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읽는 중.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와 그 책에서 그려낸 인물상,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를 설명한다.
이 챕터를 여러 번 읽게 되는데 정치적 연대를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감명 깊다. 내게 이십오년 정도 묵은 추천왕이 하나 있는데, 걔가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읽는 걸 보고 음, 나에게는 무리겠다 싶었던 기억이 있고 <철학책 독서모임>을 읽으면서 그 예감이 맞았다는 확신이 드네ㅋㅋ 그래도 리처드 로티의 이 책을 꼭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종종 나는 뜻도 모르면서 연대라는 말을 너무 자주 사용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이건 정체성 정치(잘 몰라서 공부가 필요하다)에 대해서 스스로가 무지하다고 느끼는 지점과 맞닿아 있는데 나는 나와 정체성이 동일한 범주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만 연대하고 있는가? 그러고 싶은가? 라고 하면 둘 다 아닌 것이다. 예를 들면 나를 가부장제 부역자, 라고 하는 사람에게도 내가 공감할 수 있을까? 맘충, 집에서 놀고 먹는 뭐뭐, 류의 언설을 일삼는 사람들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그들의 심정에 감정을 이입할 수 있을까? 내 공감은 좋아요 등가교환처럼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에게만 향하고 있지 않나? 내 아이들을 나와 똑같은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이 진짜 내 목표여야 하나? 그런 고민들인데, 책의 설명에 따르면 리처드 로티의 철학, 그 중에서도 연대에 대한 재정의가 바로 이런 물음들을 해소할 만한 단서가 되어 준다.
“이렇듯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는 우연한 개인들의 사회를 위한 철학이다. 한마디로 말해, 우리는 우연한 존재다. 우리의 언어도 자아도 양심도 공동체도 발견되어야 할 본질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철저히 역사적인 산물이며 스스로를 만들어가야할 아이러니한 존재다. 독특하고 특이한 개인들의 사회에서 전통 철학이 추구해 왔던 보편적인 진리는 더 이상 연대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늘날 인간의 연대는 공통의 진리보다는 오히려 각자의 세계가 파괴되지 않을 거라는 이기적인 희망을 공유하는 데 달려 있다.”88
‘이기적인 희망’과 더불어 ‘근대 이후 개인의 우연성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나한테는 희망을 주는 말이다.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하고 나서 짧다면 짧은 시간이 나에게는 나라는 사람의 필연성에 대해 얼마간 답을 얻는 과정이었다. 왜 나는 이런 욕망을 갖게 되었는지, 이런 괴로움에 처해있는지, 내가 속한 사회와 나는 어떤 지점에서 불화할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한 것들 말이다. 당연히 계속 해나가야 할 작업이겠지만 다른 면에서는 이게 계속 나의 정체성(혹은 가능성)을 제한하고 가두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페미니즘 인식론을 배우고 적용한다는 것은 그 이상이어야 할 텐데, 나는 왜 이것밖에 못하고 있나? 이건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라서 더 탐구해보려고 한다. 여하튼.. 아래 인용한 부분을 읽고 그런 부담을 쪼끔 덜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시야는 유한하고, 우리의 도덕적 관심사는 한정되어 있으며,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은 언제나 협소하기만 하다. 그러나 자신이 갖고 있는 유한한 정체성을 부정하고 온전히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시점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93
“각자의 아이러니한 삶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공간을 점차 늘려 가는 것이 사회의 도덕적 진보이며, 이런 진보는 보편적 철학이나 초월적 힘을 지닌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삶과 고통을 세밀히 포착하는 서사와 이야기를 통해 가능하다는 로티의 생각…”96
“로티가 말하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란 우리가 지닌 신념과 욕망의 이와 같은 우연성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우연한 출생과 삶의 유한한 궤적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공감의 범위를 어쩔 수 없이 제약한다. 그런 제약됨과 고착됨의 사실에만 주목하면 연대에 대한 희망은 없다. 하지만 그런 제약은 그 자체가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에, 반대로 얼마든지 고쳐 쓰고 확장할 수도 있다.”99
책 너무 좋고, 천천히 곱씹으면서 나머지도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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