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고수
이현 지음, 김소희 그림 / 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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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작가님의 신작이라니 어찌 기대하지 않을까! 꽤 두툼해서 한나절 푹 빠져 읽을 수 있겠다. 게다가 '전설의 고수'라니 뭔가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연년생 남매가 주인공이다. 정확히 말하면 동갑이다. 누나는 1월생, 동생은 12월생. 이렇게 태어날 수도 있구나.^^ 같은 학년에 다니니 거의 쌍둥이 남매 느낌이겠다. 평범한 이 남매에겐 드러낼 수 없는 비범한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것도 수차례의 전생을 통해 이어져 온.

이런 이야기를 어설프게 썼다간 비웃거나 읽다 내던지기 십상일텐데 남매의 능력과 발현, 사건의 전개와 결말이 궁금해서 책장이 쉴새없이 넘어가는걸 보면 대단한 내공이 틀림없다. 현실의(이번 생의) 남매는 티격태격하는 그야말로 현실남매지만, 수많은 전생에서 아픈 운명을 함께 겪어 온 사이라고 한다. 나로서는 전혀 납득되지 않지만 소설적 재미가 커서 그냥 감안하며 읽게 된다.

읽어나가며 놀란 것은 제목에도 '전설'이 들어가듯이 설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왔거나 일부를 차용했나? 하는 느낌 때문이었다. 옛이야기에 관심이 있긴 한데 광범위하게 알진 못한다. 그래서 이 초능력 오누이와 오누이탑 이야기가 기존 설화에 나오는 내용인지 궁금했다. 할 수 없이 '오누이 탑'으로 검색을.... 내가 찾아본 내용 중에선 이 책에 나온 수몰된 오누이탑은 없던데, 그냥 내가 못찾은 것일수도.... 어쨌든 '오누이탑'은 곳곳에 있고 다양한 설화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 설화에서 '오누이'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높으며 그중에는 이렇게 괴력을 가진 오누이 이야기도 있다.

괴력 오누이라는 모티프, 전생이라는 설정 등을 통해 현대 동화이면서도 설화의 느낌을 극대화하는데 성공했다는 느낌이다. 이 책에서 초능력이 먼저 발현되는 사람은 누나인 형은이다. 동생 형수가 양아치 녀석들한테 약점을 잡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영웅처럼 나타나 그들을 물리쳐 준다. 이후로 형수에게 나타날 초능력을 독자나 형수 모두 기대하게 되지만, 전생의 기억은 조금씩 재생되는 반면 초능력의 발현은 좀처럼 되지 않는다. 그 와중에 동네에는 굵직한 형사 사건이 두 가지나 터졌고, 남매+친구 충호 트리오가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스토리의 중심이고 가장 가슴졸이며 읽게되는 부분이다.

형수는 사건 해결 과정에서 초능력을 가진 누나에게 자존심이 상하고 비교의식을 느끼지만 그래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한다. 평소에 틱틱거리는 남매지만 위기 때에는 전생의 그 애틋한 남매애가 나타난다. (나타났다간 언제 그랬냐는 듯 쑥 들어가 버리는 것이 특징ㅎ)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야 형수에게 주어진 초능력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 능력은 과연 지금에 와서 발현된 것인가?^^

'작가의 말'에 보니 작가도 옛이야기를 언급해 놓았다. "옛이야기 속 오누이는 대개 슬프게 끝납니다. 이들은 엄청난 초능력을 가졌지만 악당을 물리치지도, 영웅이 되지도 못합니다. 어른들로 인해 오누이는 무리한 내기를 하던 끝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도 했지요. 그렇다면 이번 생의 경우는 어떨까요? 지금의 오누이는, 형은이와 형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292쪽)
이 책의 결말은 더없이 바람직하고 흐뭇하다. 근데 앞날은? 그 생각까지 하면 복잡해진다. 여기까지가 딱 좋은 이야기.^^

