 만들었다 ㅋㅋㅋ!!

유수 2023-05-06 11:32   좋아요 0 | URL
쟝님// 진정한 계단 탈출? ㅎㅎㅎ 저도 지하철 계단에서 그런 상상 많이했고 제 상상보다 안전한(?) 것이 신기했어요. 저도 서울 지하철 계단 생각하니 떠오르는 몇군데가 있는데 요즘은 업뎃되었을 거 같기도 하네요ㅋㅋㅋ
 
예술가의 서재 - 그들은 어떻게 책과 함께 살아가는가
니나 프루덴버거 지음, 노유연 옮김 / 한길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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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엄있는 판형의 책 속 사진들, 서재와 공간과 책들이 주는 낭만에 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어쩐지 ‘서재’보다는 여러가지 의미로 ‘재산’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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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04-15 09: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나도 그 생각 계속 했음. 돈이 많아야 서재를 이렇게 꾸밀 텐데;;;; 라고.

유수 2023-04-15 10:44   좋아요 1 | URL
그쵸. 머릿속엔 불만이 더 많은데 순화해서 올렸어요ㅋㅋㅋㅋ

수이 2023-04-15 11:18   좋아요 1 | URL
개 같은 자본주의 ㅋㅋㅋㅋㅋㅋ

유수 2023-04-15 12:16   좋아요 0 | URL
역시 수이님 ㅋㅋ부제에 대한 답이랄까
 


“모든 성별 격차는 권위 격차에서 시작한다.”9
선언같은 설명. 원제가 권위 격차이고 (수없이 많겠지만) 단적으로 그걸 드러내는 일화를 예로 들며 시작하는 책. <남성 특권>도 생각난다.
















목차 같이 봐용ㅋㅋ


하지만 ‘미투 운동‘ 이후로 선진국에서 목격되는 현상은 일종의 립 서비스 페미니즘이다. - P11

무의식적 편향은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그 뒤를 바싹 쫓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이룬 진보에 너무나 쉽게 기뻐하면서 세상에 여전히 존재하는 편향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11 (…) 윤리적으로나 지적으로 성차별에 진지하게 반대하는 사람도 무의식적 편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편향은 굉장히 깊은 수준에서 무의식적으로 전달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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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후.. 이 책을 어찌 해.


내 경험은 자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꼭 들어맞지는 않았고 자페를 둘러싼 여러 신화의 미로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신경 생물학 분야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그저 이것이 내 정체성 중 하나임을 인정해달라고 구걸하기 위해서 말이다.

기억하는 한 나는 약간은 만신창이라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고 어딘가에 속한다는 건 나를 넘어서는 일 같았다. - P410

엄마에게 ‘나한테 자폐가 있다’고 말했을 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네. 나도 네 안에서 많은 게 돌아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 그런데 너의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더. 너는 캔으로 된 콩 통조림인데 내가 가진 캔따개로는 열 수 없는 느낌이랄까." 굉장히 깔끔하고 선명한 비유가 아닐 수 없는 것이, 우리 엄마는 콩 통조림을 싫어한다. - P413

이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이 원래 비호감이라고 생각해버렸고 나의 욕구라는 렌즈로 세상을 보기를 포기했다. - P414

어릴 때 내 자폐 스펙트럼에 대해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을 때가 많다. 그랬다면 나는 고통이 정상이며 고통을 겪는 게 마땅하다고 여기는 나 자신의 고통을 돌보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탓할 사람은 없지만, 인간 퍼즐을 풀지 못했기 때문에 삶의 질이 나빴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많이 아프다. - P416

이렇게 완성된 나의 작품이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미켈란젤 로의 위대한 작품과 비견할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아 니, 나를 뭘로 보는가? 남자의 자아를 가진 남자와 비교하신다고?
내가 그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 농담입니다. 넘어가주세요 - P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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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도시 거대한 공원에서 아이 뒤에 태워 자전거 타고 호숫가를 돌아다녔다. 돌아오는 길 거기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아이랑 읽은 책들. <헤이즐~>은 예전에 인터넷에서 원서 표지 보고 뿅가서 나오면 꼭 봐야지 했었는데 벌써 한글 책이 나왔네. 생기넘치는 작은 마녀와 채도 높은 그림. 나무냄새, 흙냄새 물씬 나는 듯한 숲의 존재감. 아쉽게 다 못 보고 나와서 희망도서 신청했다.

<나의 사랑스러운 할머니> 아이가 빼왔는데 읽어주다 줄줄 눈물 흘리며 울었다. 그림책 보다 내가 우는 게 자주 있는 일이라 아이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넘어가는 편인데 그 장면에서 나오는 풍습을 처음 보게 된지라 같이 잠시 쉬게 됐다. 입에 들어오는 내 눈물 맛 보며 잠긴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b맛이 따로 없네 ㅋㅋ 아이에게 제대로 소개할 기회가 없었지만 나에게도 정말 사랑스러운 할머니가 있다. 언피씨한 할머니 치맛폭에서 그야말로 깨춤추며 자랐다. 언젠가 할머니에 대해 써보고 싶다.

<나의 작은 아빠> 작가 조합도 그렇고 안 살 수 없는. 그런데 다비드 칼리 돌봄하면서 그렇게 다작했단 말이야.. 얼마전에 데이비드 스몰에 대해서도 비슷한 생각했지만 어떤 창작물은 그런 깊이, 정확히 말하면 따뜻함의 깊이를 품을 수 밖에 없나 보다. 나이젤 베인스의 <엄마, 가라앉지 마> 봤을 때 남성 작가들의 간병기가 더 나와주었으면 했던 것도 생각나고. 처음엔 갸우뚱했던 제목 <나의 작은 아빠>, 작은 나의 아빠보다 적절한 번역이구나 읽으면서 설득되었다. 더욱이 그림책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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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4-10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앗! 헤이즐 저 책 뭐죠? 저 살래요!! >.<

유수 2023-04-10 22:07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피드가 다 화사해지네요. 다락방님도 고고 💚

서곡 2023-04-10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수선화가 예쁘네요~ 잘 보고 갑니다!

유수 2023-04-10 21:2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곡님! 댓글은 잘 못남겼는데 늘 글 흥미롭게 보고 있어요.

서곡 2023-04-10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그러고 보니 저도 첫 댓글인데 인사도 없이...ㅋ 위에 안녕하세요 넣어 수정했습니다 ㅎ 감사합니다 저도 잘 보고 있습니다~

유수 2023-04-10 21:33   좋아요 1 | URL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오며가며 계속 뵈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