좋은 책이라고 학교도서실에 사두어도 한참이 지나도록 책장이 넘겨진 흔적도 없는 책들이 많은데, 이 책은 벌써 여러 명의 손을 거친 듯 헌 책이 되어가고 있었다. 읽다가 책장 사이에서 다량의 머리카락 발견... 으윽 대체 어떤 놈이냐...ㅠ 어쨌든 확실한 건, 재미있는 책은 알아서들 찾아 읽는구나.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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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층 친구들 이야기와 놀 궁리 1
남찬숙 지음, 정지혜 그림 / 놀궁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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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찬숙 작가님의 책들은 내가 어른이 되어 다시 동화를 읽던 초기에 국내창작동화에 애정을 갖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괴상한 녀석, 니가 어때서 그카노, 받은 편지함 등이다. 이분의 책은 은근한 재미가 있었고 읽고 나면 인간에 대한 신뢰와 따뜻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그당시로는 파격적인(?) 소재라고 느껴진 작품도 있었는데 미혼모의 아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안녕히 계세요>라는 작품이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옛날 그 책이 떠올랐다. 동화에 한정된 소재는 없구나. 이 책에는 두 할머니의 삶이 나온다. 아이들이 이해하거나 공감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차별과 희생을 안고 살아오신 할머니들의 삶이다. 대단한 역사적 아픔을 끌어안은 것은 아니지만 그시대가 아니라면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그런 삶. 82년생 김지영보다 더 고달프고 신산한 42년생(?정확한 연도는 모름) 김혜순, 김분한 할머니의 삶.

준희네 집이 아래층 아주머니의 층간소음 등쌀에 못이겨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결심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단독주택은 아파트보다 싸면서 방도 하나 더 많고 넓었다. 그런데 이사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양가에 우환이 터졌다. 이러저러하여 양가 할머니들이 집에 오셔서 여분의 방 하나에 함께 기거하시게 된다. 사돈간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 것이다. 2층 단독주택에서 1층에 있는 안방을 두분이 쓰시게 되었으므로 책의 제목은 <일 층 친구들>

상식적인 분들이라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처음에는 잘 지내시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인간들 있는 곳에 갈등 있는 법. 서로 다른 두 할머니는 그 차이만큼 갈등을 겪게 된다.
외할머니 : 도시 태생. 가까이 살면서 바쁜 엄마를 대신해 준희 남매를 키워줌. 곱게 화장하고 우아한 옷을 즐겨 입으며 취미로 노인회관에서 이것저것 배우며 합창단 활동도 하고 있음.
친할머니 : 시골에서 농사로 잔뼈가 굵은 할머니. 고향에선 할 일이 천지지만 도시에 오니 할 일이 없음. 딱히 취미활동도 없음. 준희네 집에 와서도 결국 마당에 농사를 지음.

이렇게 배경과 성향이 다른 두 할머니는 본의아니게 서로의 상처를 건드린다. 친할머니는 '못배우고 무식하다'는 것이고 외할머니는 '이혼했다'는 것이다. 여기 담긴 할머니들의 사연을 듣자면 진짜 '42년생 김할머니'가 나올 만하다. 여자라서 참고 살았던, 혹은 운명이려니 하고 살았던 삶에서 잃어버린 수많은 것들.... 친할머니는 그렇게 희생하고 살았으면서도 이혼 문제에서는 "무조건 여자가 참아야 한다, 자식 생각해서 참고 살아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하여 여적여의 느낌으로 외할머니 가슴에 못을 박는다. 그러나 드라마식의 반전이 뙇!하고 나타났으니, 준희 고모(즉 친할머니의 딸)가 같은 문제를 안고 등장한 것이다.

결말까지의 과정에서 작가 특유의 따뜻한 해결을 보게 되고, 선악 구도가 없는 주인공들의 인간미에 흐뭇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새삼 깨닫게 된다. 할머니들의 삶은 아직 완전히 극복된 게 아니구나. 세상 구석구석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구나. 이런 소재들을 같은 초딩이라도 내 어린시절처럼 엄마 우산 아래 곱게 자라는 아이들은 이해 못할 것이요, 어린 나이에도 산전수전 다 겪은, 생활의 전선에 선 아이들은 이해할 것이다.

할머니들 이야기만으론 동화로서 조금 아쉽다 할 텐데, 준희와 준희 친구들의 이야기도 교차되어 들어가 있다. 할머니들의 갈등과 해결을 거울 삼아 자신들의 문제도 해결해가는 친구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도 할머니들처럼 따로 또 같이 하자는 거구나?"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해서 뭐든 같이 하란 법은 없다는 거야." (49쪽)


같은 맥락에서, 아이들이 이런 책을 읽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 주변의 삶이 다라고 생각하면 세상을 보는데 많은 오해가 생긴다. 반대로 자신만 힘들다고 생각하면 슬프고 억울하다. '남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싸울 때는 다신 안볼 것처럼 가시 돋힌 말을 주고받아도 상대방의 어려움 앞에 말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자식의 앞길을 강제했던 걸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는 할머니들의 성정은 딱 보통사람들이다. 나도 보통사람 이상으로 살 순 없을 것이다. 할머니들이 보통 이하로 전락하기 직전의 포인트들은 다 내게 배울 점들이었다. 그렇게 보통만 하며 살길 바란다.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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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독수리 난 책읽기가 좋아
박주혜 지음, 유설화 그림 / 비룡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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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에는 좀 유치하게 느껴졌다.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 대머리 독수리와 수다쟁이 앵무새의 캐릭터도 그닥 매력적이지 못했다. 그럭저럭 읽을 만한 정도여서 읽고 있었는데.... 중반부에 쏘리라이언(마음이 약해 뭐든지 미안해하는 사자)이 나온다. 삼총사가 결성되는 셈. 여기서부터 재밌어지기 시작하더니 막판엔 좀 감동이었다.

나는 힙합을 잘 모른다. 랩도 그닥 즐기진 않는다. 그러나 힙합정신(?)이란 게 있다면 그게 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게 바로 이 책의 주제라 하겠다.

첫장부터 대머리 독수리의 시련이 나온다. 초원의 미녀 공작에게 다가갔다가 보기좋게 차이는 장면이다. 이유는 단 한가지.
"너는 너무 못생겼어. 게다가 그 대머리는 최악이야."
대머리 독수리는 가는 곳마다 외모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 (심지어 선생님까지...ㅠ)
"대머리 독수리는 더 이상 이런 곳에 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힘차게 날았지. 못생겨도, 머리카락이 없어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찾아서." (12쪽)
그리고 다음 쪽으로 눈을 돌렸을 때 풋, 하고 웃게 됐다.
"그런 세상은 없었어." (13쪽)

절망한 대머리 독수리는 사바나의 귀퉁이 쓰레기장에 자리잡았다. 혼자가 되니 편했다. 쓰레기장에서 이것저것을 주워 꾸미고 노래를 불렀다. 대머리 독수리의 특기는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거든. 혼자라는 생각에 마음껏 불렀는데 그곳엔 생각지도 못한 첫 관객이자 팬인 수다쟁이 짹이 있었다. 이 앵무새 또한 말이 많아 따돌림 당한 외톨이. (좀 찔린다. 나도 말많고 시끄러운 사람은 애고 어른이고 간에 싫은데...ㅠ)

이어서 둘은 세번째 주인공을 만났다. 사자 무리에서 쫓겨난 이 사자는 세상의 모든 것에게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흙과 나무, 벌레들에게 사과를 하는 사자. 이런 사자가 무리에서 떨궈진 건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랩 가사가 많이 나온다. 이런 걸 쓰는 건 작가에겐 껌인가? 그렇지는 않겠지?^^;;; 초반부엔 유치함으로 느껴지던 랩 가사가 후반부엔 재미와 흐뭇함이 되었다.

"나는 나를 위해 살아. 너는 남을 위해 살지.
나는 내가 제일 최고. 너는 남이 항상 최고.
어떻게 생겨야 잘생긴 건데? 그건 도대체 누가 정한 건데?
내가 멋지다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정해.
그것이 바로 내 스타일." (50쪽)

"모두 함께 소리쳐. 난 너와 달라. 넌 나와 달라.
우리는 기계에서 만들어지는 인형이 아니지.
모두 다 같은 눈, 다 같은 코, 다 같은 입
그런 건 정말 별로야. 난 너와는 다르니까." (63쪽)

결말을 말하자면 대머리 독수리(대독)의 노래는 유명해졌고 이들은 환호 속에 공연을 했다. 사바나엔 힙합대회가 열리고 이들은 초대가수가 된다. 왕따들의 도전. 인간(?)승리의 드라마다.^^

스토리 자체는 단순하다. 분량도 80쪽 밖에 안되어 딱 저학년 책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학년 교실에서 읽어도 좋겠다. 정체성의 문제, 자존감의 문제는 고학년 교실에서 많이 앓고 있는 문제니까. 눈이 작아도, 다리가 짧아도, 유행하는 패딩을 유니폼처럼 입지 않아도, 쥐잡아먹은 듯 입술을 칠하지 않아도, 화장을 안한 쌩얼이어도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고개 들고 당당히 자신의 앞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보고 싶다.

아쉬운 점은, 이 책을 내가 읽어주지 못하겠다. 랩 가사를 읽는데 넘나 쑥스러워서....^^;;; 반에 끼가 있는 녀석이 있어서 이 부분을 넘겨줄 수 있다면 흥겨운 책읽기가 될 수 있을텐데. 조만간 그런 기회가 오길 바라며 잘 기억해두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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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 내가 케이크를 나눈다면 질문하는 어린이 1
소이언 지음, 김진화 그림 / 우리학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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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이라는 화두처럼 거대하고 민감한 주제가 있을까? 어찌보면 정치란 공정을 주장하고 실현하는 과정인 것 같다. 하지만 정치를 잘했다는 평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거의 없는 것처럼 공정을 실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공정에 대한 시각차가 존재하며 체감도 각기 다르고 자신의 문제일 때와 남의 문제일 때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 공정함을 주제로 어린이책을 만들다니, 쉽지 않았겠다. 이 책은 겉으로 보기엔 만만해(?) 보인다. 그림이 많고(만화면도 있음) 설명은 길지 않다. 하지만 짚어야 할 점들을 잘 짚어가며 생각을 잘 인도해 주는 책이라고 느꼈다. 이런 주제로 수업을 하는 교사가 읽고 흐름을 잡기에도 좋고,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눈다면 더 좋을거라 생각한다.

이 책에는 초등 고학년으로 보이는 두 아이, 호두와 롱롱이가 나와서 대화를 나누다가 상황 제시가 되고, 그 주제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이 외에도 구석구석 삽화나 예화 등등 구성이 다채로워 아이들이 지루하게 느끼지 않을 것 같다. 호두와 롱롱이의 캐릭터가 고학년 교실 어느 구석에 있는 시니컬 한 명, 무난싱글싱글 한 명을 아무나 데려다 놓은 듯 친근하다는 점도 장점이다.

아이들은 공평하지 않음을 참지 못한다. 그런데 무조건 '똑같은' 것이 공평함일까? '똑같게' 해도 우리 마음에는 불편함과 복잡함이 생길 때가 있다. '옳음'이 빠졌을 때 그러하다. 그 '옳음'을 추가한 것이 공정함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공정함은 '정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시대가 흐르며 공정함은 상당히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고 낮은 신분은 높은 신분의 지배를 받던 시대를 떠올려보면 말이다. 인류는 많은 피를 흘리며 누구나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왔다. 표면적으로는 거의.... 그렇다. 그러나 정말 노오오오오력은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까? 여기에서 '출발선 논란'이 나온다. 이것을 조정하다보면 '역차별 논란'이 나온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 공정함이란 게 세상에 있을까? 정말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책의 후반부에 이 설명이 거의 결론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두 개의 잣대' 라는 비유다. 그대로 옮겨보겠다.
"우리에게는 공정함을 판단하는 두 가지 잣대가 있어요.
하나는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거예요.
다른 하나는 자기 잘못이 아닌데 차별받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거예요.
잣대가 두 개면 서로 충돌하기도 하지만 헤쳐 나갈 방법도 많아져요.
동전도 앞면과 뒷면이 있고, 어떤 일이든 빛과 그림자가 있잖아요?
어떤 일이든 이쪽으로도 생각해 보고 저쪽으로도 생각해 봐요.
잣대가 두 개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세상이 더 근사해져요."


그리고 마지막 장, '사회안전망' 이라는 용어에도 주목하고 싶다. "노력한 사람과 노력하지 않은 사람을 똑같이 대접하라는 게 아니에요. 누구에게나 행복할 권리는 똑같이 주어져야 하고 모두가 그걸 지켜야 한다는 말이랍니다. 우리는 그런 사회안전망을 꼭 만들어야 해요. 마치 커다란 트램펄린 같은 안전망 말이에요. 그래야 누구든 바닥으로 떨어져도 다시 위로 점프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쌓은 성취는 궁극적으로 행복하지 않을 뿐더러 위태롭기도 하다. 결국 공정성에 대한 고민은 안전하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기 위한 노력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큰 테두리의 결론을 내려도 개별 사안에서 인간은 늘 충돌할 것이다. 교실 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정도로 테두리를 쳐 놓으니 그 논란은 할 만한 것으로 느껴진다. 아이들과 꼭 다뤄볼 주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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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라임오렌지나무
J.M. 바스콘셀로스 원작, 이희재 만화 / 양철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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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녘 출판사에서 나온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초판을 읽었던 때가 고1 때였다. 무기력에 슬럼프를 겪고 있을 때라 상태가 총체적으로 안좋았는데 그 책을 읽고 감정을 주체 못해 한동안 더 헤맸던 기억이 난다. 근데 그때 내가 느꼈던 게 뭐였을까 꼭 집어 알 수가 없다. 매맞는 외로운 악동 제제에 공감했던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그 아이를 사랑하는 뽀르뚜가라는 어른을 이해했던 것도 아닐 것이다. 삶에 찌든 나머지 자식의 아픔을 알긴 커녕 더 고통에 빠뜨리는 어른을 이해했을 리도 없다. 그냥 책 전반에 흐르는 슬픔이 나를 쥐고 흔들었을 뿐이다.
"소용없어. 내가 처음으로 만든 풍선이었어. 첫번째 풍선만이 가장 아름다워. 첫 풍선이 소용없게 되면, 더이상 만들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아빠는 이미 없어졌어요. 제 마음 속에서 죽은 거나 다름없어요. 사랑하기를 그만두면 그 사람은 언젠가 죽어요."
"그 시절, 우리들의 그 시절엔 저는 몰랐습니다. 먼 옛날 한 바보 왕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제단 앞에 엎드린 채 환상의 세계에 이렇게 물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 아이들은 철이 들어야만 하나요?"

이런 문장들을 곱씹으며 눈물짓는 게 다였다. 가슴은 아픈데 뭔가 잡히지는 않는...

어른이 되어(2003년쯤?) 청년사에서 이 책이 이희재 님의 만화로 나왔다. 그당시 학급문고에 사놓았다가 닳고닳아 몇 년 후 처분했던 기억이... 어른이 되어 만화로 본 라임오렌지 나무엔 첫 느낌이 거의 그대로 살아있었다. 제제를 비롯하여 캐릭터들도 어색하지 않았다. 첫 풍선을 찢긴 후 처절하게 얻어맞고 글로리아 누나와 울며 속삭이던 그 느낌도, 뽀르뚜가 아저씨와 물놀이를 하던 강가에 누워 "왜 우리 아빠한테 절 달라고 하지 않으세요?" 물을 때의 그 울컥함, 망가라치바가 앗아가버린 진정한 사랑에 삶의 끈을 놓듯이 앓아누워버린 제제의 안타까운 모습도 다 생생히 살아있었다.

10년도 넘게 흘러 양철북 출판사에서 이 만화가 다시 출간되니 반갑다. 그때 샀던 책을 갖고 있지 않아서 비교는 못하겠지만 거의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나이를 더 먹었지. 어쩌면 제제 아빠나 뽀르뚜가 아저씨 보다도 더. 그래도 볼 때마다 가슴을 선뜻선뜻 베는 듯한 느낌은 여전하다.
"사랑하는 뽀르뚜가! 저는 너무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일찍 철이 든 작은 아이 하나가 이렇게 슬프고 먹먹한 이야기를 오래도록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다니 참 신기하다. 생각해보면 아이는 그 어린 나이에 나보다 큰 감정의 경험들을 했다. 구박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가정폭력, 필요없는 아이라는 소외감, 그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 아저씨와의 만남, 그 귀한 존재를 금방 데려간 버린 세상....
"아기예수, 넌 나빠."
아이는 어떻게 그 아픔을 삭이며 어른이 되었을까.

어린 제제가 가정 안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제대로 사랑받아보지 못했다는 걸, 고딩 때 처음 읽었을 때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왜 저를 사가지 않으세요?" 라는 말이 제제가 정말 특이한 아이라서 하는 말인 줄 알았다. 난 그때 어렸으면서도 부모를 이해하려 했던 건가.... 지금 보니 제제의 말은 너무 당연한 거다. 핏줄이란 울타리는 절대적인 게 아니다. 아빠는 용서를 빌었고 제제는 용서했지만, 사랑할 순 없었을지도 모른다. 제제의 말대로 '마음 속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실제로 자주 일어난다. 어른은 아이에게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처음 읽었던 그때부터 제제는, 나라는 독자에게 너무 작고 어리고 애틋하고 사랑스런 존재였지만 사사건건 사고치는 악동인 것도 사실이다. 동네 사람들을 골탕먹이고, 누나를 '갈보'라고 욕하고, 아빠 앞에서 "난 발가벗은 여자가 좋아~"라는 노래를 부른다. 이걸 요즘 버전으로 바꿔 보자. 나는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아이의 지독한 외로움과 소외감에 한줄기 빛이라도 줄 수 있는 사람일까?

독한 아픔에서 천천히 딛고 일어나 어른이 된 제제. 마지막으로, 제목인 라임오렌지 나무(밍기뉴)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본다. 뽀르뚜가 아저씨처럼 절절히 사랑하지도 현실적인 어떤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지만 밍기뉴는 제제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그 나무는 제제가 고른 나무였고, 제제만의 나무였고, 그를 통해 상상했고 그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기 때문에. 사경을 헤매던 제제를 일으켜 세운 건 그래서 밍기뉴였다. 아이들은 환경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마다 자신들의 밍기뉴를 찾을 수만 있다면......

어린 제제가 아리오발도 씨를 따라다니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악보를 팔던 장면을 영화로 보고 싶다. 그 고운 목소리의 제제는 어른이 되어서도 노래를 부를까? 아이는 금방 자란다. 하지만 어린시절은 그 안의 어떤 방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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